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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회

제 1 장, 방 황

13


원표의 입을 통해 패서의 검용이 궁예를 만나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두근은 아연실색하였다.

그럴수 있는가? 검용이 무슨 리유로 궁예를 만났다는건가?!…

원표의 말을 들으니 검용의 사리정연한 언변과 경륜에 궁예는 완전히 위압당했다는것이였다.

검용이 궁예와 손잡고 함께 싸우자는 제의를 하러 왔다는 말을 들은 두근은 혀를 빼물었다.

고개너머 또 고개라더니 들려오는 소리마다 골치가 아픈 소리였다.

두근은 절대로 궁예와 검용이 손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검용이 자기의 재주와 그동안 쌓아올린 공적으로 궁예를 휘여잡으면 자기가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쳐졌다. 아니, 그보다도 검용을 제거하여 발해행상권을 가지려 했던 자신의 죄행이 만천하에 드러날것이 두려웠던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손을 잡는것을 무슨 수로 막을텐가?

두근이 심한 정신적충격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는데 원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참, 궁예장군이 검용이 돌아간 다음에 대행수님께 갖다드리라면서 이걸…》 원표는 이러면서 봉인한 한장의 서신을 내밀었다.

두근이는 깜짝 놀랐다.

《궁예가 나와 검용의 관계를 알고있느냐?》

두근의 물음에 원표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사실은 궁예가 두근행수님과 검용의 관계를 따져묻기에 그만… 어차피 그가 궁예와 손을 잡으면 두근행수님과도 맞다들릴게 아니오이까.》

두근은 쓰겁게 웃으며 아무 대꾸도 없이 봉인을 뜯고 서신을 꺼냈다.

서신을 펼쳐들던 두근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종이장을 땅에 떨구었다. 궁예가 보낸 서신은 글 한자 없는 완전 백지였던것이다.

원표가 땅바닥에 떨어진 백지서신을 주어들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수가 있나. 분명 궁예가 중요한 서신이니 대행수님께 꼭 보이라면서 준것인데…》

두근은 그제서야 궁예의 의도를 깨달을수 있었다.

궁예는 두근의 손을 빌려 검용을 제거하려는것이였다.

봄을 기다리는 광야는 태양을 찾아 모대기고있었다.

골짜기들과 펑퍼짐한 들에는 어디라 할것없이 아직 눈이 가득 쌓여있었다. 행길도 오솔길도 찾기 힘들었다.

주위는 제멋대로 활개치는 눈바람에 할퀴우는 허허벌판이였다.

하지만 눈밑에 묻힌 대지는 역시 살아있었다.

은빛눈에 깔린 밭, 가을에 써레질을 한 땅, 죽어버린듯 한 잔물결모양의 기복을 이룬 땅에서는 추위에 얻어맞아 쓰러진 풀뿌리들이 억세게 땅을 그러쥐고 누워있었다.

풀뿌리들은 추위에 허리를 꼬부리고서도 긴긴 겨울이 곧 물러가고 따스한 태양이 빛나는 봄이 올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듯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고있었다.

이 땅은 멀지 않아 봄을 맞이할것이였다.

검용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철원성을 떠나 패강진으로 가고있었다.

그의 뒤로는 상단시절부터 오래동안 따라다닌 식객무사 한명이 호위 겸 수행원으로 따라붙었을뿐 너무도 단순한 행차였다.

검용은 지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과연 나의 이번 길이 옳은것일가?!

검용은 함께 손잡고 싸우자는 궁예의 제의를 받고 그를 찾아왔으나 결국은 실망을 안고 가는 길이였다.

장사를 하는 과정에 사람을 많이 대면하여본 검용은 첫 대면에 궁예의 이지러진 성격과 잔인한 기질을 간파한것이다. 하여 검용은 자신의 이번 행을 돌이켜보게 된것이다.

궁예가 과연 우리들이 바라는 백성들의 새 세상을 세울수 있을가?…

검용은 고개를 저으며 저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자기가 어리석게도 궁예의 명성만 듣고 찾아간것이 잘된 선택이라 여겨지지 않았던것이다.

사실 검용은 옛 부하인 명귀 등의 간청에 못이겨 칼을 들었으나 동란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당하는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였던것이다.

백성들의 새 세상을 세우겠다고 표방하고 일어선 각지의 반란군두령들은 세력이 커지게 되자 제왕이 될 야심을 품고 령토쟁탈에 미쳐돌아갔다.

권력에 전혀 뜻을 두고있지 않는 검용으로서는 자기를 믿고 찾아온 백성들의 삶을 지켜줄 기둥을 찾아야만 했다.

이러한 때 량길의 부하로 있던 궁예가 별안간 고구려의 후손으로 자처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 검용이였다. 하지만 궁예를 대하고나니 실망밖에 남는것이 없어 이렇듯 고민에 빠져있었다.

검용은 이번에 철원성에 가서야 자기의 발해행상권을 빼앗기 위해 비렬한 음모를 꾸몄던 두근이가 궁예와 야합하고있는줄 알게 되였다.

두근이와 같은 비렬한 시전상인과 손을 잡고있는 궁예가 과연 고구려의 넋을 이은 백성들의 새 세상을 세울 인물이겠는가.

그는 천하가 평온해지면 다시 행상상인으로 돌아가 마음껏 장사를 하는것이 소원이였다.

그러나 천하가 평온해지려면 백성들을 옳게 이끌수 있는 인물을 만나야 하겠는데 그러한 인물이 아직까지 나서지 않은것이였다.

검용은 불현듯 세해전에 헤여진 아들 응통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렸다.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자랐을가.

검용은 응통이 제 힘으로 오령의 상단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전해듣고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오령은 그가 목숨을 구해주었던 상인이였다.

그러나 오령은 그 은혜를 배반하고 검용을 구렁텅이에 밀어넣은 사람이였다. 물론 검용은 오령이 자의대로 화살촉의 거래를 내걸고 자신을 함정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아님을 잘 알고있었다.

아마 그도 두근의 계략에 넘어갔을것이다. 하지만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어쨌든 오령과 거래를 한것으로 하여 검용의 운명이 이렇게 달라진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러한 오령의 상단에 아들이 의탁한것도 운명인 모양이였다.

검용이 아무리 름름하게 자란 아들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애를 썼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세해전 열두살나이에 헤여진 응통의 모습만 계속 눈앞에 얼른거리는것이였다.

기약할수 없는 길을 가기에 앞서 아들을 멀리로 떠나보냈었다.

비록 친아들은 아니지만 자기를 빼여닮은 아들이라 여기는 검용이였다.

응통이 비상한 상재를 발휘하여 반드시 뜻을 이룰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는 쉬고싶었다. 이젠 모든것을 포기하고 응통의 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자신의 뜻을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나니 검용은 어느새 철원지경을 넘어서고있었다.

검용은 갑자기 뒤켠에서 다급한 말발굽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깊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여라문명의 기마수들이 뽀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속보로 달려오는 모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멈추시오. 검용장군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소이다.》

맨앞에서 소리치며 달려오는 기마수가 궁예의 호위장인 원표라는 무사라는것을 알아본 검용은 그제서야 빼들었던 검을 거두었다.

《무슨 일이요?》

검용은 가까이 다달아 코앞에서 급히 말을 멈추어세우는 원표에게 소리쳤다.

《궁예장군이 뵙자고 하니 철원성으로 돌아가소이다.》

원표의 말에 검용은 납득이 되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군이 날 성문밖까지 직접 바래주었는데 어인 일로 다시 찾는것이요?》

《갑자기 적정이 들어왔소이다. 량길의 선진이 벌써 공격을 개시했으니 궁예장군은 검용장군과 전략을 의논하려는가 보오이다.》

검용은 더이상 캐여묻지 않고 말머리를 돌리였다.

순간 검용은 어딘가 이상한 예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불안이 원표의 부하들이 입은 신라군의 복장에서부터 온다는것을 깨달은 검용은 날카로운 눈을 들었다.

《어째서 신라군의 복장을 갖추고있는것이요?》

검용이 이렇게 묻자 원표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들은 얼마전에 항복해온 군사들이라 미처 군복을 갈아입힐 경황이 없었소이다. 괘념치 않고 어서 가시오이다.》

검용은 어쩐지 원표의 태도가 미심쩍었으나 자기를 다잡고 철원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10리쯤 행길을 따라가던 일행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인적없는 곳으로 향하자 검용은 말을 멈추어세웠다.

《철원성은 저쪽인데 어디로 가는것이요?》

순간 검용은 살기로 번뜩이는 원표의 시선을 보고 전률하였다.

함정이였구나! 갑자기 주변의 수림속에서 창검을 번뜩이며 자객들이 뛰쳐나왔다.

《이게 무슨짓이냐?》

검용은 두눈을 부릅뜨고 자객들에게 무섭게 소리쳤다.

《주인의 령을 거역할수가 없어 나선것이니 우릴 원망하지 마시오.》

원표가 검용의 호령에 주눅이 들어 이렇게 대꾸했다.

《궁예가 이런 비렬한짓을 너희들에게 시키더냐?》

검용이 이렇게 소리치자 원표는 그를 외면한채로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원표가 눈짓하는대로 사방에서 자객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검용은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결국 궁예라는 비렬한 인간을 믿었던게 애당초 큰 잘못이였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죽어서도 후회할 큰 잘못을 저질렀던것이다.

검용은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하리라 결심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이제는 오직 죽고 죽이는 일만 남아있었다.

검용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그를 향해 달려드는 자객들은 무려 20여명에 달했다.

식객무사마저 쓰러지고 그는 홀로 자객들을 상대로 악전고투하였다.

끝내 검용은 원표가 힘껏 내뻗친 장검에 가슴을 찔리워 땅에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묻는 말이다.… 너희들을 여기 보낸자가 누구냐?…》

검용이 피흐르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원표에게 가까스로 말하였다.

원표는 검용의 불이 철철 흘러넘치는 시선에 질겁한 나머지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실은… 두근행수가 시켜서 여기까지 온것이웨다. 그러니 우릴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검용은 쓰겁게 웃으며 피가 슴배여나오는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놈!… 가서 두근이에게 전… 하거라. 비렬한짓을 벌릴수록 비명에 죽을 날이… 다가온다고 말이다.》

검용은 이렇게 소리높이 웨치고는 땅을 그러쥐고 쓰러졌다.

그가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것은 피빛으로 불타는 마지막 석양노을이였다.

그로부터 한달후, 검용의 생전의 뜻대로 패강진에서 일어난 패서의 농민군은 궁예의 군사와 합세하여 신라조정을 반대하는 싸움에 함께 나서게 되였다. 궁예는 이 련합을 주도한 검용의 공적을 찬양하여 그를 평양성태수로 봉한다고 천하에 선포했다.

검용의 죽음은 의연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전해진데 의하면 검용과 궁예가 서로 손을 잡는것을 달가와하지 않는 계림의 귀족들이 자객을 파견하여 그를 살해하였다고 하였다.

검용은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났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정설처럼 나돌았다. 그의 죽음을 두고 항간에서는 여러가지 소문과 억측이 나돌았으나 어느 하나도 확정된것이 없었다.

그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진것은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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