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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회

제 1 장. 방 황

9


견훤의 도움으로 무사히 완산주경내를 탈출하여 바다로 나간 능환은 광주앞바다에서 송악의 례성강포구까지 쌀을 실어가는 운반선을 얻어 탈수 있었다.

광주에서 송악의 례성강포구까지 가는 배길에는 연해를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는 상선들이 많아 기찰을 당할 념려는 전혀 없어 능환은 안도의 숨을 내쉴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탕개를 늦추자바람으로 능환은 기진하여 쓰러져버렸다.

대보름날의 거사이후 변변히 먹지도 자지도 못한 후과가 곧 나타났던것이다. 고열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고 거기에 배멀미까지 겹쳐 아예 꼼짝달싹 못했다.

다행히 운반선의 가장 년장자인 배사공늙은이가 능환을 제 손자처럼 여기고 각근히 돌봐주지 않았으면 밥숟가락을 놓은지 오랬을것이였다.

겨우 급한 고비는 넘겼으나 약 한첩 쓰지 못한데다 배멀미로 미움 한숟갈 넘기지 못하여 일어설 맥도 없어 전기간 선창에 누워있기만 했다.

배사공늙은이의 지극한 구완에 의해 정신을 차린 능환은 흔들거리는 선창에 누운채로 앞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신라를 떠날 결심이였다.

처음엔 변성명하고 대처에 숨어지내든가 아니면 속세를 떠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곰곰히 되새겨보니 평생 가슴을 조이며 숨어지낼 바치고는 차라리 광활한 대륙으로 나가서 뜻을 펴고싶었다.

장사에서 성공하여 대상으로 일어서면 그처럼 갈망하던 권력도 손에 넣을수 있을것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뿐이지 몸에 단돈 한푼 지니고있지 못한 알짜 빈털터리신세에 무엇을 어찌한단 말인가.

가지고있는 재주란 고작 칼을 잘 던지는것뿐인데 남의 나라땅에 건너가 자객질로 연명한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우선 당나라로 갈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조차 없었다.

이목구비가 멀쩡하여 어디 가서 빌어먹을수도 없는노릇이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우는 짐군이나 되여서는 어느 하가에 당나라로 건너갈 려비를 마련할것인가.

능환이가 례성강포구까지 가려는것은 어떻게 하나 당나라로 가는 배를 물색하여 사공이라도 되려는것이였으나 나이도 어리고 배를 부려본 경험도 없는 그를 누가 쓰겠다고 하겠는지. …

능환은 생각할수록 앞이 막막했다.

《이보라구 총각, 이젠 례성강포구에 다달았으니 어서 이리로 나오게나.》

선창에 드러누워있던 능환은 배를 타고오는 동안 각근히 대해주던 사공늙은이가 소리쳐부르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선미로 나와섰다.

지금까지 선창에만 줄곧 박혀있다나니 다리가 후들거렸고 귀전에서는 벌떼가 날개짓하는 소리인듯 붕붕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사공늙은이가 다가와서 몸을 부축해주어서야 간신히 몸을 바로잡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순간 능환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비를 따라 완도를 비롯한 전국각지의 해상교역장을 많이 돌아다닌 능환이였지만 송악의 례성강포구처럼 큰 해상교역장을 보기는 처음이였던것이다. 정박장에 머물고있는 배들은 거의 모두 길이가 백자가 넘는 큰 배들로서 사람만 해도 백명이상씩 탈수 있는것들이였다.

능환이를 놀라게 한것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였다.

포구에 들어서니 정박장에서부터 송악성에 이르는 연도에 눈뿌리가 아득하도록 큰 저자가 펼쳐져있었던것이다.

과시 나라에서 제일가는 해상교역장으로 불리울만 하였다.

연도에 주런이 늘어서있는 로천가게들앞에서 마구 붐비는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갖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능환은 야심만만하여 가슴을 쭉 폈다.

지금껏 고열에 시달리고 배멀미로 만신창이 되였던 온몸에 기운이 솟는듯 했다.

《그래 어떤가? 자네가 늘 보아오던 남도의 해상교역장들도 여기 례성강포구에는 미치지 못할게야.…》

능환은 사공로인에게로 돌아섰다.

《로인님은 배사공으로 평생을 보냈다니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도 가보았나이까?》

능환이 이렇게 묻자 사공늙은이는 사기가 난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철들기 전부터 짠물을 동이채로 먹은 내가 어딘들 가보지 못했겠나. 한 이십년전에 당나라로 가는 사신단일행을 실은 배를 몰고간적이 있어.》

능환은 호기심으로 두눈을 불태우며 로인에게 바싹 다가섰다.

《거긴 어떻소이까. 저 례성강포구만큼 큰 교역장도 있소이까?》

사공늙은이는 능환의 이런 물음에 어이가 없는듯 크게 웃었다.

《글쎄… 뭐라고 말할가. 내가 갔던 당나라 등주의 문등포구는 중원 최대의 해상교역장으로 불리우는 곳인데 정말 크긴 크더군.… 하여간 없는 배가 없었어. 저기 북쪽의 발해의 상선들과 머나먼 서역의 배도 있었다니까. 이 례성강포구와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거기도 굉장하데…》

능환은 로인의 말을 들으며 자기가 그토록 바라던 권력을 손에 넣는 길이 바로 장사에서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당나라로 건너가는 배편을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오이까?》

능환이 갑자기 이렇게 물어보니 사공늙은이는 놀란듯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가?》

《여기 례성강포구에서 당나라로 곧장 갈수 있는 항로가 있는지 알고싶어 하는 말이오이다.》

능환이 계속 보채니 사공늙은이는 마지못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글쎄… 저기 당항포라면 몰라도 여기서 곧바로 당나라로 가는 배편을 얻기가 조련치는 않을걸세.…》

이렇게 서두를 뗀 사공늙은이는 구체적인 사정을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신라와 당나라를 서로 오가는 항로는 남해의 완도에서 바다를 건너 남중국의 장강으로 들어가는 배길과 서해의 남양만의 당항포에서 출발하여 연해를 따라 북상하여 풍천의 초도에 기항하였다가 다시 서해를 가로질러 당나라의 등주포구로 들어가는 배길 그리고 례성강에서 나와 곧바로 서해를 건너가는 배길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당항포를 떠나는 항로만 간신히 유지되고있다는것이였다.

완도에서 떠나 바다를 건너 남중국의 장강을 거슬러올라가는 배길은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인 841년에 신라의 해상왕으로 불리우던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살해되면서 없어진것은 능환이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례성강포구를 출발하여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로는 어찌하여 없어져버렸는지 그 리유를 알수 없었다.

능환의 이러한 의문을 사공늙은이가 가셔주었다.

당항포를 떠나는 배길은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외교사절을 교환하거나 국가의 공무역을 위하여 설정된 항로라면 례성강포구에서 나와 곧바로 서해를 가로지르는 배길은 두 나라 상인들의 사무역을 위한 해상 교역로였다.

당나라의 쇠퇴몰락으로 하여 배들의 항행이 끊어져 자연히 항로가 없어지게 되였다는것이였다.

능환이 락심해하자 사공늙은이는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뭘 그다지나 의기소침해하는가. 조정에선 개별적인 상단들이 직접 당나라로 건너가는것은 제한하지만 당나라상인들과의 거래를 막은것은 아니니 마음만 먹으면야…》

《방금전엔 사신단을 태운 배와 선정된 상단의 상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선단의 항행만을 조정에서 허가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이까?》

능환은 사공늙은이의 말허리를 물고늘어졌다.

《원, 이렇게 고지식하다구야… 지금 어디 조정에서 하라는대로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조정의 지시가 나라의 주, 군, 현 그 어디에 가닿기나 할새 말이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일뿐이고 배를 가진 선주라면 누구라할것없이 당나라상인들과 밀무역을 벌리고있다네.…》

《그럼 여기 례성강포구에서도 얼마든지 당나라로 가는 배편을 구할수가 있겠군요.》

《그거야 마음먹기탓이지.… 헌데 임잔 아까부터 어째서 그런 말만 자꾸 꺼내는가. 혹시 당나라로 건너갈 생각이 아닌가?》

능환이 달다쓰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데 사공늙은이는 질겁한듯 한손을 내저었다.

《이거 늙은게 주책머리없이 쓸데없는 말을 했군. 혹시라도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게.》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나이까?》 능환이 의아한듯 물어보자 사공늙은이는 침방울까지 튕겨가며 애써 만류하려들었다.

《원, 이렇게 철이 없다구야… 거기가 어디게 가겠다는건가. 임자도 지금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봤겠지? 나라꼴이 어떤가 말일세. 바다건너 당나라는 우리보다 더한 혼란에 빠져있다더군. 륙지는 말고라도 바다에서는 해적들이 들끓고있어 임자처럼 허황한 꿈을 꾸면서 갔다가 살아돌아온자를 못 봤네.》

사공늙은이가 아무리 설복하여도 능환은 건성으로 예예 하였지 애초에 새겨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야심에 차있는 능환인지라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리 만무한것이다.

지옥의 문고리도 쥐였댔는데 그깟 해적들따위를 겁내서 심중에 묻어두었던 야망을 버리겠는가.

이런 배심을 가지니 세상이 록두알만 해졌다. 드디여 배는 포구에 들어서서 정박장에 닻을 내렸다.

사공늙은이와 헤여져 배에서 내린 능환은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알아볼겸 길가에 주런이 늘어서있는 로천가게들을 둘러보면서 저자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배에서 내린지 한식경도 못되여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내배이는것이였다.

그제서야 능환은 자기가 여러날째 고열로 앓고 배멀미로 시달리여 밥한술 입에 대보지 못했음을 느낄수 있었다.

하긴 대보름날의 거사때부터 지금까지 근 보름이라는 기간을 죽지 않고 버티고있은것자체가 기적이라고 해야 옳을것이였다.

바다에서 줄창 앓으면서 배멀미로 시달린것은 뭍에 내려서면 곧 안정될것으로 여겼는데 갑자기 허기가 치밀어오르면서 정신이 가물가물 해졌다.

길가의 여기저기 널려있는 음식가게들마다에서 저마다 손님을 끌겠다고 지지고 볶고 굽고 삶는 음식냄새에 속이 통채로 뒤집히는것만 같았다.

능환은 현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길거리 한복판에 주저앉아버렸다.

《이크, 이게 뭐야? 하마트면 밟을번 했군.》

《이녀석, 어서 일어나지 못해? 누우려면 집에 가서나 눕거라.》

《에구, 저녀석이 지랄병에 걸린 녀석이 아닌지 모르겠네.》

오가는 행객들이 한마디씩 걸게 말을 던지고 지나칠뿐 모두가 외면한채 누구 하나 붙들어 일으켜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쳐들던 능환은 저쯤 앞에서 검정복색의 포졸들이 부리나케 다가오는 모습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차고 일어서서 도망치고싶었으나 도무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선 포졸이 가죽신을 신은 발로 그의 옆구리를 직신직신 건드렸다.

《웬놈이냐? 고개를 쳐들어라.》

나이가 젊은 포졸이 소리치는데 그보다 좀 지숙한 포졸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것이였다.

《여보게, 어디 아픈가본데 어느 의원집에라도 데려다줄가?》

《흥, 저 불량한 눈초리를 좀 보시우다. 저런 걸인녀석을 의원집에 데려다주면 약값은 누가 낸답디까?…》

젊은 놈이 이렇게 투덜거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미쳤는지 손에 든 곤봉으로 능환의 턱을 치켜들었다.

《가만, 네놈의 모색이 낯이 익은걸… 네놈은 어디 사는 누구냐?》

능환은 흐려지는 의식속에서도 만약 이 자리를 모면하지 못하면 반드시 붙잡히고말것이라는 생각에 등골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가까스로 기운을 내여 벙어리시늉으로 맥없이 손만 휘저었다.

포졸들은 관가로 데려가자느니 그냥 내버려두고 가자느니 서로가 다투던 끝에 젊은 놈의 주장이 우세를 차지하여 두놈이 능환이의 량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무지막지하게 일으켜세웠다.

능환은 절망감에 맥을 놓고 이제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예 두눈을 감아버렸다. 모든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하였던것이다.

바로 이때였다.

《형님,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요? 어머님이 애타게 기다리시는데 어서 집에 가소이다.》

갑자기 누군가의 야무진 목소리가 귀전을 때리는 바람에 능환은 와뜰 놀라 두눈을 크게 떴다.

나이가 자기보다 두세살 어려보이는 총각애가 제법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다가서는 모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수한 차림새를 갖추고있으나 영특하게 잘생긴 얼굴에 나이는 어려도 록록치 않은 태도와 단정한 몸가짐, 말투로 미루어보아 저자거리에서 마구 굴러먹는 아이들과는 근본이 달라보였다.

《이자가 네 형이냐?》 젊은 포졸이 대뜸 이렇게 물어보는데 총각애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대꾸하였다.

《지랄병을 앓고있어 의원에게 보이려고 저자거리로 나왔는데 갑자기 없어져 이 소동이 아니오이까. 이렇게 포졸님들이 찾아주었으니 망정이지 큰일날번 하였소이다.》

젊은 포졸은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으로 총각애의 아래우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얘, 넌 여기 송악에서 살고있는 애가 맞느냐?》

《여기서 이럴것없이 우리 집이 멀지 않으니 우리 형님을 집까지 데려다주소이다.》

총각애가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또라지게 말하니 포졸들은 쓰거운듯 입만 다셨다.

《얘, 우리가 뭐 지랄병에 걸린 놈이나 시중들고있으란 말이냐? 우린 바쁘니 여기서 이러고있지 말고 의원에게 데려가든 집으로 가든 어서 가기나 해.》

총각애의 여린 몸에 의지하여 간신히 몸을 일으킨 능환은 멀어져가는 포졸들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였다.

그는 총각애에게 맥없는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날 구해주어 고맙다. 내 이름은 능환이다. 네 이름은 뭐냐?》

《내 이름은… 응통이오이다.》

순간 능환은 더이상 자신을 지탱해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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