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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회

제 1 장. 방 황

11


새벽녘에 비가 내렸으나 해가 뜨자 비구름은 흩어졌고 두어시간쯤 지나서는 벌써 마차바퀴자리들이 얽히여져 꾸덕꾸덕해진 진흙덩이들만이 비가 내렸음을 알리고있었다.

7월의 짧고 선선한 새벽이 잰걸음으로 왔다가 사라져버리였다.

눅눅하고 선선하면서도 떫은 대기는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뜨거운 열풍이 숨막힐듯싶은 더위를 몰아왔다.

안개짙은 아지랑이가 한낮의 김처럼 땅에서 서려올랐고 벌써 누렇게 색이 바랜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고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태양이 걸려있을뿐이였다.

큰길이 가로질러간 초원에서는 새벽에 내린 비로 싱싱하게 살아났던 쑥이 다시 열풍에 시들어 해볕에 초들초들 말라가고있었다.

한낮이 되여 메마르게 말라 풀썩풀썩 먼지만 날리고있는 큰길로 말 네마리가 끄는 크고 육중한 마차가 덜렁덜렁 굴러가고있었다.

마차안에는 계림의 시전상인들의 두목인 두근이가 막내아들 관나와 함께 타고있었다.

유개를 씌운 마부석에는 마부를 대신하여 호위무사 원표가 앉아있을뿐 행세를 하는 대상인의 행차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였다.

두근은 지금 한산주를 향해 가는 길이였다.

한산주에는 패강진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킨 변방수비군출신의 폭동군을 진압하겠다고 수천명의 관군이 집결하고있었다.

이 반란은 옛 고구려의 유민으로 자처하는 패강류역의 백성들과 그 이북지역에서 사는 발해세력의 호응으로 삽시에 규모가 커져 조정에서는 이찬 김질을 파견하여 반드시 이것을 진압하라는 령을 내렸던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전국도처에서 반항의 불길이 타오르는 때에 나라의 서북방이라고 할수 있는 패강류역에서 변방수비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계림의 문벌귀족들은 어떻게 하나 이 불길부터 제압하려는것이였다.

패강진의 폭동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삽시에 그 불길이 전국각지에 들불처럼 퍼져나갈수 있었다.

옛 고구려땅인 패강이북지역에는 고구려의 유민들로 이루어진 발해의 세력이 오늘날까지도 용케 생명력을 잃지 않고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유민세력이 패강진의 반란에 합류한다면 어찌될것인가.

천하가 고구려의 판으로 되지 않겠는가 두려워하던 신라귀족들의 우려가 현실로 될수 있었던것이다.

지금 나라의 서남해안을 휩쓰는 폭동이나 북원을 거점으로 일어난 량길의 폭동군, 죽주의 기훤의 농민군 같은것은 패강진의 반란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이나 같은것이라고 계림의 대문벌귀족들은 판단하고있었다.

만약 서북방의 패강류역이 폭동군의 거점이 된다면 북원의 량길이나 죽주의 기훤이 같은자들이 여기에 편승할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여파가 한산주지방에로 미칠것이기때문이였다.

하여 조정에서는 급히 이찬 김질에게 정예군사를 내주어 한산주에로 급파하는 한편 한산주관하의 30여개의 고을에서 지방군을 긁어모으도록 하였다.

철원성에 틀고앉아있던 두근이 한산주에 가게 된것은 바로 이러한 리유에서였다.

이찬 김질은 두근과 깊이 련관된자로서 토포군의 치중보급을 맡아달라고 루차 지시를 떨구었던것이다.

사실 말이 쉽지 수천이나 되는 관군의 치중보급을 맡는다는것은 막대한 재부를 가지고있는 대상인인 두근이로서도 너무나 아름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찬 김질은 이번에 패강진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면 조정에 보고하여 두근이가 그렇게도 원하던 발해행상권과 당나라와의 해상교역로를 독점할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였으나 과연 그것이 말대로 되겠는지는 알수 없는 일이였다.

지금 신라는 낭떠러지로 정신없이 굴러가는 수레와 같았다.

전국도처에서 백성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신라의 행정체계를 뒤엎는 판이였다. 두근이가 십여년간 애써 품을 들여 발판을 마련한 철원지방도 결코 편안치는 않았다. 이런 판에 무얼 믿고서 수종의 재산을 절반이나 내던진단 말인가. 두근은 속이 쏴서 화풀이를 하듯 손에 든 부채를 활활 부쳤다.

이날이때껏 그는 신라의 모든 상권을 한손에 거머쥐기 위해 권력을 등에 업고 동분서주하였다.

돈이자 권력이였고 권력을 업으니 주머니로 돈이 쉴새없이 흘러들어왔다.

이러한 생리를 그 누구보다 일찍 터득한 두근은 계림의 문벌귀족들을 등에 업은 대가로 마침내 시전상인들의 두목으로 일어설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그렇듯 크게 믿고있던 그 권력의 실체가 눈앞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통채로 무너져내리고있었다.

제 족속도 사정없이 멱을 물어메치는 포악한 야수와도 같이 시전권을 독점하기 위해 동료들도 서슴없이 해친 두근이였다.

탐나면 그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주저없이 달려들어 빼앗지 못하면 결국 적수에게 먹히고만다는것이 두근의 생활신조였다.

바로 이러한 리유로 패서의 상인 검용을 해칠 칼을 빼들었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행상상인인 검용이 이렇듯 자기앞을 막을 커다란 절벽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었다.

검용이 패강진에서 일어난 반란의 주모자라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큰 충격에 며칠밤을 불안으로 지새운 두근이였다.

자리에 누웠다가도 검용이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환각에 소스라쳐 놀라 일어나는 두근이였다.

사실 두근은 검용을 혼내워 발해행상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할 결심이였지 그를 해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까지 번져진 이상 그를 살려두어서는 앞으로 자신의 눈을 찌를 막대기가 될것이 명백해졌다.

두근이가 검용을 미워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비상한 상재를 타고난 그의 능력때문이였다.

이제 자신과 상권을 다투는 경쟁자로 그냥 내버려두기보다 차라리 미리감치 제거하는편이 리로운것이였다.

그래서 결국은 상업상 지켜야 할 저네들나름의 도리까지 어겨가며 검용을 해칠 생각을 가지게 된것이였다.

지나친 욕심이 평생의 적을 하나 더 만든셈이라고 할수 있었다.

두근은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할 진퇴량난에 빠졌다.

김질을 도와 토포군의 치중보급을 맡아야 하겠는가?!

과연 그것이 지금껏 손에 피를 적셔가며 마련한 재부를 허공에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겠는지.…

그렇다고 쉬이 물러설수도 없었다. 원래 시전상인이란 관청에 매여 상업활동의 우선권을 보장받는 반면에 관청에서 요구하는 일은 조건없이 받아들여야 하는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시전상인들을 부러워하지만 특혜를 받으며 돈을 버는만큼 비싼 대가를 치르어야 하는 법이다.

마차가 덜컹 들추는통에 깊은 생각에서 깨여난 두근은 막내아들 관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관나는 철원성을 떠난지 반나절은 쉬이 되였으나 아직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채 눈앞에서 따분하게 흘러가는 산천풍경만 바라보고있었다.

두근은 입술에 웃음을 담았다.

신통히도 자신의 젊은 시절을 련상케 하는 모습이였다.

용모는 물론이요 그 성격과 기질마저도 자기를 그대로 빼여닮았다.

앞으로 자기가 만든 상업세계를 대신 이끌어나갈 아들이였다.

두근이가 악착하게 재산을 끌어모으고 상권을 여기저기 확대하는것이 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그의 꿈은 막내아들 관나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의 모든 부를 한손에 거머쥐도록 하는것이였다.

《네가 오랜만에 먼길을 다니느라 피곤한게로구나. 아직 한산주지경에 들어서려면 멀었으니 그동안 눈이나 좀 붙이거라.》

두근은 아들이 여전히 시무룩한 인상으로 밖을 내다보고있는것을 눈여겨보며 은근한 어조로 말하였다.

관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 무슨 말인가 하려는듯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푹 떨구는것이였다.

《이 아비에게 무슨 할말이 있느냐?》

여느때없는 관나의 태도에 놀란 두근이가 물었다.

주저하던 관나는 마침내 결심이 되였는지 정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자는 아버님의 이번 행보가 그리 잘되였다고 생각하지 않소이다.》

두근은 아들의 뜻밖의 말에 소스라쳐 놀란듯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한참만에야 자기를 수습한 두근이 화가 동한듯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도 관나는 끄떡없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님이 소자에게 늘 가르치지 않으셨소이까. 장사군은 대세를 잘 가려보아야 한다고요.… 그런데도 다 낡아빠져 침몰하는 배를 구하겠다고 품을 들이시니 소자는 그리 잘된 방책이라고 여겨지지 않소이다.》

《흥, 너같은 어린아이가 무얼 알겠느냐. 아직은 신라의 기운이 다한것은 아니란다. 무지한 백성놈들이 들고일어난다고 해서 천년사직이 그리도 쉽사리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리겠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다.》

두근은 쓸데없는 소린 하지도 말라는듯 아들을 욱박질렀다.

하지만 관나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제 고집을 세웠다.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이라 하였다 하더이다. 민심이 이미 계림을 떠난지 오랜데 어찌 신라가 멸망하지 않겠소이까. 그러니 미련을 버리고 새로 딛고 일어설 발판을 마련하는것이 좋을가 하나이다.》

두근은 달다쓰다 아무말없이 두눈을 감고 부채질만 하였다.

척 보기엔 한가한 선비가 글귀를 고르기 위한 자세인듯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세찬 격랑이 일고있었다.

정말 내가 침몰하는 낡은 배에만 집착하고있지 않는가? 옛글에 이르기를 현명한 새는 가지를 가려서 앉는다고 했는데 이제라도 아들의 말대로 딛고설 발판부터 든든한것으로 바꾸는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만에 하나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나자신은 물론 온 가문이 하루아침에 망할수 있다.

여우도 제가 들어갈 굴을 세개나 파놓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그럼 네 생각엔 어찌하면 좋겠느냐?》

마침내 두근은 무거운 침묵을 깨였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적당한 구실을 붙이고 철원성으로 돌아가시오이다. 계림의 차인행수들에게 통기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급히 철원성으로 오라고 하시오이다. 뿐만아니라 각지에 널려있는 상단들도 모두 철원으로 집결시켜야 할줄 아오이다.…》

《그래서?》 두근이 초조한듯 다음말을 재촉하자 관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아버님이 늘 말씀하시지 않으셨소이까. 장사군이 될바에는 나라를 팔고살 정도로 큰 장사군이 돼야 한다고요.… 아버님께서 지금껏 마련한 재력을 한곳에 집중시키면 나라도 세울만 한 큰힘이 될것이오이다.》

두근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관나의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아들의 말이 너무도 엄청나서 호흡이 가빠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듯 했다.

관나는 멈추지 않고 말고삐를 죄이듯 계속 조여들었다.

《큰 장사군이 되려면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릴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낼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옵나이다. 침몰하는 배를 건지기보다는 차라리 새로 배를 뭇는편이 리로운게 아니겠소이까.

아버님이 적당한자를 내세워서 새로 나라를 세우신다면 얻으시는 리득이 발해와의 행상권정도이겠나이까?…》

《이… 이건 가문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니 서뿔리 덤빌 일이 아니다.》

두근은 이마에 배여나오는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힘겹게 말하였다.

이때 갑자기 마차가 덜컹 멎어서는 바람에 그들의 이야기는 끊어졌다.

《감히 어느앞이라고 마차를 막아서는것이냐, 어서 길을 비키지 못해?》

밖에서 원표의 호령소리가 울리는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두근이 마차문을 열었다.

험상궂게 생기고 하나같이 건장한 여라문명의 사나이들이 말을 탄채로 마차를 빙 둘러싸고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마어마하게 무장을 갖춘 사나이들은 해볕에 시꺼멓게 타고 우락부락하게 생긴것이 필경 산적인듯싶었다.

《너희들은 무슨 리유로 행차의 앞길을 가로막느냐?》

두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호령하였다.

《북원폭동군의 두령인 량길장군의 부하들인데 대행수님을 뵙자고 하오이다.》

한쪽눈을 검은 천으로 싸맨 애꾸눈젊은이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비록 보름보기 외눈통이였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어깨가 쩍 벌어진것이 례사 산적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자가 무리의 두목이라고 짐작한 두근은 손가락만 한 금편이 여라문개 들어있는 패물함을 발치에 던져주며 뇌까렸다.

《난 량길이란 사람을 모르니 이것이나 가져가거라. 너희네 두령에게는 후날 철원으로 날 찾아오면 요구하는것만큼 내여줄것이라고 내말을 전하거라.》

두근의 건방진 태도에 화가 치민 부하들이 달려들려는것을 두목이 손을 쳐들어 막았다.

그자는 로련하여 함부로 노기를 드러내지 않고 입가에 차거운 랭소를 흘렸다. 하지만 남은 한쪽눈에서는 소름끼치는 살기가 흘러나오고있었다.

《이까짓 금품때문에 두근행수님을 모셔가자는것이 아니니 순순히 따라서길 바라오이다.》

《뭐야? 내가 순순히 따라서지 않으면 어쩔셈이냐?》

두근이 벌컥 성을 내는데도 그자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럼 강제로라도 모실수밖에… 얘들아, 정히 모셔라.》

두목의 부추김을 받은 산적들이 두근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순간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있던 원표가 날아들어오며 제 주인에게 달려드는 산적들을 쳐갈기였다.

산적들은 원표의 날랜 동작에 손쓸새없이 얻어맞고 에쿠, 지쿠 되떨어졌다.

두근이 뻣뻣하게 나온것은 다 리유가 있어서였다.

두근의 호위무사 원표는 무예가 월등하여 웬만한 산적 여라문명은 맨손으로도 감당할 자신이 있었던것이다.

《감히 우리 주인을 붙잡으려들어? 또 덤비는자는 아예 허리를 부러뜨려놓겠다.》

원표가 두손을 허리에 올려놓고 산적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바로 이때였다. 제 부하들이 허깨비처럼 나가떨어지는것을 지켜보고만 있던 애꾸눈이가 별안간 한소리 크게 웨치며 곧바로 원표를 향해 육중한 몸을 날렸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공격이여서 원표는 첫 타격을 가까스로 피할수 있었으나 재차 들어오는 발타격에 복부를 채우고 저만치 날아가 쓰러졌다.

원표가 아무리 무예의 기량이 높다고 해도 애꾸눈이의 상대가 아니였다.

애꾸눈이 발을 지싯거리면서 원표에게 다가서는데 쇠붙이 하나 지니지 않은 맨손이였지만 그의 온몸에서는 전장에서 대소격전을 무수히 치르어본 무사만이 느낄수 있는 살기가 배여나오고있었다.

한다하는 원표였으나 애꾸눈이의 기세에 위축되여 저도 모르게 낯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지금껏 마차안에 앉아 강건너 불보듯 하고있던 관나가 큰소리로 웨쳤다.

《잠간 멈추시오.》

마차에서 내려선 관나는 두목에게 다가서며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히 아버님께 이 무슨 행패이오이까?》

그제서야 그자는 소름끼치는 외눈에 웃음을 담으며 평소의 태도로 돌아갔다.

그는 두근에게 돌아서며 례를 올리였다.

《노여움을 푸시우. 무례를 범할 생각은 전혀 없었소이다.》

두근은 어안이 벙벙하여 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는자였더냐?》

《얼마전에 철원성의 저자거리에서 소자를 볼모로 잡았던 사나이를 벌써 잊으셨소이까?》

관나가 이렇게 퉁겨주어서야 두근은 애꾸눈이를 알아보았다.

두근은 아까보다는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 우정 날 찾아왔으면 바라는것이 있을테지? 자네가 무얼 바라는지 한번 말해보게나.…》

궁예는 두근이 신용장에 수결이나 하는 태도로 이런 말을 수월히 꺼내는것이 마음에 안 드는듯 픽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주위에 둘러선 부하들을 눈짓으로 물러가있게 한 다음 두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두근행수님의 짐작이 옳소이다. 내 상전인 량길두령은 당신을 볼모로 잡고 자기에게 필요한 재물을 옭아낼 생각을 하고있소이다.》

두근이는 가소롭다는듯 쓰겁게 웃었다.

《흥, 내가 그따위 좀도적에게 가산을 털어바치자고 평생을 악착하게 재물을 거두어들였겠느냐?》

궁예는 침착하게 두근이의 말을 받았다.

《고정하시우. 두근행수님이야 계림의 시전권은 물론 상권이 나라의 곳곳에 미치고있으니 누군들 그 재산을 부러워하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자네도 내 가산을 탐내는것인가?》

두근의 노여움이 이제는 궁예에게로 향하였다.

궁예의 외눈깔이 번뜩이였다.

《난 그 가산이 전혀 탐나지 않소이다. 하지만… 당신만은 꼭 가져야 하겠소이다.》

두근은 궁예의 말에 소스라쳐 놀라 말뚝처럼 굳어져버렸다.

《그… 그건 무슨 무례한 말이냐?》

《난 이미 량길의 수하에서 떨어져나오기로 결심한 몸이오이다. 사내대장부가 어찌 량길과 같은 좀스러운자의 밑에서 구구히 지내겠소이까. 심중의 뜻을 펼수 있게 도와주소이다.》

궁예가 정색한 태도로 하는 말이였다.

이때였다. 지금까지 덤덤하게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던 관나가 별안간 아비를 향해 꿇어앉았다.

《이… 이건 또 뭐냐?》

두근은 아들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서 뒤걸음쳤다. 관나는 단정히 꿇어앉아 아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소자는 아버님이 결단을 내려 저 궁예두령의 뒤를 받쳐주는것이 옳다고 생각하오이다. 소자를 믿는다면 제발 도와주시기 바라나이다.》

두근은 기가 막힌듯 아들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두근은 오늘일이 이미 아들과 궁예가 서로 짜고 벌리는 일임을 어렴풋이 짐작할수 있었다.

《그래 네가 말하던게 이것이였느냐? 나는 지금껏 요행수나 바라고 서툰 도박군에게 투자했던적이 없다. 그래 뭘 믿고 투자를 하란 말이냐?》

《저 역시 서툰 도박군에게 도박밑천을 대달라는것이 아니웨다. 내게 군마 백필과 500명의 군사가 한달동안 먹을 군량만 주면 한달내에 명주관내 10여개 고을을 타고앉겠소이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목숨으로 보상하겠으니 믿어의심치 마소이다.》

두근은 궁예의 말에 아연해졌다.

명주는 이전에 하실라주(강릉)로 불리우던 고장으로서 신라 9주 5소경에 속하는 중요행정거점중의 하나이며 이 아근의 수십개 고을을 관하에 두고있는 주요고을이였다.

물론 두근이 틀고앉은 철원고을도 명주관내에 속해있었다.

사실상 명주만 타고앉으면 그 관내에 속한 수십개 고을을 신라의 기반에서 떼여낼수 있고 앞으로 천하를 노릴수 있는 지반을 마련할수 있는것이였다.

마침내 두근은 이 애꾸눈이 궁예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내렸다.

아니, 그보다도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막내아들 관나의 판단을 믿었다고 해야 옳을것이였다.

궁예가 정말 명주를 타고앉아 나라의 동북방을 세력권에 두고 차츰 발을 뻗쳐 천하를 얻게 된다면 옛날 어느 한 장사군처럼 돈과 재력으로 나라를 팔고사는 장사를 할수 있지 않겠는가.

두근의 몸에서는 젊은 시절 계림의 시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혈투를 벌릴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것만 같았다.

성공만 한다면 얻는 리득이 계림의 시전권에 비할텐가?! 아들 관나의 말대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김질과 손을 끊고 낡아빠진 배에서 뛰여내려야 한다. …

이 일은 계림의 시전권과 맞바꿀만치 중대한 일이였다.

물론 이러한 일을 미리 예견하여 벌린 일은 아니였으나 이미전에 계림의 점포들과 재부를 철원으로 옮겨왔으니 이제 계림의 귀족들과 손을 끊는다고 해도 큰일은 없을것이였다.

두근은 이 애꾸눈이젊은이를 믿고 한번 큰 투자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두근은 자기앞에 무릎을 꿇고앉은 궁예의 두팔을 잡아일으켰다.

《좋소. 한달이요. 그대가 한달동안에 명주를 수중에 거두면 나는 내가 가지고있는 힘과 재부를 다 바쳐 도울것이니 뜻을 이루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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