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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허 헌 편

평양에 찾아온 사연


나라가 해방되였을 때 허헌은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과로 처가가 있는 황해도 삼천군 달천에서 병치료를 받고있었다. 그때 려운형으로부터 자기를 도와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사업을 해달라는 전갈이 왔다.

약한 신체는 정신을 약하게 한다고 하였지만 허헌은 려운형선생을 믿고 모든 지혜를 짜서 돕겠다고 하면서 병색이 짙은 몸을 끌고 나라가 해방된지 보름후에 서울로 가게 되였다.

서울에 온 허헌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하루밤 자고 일어나면 알지도 못할 정당, 단체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애국자, 명사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저마끔 당파를 무어가지고 세력다툼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민주건국을 리념으로 한다는 각이한 단체들도 서로 목청을 돋구어가며 사람들을 끌어당기고있었다.

미군의 남조선강점으로 하여 조성된 정세도 허헌의 마음을 무겁게 해주었다.

길 닦아놓으니 미친개가 먼저 지나간다더니 조선의 해방을 위해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미군은 일제가 패망하자 남조선에 무혈입성하여 점령군행세를 하며 온갖 못된짓을 일삼았다.

40여년간 일제와 그 앞잡이들에게 치떨리도록 억압당해온 조선인민에게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숙청이 소원이였지만 미국인들이 남조선에서 처음 실행한 일이란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것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왜놈들과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조국의 장래를 《해방군》과 론의하기 위해 찾아온 조선의 애국인사들을 문전박대하면서 쫓아낸것이였다.

트루맨은 《일시적으로 관직에 일본인들을 그대로 앉혀두는것은 조선인민에 대한 봉사나 우리 점령군의 업무수행에 유용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시기에는 그들의 기술적인 자질이 절대 필요하기때문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미군정의 한 미군장교는 《군정의 조선인들은 극악한 부패와 음모를 대표하는자들이다. 우리가 남조선을 통치하기 위하여 고용하고있는 사람들은 일본의 더러운 사업을 도와주었던 극우파들이다. 현재 남조선의 경찰들중에는 실제로 민족주의를 탄압하는데 매우 잔악했고 열성적이였기때문에 훈장을 받은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였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미국의 이러한 책동은 남조선정국을 일대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복잡한 속에서도 허헌은 이전처럼 박해받고 억압당하는 인민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리익을 지키기 위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친일분자들, 민족반역자들이 해방이 되자 정계의 전렬에 나서는것을 반대했으며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 정국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서 그가 참여한것이 건국준비위원회였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이였다.

탄압과 착취에 억눌리던 근로대중을 동정했고 독립운동가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변호에 앞장섰기에 일찍부터 그는 민중들뿐아니라 이른바 좌우익정객들로부터도 존경받는 인물이였다. 하기에 각당, 각파들은 명성높은 허헌을 저들의 편에 세우려고 모지름을 썼다.

그무렵 미국은 려운형과 함께 인민들속에서 신망이 높은 허헌을 제편에 흡수하여 애국력량을 분렬시키려고 저들이 세우려는 친미정권의 요직도 권고하였고 미군정청에 불러들이여 회유와 기만, 위협을 했다.

한번은 하지가 허헌을 불렀다. 명망높은 허선생을 만나니 반갑다고 너스레를 떨던 하지는 감옥에서 얻은 병을 미군정에서 치료해주겠다고 하면서 인민위원회를 해산하고 리승만과 손잡고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허헌선생과 같은분이 정계에 나서면 여러 계층의 지지를 받을것이다, 총리자리를 주겠노라고 회유하였다.

허헌은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리승만과 손잡아야 할 아무런 리유도 없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는 허헌의 손을 잡아 앉히면서 더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허헌은 하지에게 4가지 요구조건을 제기하였다.

조선을 독립국가로 인정할것, 일본은 전패국이고 조선은 해방국이니 민주주의적발전을 도모할것, 인민위원회를 해산시킬것이 아니라 인민위원회를 인정할것, 미군정은 정권에 간섭하지 말것.

하지는 이 4가지 요구조건을 다 거부하였다. 아니 하지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수 없는 요구였다.

하여 허헌과 하지와의 담화는 싸움으로 번져졌다. 영어를 잘하는 허헌이였지만 그는 조선말을 하고 하지는 영어로 자기주장을 고집하였다. 당시 하지의 통역관은 통역을 하다 나중에는 물러나고말았다고 한다.

그때 허헌은 종로구 효자동에서 살았는데 하지가 파견한 요원이 찾아와 리승만과 손잡을것을 또다시 권유하자 그를 거절하고 룡산구 청파동으로 이사해버리였다.

사실 그 당시 해방초기의 환희와 희망은 가뭇없이 사라져가고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앞에서 사람들은 갈팡질팡하였다.

허헌도 해방전 법정투쟁을 벌릴 때나 신간회에서 활동할 때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간의 반목과 알륵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때와는 비교도 안되리만큼 복잡한 정국앞에서 어떤 태도와 립장을 취해야 하겠는가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지 않을수 없었다.

해방된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은 이제부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로 고심을 거듭하던 허헌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평양으로 향하였다.

그에 대한 대답을 주실분은 오직 우리 민족이 한결같이 우러르는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뿐이시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는 맏딸을 통하여 김일성장군님의 고견을 받고싶은 마음에서 지체없이 평양으로 사람을 떠나보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자기의 맏딸이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신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싸운줄로만 알고있던 허헌이였다.

그는 떠나보내는 사람에게 평양에 가서 맏딸이 귀국하였는지 알아보고 귀국했으면 자기의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평양에서는 딸의 행적을 찾을 길 없었다. 생사여부조차 묘연하였다.

중국 팔로군부대에서 정치일군으로 사업하고있던 허헌의 딸 허정숙은 연안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다가 김일성장군님께서 중국 관내에서 투쟁하고있던 조선혁명가들을 조국으로 불러주셨다는 련락을 받게 되였다.

기쁨에 넘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안을 떠난 그는 간고한 행군을 거쳐 11월 중순에야 중국의 단동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만나게 되였고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허헌은 편지에서 민족적량심을 끝까지 지키고 해방된 조국에서 너를 만나게 되여 기쁘다고, 남조선정세가 매우 복잡한데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를 타개하고 조선이 나아갈 길에 대하여 어떤 가르치심을 주시였는지 알고싶다고 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후 허정숙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 기회에 아버지의 편지내용에 대하여 말씀드리였다.

그이께서는 허헌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많은 일을 해야 할분이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가 편향없이 투쟁해나갈수 있도록 곧 편지를 써서 남조선정세를 잘 분석해주고 우리 당의 로선과 방침을 잘 알려주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아버지가 미국놈들과 타협하지 않을것은 뻔한것이라고 하시면서 아버지를 여기저기서 잡아당기려고 하는 조건에서 그의 태도와 립장이 아주 중요하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아버지에게 파쟁분자들의 책동에 속아넘어가지 말라고 꼭 당부할데 대하여 이르시면서 우리는 아버지가 동요없이 밀고나가리라는것을 믿는다고 하시였다.

허정숙은 그날중으로 김일성장군님의 말씀내용을 편지에 그대로 옮겼다.

허헌은 딸이 보낸 편지를 받고 흥분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날이 감에 따라 점점 드러나는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화정책의 진면모, 반목과 질시로 좀처럼 단결을 이루지 못하는 애국적민주력량의 실태를 놓고 마음쓰던 허헌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 편지를 올리기로 결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정숙을 통하여 그의 편지를 받아보시고 몸소 회답서한을 보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과거 조국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지지하여준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고 하시면서 미군정에 의하여 새 조국건설을 위한 애국적인민들의 민주주의적활동이 심히 억제당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비롯한 반동세력의 반민주주의적책동이 날로 강화되고있는 남조선의 정치정세를 언급하신 다음 허헌이 그처럼 고심하던 문제 즉 해방된 오늘 우리 민족이 어느 길로 나가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해방된 조선에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이 력사적과업을 수행하려면 민주주의적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우리가 수립하려는 민주주의적정부는 인민대중에게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주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이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는 선생이 남조선의 애국적민주인사들과 인민대중속에서 미국에 대한 환상을 없애며 민족자주의식을 배양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리라는것을 믿어마지 않는다고, 량심이 있고 생각이 깊은 조선사람은 누구나 다 우리 민족이 제정신을 가지고 새 조국을 건설하기를 원하고있다고, 대중의 신임과 존경을 받고있는 선생과 같은분들이 잘 활동한다면 광범한 인민들을 민족자주의식으로 교양하는데서 큰 성과를 거둘수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쓰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가 건국사업을 잘해나가려면 정당이나 신앙, 정치적리념의 차이에 관계없이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단결하여야 하며 광범한 대중을 전취하여야 한다고, 우리는 비록 정치적립장이 불철저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애국적요소가 있으면 그들과 단결하여나가야 한다고, 공산주의자들이나 몇몇 애국적민주인사들의 힘만으로는 새 조국을 건설할수 없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광범한 군중을 결속하며 민주력량을 확대강화하기 위한 투쟁에 모든 힘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끝으로 그이께서는 어떤 기회에든지 선생과 만나고저 한다는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온 겨레가 우러르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믿음이 담긴 회답서한을 받아안은 허헌은 갈피를 잡을수 없게 뒤엉켰던 실마리들이 하나하나 풀리고 앞이 환히 트이는것만 같았다.

그는 즉시 남조선에서 애국적민주력량을 단합시키기 위한 투쟁의 길에 나섰다. 려운형, 홍명희, 백남운, 리극로 등 애국적민주인사들과 손잡고 앞으로 내오게 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광범한 애국적민주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갔다.

한편 이 시기에 남조선에서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되였다.

명색은 통일전선조직체로 결성된 조직이였지만 파쟁군들의 종파적행위로 의장들과 부의장들이 따돌림까지 받다나니 민전내에서는 애국적민주력량의 통일단결이 아니라 분렬, 분파가 더 성행하는 형편이였다.

더우기 한심한것은 민전이 친일친미반동세력의 소굴인 《한국민주당》이나 리승만일당을 반대하는 창끝보다 김구를 비롯한 림정계민족주의세력을 반대하는 창끝을 더 날카롭게 벼리는 그것이였다. 민전은 김구를 《반공대장》, 《테로대장》이라고 하며 《김구타도》구호까지 내들었다.

남조선에서 민주력량의 단결을 이룩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적지 않은 인사들은 파쟁분자들처럼 협애한 사람들과는 손잡고 함께 일할수 없다고 하면서 머리를 저었다.

허헌, 려운형 등 애국적인사들의 주관하에 결성되였던 민전은 이렇듯 남조선애국력량의 분렬과 대립을 노린 미국과 종파분자들의 책동에 의해 결성취지와 반대되는 길을 걷게 되였다.

해방후 우리 나라에는 공산당과 함께 다른 근로자당들이 조직되였는데 남조선에는 인민당과 신민당이 조직되여 활동하고있었다.

이 당들은 남조선에서의 미군정의 반민족적이며 반민주적인 폭압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에 적극 참가하였는데 미군정과 친미반동들의 방해책동이 악랄해지는 조건에서 각계각층의 많은 대중을 대표하는 여러 정당들의 통합은 절실한 문제로 나서게 되였다.

1946년 7월 북조선공산당 및 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확대련석회의에서 두 당이 합당할것을 성명하자 남조선에서도 인민당의 제의에 의하여 3당합당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여 자기 사업을 시작하였다.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 성원으로서 민주세력의 단합을 위해 마음써오던 허헌은 남조선에서의 3당합당을 지지하면서 그 사업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남조선에서의 합당사업은 미국과 그 앞잡이들의 파괴책동과 파쟁분자들의 분렬책동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난관에 부닥치게 되였다.

미국은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이 당들에 박아넣은 앞잡이들을 내세워 이 당들을 안으로부터 분렬와해시키려고 음흉하게 책동하였다.

파쟁분자들은 합당이 애국적민주력량의 단합을 목적한것이고 또 3당의 당원들이 적극 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갔다.

공산당에 기여든 파쟁분자들은 겉으로는 합당사업을 지지하는척 하면서 사실상 인민당, 신민당과의 합당사업을 고의적으로 파탄시키려고 책동하였다.

파쟁의 여파는 인민당, 신민당에도 미치게 되였으며 이 당들의 내부분렬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허헌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1946년 중순 그는 동네집에 마실다니는 늙은이의 차림새그대로 38°선을 넘었다.

그때 로동법령집행정형을 료해하기 위하여 어느 한 지방에 내려와있던 허정숙은 마침 아버지가 그곳에 와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허헌과 그의 딸 허정숙은 꼭 10년만에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북으로 들어왔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외국방문의 길에 계시였다.

며칠간을 기다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허헌은 섭섭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사진을 소중히 가슴에 품고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간지 사흘만에 조국에 돌아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헌이 다녀갔다는것을 아시고 허헌선생과 같은 년로한분이 우리를 만나보러 분계선을 넘어올적에야 얼마나 어려운 결심을 하였겠는가고, 그런데 모처럼 찾아온분을 되돌려보냈으니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허헌선생의 심정이 얼마나 무거웠겠는가고, 자신께서 사흘만 미리 왔어도 허헌선생을 만날수 있었던건데 이번 일이 정말 안되였다고, 인차 허헌선생을 만나보아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허헌은 수수한 농민복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북행길에 올랐다. 미군의 삼엄한 경계를 피해가는 험한 길이였지만 절세의 위인의 부르심을 받고 북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어려있었다.

38゜선을 무사히 통과한 허헌이 어느 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일군들이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은 험한 길을 오느라고 피곤할터인데 련락이 있을 때까지 푹 쉬라는 수령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허헌이 이날 오후 피로를 풀고나서 소풍을 하고있을 때 승용차 한대가 숙소앞으로 급히 달려와 멈추어섰다.

순간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빛같이 밝은 미소를 지으시며 차에서 내리시는것이 아닌가.

왜놈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던 백두산호랑이가 바로 저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에 허헌은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엎어질듯 위대한 수령님께로 달려간 허헌은 마음을 진정하고 수령님께 인사를 올린 다음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건져주시고 저희들이 나아갈 길을 항상 밝혀주시는 장군님께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그리고 저때문에 이처럼 먼길을 몸소 나오시다니 황송하기 이를데없다고 진정의 말씀을 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그를 만류하시며 선생님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해서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지난달에 선생님이 저를 찾아오셨다가 헛수고를 하셨고 또 이렇게 험한 길을 오시는데 제가 어찌 평양에 앉아서 선생님을 맞을수 있겠습니까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헌과 함께 남조선에 조성된 사태를 의논해주시고 민족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은 로동자, 농민, 지식인, 수공업자, 상인, 기업가, 종교인 등 광범한 대중이 단결해야 이루어질수 있다고 하시면서 파벌싸움과 령도권쟁탈을 위한 분파적행동을 없애고 남조선에서 애국적민주력량의 단합을 반드시 이루어나갈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그러시면서 허헌에게 합당사업에서 나서는 암초들을 극복해나갈수 있는 방도들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나서 우리 당은 선생님을 믿는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진정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깊고 받아안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사랑과 믿음이였다.

항상 자신을 이 나라의 평범한 백성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해온 허헌은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크게 해놓은 일도 없는 자기를 그처럼 믿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수령님앞에서 격정의 눈물을 흘리고야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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