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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회

제 2 장. 후삼국

2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버린 남강마을은 텅 비고 쓸쓸한 고적만이 유령처럼 감돌고있었다.

이미 내버린지 오래된 마을의 집들은 고삭은 지붕을 간신히 이고 서있었다.

집집마다 돌쩌귀에서 빠져나온 문들이 바람에 삐걱거릴 때면 페허로 변한 마을의 스산한 광경을 더해주는듯 했다.

사람이 나들지 않아 마당에는 잡초가 키를 넘게 자랐고 노루나 메돼지들이 자기들의 거처지마냥 제멋대로 집안팎을 드나들고있었다.

응통은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듯싶은 고통속에 페허로 변한 고향마을을 둘러보고있었다.

남강마을에 들어선 응통은 옹근 반나절이 걸려서야 간신히 집터만 남은 제 집마당으로 들어설수 있었다.

누런 황토먼지를 두텁게 쓰고있는 잡초가 허리를 치게 무성한 이 땅뙈기가 제 집터라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처량한 마음으로 옛집의 마당을 거닐고있는 응통의 눈가에는 어느덧 뜨거운것이 고여올랐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될만 한것을 찾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그런것은 찾을래야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가 집을 나선지도 어언 다섯해라는 세월이 흘렀다.

열두살 철부지소년이 이젠 어엿한 대장부로 자랐다.

하지만 고향을 찾아온 응통을 맞이한것은 이렇듯 쓸쓸하기 그지없는 재무지뿐이였다.

패강진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남강류역으로 들어온 토포군이 폭동의 우두머리인 검용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이렇게 불을 질러 재더미로 만들었던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군과의 싸움으로 희생되여 돌아오지 못했고 남은 사람들마저 각지로 뿔뿔이 헤쳐져 이렇듯 마을은 페허로 변하고말았다.

응통은 자기가 집을 나설 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고구려의 후손임을 잊지 말자고 웨치는 아버지! 아버지의 웨침에 함성으로 호응해나서던 남강마을의 정든 사람들!

그때 응통은 희열과 격정으로 가슴을 끓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응통이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월은 그에게서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도, 정든 고향마을과 친근한 이웃들마저 모조리 앗아가버렸다.

뜻밖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비보를 받고 응통은 하늘이 무너지는듯 한 충격을 느끼였었다.

검용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것이 3월이였는데 그에게 이 소식이 가닿은것은 석달이 지난 6월말이였다.

그때 응통은 오령의 상단을 따라 당성고을에 행상을 나가있었다.

철원방향에서 오는 행상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궁예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정체모를 자객들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을수 있었다.

응통은 그길로 말을 타고 아버지가 피살되였다는 철원고을을 향해 말을 달려갔다.

련 사흘째나 물 한모금 입에 대지 못하고 눈도 붙이지 못한채 산야를 향방없이 헤매였으나 끝내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수 없었다.

응통은 가슴을 치며 통분해하였다.

아버지 검용이 행상으로 얻은 재물로 부귀를 누리였다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것이였다.

검용은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남이 겪는 불행을 가셔주기 위해 솔선 팔을 걷고 나서군 하였다.

어제날엔 빈곤한 고향사람들에게 생업을 마련해주기 위해 행상에 나섰다면 오늘은 계림의 귀족들의 학정에 신음하는 패서의 백성들을 위하여 손에 칼을 들고 나섰었다.

일찌기 어머니를 여윈 응통이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속 그늘이 질가봐 재취도 하지 않고 홀로 아들을 키운 아버지였다.

고구려의 후손으로 자부하면서 강대한 고구려의 넋을 이어야 겨레가 하나로 모여살게 된다고 입버릇처럼 외우던 아버지였다.

하여 응통은 아버지의 령전앞에서 반드시 고구려의 후손답게 살리라 마음속 맹세를 다지였었다.

그러나 지금 천하는 여러개로 나누어져 권력자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세력다툼의 란무장으로 변하고말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이 별안간 후고구려사람이 되고 후백제사람이 되여 죽기내기로 싸우고있었다.

아! 하늘이여, 땅이여! 언제면 겨레가 한하늘아래 한강토에서 함께 모여살 날이 올것이오이까? 정녕 단군성왕님의 자손들이 이렇듯 갈라져 살아야 하오이까?

응통은 가슴에 그득히 쌓인 울분을 토하듯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이제 곧 날이 어두워지니 이젠 그만 내려가시오이다.》

응통은 뒤켠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서야 자기를 수습하고 얼른 돌아섰다.

한 소년이 조심히 다가서는 모양을 놀란 눈길로 지켜보던 응통의 두눈이 대바람에 커졌다.

소년으로만 여겼던 상대가 오령행수의 딸 미령인줄 알아보았던것이다.

함께 행상을 다니군 하였으나 이렇게 남복차림을 한 모습은 처음 보는 응통이였다.

《아가씨가 여길 어떻게?…》

응통은 미령의 뜻밖의 출현에 놀라 이렇게 물었다.

상단은 여기서부터 20리나 떨어진 원집에 머물고있었다.

상단을 따라 패강류역을 지나게 된 응통은 오령행수에게 잠간 말미를 받고 이렇듯 옛 고향 남강마을을 홀로 찾은 길이였다.

그런데 미령이 자기를 따라 여기까지 온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저도 들었나이다, 아버님이 패서의 인망높은분이였다는것을… 저도 함께 뵙고싶었나이다.…》

미령은 응통의 뒤를 밟아 여기까지 따라온것이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럼 행수님께 아뢰지도 않고 내뒤를 따라왔소이까?》

응통은 짐짓 성을 내였으나 자기를 위로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온 처녀의 진정이 고마와 속으로 뜨거운것을 삼켰다.

오령의 상단에 몸을 담근지 수년동안 남모르게 미령의 따뜻한 보살핌을 많이 받아온 응통이였다.

행상이란 일년 열두달 거처가 없이 각지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고달픈 노릇이 아닐수 없었다.

객지에서 풍찬로숙을 해야 하고 산과 들에서 들끓는 도적들의 성화와 맹수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어린 나이에 행상단의 사환이 되여 채 여물지도 못한 몸에 무거운 짐을 지고다녀야 하는 응통에게 힘이 되여주고 각근히 보살펴준 고마운 존재가 바로 미령이였다.

미령이 역시 어려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걸음마를 뗄적부터 상인인 아버지를 따라 행상의 길에서 성장한 처녀였다.

응통이보다 한살 우인 미령은 처녀의 몸으로 남자들도 견디기 어려운 행상을 다니면서도 언제한번 힘든 기색을 지어본적이 없이 늘 밝고 명랑하게 시련의 고비고비를 헤쳐왔다.

응통이 역시 상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누나처럼 각별한 심정으로 살펴주었을뿐아니라 그가 각 지방의 풍속과 문물을 익힐수 있게 적극 도와나서기도 했다.

응통이 차츰 두각을 나타내여 멀고가까운 지방의 상인들속에서 이름을 날릴수 있은것은 미령의 남모르는 뒤받침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그 과정에 서로 정에 끌리여 응통과 미령은 어느덧 사랑하는 처지가 되였던것이다.

《이제 한군데 더 들려볼데가 있는데 아가씨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응통은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는 지금 고향마을에 온 기회에 나한암의 암주 해명을 만날 결심이였다.

그런데 미령을 홀로 위험한 밤길을 보낼수 없기에 이렇듯 나한암에 함께 가기를 청한것이였다.

《저… 실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나한암이라는 녀승들이 사는 암자가 있는데 그곳 암주인 해명스님은 절 키워준 어머니와도 같은분이오이다.

이번 길에 꼭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겠기에…》

응통이 이렇게 얼버무리자 미령은 다심한 누나처럼 활짝 웃었다.

《저는 괜찮으니 함께 가시오이다. 아버님께는 떠나기 전에 몇자 올리고 나왔으니 크게 근심하지는 않을것이오이다.》

그제야 마음이 밝아진 응통은 미령과 함께 말을 타고 남강마을을 떠나 나한암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땅거미가 깃들고 하늘에 별들이 하나, 둘 박혀 빛을 뿌리기 시작한 저녁무렵에야 나한암에 도착할수 있었다.

응통이 찾아왔다는 연통을 받은 해명이 허위허위 손을 내저으며 달려나왔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응통을 품에 안고 해명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응통은 떨리는 손으로 해명의 얼굴에 가득 잡힌 주름살들을 어루만졌다.

세월은 그에게서 젊음과 활력을 앗아가버린것이다.

해명은 얼른 자기를 수습하고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거 내가 주책머리없이 널 그냥 밖에만 세워두고있었구나.》

해명은 어느덧 름름한 대장부로 자란 응통을 일으켜세우며 대견한 어조로 말하였다.

해명이 어서 들어가자고 팔소매를 잡아끄는데 응통은 게면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왜 그러느냐?》

해명이 의아쩍은듯 물어보자 응통은 얼굴을 붉혔다.

《전 혼자… 오지 않았소이다.》

응통이 이러면서 꾸물거리자 지금까지 나무그늘에 서있던 미령이 얼른 나와서며 해명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스님께 문안드리오이다.》

미령의 절을 받은 해명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응통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 녀석두… 그동안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더니 이렇게 어여쁜 각시를 척 데리고 나타날려고 그랬구나.》

《아니오이다. 저희 상단 행수님의 따님이온데 이번 길에 함께 오다나니…》

응통이 당황해하는 모습이 더 우스운지 해명은 한바탕 웃고나서 그들을 데리고 암자로 들어갔다.

자기 방앞에 이르러 응통이와 미령의 등을 떠밀어 들여보내고는 해명은 다과를 가지러 갔다.

정갈하기 그지없는 해명의 방에 들어선 미령은 서화로 가득찬 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어마나, 저 그림들을 보세요. 그림속의 새들이 당장이라도 포르릉 날아오를것만 같나이다.》

미령이가 어린애마냥 손벽까지 치며 감탄하는 모양을 지켜보는 응통은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암주님은 이 아근에서 명화가로 소문이 자자하오이다. 저도 그분의 슬하에서 글도 배우고 그림까지 배우게 되였지요.…》

그들에게 대접할 다과를 가지고 뒤따라 들어서던 해명이 응통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 앤 또 뒤에서 내 소리를 하는가보구나. 아씨, 저 응통이는 어려서부터 겉보기는 얌전해도 속으로는 구렝이가 들어앉은 애니 저 애 말을 흘려들으시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응통과 해명은 그동안의 회포를 마음껏 풀었다.

이야기도중에 해명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미령을 눈여겨보군 했다.

그들의 사이가 남다른줄 이미 짐작한 해명은 속으로 응통이 좋은 배필을 만났다고 만족해하고있었던것이다.

이윽고 해명은 정색한 태도로 돌아갔다.

《응통아, 넌 앞으로 어찌할셈이냐. 계속 행상을 다니겠니?》

응통은 해명이 이렇게 물어보자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를 거두어주신 오령행수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쉬이 상단을 떠날수 없으니 계속 행상상인으로 살겠소이다. 아버님께서도 행상으로 심중의 뜻을 이루시려 하시지 않았소이까.》

해명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구태여 널 막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걸 명심하거라. 네 아버지는 결코 부귀를 바래서 장사길에 나선것이 아니라는것을… 동족이 겪고있는 갈라진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겠다고 결국은 행상상인이 되였단다. …》

해명은 잠시 말을 끊고 응통의 두눈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딴사람처럼 변해버린 갈린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져 제 사람들끼리 죽일내기를 하는 동란의 시기가 닥쳐왔구나. 이 땅에 태를 묻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동족이 하나로 모여살 날을 가져오기 위하여 모든것을 다해야 하느니라. 너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치부에만 눈이 어두운 장사군이 아니라 서로 남남이 되여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장사군이 되여야 한다.》

《명심하겠소이다.》

해명은 차주전자를 들어 응통과 미령의 앞에 놓인 차잔에 따라주고나서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통아, 오늘 너는 내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다주었구나.… 네가 이렇게 장성하여 사랑하는 처녀와 함께 내앞에 나타났을 때의 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사람이 세상에 태여나 서로 만나고 헤여짐은 다 부처님이 점지해준 인연이라고 할수 있지.…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난 연분도 그러하고 네가 이 미령이와 만난것이 어찌 우연이겠니.… 오늘은 네게 해줄 말이 있다.》

《무슨 말씀이오이까?》

《음, 이젠 너도 장성하여 장가를 갈 나이가 되였으니 알아둬야 할일이 있다. 돌아가신 네 부모를 대신하여 이 말을 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응통아, 사실 너는 검용오라버니의 친자식이 아니란다.》

응통은 깜짝 놀라 해명의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예?! 친… 친자식이 아니라는것은?…》

해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이번에는 미령이마저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두사람을 긴장한 시선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꼭 18년전이였구나.… 어느 새벽인가 갑자기 네 아버지가 웬 녀인을 안고서 암자로 들어서는게 아니겠니.… 추노군들에게 쫓기는 이름모를 녀인을 네 아버지가 구하여 데리고온것이란다.…》

해명은 두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자기가 알고있는 녀인의 래력에 대하여 하나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해명의 이야기를 듣고있는 응통의 눈가에는 어느덧 뜨거운것이 고여올랐다.

《녀인이 완쾌된 후 내가 주선하여 네 아버지와 혼인을 맺도록 하였구나. 아직도 그때 일이 눈앞에 선하다. 네 아버지는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펄쩍 뛰셨지. 하지만 남편을 잃고 관청의 관비로 박혔다가 죽기를 각오하고 도망친 녀인의 기박한 운명에 대해 알게 되자 생각을 돌리게 되셨지.

진짜 활인이란 상대의 슬픔도 걷어안을줄 알아야 한다는것을 깨달은것이란다. 네 어머니도 그 진정에 감복하여 두사람의 기박한 처지는 하나의 운명으로 엮이게 되였지.… 그후 네 어머니는 널 낳았고 검용오라버님은 제 친자식보다 널 더 끔찍이 귀여워했단다. 헌데 불행은 언제나 행복한 가정의 문부터 먼저 두드리는 법이란다. 네가 다섯살때 네 어머니는 그만 중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였구나. 그러나 네 어머니는 림종에 앞서 내 이 두손을 잡고 네 아버지와 산 이 5년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였다는 말을 남기였다. 그후 네 아버지는 재취도 하지 않고 널 친자식처럼 홀로 키워왔단다.…》

응통은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리고나서 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 친아버지는… 친아버지는 어데 있소이까?》

해명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네 친부모도… 고구려의 유민출신이란다. 네 모친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손을 잡고 이런 말을 남겼다. 네 친아버지는 고구려의 유민출신으로 부패한 신라조정을 뒤엎고 고구려를 재건할 큰뜻을 품고있었다고 말이다.… 구월산 아사봉밑에 월정마을이라고 오붓한 동네가 있었는데 그 마을사람들은 모두 고구려의 유민들이였다는구나. 바로 그 마을의 류씨성을 가진 장자가 네 친아버지였다.… 네 친아버지를 중심으로 조정에 항거할 거사계획이 무르익던 어느날 갑자기 월정마을로 수백명의 관군이 들이닥쳤다는것이 아니겠니. 포상금을 탐낸 변절자의 밀고를 받고 토포군이 출동한것이란다. 네 친아버지는 굴하지 않고 토포군과 맞서싸우다가 그만 희생되였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토포군에 잡혀 관가로 끌려갔다. 네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관비로 굴러떨어졌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팔려다니는 치욕을 겪게 되였지.… 여러번 목숨을 끊으려는 결심을 가졌으나 그땐 벌써 배안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있어 차마 결심을 내리지 못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네 어머니는 죽기를 각오하고 관가에서 도망쳐 지경을 넘어갈 모진 결심까지 품게 되였지.… 결국은 남강마을에까지 오게 된것이다.…》

응통은 방구석을 노려보며 해명이 일러주던 말을 되씹고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헤여지기에 앞서 나에게 구월산 월정마을을 반드시 찾아가보라고 하였구나.…

해명은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응통의 손목을 잡고 다른 손을 더듬어 미령의 손을 잡아 두손목을 합쳐쥐고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너희들의 연분은 하늘이 알고 부처님이 아는것이니 부모가 준 피와 살이 하나로 되거라. 부디 서로가 아끼고 위해준다면 죽어서도 두사람의 넋은 끊기지 않을것이다.》

해명이가 말을 마치자 지금까지 잠잠하던 응통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럼 아버님께서 늘 절더러 고구려의 후손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말씀이 제 출생과 관련되는것이오이까?》

응통의 이런 물음에 해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네 아버지가 처음으로 장사길에 나선것은 마을사람들의 생업을 위해서였으나 굳이 위험한 행상을 고집한것은 응통이 너처럼 끊어진 사람들의 혈맥을 이어주기 위함이란다. 고구려의 후손인 단군성왕님의 자손들모두가 한식구처럼 화목하게 사는 새 세상을 갈망해왔지.… 이제는 네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하여 새 세상을 불러오는 길로 멈춤이 없이 가거라.》

《스님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겠나이다.》

응통은 해명의 앞에 넙적 엎드려 두손바닥을 머리우로 향하는 불자의 절을 올리고나서 부쩍 몸을 일으켰다.

《가려느냐?… 날도 저물었는데 암자에서 쉬고 래일 아침밥을 먹고 떠나거라.》

해명이가 놀라서 만류하는데 응통은 평온해진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같아서는 스님과 몇밤을 지새면서 이야기를 나누고싶지만 우릴 기다리는 상단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젠 그만 떠나겠소이다. 스님, 부디 다시 뵈올 날까지 몸을 돌보시오이다.》

응통은 이렇게 하직인사를 올리고나서 미령과 함께 방을 나섰다.

해명은 뒤돌아봄이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암자를 나서는 응통의 뒤를 따르려는듯 허둥지둥 마루로 내려서다가 발을 멈추고서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그의 뒤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해명에게 있어서 응통은 친아들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며 둘도 없는 제자였다. 그는 고적감때문에 견딜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의 곁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던것이다.

해명은 사실 불가에 몸을 담고있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오누이처럼 자란 검용을 남몰래 가슴에 품고있었다.

그러한 검용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응통이마저 기약할수 없는 길을 떠난것이다.

해명은 자기가 얼마나 외롭고 고적한 처지에 이르렀는가를 느끼고는 큰 산이 무너진듯 주저앉아 시름짙은 시선으로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 반짝이는 별무리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해명과 응통이와의 마지막작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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