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허 헌 편
민족의
그는 평소부터 파쟁군들을 미워하였다. 우리 민족을 이끄실
허헌은 여러 기회에 3당합당사업을 방해하는 파쟁분자들의 죄행을 회의장에서 날카롭게 단죄규탄하였으며 자기에게 위험이 올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없이 강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파쟁분자들의 배척행위에 환멸을 느끼고 그들과는 합작을 못하겠다고 동요하던 인사들을 만나 3당합당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설복하였다.
허헌을 비롯한 애국인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마침내 1946년 11월말 공산당, 신민당, 인민당이 합쳐져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였다. 허헌은 결성대회에서 남로당 중앙위원회
이전에는
1947년에 들어서면서 남조선의 애국적민주세력에 대한 미국과 그 주구들의 탄압은 더욱 횡포해졌다.
7월 19일 남조선의 애국적민주세력의 대표적인물이였던 려운형이 백주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타리에서 무참하게 암살당하였다.
한편 미국은 8.15를 계기로 8.15폭동음모사건이니 방송국적색음모사건이니 하는 모략극들을 날조하고 경찰들을 내몰아 남조선로동당과 근로인민당, 민전을 비롯한 민주정당, 단체들과 애국적인사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이 모든것은 남조선을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드는데서 장애물로 되고있는 애국적민주세력을 없애버리기 위한 미국의 비렬한 음모에 따른것이였다.
이 시기 허헌의 집에 대한 테로분자들의 침입사건도 꼬리를 물고일어났다.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반동단체의 테로분자들은 밤마다 담장을 넘어들어와 집안의 동정을 살피다가 사라지군 하였다.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집안에 달려들어 소동을 피우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대낮에 경찰이나 형사가 찾아와 이것저것 심문하는척 하다가는 공연한 트집을 걸어 가택수색을 하면서 온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어놓군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일가가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서 살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후 룡산구 청파동에 옮겨가서도 계속되였다.
그무렵 허헌을 더욱 괴롭힌것은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광범한 민주력량을 굳게 묶어세워 미제와 반동들의 책동에 과감히 맞서나가야 하겠는데 남조선로동당이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남조선에서 3당합당에 의해 남조선로동당의 창립은 선포되였지만 파쟁분자들의 책동으로 근로대중의 통일적당, 대중적정당으로 되지 못하였다.
파쟁분자들은 허헌의 신변안전을 구실로 내대면서 그가 공개합법적인 활동을 피하고 비밀활동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떠벌이였다.
한편으로는 경찰과 테로분자들을 사촉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게 함으로써 그가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허헌을 따돌려놓고는 저들의 지지자들로 《지도부》를 비법적으로 꾸려놓고 중요한 문제들을 제멋대로 토의결정하며 당을 사분오렬시켰으며 당의 로선을 란폭하게 외곡하고 모험주의적폭동을 선동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무모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할 민주인사들을 함부로 배척함으로써 그들은 물론 그들의 영향하에 있던 적지 않은 사람들까지 파쟁분자들과 더는 손을 잡지 않겠다고 등을 돌려대게 하였다.
그러나 허헌은 북녘하늘을 우러르며 애국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허헌은 모든것을
이러한 때
이무렵 남조선에서는 친미적인 《단독정부》를 조작하여 우리 민족을 분렬시키려는 미국의 책동이 더욱 로골화되였다.
통일적민주주의림시정부수립을 목적으로 한 쏘미공동위원회사업을 고의적으로 파탄시킨 미국은 그 책임을 쏘련측에 전가시키면서 조선문제를 유엔에 끌고가는 행위를 감행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속심에 대하여 미국신문 《뉴욕 져널 앤드 아메리칸》(1947년 9월 17일부)까지도 《38゜선 이북에 놓여있는 조선의 절반을 될수 있는대로 빨리 획득하려는 기도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게 될 남조선공화국을 세우려는것》이라고 폭로하였다.
이렇게 되여 민족분렬의 위기는 더욱 격화되고 통일적인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의 앞길에는 엄중한 장애가 조성되게 되였다.
우리 민족앞에는 미국의 남조선《단독정부》조작책동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것을 파탄시키자면 어느 길로 가야 하겠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47년 10월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하고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우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며 적극적인 남북협상방안에 온 민족이 환성을 올리며 호응해나섰다.
허헌은
그는 자기가 직접 중간 및 우익계인사들을 만나 그들에게 북조선에서의 민주개혁의 빛나는 성과들과
남조선의 거의 대다수의 정당, 단체들이 남북협상을 지지해나서고 남조선의 전반적민심이 북으로 쏠리게 되자 바빠맞은 미국과 리승만역도는 이를 저지시키기 위해 류례없는 탄압만행을 감행해나섰다.
그리하여 허헌은 이미 내려진 체포령에 살벌한 테로의 위험이 겹치여 더이상 남조선에 있을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47년 12월 북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다음해 1월 그의 가족들도 무사히 38゜선을 넘어 평양에 오게 되였다.
허헌은
미국은 1948년 1월 8일 우리 민족의 강력한 항의와 규탄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끌어들여 남조선에서 《단독정부》를 조작하기 위한 책동을 본격화하였다.
조성된 정세는 북과 남의 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미국이 추구하는 《단독정부》조작책동을 파탄시키고 민족통일의 실현방도를 합의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하루빨리 진행할것을 요구하고있었다.
그리하여 남조선의 정당, 사회단체
드디여 온 민족의 커다란 기대와 관심속에 1948년 4월 19일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는 민족의
그리고 조국분렬의 위기에 처한 이 엄중한 때에 우리가 단결하여 일대 구국투쟁을 벌리지 않는다면 민족과 후손들에게 천추에 씻을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민주주의적원칙에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거족적투쟁을 벌려나갈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그는 민족의
련석회의가 진행되던 어느날 김구가 허헌을 찾아왔다. 해방전부터 인민들속에서 독립투사로, 애국자로 소문이 자자했던 두사람의 상봉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구는 허선생이 내 심정을 알아줄것 같아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왔다고 하면서 그에게 평양에서 받은 큰 감동에 대해 피력하였다.
내가 만났던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가 똑 제일이라며 남을 깔보고 헐뜯는 파쟁군들이였고 세계혁명이 어쩌구저쩌구하는 빈말공부쟁이들이였다. 그래서 나는 공산주의자라면 미워하며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공산주의자도 그나름이라는것을 이제야 알았다. 조국애와 민족애가 없는 사람은 무슨 주의자든 나는 반대다. 그러나 김장군의 공산주의는 절대찬성이다.
김구는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허헌을 다시 만났을 때에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
허선생의 말이 옳았소. 참 훌륭한분이시오. 나는 공산주의자를 믿지 않았지만 이분만은 믿을수 있소.
내 이제는 늙어서 축성여석이지만
흩어진 광선을 다 모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