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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허 헌 편

마지막당부


미국이 1948년 5월 10일 총칼의 위협속에 단행한 단독선거는 남조선인민들 대다수의 반대와 배격을 받은것으로 하여 사실상 선거 아닌 선거로 력사에 기록될 정도로 파렴치하고 날강도적인것이였다. 그러나 미국은 온갖 사기와 협잡으로 선거결과를 날조하고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들로 구성된 《국회》를 조작해냈다.

미국과 그 주구들의 책동으로 남조선에 《국회》가 조작됨으로써 민족분렬의 위험은 더욱 커졌으며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한 우리 민족의 앞길에는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였다.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해 6월 29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가 열리였다.

그무렵 허헌의 건강은 좋지 못하였다. 집을 나서는 그를 만류하는 안해에게 허헌은 나라가 영구분렬의 위험에 처했는데 내 한몸이 뭐 그리 중한가고 하면서 기어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협의회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국이 5월 10일 망국적단독선거를 꾸며낸것으로 하여 조국분렬의 위기가 더욱 심각화된데 대하여 지적하시고나서 지체없이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세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실시할데 대하여, 단독정부를 세울것이 아니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들로써 전조선정부를 세울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방도가 조성된 엄중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유일하게 정당한것이라는것을 일치하게 강조하면서 남조선에서 조작된 단독선거를 비법적인것으로 선포하는것과 함께 하루빨리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적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회의에 참가한 허헌의 얼굴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전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창건하기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모든것을 다 바치리라는 결심이 력력히 어려있었다.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그는 낮에는 낮대로 협의회에 참가하고 또 군중집회에 참가하여 불을 토하는듯 한 열변으로 연설을 하였다. 밤에는 밤대로 집에 돌아와서 신문, 통신자료들을 읽으며 늦게까지 정세를 연구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통일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방도를 연구하였다.

허헌은 적들의 가혹한 탄압속에서 비합법적으로 진행되는 남조선에서의 선거투쟁을 승리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정열적으로 활동하였다.

남조선에서는 미국과 그 주구들의 테로와 탄압으로 하여 먼저 서면을 받는 방법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인민대표들을 선출하는 사업부터 진행되였다.

남조선 전체 선거자의 77. 52%가 선거에 참가하여 1 080명의 인민대표들을 선거하였다. 허헌은 이때 서울시대표의 자격으로 선거에 참가하여 대의원후보자로 선거되였다.

선출된 대표들은 사선을 헤치고 륙로로, 배길로 해주에로 모여왔다. 그들은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비밀투표의 방법으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통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중앙정부를 세우기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은 마침내 귀중한 결실을 맺었다.

남북조선총선거의 빛나는 승리에 기초하여 최고인민회의가 수립되였다.

1948년 9월 평양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위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성대히 열렸다.

회의에서는 전체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념원을 담아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국가수반으로 높이 추대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9월 9일 전조선적인 통일중앙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구성하시고 공화국의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남조선 전체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 민족의 유일한 합법적국가이며 로동자, 농민, 지식인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반석같은 통일전선에 의거하여 그들의 리익을 대표하고 옹호하는 참다운 인민의 국가였다.

한 해외동포는 《정통과 계승》이라는 자기의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민족사의 정통성이 어디에 있는가. 북인가 남인가.

첫째로, 외세가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했을 때 누가 정면으로 맞서싸웠는가.

둘째로, 해방이 되였을 때 어느쪽이 식민지잔재를 옳바르게 청산했는가.

셋째로, 누가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권을 창출했는가.》

그러면서 그는 손에 무장을 들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에 맞서싸웠으며 그 식민지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고 민족주체적힘으로 통일정부를 세운 북에 민족사의 정통성이 있다는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썼다.

공화국의 창건이 선포되고 새 정부가 구성될 때 허헌은 최고인민회의 초대의장으로, 그의 딸 허정숙은 초대내각의 문화선전상으로 임명되였다.

어제날 가슴속에 간직되여있는 애국의 마음을 바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허헌과 그의 딸이 새 조선의 국가활동가들로 선출된것이다.

홍명희, 리극로, 백남운, 리병남 등 남조선의 애국인사들이 초대내각의 부수상, 상들로 임명되였다.

감격과 흥분이 없이 대할수 없는 이 현실은 애국의 길에서 한번 손을 잡은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변함없이 믿고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주시는 절세위인의 숭고한 의리의 세계가 펼친 또 하나의 사랑과 믿음의 전설이였다.

1948년 9월 하순 허헌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였다. 그가 극력 사양하였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친히 만나주시고 종합대학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인민의 대학이며 공화국의 최고학부이라고, 종합대학사업을 더욱 강화하여 대학을 민족간부양성의 믿음직한 기지로 튼튼히 꾸려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대학교수교양사업에서 나서는 과업들을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합대학은 민족문화의 전당이며 과학의 거점이라고, 이런 중대한 대학의 지도사업을 선생에게 맡기는 기대는 크다고, 우리 후대들을 잘 키워주리라는것을 믿는다고 크나큰 신임을 베풀어주시였다.

어찌 그뿐이랴. 남녘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모두 평양으로 안전하게 데려오도록 하시고 그의 생일날에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녀사와 함께 그의 집에까지 찾아오시여 생일을 축하해주시면서 총장선생은 건강에 주의하여야 한다고, 병원에도 자주 다니고 몸조리를 잘하여야 하겠다고, 부디 몸건강하라고 거듭 당부하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하기에 허헌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내세워주고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힘과 정열을 바치였다.

허헌은 여러가지 사업으로 바쁜 속에서도 자주 김일성종합대학에 나가 교수참관도 하고 교직원, 학생들을 만나보기도 하면서 대학사업이 잘되여나가도록 여러모로 애썼다. 어떤 때에는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강의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것만도 104개나 되는 원소들, 저마끔 서로 다른 전자수와 무게, 지구화학적성질을 가진 그 매개 원소들이 모여 이 세계를 형성하고있다.

그것처럼 사람들도 각이한 생활경위와 성격, 서로 다른 기질과 지향을 가지고있지만 공고한 이 사회를 이루고있다.

하지만 매우 불안정한 원소도 있다. 그것들은 공기중에 드러나기만 해도 쉽게 불타서 산소화합물이 되거나 완전히 다른 원소로 변함으로써 안정을 유지하려고 한다.

학생들은 그런 원소가 되여서는 안된다. 다시말해서 사회의 한 원소로서 변치 말아야 할 고유한 공통의 속성인 신념을 버림으로써 딴 물질 즉 집단보다 자기의 리해관계를 더 중시하는 리기주의자, 나아가서 조국반역자가 되여서는 안된다는것이다. …

허헌이 어느 한 강의에 출연하여 한 이 말을 평생 잊을수가 없었다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총장선생님의 이 말을 되새겨보며 이겨내군 하였다고 그전날의 학생들은 말하였다.

그는 가렬한 전쟁의 나날에도 종합대학의 전시교육사업을 잘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먼 후방에 새 교사와 기숙사를 건설하여 민족교육사업이 중단없이 진행될수 있게 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마침내 대학이 꾸려지고 전선에 탄원했다가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로 다시 대학에 온 학생들, 종합대학추천을 받은 전쟁에서 단련된 청년들도 다 도착함으로써 드디여 개교식이 열리게 되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개교식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려는 허헌에게 아직 장마가 걷지 않았으니 장마가 멎고 강물도 다 찐 다음에 떠나는것이 좋겠다고, 지금은 장마때문에 강물이 불어서 청천강을 건느기 곤난할것이라고,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꼭 장마가 멎은 다음에 경비대동무들과 함께 떠나도록 하라고 거듭 당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그토록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헌은 개교식에 책임상 총장이 꼭 참가해야 한다고 하면서 대학이 자리잡고있는 곳으로 기어이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딸 허정숙에게 이런 말을 남기였다.

《요즘엔 자꾸 김책이 생각이 간절해지는구나.

참, 사람두…

나라형편이 이토록 어려운 때 장군님곁에 굳건히 서있어야 할 사람이 왜 그리도 마지막길을 재촉했다더냐. 장군님곁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인데…

장군님신상이 늘 걱정되누나. 항상 마음에 걸려…

장군님이 안 계시면 우리 조선이 살아나지 못한다.

너도 그분의 안녕에 언제나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때는 1951년 8월 중순이였다.

허헌일행이 청천강의 지류인 대령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의 물량이 상상밖으로 훨씬 크게 불어나 건너가기가 매우 위험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적비행기의 폭격으로 다리까지 파괴된 상태였다. 동행한 일군들은 며칠 기다렸다가 물이 찐 다음에 강을 건너가자고 허헌을 설복하였다.

그러나 제시간에 개교식에 참가하자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것이 그의 주장이였다.

《전시대학교육을 제대로 보장하라는것은 장군님의 뜻일세.

개교식을 늦출수가 없네. 학생들이 기다리고있는데 총장이라는게 어떻게 여기서 우물거리겠나.

그래 아무때면 미국놈들이 이 허헌이 편안히 강을 건너가라고 놔둘상싶은가.

두말말고 어서 건너가자구.》

일행은 적기의 폭격이 좀 뜸해진 틈을 타서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강을 건느기 시작했는데 강 한복판에 들어서던 떼목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거칠게 사품치는 물살에 떠밀리우더니 파괴된 다리기둥에 부딪쳐 그만 파괴되고말았다. 세찬 물결에 휘말려든 허헌은 다시는 물우로 솟아나지 못하였다.

이튿날 새벽 허헌이 희생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으시였다. 한 일군이 허헌이 잘못된것이 사실이라고 거듭 말씀드리자 그이께서는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되였는가고 물으시였다.

그 경위에 대하여 들으시던 수령님께서는 왜 그런 위험한 강물에 허헌선생을 건너보냈는가고 엄하게 질책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허헌선생을 꼭 찾아야 하겠다고 하시며 사회안전상을 비롯한 여러 일군들을 현지로 파견하시면서 적들의 모험적인 《하기공세》가 박두한 때였지만 3 000여명의 군인들을 이 사업에 동원하도록 즉석에서 조치를 취해주시였으며 해군군함들까지 동원시켜주시였다.

바다밑을 다 뒤져서라도 그의 시체를 꼭 찾아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 인민군군인들과 경비대대원들 그리고 지방의 수많은 사람들도 동원되였다.

그처럼 찾고찾던 허헌의 시신은 시체가 파도에 밀려 북쪽으로 갔을수도 있으니 남쪽에서만 찾지 말고 북쪽으로도 찾아보라고 하신 수령님의 말씀대로 수색작업을 북쪽방향으로 벌렸는데 정주앞바다에서 발견되였다.

해당 일군으로부터 허헌의 시신을 찾았다는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고인의 시체를 찾았다니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 당의 품에 안기여 그처럼 기뻐하던 허헌선생이 조국통일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곁을 너무도 빨리 떠나갔다고, 허헌선생이 돌아가서라도 우리와 늘 가까이 있도록 평양에 묘를 써주자고, 고인의 령구를 평양으로 올려올 때 사고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겠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리하여 허헌의 령구는 해당 일군들의 호송을 받으며 평양에 도착하여 모란봉지하극장에 안치되게 되였다.

허헌의 령구가 도착한 날 새벽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정숙을 몸가까이 부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아버지를 잃은 아픈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고, 이제부터 자신께서 아버지를 대신하겠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헌선생은 당에 충실한 사람이였다고, 그렇기때문에 자신께서는 허헌선생을 굳게 믿었다고, 이번 일로 동무는 자기 가슴이 제일 아프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내 가슴이 더 아픈지도 모른다고 하시고는 말끝을 흐리시며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가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참 가슴아픈 일이라고, 허헌선생이 대학으로 떠나기 전에 무슨 말씀이 없었는가고 물으시였다.

허정숙은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을 그대로 말씀드리였다.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직하신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동무의 아버지는 나에 대한 생각이 참으로 극진하였습니다. 내 신변을 항상 념려해주었습니다. 선생은 참으로 당과 혁명에 충실한분이였습니다. 혁명의 리익을 위해서는 언제나 서슴지 않고 자기를 바치는 그런 혁명적열정이 강했습니다.

조국이 통일되지 않았고 전쟁도 아직 결속되지 않았는데 왜 벌써 가시겠소. 좀더 앉아계셔야 하는건데…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요.

동무는 훌륭한 아버지를 모시고있었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

허헌의 령구가 발인되는 날이였다. 모험적으로 감행되는 미국의 《하기공세》로 하여 전선의 정황이 매우 긴박하였지만 장례식장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령구를 발인할 시각이 오자 선참으로 령구의 앞채를 메시고 모란봉지하극장의 높은 계단을 한단한단 오르시였다.

그날 오후 허헌의 묘소를 찾아주신 그이께서는 세상을 떠난 그와 마음속대화를 나누시는듯 오래도록 분묘앞을 뜨지 못하시였다.

흐리신 안색으로 분묘주위를 돌고도시던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새로 판 자리가 보이지 않도록 주변에 잔디를 더 입혀야 한다고, 미국놈들이 어떤짓을 할지 모르는 조건에서 새로 만든 분묘라는것이 알리지 않도록 잔디를 잘 입히라고 거듭 이르시였다.

일군들이 거듭 간청해서야 묘소를 떠나시던 수령님께서는 자주 발걸음을 멈추시고 묘소를 한참동안이나 돌아보군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에도 현지지도의 길에서 그의 자취가 어려있는 장소를 지나실 때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허헌선생은 애국심이 강하고 혁명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높은분이였다고 추억하시였으며 애국렬사릉이 새로 건립되였을 때에는 그를 그곳에 안치하도록 해주시였다.

해방후부터 허헌의 일가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계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애국애족의 뜻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1990년대 중엽에 애국애족의 뜻을 지니고있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참된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허헌과 그의 딸의 지난날을 소재로 민족의 운명이자 개인의 운명이며 민족의 운명속에 개인의 운명이 있다는것을 깊이있게 보여주는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허정순편)을 세상에 내놓도록 하시여 그들의 삶이 민족과 더불어 빛나도록 해주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의 한량없는 믿음과 사랑속에 값있게 장식한 허헌의 한생은 오늘도 말해주고있다.

애국의 뜻을 굽히지 않고 량심과 의리에 사는 사람들을 제일 귀중히 여기시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을 민족의 태양으로, 어버이로 모시였기에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이 위대하고 그 래일이 밝고 창창하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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