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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회

제 1 장. 방 황

10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능환은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창호지를 대충 바른 자그마한 뙤창으로 희미한 해빛이 흘러들어오는 어둑컴컴한 골방에 자기가 누워있음을 깨닫고는 웃몸을 일으켜세웠다.

뭇사람의 때에 절어 반들거리는 노전을 깐 방구석에 오래되여 퇴색한 낡은 반짇고리 하나와 그옆에 덩실한 이불장이 놓여있을뿐 방안은 텅 비여있었다.

얇은 간막이를 통해 술취한 사나이들의 비린청이 들려오는것으로 보아 어느 주막집 뒤골방이라는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되여 이런 주막집 뒤골방에 들어가 눕게 되였는가?!

점차 눈앞이 선명해지면서 저자거리에서 쓰러져 포졸들에게 붙잡혀갈번 했던 일과 사경에 처한 자신을 구원한 총각애의 모습을 떠올릴수 있었다.

그때 분명 총각애가 자기 이름이 응통이라고 하였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응통이라는 총각애가 자기를 길거리주막집에 맡기고 떠난것이라고 짐작한 능환은 일어서려고 애를 썼다.

문이 바시시 열렸다.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돌아보던 능환은 자기를 구원해준 응통이가 대접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눈초리가 누그러졌다.

《정신이 드오이까. 그럼 이 꿀물이라도 드세요.》

응통은 일어나앉은 능환의 모습을 보고는 손에 든 대접을 가까이에 놓아주었다.

능환은 꿀물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트이여 체면이고뭐고 가릴새없이 대접을 끌어당겨서는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말끔히 비운 대접을 내려놓으며 후련한듯 한숨을 내쉬였다.

꿀물을 마셔서인지 정신이 번쩍 들고 온몸에 기운이 솟는듯 했다.

《사경에 처한 날 네가 제때에 구해주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큰일날번 하였구나. 네가 아니였더라면 난 이미 저세상사람이 되였을거다.》

능환이 이렇게 정색해서 말하자 응통은 쑥스러운듯 웃었다.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고보니 역시 나이는 숨길수가 없어 귀염성스럽고 애된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보였다.

능환은 아까 저자거리에서 처음 보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나섰던 응통의 행동이 리해되지 않아 그 의문을 풀어보려고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어떻게 되여 포졸들을 따돌리고 날 구해주었니? 너와 나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생면부지가 아니냐?》

능환의 말이 여기까지 와닿자 응통은 정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까 포구에서 점포에 붙여놓은 형님의 용모파기를 보았소이다. 완산에서 대아찬을 살해하고 도망친 범인을 잡으라는 방을 보고는 만약 이 사람과 맞다들게 되면 어떤 일이 생겨도 도와주리라 결심하게 되였지요.… 헌데 이렇게 저자거리에서 형님을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소이다.》

응통의 말을 들은 능환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차마 믿을수 없다는듯 응통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다치고… 어떻게 한번 본 용모파기를 가지고 우연히 맞다든 나를 그 범인이라고 대뜸 짐작할수 있었느냐? 난 혹시라도 포졸들이 말씨를 가지고 낌새를 챌가봐싶어 줄창 벙어리시늉까지 했었는데…》

응통은 능환의 말에 피씩 웃음을 흘리면서 가까이 다가와 그가 입고있는 옷섶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옷을 보고 알아보았지요. 같은 베천이라고 해도 지방마다 천을 짜는 방식과 무늬, 성김이 서로 다르오이다. 형님이 입고있는 이 베옷은 성글게 짠 베천으로 만든것으로서 주로 남도사람들이 즐겨 입는것이지요. 이 지방사람들은 이런 베옷을 입고다니지 않아요.》

능환은 응통의 식견과 안목이 뛰여난데 놀라서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넌 도대체 누구냐?》

능환은 응통을 덮치려는 자세로 상반신을 세우고서 날카롭게 물었다.

《사실은 저도 상인의 아들이오이다. 저의 아버님은 검용이라고 패서의 행상상인인데 지금은 조정에 항거하여 칼을 들었나이다.》

응통은 전혀 두렵지 않은듯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당당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능환은 갈피를 잡지 못해 망설이기만 했다.

과연 저 말을 믿어야 하겠는가. 응통의 진지한 태도로 보아 전혀 거짓이 아님은 명백한데…

능환의 이러한 의혹을 응통이 가셔주었다.

응통은 능환에게 자기가 패서땅을 떠나 여기 송악으로 오게 된 사연을 구체적으로 숨김없이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능환은 그제서야 경계심을 풀고 어린 응통의 기개에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뜻을 이어가겠다고 붓을 꺾고 어린 나이에 세상공부를 하겠다고 나선 응통이 참으로 돋보이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응통이 행상으로 뜻을 펴겠다고 하자 능환은 코웃음을 쳤다.

《흥, 장사를 하려면 나라를 팔고살 정도로 유명한 대상이 되여야지 고작해서 행상이나 운송업을 하여서는 입에 풀칠도 못하겠다.》

《그럼 형님의 뜻은 무엇이오이까?》

응통이 두눈을 깜박이면서 물어보자 능환은 제법 어깨를 으쓱해가며 흰소리를 쳤다.

《너도 청해진대사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겠지. 장보고는 바로 완도사람이란다. 비록 음모의 희생물이 되여 값없이 쓰러졌지만 아직도 남도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고있다. 그는 천하의 모든 바다를 지배한 해상왕이란다. 난 장보고와 같은 인물이 되련다.》

한바탕 열변을 토하던 능환은 자기보다 세살이나 아래인 응통이앞에 멋적은지 제풀에 주저앉고말았다.

《그게 뭐 나쁜가요? 그럼 형님은 해상왕 장보고처럼 바다를 다스리고 난 이담에 커서 륙로를 지배하는 행상이 되면 서로가 도울수 있을거예요.》

응통의 이런 말에 그들 둘은 마주보며 마음껏 웃었다.

이렇게 저자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결합된 능환과 응통은 서로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들은 저자거리를 돌며 시장형편을 료해한 다음 아무 상단이든 우선 몸을 붙이기로 결심을 내렸다.

응통은 장사에 유리한 송악지방에서 장사를 배울 생각이였으나 능환은 기회만 차례지면 한시바삐 여길 뜰 생각뿐이였다.

능환은 밀항을 해서라도 오직 당나라로 갈 생각만 하고있었다.

능환을 설복하다 못한 응통은 하는수없이 그가 시키는대로 포구를 나돌며 적당한 상단을 물색하였으나 당나라와의 교역로가 막힌것으로 하여 그곳으로 가는 배를 물색하기가 조련치 않았다.

능환은 사방 용모파기가 붙어있어 아직 나타날 처지가 못되여서 주로 포구를 나다니는것은 응통이가 맡아하였다.

드디여 그들에게 기회가 차례졌다.

심한 재정난으로 시달리는 조정에서 수년간 중단하였던 당나라와의 비단무역을 재개하기로 결심하고 당나라의 등주에 무역중계소를 다시 내온다는 소식을 응통이가 물어왔던것이다.

송악의 상인세력들이 자금을 대여 당나라 등주에 무역중계소인 신라방을 내오기로 하였다는것이였다.

사문개라고 송악지방의 유명한 상인이 무역중계소를 내오기 위해 상단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기로 락착이 되였으며 그를 위해 사람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능환은 고대하던 기회가 차례졌는가싶어 환성을 질렀다.

뒤따라 이번 당나라행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대륙정세와 해적들의 준동으로 자칫하면 화를 당할수 있다는 불길한 소문도 들어왔으나 오직 당나라로 갈 생각에만 몰두하고있는 능환은 아예 귀등으로 스쳐보내고말았다.

마음이 붕 떠서 한달음에 포구로 내려간 그들은 깜짝 놀라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포구에는 인원모집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로 꽉 들어차 발들여놓을 자리도 없었기때문이였다.

당나라로 가는 배길이 위험하기 그지없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땅을 잃고 류랑하는 사람들과 빈민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들었기때문이였다.

그래서인지 인원선발기준이 매우 높아 능환이와 응통이는 아예 끼울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였다.

밀항이라도 하기 위하여 배를 보러 갔으나 국가의 물장고에서 나온 비단을 싣고 가는것만큼 어찌나 경계가 삼엄한지 접근하기조차 불가능했다.

능환이 맥을 놓고 앉아있는데 좀더 자세한 소식을 알아보러 내려갔던 응통이 사기가 나서 뛰여왔다.

《형님, 저기 저자거리 오른편 점포에서 행상상인들이 사환으로 쓸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하더이다. 우리도 거기로 가는것이…》

《상단에 적을 둘바에야 대국으로 가야지 국내에서 보짐이나 져나르란 말이냐?》

대뜸 응통의 말을 매정하게 막아치운 능환은 행여나 하는 생각으로 포구로 내려갔다.

능환은 차라리 상단무사로 받아달라고 청을 넣을가 생각도 해보았으나 혹시 제 신분이 로출될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런 생각을 머리속에서 지워버렸다. 취재를 본다는 점포에 도착하니 소문 그대로 아직까지 누구도 합격한자가 없는 모양으로 점포를 담벽처럼 둘러싼 군중이 저마다 먼저 들어가겠다고 밀고닥치며 혼잡을 일으키고있었다.

방금 취재에 응했던자가 얼굴이 수수떡처럼 시뻘개서 점포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오자 밖에서 붐비던 구경군들이 우 밀려들어 그를 에워쌌다.

《그래, 합격했나?》

구경군들이 호기심에 물어보자 그자는 벌컥 성을 내였다.

《이런 성화라구야… 가뜩이나 시합장에서 쫓겨나 어리벙벙한데… 자, 길이나 비키슈.》

《그래서 어떤걸 물어보던가?》

《흥, 날보고 비단 한필을 내여주기에 거저 주는것인가 했더니 종류가 어떻소, 품질이 어떻소 하며 성가시게 물어보기만 하는게 아니겠소? 내 참 드러워서… 대답 못하니까 두말 안하고 내쫓습디다.》

《그거야 자네가 시꺼멓게 생긴것이 천생 도둑놈상판이니 누가 그 비싼 비단을 거저 내주겠다고 하겠나.》

누군가 뒤전에서 이렇게 시까스르자 군중은 마음놓고 폭소를 터뜨리는것이였다.

능환은 실지 이 광경을 목격하고보니 은근히 승벽심이 동하여 응통의 손을 잡고 함께 점포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거의 반나절이나 기다리던 끝에 겨우 그들의 차례가 되였다.

저자거리와 면한 점포에는 밖에서 들여다보지 못하게 차일을 쳐놓았는데 그곳을 돌아드니 취재장소인듯 사방 열자쯤 되는 자그마한 마당엔 돗자리를 깔아놓았다. 마당을 지나면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게 되여있는데 문을 열어놓고 발을 드리워놓은것으로 보아 아마 사문개라는 상인이 그안에 있는 모양이였다.

사환이 시키는대로 돗자리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앉은 능환과 응통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초조한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발이 걷혀지면서 나이가 마흔이 좀 넘은듯싶은 서글서글하게 생긴 중년사나이가 천천히 토방에 나와섰다. 그가 바로 사문개였다.

그는 대뜸 능환과 응통을 띄여보더니 집사를 책망했다.

《당나라로 가는것이 무슨 배놀이를 가는것으로 알고있는게냐? 어서 돌려보내거라.》

능환이 이제는 다 글렀구나 하고 실망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이때 점포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열리더니 풍채좋은 중년사나이가 응통이또래의 처녀애를 데리고 마당으로 들어서는것이였다.

그 중년사나이는 다름아닌 행상상인 오령이였다.

이전부터 사문개와 안면이 깊은 관계로 이렇듯 취재장소를 찾은것이였다.

처녀애는 키가 호리호리하고 눈이 검고 이마가 훤칠한것이 제 나이보다 숙성해보였다.

먹으로 그린듯 한 눈섭이며 오똑한 코가 여간 예쁘고 활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녀애는 오령의 딸 미령이였다.

《이게 누구요? 자네가 귀여운 딸까지 척 데리고 내 점포엔 어인 일로 행차하였는가?》

사문개가 반색하며 오령을 맞아들였다.

오령은 점잖게 웃으며 사문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형이 여기서 등주로 데려갈 사환들을 고르기 위한 취재를 본다기에 구경이나 하러 들렸소이다.》

사문개는 대바람에 두손을 저었다.

《련 이틀에 걸쳐 취재를 보았으나 아직까지 쓸만 한 사환 하나 고르지 못했소. 동생이 하나 천거해주시오.》

오령은 마당에 꿇어앉은 두 소년을 찬찬히 눈여겨보며 사문개를 향해 말을 꺼냈다.

《저 소년들도 취재를 보러 왔는가요?》

그러자 얼굴이 수수떡처럼 붉어진 사문개가 집사에게 소리질렀다.

《뭘하고있는게냐? 어서 저 애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바로 이때였다. 별안간 응통이 분을 참지 못하여 좌중에 대고 소리질렀다.

《어르신께서는 어찌 나이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려 하시나이까. 옛날 고구려의 소년들은 외적이 쳐들어오면 어린 나이에도 종군하여 목숨을 서슴없이 바쳤다 하오이다.》

응통의 항변에 사문개는 물론 오령도 깜짝 놀라 한참만에야 자신을 수습할수 있었다.

《너희들이 무슨 소문을 듣고 당나라로 가겠다는지 알수 없지만 이번 길은 극히 위험한 길이 될수 있다. 사실대로 말해서 살아서 무사히 돌아온다는 담보가 없는 길인데도 꼭 가야 하겠느냐?》

사문개를 대신하여 오령이 정색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자 능환이 무릎걸음으로 나서며 간청했다.

《우린 대국으로 가서 장사를 해보는것이 소원이오이다. 그런데 바다길이 두렵다고 물러선다면 어떻게 장사를 할수 있겠소이까.》

오령은 그들의 기개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문개를 향해 돌아섰다.

《허허, 나이는 어리지만 기개가 있어보이니 한번 취재라도 하는것이 어떻소이까?》

사문개는 못마땅한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벗인 오령이마저 이렇게 나서니 차마 뿌리칠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는 곧 발을 드리운 안방을 향해 소리쳤다.

《비단 한필 내오거라.》

그러자 기다렸다는듯 발이 제껴지면서 사환이 흰 비단 한필을 들고나왔다.

《이 비단이 무슨 비단인지 아느냐?》

사문개는 사환이 놓아준 비단을 손으로 가리키며 대뜸 이렇게 물었다.

씨실을 띄우지 않고 무늬가 알릴듯말듯 은근하게 짠것이 손맛이 부드럽고 빛갈이 우아한 비단으로 여간 값비싼 물건이 아니였다.

상인의 아들이 비단의 종류를 모를가, 능환은 씩 한번 웃고나서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

《이 비단은 대화어아금이라고 부르는 비단이오이다.》

사문개는 물론 오령도 깜짝 놀란듯 두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취재에 응하였으나 아직까지 그 누구도 이 비단의 이름을 아는자가 없었다.

대화어아금은 항간에서 흔히 보는 비단과 전혀 다른것으로서 궁성에 진상품으로 들어가는 비단이였다.

당나라에서도 신라와의 공무역물품중에서 제일 첫손가락에 꼽는 비단이였다.

《무얼 보고 이 비단이 어아금이라 단정하느냐?》

사문개를 대신하여 오령이 날카로운 어조로 묻자 능환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어아금은 물고기이발과 같은 무늬가 새겨져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이 비단의 물결무늬와 광택을 보면 첫눈에 알수 있나이다. 대화어아금은 비단의 무늬가 하도 우아하고 아름다와 우정 물감을 들이지 않고 흰 비단 그대로 쓴다고 들었소이다.》

능환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오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 비단을 어디에 쓰는지도 알고있겠구나.》

오령이 이렇게 대답을 재촉하자 능환은 어리둥절해하는 인상이였다.

비단으로 의례히 옷을 해입는줄로만 알고있는데 갑자기 용도를 밝히라고 하니 갈피를 잡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러자 응통이 그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대화어아금은 옷을 해입는 비단이 아니오이다.》

《비단으로 옷을 해입지 않는다면 무엇에 쓴다는것이냐?》

오령이 짐짓 눈을 부릅뜨고 말하는데도 응통은 전혀 위축됨이 없이 말을 계속했다.

《대화어아금은 여느 비단과 달리 발이 얇고 색갈이 은은하여 거기에 그림을 그려넣으면 제격이오이다. 하여 사치를 즐기는 당나라의 귀족들이 제 집의 재부를 자랑하기 위하여 화폭으로 쓰던것이 이제는 그림을 그리거나 명필들의 글을 받는 비단천이 되고말았소이다.》

응통의 말에 모두가 놀라서 서로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너희들은 저자거리의 범상한 인물들이 아닌가보구나. 부모님들은 계시느냐?》

사문개의 이런 물음에 능환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우린 어려서 부모를 잃고 떠도는 처지라 거처도 없는 몸들이오이다. 어르신께서 거두어주신다면 열심히 장사를 배워 상인으로 되는것이 소원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소이다.》

그때 그들이 제 부모들의 이름을 밝혔더라면 못내 반가와했을것을 그런줄 꿈에도 생각을 해보지 못한 오령이 사문개를 향해 돌아섰다.

《어떻소이까? 비록 나이는 어려도 생각하는바가 남다른데가 있어 사형에게 절실히 필요한 인재들이라 생각하오.》

사문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능환이라는 소년은 그런대로 나이가 알맞춤하나 저 응통이는 너무 어려서 승선할수가 없소. 괜히 관가에 이런 일로 까탈을 잡혔다가는 아예 상권을 박탈당할수 있소.》

그러자 오령의 딸 미령이가 제 아버지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오령은 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사문개에게로 돌아섰다.

《그럼 능환이라는 사내를 사행수님의 상단에 받고 저 응통이는 당분간 내가 데리고있는것이 어떻소이까? 그동안 내게서 장사를 배우다가 나이가 차면 사형이 등주로 데려간다면 좋으리다.》

이렇게 되여 능환과 응통은 사문개와 오령의 상단에 사환군으로 각각 적을 두게 되였다.

그동안 각별한 사이로 정이 두터워진 그들은 헤여지는것이 슬펐으나 어쨌든 각자가 바라는것을 얻었기에 만족한 기분이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능환은 그토록 원하던대로 당나라 등주에로의 항행의 길을 떠날수 있었다.

드디여 사문개의 상단은 송악의 대토호인 왕륭의 도움으로 수송선을 여러척 내여 수천필의 비단과 약재 등을 싣고서 먼길에 나섰다.

연해를 따라 북상하다가 초도에서 수로안내를 맡은 배군들을 태우고 곧장 서해를 가로질러 항해하기 시작했다.

이번 항해가 상단의 운명을 건 먼길이였기에 사문개이하 모든 상단일군들과 배군들이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이 여러날에 걸친 지루한 항해끝에 당나라연해에 들어섰을 때였다.

혹시라도 해적을 만나지 않을가 가슴을 조이던 그들의 앞에 당나라수군함선이 불쑥 덩지 큰 자태를 드러내였다.

상단일군들은 연해를 순찰하는 수군함선을 만난줄로 알고 기뻐하였다.

상단의 배길을 막아선 함선은 어찌된 영문인지 배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여왔다.

함선의 신호에 복종하여 닻을 내린 사공들은 모두 갑판에 나와 서서 서로 이국의 함선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나라의 상선은 여러차례 보았으나 수군함선만은 처음 보는 배군들이였던것이다.

그들 틈에 끼여 호기심이 동해 함선을 세심히 뜯어보던 능환은 속으로 고개를 기웃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함선이라면 어느 수군영에 소속되였는가를 알리는 표식기를 반드시 세우게 되여있는데 두척의 배들중 한척도 표식기가 없었던것이다.

배머리에 위풍을 돋구느라 잔뜩 꽂은 기치들도 의심만을 자아냈다.

당시 륙군과 수군은 기치의 색갈로 구분했는데 이 배들은 수군함선기뿐아니라 륙군의 기병들이 들고다니는 기치까지도 버젓이 배머리에 꽂고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사방 가보지 않은데가 없는 능환인지라 벌써 첫눈에 함선이 위장된것이라는것을 간파했다.

그는 곧장 사문개에게로 뛰여갔다.

능환이 다짜고짜 저 함선들이 의심스럽다고 말하자 사문개는 어이가 없다는듯 앙천대소하였다.

능환이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분명 함선으로 가장한 해적선일수 있으니 절대로 가까이 오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애걸하였으나 사문개는 벌컥 성을 내며 애당초 그의 말을 받아줄 잡도리가 아니였다.

능환이 물러서지 않자 화가 잔뜩 동한 사문개는 사공들에게 일러 끌어내가게 하고는 이물갑판에 나와섰다.

두척의 함선중 한척은 그냥 배길을 가로막아 서있고 다른 한척이 노를 저어와 사문개가 타고있는 수송선의 선미에 선체를 갖다대는것이였다.

갈구리가 날아와서 수송선을 비끄러매고 험상궂게 생긴자들이 창검을 번뜩이며 배전을 넘어와서야 사문개와 배군들은 질겁하여 뒤걸음쳤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배군들은 물론 상단의 호위무사들마저도 방심하고있다가 그자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하고말았다.

본색을 드러낸 해적들은 반항해나선 상단의 호위무사들을 여러명이나 잔인하게 찔러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짐짝처럼 꽁꽁 묶어 바닥에 엎어놓았다.

능환의 말을 듣지 않은탓에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사문개는 혀를 깨물며 통탄하였으나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맨 나중에야 해적선에서 넘어온 두목이 두팔을 결박당한 사문개의 목에 칼을 갖다대며 야시꼽게 웃었다.

《어리석은 신라놈들같으니… 대국의 수군함선이라고 하니 그렇게도 공경스럽더냐?》

두목은 이렇게 빈정거리면서 다른 두척의 배도 불러서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게 하라고 이르는것이였다.

해적들이 죽이겠다고 위협했으나 사문개는 죽으면 죽었지 차마 제 손으로 다른 배들까지 희생시키고싶지 않았다.

사문개가 죽기로 거부해나서자 두목은 졸개들에게 떨어져있는 신라상선들에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내게 하였다.

아직 해적선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한 다른 두척의 신라상선들이 수송선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고 차츰 가깝게 다가서고있었다.

해적두목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신라상선들을 덮친것으로 하여 완전히 방심하고있었다.

해적들의 시선이 모두 가깝게 다가오는 다른 두척의 신라상선들에 쏠려있을 때 사문개가 결박된채로 쓰러져있는 이물갑판우에 자그마한 그림자가 불쑥 치솟았다.

그는 능환이였다.

이미전에 해적선의 정체를 간파하고있던 능환인지라 해적들이 배전을 넘어올 때 선창에 들어가 숨어있다가 이렇듯 주의가 덜 돌려진 틈을 리용하여 이물로 나왔던것이다.

능환이는 해적들의 주의가 다른 배들에 쏠린 기회를 리용하여 사문개이하 배군들의 결박을 돌아가며 단검으로 끊었다.

결박이 풀려난 배군들은 곧 닥치는대로 작살이며 고기비늘따는 칼이건 가림없이 무기로 쓸수 있는것은 무엇이든 손에 들고서 해적들에게 달려들었다. 곧 치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해적들은 무장을 잘 갖춘데다가 사람 죽이기를 식은죽먹듯 하던자들이라 신라배군들은 상대가 못되였다.

여럿이 죽고 상하는 통에 배군들은 차차 압축되여 한구석으로 몰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뭣들 하느냐? 한놈도 살려두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두목놈이 이렇게 부추기자 해적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덤벼들었다.

신라배군들이 아예 맥을 놓고 손에 든 어설픈 무기들을 땅에 떨굴 때 《물러서지 말라!》하며 배사공들속에서 누군가가 용약 소리를 치며 해적무리속으로 뛰여들었다. 그는 능환이였다.

장검을 비껴들고 몸을 날려 해적무리속에 뛰여들어간 능환은 비호같은 동작으로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10여년간 익힌 비범한 그의 칼재주가 은을 내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여라문명이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쓰러지자 이번에는 반대로 질겁한 해적들이 반대켠으로 우 몰렸다.

능환의 용기에 힘을 얻은 배군들이 사기가 충천하여 반격에로 나섰다.

《뒤로 물러서면 죽여버리겠다. 물러서지 말고 저놈부터 죽여라!》

악에 받친 해적두목이 미친듯이 소리지르며 능환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순간 능환은 손에 든 검을 미친듯이 달려드는 해적두목에게 주저없이 힘껏 던졌다.

얼결에 던진것이였으나 수년간 재주로 익힌 자객의 수법이라 능환의 손에서 날아간 검은 면바로 해적두목의 가슴을 푹 꿰였다.

두목이 풀썩 꼬꾸라지자 승패는 이미 결정되였다.

질겁한 해적들은 손에 든 무기들을 황급히 내던지고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눈깜박할 사이에 사태가 역전되였던것이다.

사태를 알아차린 다른 신라상선들이 해적선을 에워싸고 능환을 선두로 하는 배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배전을 넘어가 해적선을 점거해버리자 남은 한척의 해적선은 질겁하여 황급히 노를 저어 달아나버렸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모든 광경을 주의깊게 지켜본 사문개가 능환에게 지척거리며 다가가 정중히 허리를 굽혀 절까지 하였다.

《고맙네. 내가 눈이 멀어 귀인을 가려보지 못한것을 용서해주게나. 임자가 아니였다면 이 늙은 몸은 물론이요 저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도 비참하게 끝났을거네.》

능환은 당황하여 두팔을 내저었다.

《나도 상단의 한사람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사문개는 능환의 겸사의 말에 감동이 된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곧 혼란을 바로잡고 행장을 수습한 일행은 드디여 목적지인 당나라의 등주포구에 들어섰다.

선단이 서서히 포구로 들어설 때 배머리에 나와 서있던 능환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처럼 큰 포구는 보기가 처음이였던것이다.

끝을 알수 없게 아득히 뻗은 포구로는 단꺼번에 수십척씩 배들이 들고나는데 정박장에 매여져 파도가 이는대로 흥떡이는 덩지 큰 배들의 이물마다에 꽂은 각양각색의 기발들이 해풍에 나붓기는 모습들은 실로 장쾌한 광경이였다. 정박장에서 매 배들마다 수십, 수백명씩 짐군들이 달라붙어 짐을 부리우고 싣고 하는 모양 또한 볼만 했다.

어떤 배들은 길이가 거의 이백자에 달하는것도 있어 능환이 자기가 타고있는 배는 거기에 비하면 볼품없이 느껴졌다.

《그래 어떤가? 사내라면 이쯤되는 포구를 깔고앉을 야심이야 가져야지.…》

사문개의 말을 들으며 능환은 야망으로 두눈을 불태웠다.

이런 해상교역장만 손아귀에 틀어쥐면 심중에 품은 뜻을 얼마든지 펼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이렇게 능환은 사문개의 상단성원으로 바다를 건너가 등주에 자리잡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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