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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허 헌 편



경력

• 1885년 7월 6일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

• 1908년 8월 변호사개업.

• 1911년 3월 서울 보성학교 교원, 그후 보성전문학교 교장.

• 1927년 2월 신간회결성식에 참가.

•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 1946년 2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 1948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성원,

• 1951년 8월 17일 사망.

• 1990년 조국통일상 수상.



나라의 독립과 갈라진 겨레의 통일을 위해 한생을 바친 애국렬사들속에는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는 변호사로, 반일운동가로, 해방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신민당 당수,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생의 말년에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성원, 최고인민회의 초대의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사업한 허헌도 있다.

그의 한생을 총화지어보면 그는 량심적이고 강직한 법률가, 불의를 참지 못하고 대의를 위해 투신한 의로운 정치가, 민족의 어버이의 크나큰 믿음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불같이 산 충직하고 신의있는 인간이라고 할수 있다.

소나무의 억셈은 추위로 알고 애국자는 조국이 위험할 때 알수 있다고 하였다.

칠칠야밤이던 일제식민지통치시기와 민족의 분렬이 영구화되던 엄혹한 시기의 허헌의 대바르고 량심적인 애국의 삶은 오랜 세월 분렬의 암흑속에 사는 우리 겨레에게 어느 길이 진짜 애국에 사는 길이며 어떻게 사는 삶이 영생으로 이어지는가를 웅변으로 실증해주고있다.



불의에 맞선 량심적인 변호사


칠보산은 산과 바다의 뛰여난 풍치로 하여 예로부터 《함북금강》으로 알려졌으며 산이름도 진귀한 일곱가지의 보물에 비기여 지어졌다고 한다. 1885년 7월 이처럼 경치좋은 칠보산이 자리잡고있는 명천군의 어느 한 산골마을에서 후에 우리 민족사에 이름을 남긴 허헌(호 긍인)이 태여났다.

비록 산천은 아름답고 수려했어도 어려서 량부모를 다 잃고 어린 동생도 돌봐야 하는 허헌의 유년시절은 참으로 고달픈 나날이였다. 고생속에 날과 달이 흐를수록 그의 가슴속에는 선친의 뜻대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갔다.

마침내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의 도움으로 19세기말엽에 서울에 간 그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설립된 근대교육기관인 관립재동소학교 고등과를 나온데 이어 한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나날은 비단 학문의 폭만 넓혀가는 나날이 아니였다. 애국적인 젊은 지식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 그는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에 대하여, 식민지를 쟁탈하기 위해 벌리는 렬강들사이의 암투에 대하여 상세히 알게 되였다.

허헌의 눈길은 법리론, 그중에서도 나라들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국제법에 쏠리였다. 국제법을 알아야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체결한 조약들의 불공정성, 불법성을 까밝힐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면 먼저 외국어부터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에서 낮에는 도이췰란드어를, 밤에는 일본어와 영어를 자체로 공부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규장각 주사로 일하였으나 선비들이 모여앉아 유학교리나 외우면서 허송세월하는데 환멸을 느끼고 이곳을 뛰쳐나와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이곳을 졸업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하였다.

어느날 그는 신문지상을 통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네데를란드의 헤그에서 리준렬사가 조선독립을 절규하며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그는 이미전부터 리준을 애국선배로 무척 존경하며 따랐었다. 리준도 애국심이 강한 청년들이 나라의 앞날을 떠메고나가야 한다면서 년령의 차이를 초월하여 허헌을 각근히 대해주었다고 한다.

이런 연고로 그는 만국평화회의에 리준을 비롯한 밀사들이 파견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고종은 헤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들을 파견하여 《을사5조약》의 비법성을 선포하고 세계의 정의와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국권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각국 대표들의 랭담한 반응으로 하여 회의앞으로 보내는 황제의 편지는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였으며 렬강들의 동정을 호소하는 밀사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걸음마다 좌절의 쓴맛을 보았다.

그들의 성공을 일구월심 바라고있던 허헌은 리준의 비참한 죽음앞에서 가슴을 쳤다. 그는 어떻게 하나 선렬들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어갈 의지를 가다듬었다.

법률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와 민족이 국내외적으로 불행한 처지에 빠졌다고 생각했던 허헌은 법률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며 공정한 사회를 이루겠다는 결심밑에 법률을 전공하였고 법관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피타게 노력하였다.

물론 당시의 법이라는것은 일본이 저들의 침략책동을 정당화하고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략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놓은것들이였다. 그리고 국제법이라는것도 렬강들이 약소민족들을 희생시켜 저들의 리익을 챙기기 위해 만들어놓은것들이였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 왜놈들과 당당히 맞서싸우려면 그들이 제정해놓은 법률상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법률과 국제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세우고 법률을 공부하였다.

시간은 인간이 소비하는것중 가장 가치있는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는 밤에는 달빛을 등불삼아 책을 읽었으며 바늘로 발바닥을 찔러 졸음을 쫓아가면서 공부하였다. 신발을 살 돈이 없어 대학으로 오가는 길에서는 맨발로 다니였고 5전짜리 눅은 식사를 봉사하는 식당에 들리기 위해 매일 대학에서 숙소까지 곧추 오가지 못하고 5리나 되는 길을 에돌아 다녔다.

이와 함께 학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별의별 일을 다하였다. 가정교사, 우유배달, 신문배달, 막로동…

그처럼 피타는 노력으로 그는 끝내 최우수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908년 조선으로 돌아와 그해에 실시된 제1차 변호사시험에서 합격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당당히 법정에 나서게 되였으며 실력으로 일본인법관들을 내려누르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무렵 조선의 사법재판제도는 이미 일본이 완전히 틀어쥐고있었다. 재판제도만 보더라도 재판정에서는 일본말만 쓰게 되여있었다. 피고가 반일적인 요소가 있는 조선사람이면 왜놈판사는 심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교수형에 처한다.》고 일본말로 언도해버리군 하였다. 그러면 그것을 조선말로 통역하는것으로 재판이 끝나고 즉시 형이 집행되는 판이였다.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변호사로서 법치를 념불처럼 외우는 왜놈들의 무지막지한 처사에 분격을 금치 못한 허헌은 어느날에는 억울하게 피해를 본 조선사람에 대한 변호를 하다가 왜놈재판장에게 황당무계한 판결을 취소하라고 책상을 치며 큰소리로 항의하여 재판이 중지된적도 있었다.

이 일로 하여 그는 변호사개업을 한지 불과 다섯달만에 징계에 회부되여 변호사등록이 취소된적도 있었다.

인간성이 없으면 정의로운 사람이 될수 없다고 하였다. 평소부터 억압받고 박해받는 인민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안고있던 허헌이 탐관오리들의 부패행위를 폭로하고 무고한 변을 당하게 된 불쌍한 사람들의 리익을 지켜주기 위해 무료변호에 나섰던적이 얼마인지 모른다.

왜놈들을 등대고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던 매국역적 송병준의 죄행을 까밝히고 재털이를 던지며 그자와 싸우던 일, 서울시내의 쌀값을 부당하게 올려 폭리를 보려던 왜놈상인들의 협잡행위와 이를 비호한 법부대신의 반민족적인 처사를 폭로규탄한 하미전사건, 왜놈들의 토지략탈책동으로 억울하게 경작권을 박탈당한 농민들을 변호해준 소유권분쟁들…

특히 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들을 위한 변호라면 리념이나 주의주장에는 아랑곳없이 솔선 맡아나서 수십, 수백리도 멀다 않고 달려가군 했다.

1919년 3.1인민봉기가 일어났을 때였다. 민족대표로 선정되여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던 33명을 비롯하여 수십여명의 《피고》들이 야만적인 고문끝에 살인재판정에 끌려나왔다.

허헌은 재판이 시작되자 량심적인 변호사들과 함께 그들을 위한 변호인으로 나섰으며 왜놈법관들이 작성한 30여권에 수만매에 달하는 심리기록들을 깐깐히 따져보았다.

그 기록들에서 허점을 찾아낸 그는 론리정연한 법리적근거를 가지고 자주독립의지를 내외에 천명한것은 결코 죄로 될수 없다고 하면서 《피고》들을 모두 무죄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제아무리 간교한 왜놈들일지라도 날로 높아가는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과 허헌이 제기한 법리상의 문제점을 무시할수 없었던 놈들은 끝내 공소불수리(공소기각)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자 왜놈검사는 복도에서 재판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욕설을 퍼붓는 희비극까지 연출했다. 그후 일제는 고등법원의 실책이라고 통탄하며 법원장이하 5명의 판사를 교체하고 재판장은 좌천시켰다고 한다.

일명 《공소불수리신립사건》이라고 부른 이 사건은 당시 국내는 물론 일본의 언론계와 법조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공소불수리신립》이란 재판소에 재판을 요구하는 검사의 소송활동을 위법으로 몰아 소송을 취소하도록 재판장에게 항의하는 변호사의 법률상권리라고 한다.

이때의 변호는 허헌이 대학졸업후 변호사로서 정치범에 대한 첫 변호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국내외에서 크게 주목받게 되였다.

그는 그후에도 침식도 잊고 고심하며 려운형을 비롯한 독립애국인사들을 악독하고 교활한 왜놈법관들의 마수에서 구원하기 위해 치렬한 법정싸움을 벌리군 하였다.

1950년대말에 허헌과 대학동창생이였던 일본법률가협회 회장이 공화국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허헌의 묘소를 찾고 그의 딸 허정숙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허헌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허헌은 일본법을 일본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있었다. 일본법의 약점을 알고 법정에서 변호를 잘하였기때문에 늘 이겼다.》

당시 허헌의 명성과 관련한 이런 일화도 있다.

한번은 그가 변호사들과 같이 마차를 타고 산길을 가다가 비적단에 걸려들었는데 그들은 막무가내로 독립군자금을 내라고 강박하였다. 그때 허헌은 있는 돈을 다 털어주고 명함장을 보여주었는데 그처럼 횡포하던 비적들이 대뜸 머리를 수그리며 애국지사를 몰라보았다고 하면서 자진하여 길안내까지 해주었다는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르죠아민족주의가 더는 독립운동의 기치로 될수 없다는것을 실감한 선각자들속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운동에 눈길을 돌리였다. 허헌은 앞선 시대사조를 신봉하며 반일독립투쟁의 길에 뛰여든 그들을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공산주의리념을 리해하고 그에 공감하여서가 아니였다.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있다면 그 어떤 주의든 환영한다는 립장에서였다.

곤경에 처했을 때 비로소 진실한 벗을 안다고 허헌은 김책이 공산주의운동관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을 때 자진하여 변호를 맡아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책과 허헌의 연고관계에 대하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렇게 서술하시였다.

《허헌선생이 김책의 변호를 서준것은 순수한 애국심의 표현이였습니다. 조선의 애국자들이 조선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도 벌을 받는것이 가슴아프고 억울해서 무료변호를 서준것입니다. 동정심, 련대감, 애국선배로서의 의리… 이런것들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러고보면 허헌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원래 김책은 변호사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변호사를 붙일만 한 돈도 없었고 또 변호를 받고싶은 생각도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허헌은 자진해서 무료로 그의 변호를 담당하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많은 혁명가들과 독립운동자들의 변호를 맡아가지고 형량을 덜게 하거나 무죄가 되게 하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왜놈검사가 론고할 때 김책이 공산당이니 대일본제국을 전복하려고 했다고 하면서 《치안유지법》에 걸어 중형을 선고하려고 하자 조선사람이 제 나라를 찾겠다고 하는데 공산당이라 해서 무슨 죄가 있겠는가, 량심있는 조선사람은 다 조선이 독립할것을 원한다고 하면서 김책이 하등의 죄가 없다는것을 주장하였다.

한번은 허헌과 왜놈검사사이에 김책의 형량을 놓고 격렬한 론전이 벌어졌는데 그놈은 죠센징인 주제에 법리고 뭐고 따질게 있는가고 하면서 오만하게 지껄여댔다. 격노한 허헌은 조선사람이 다 죽은줄 아느냐고 소리치면서 그놈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고 한다.

그뿐아니라 허헌은 김책이 옥중생활을 할 때 면회올 사람이 하나도 없는 그를 위해 차입도 해주고 감옥에서 나올 때 옷도 해들여보냈다.

그때에는 누구도 혁명가들과 가까이 접촉하기를 두려워하던 때였지만 허헌은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혁명가 김책에게 사심없는 방조를 주었다. 출옥한 후에는 감옥에서 쇠약해진 김책의 몸을 보양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였으며 다시 간도로 떠날 때에는 귀중한 물건을 아낌없이 저당잡혀 마련한 돈을 려비로 보태주었다.

당시 허헌은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때인지라 그의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재에 있던 법전들을 내다팔게 하였다.

딸이 그 귀한 책들을 팔면 어떻게 하는가고 하자 허헌은 이제는 그런 법전이나 붙들고있을 때가 아니니 아까워말고 내다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그가 법리로 일제와 맞서싸우는것으로써는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을 구원할수 없다는것을 확신하던 때였다.

허헌은 변호사로서만이 아니라 나라를 독립할 방도를 찾기 위해 몸부림친 애국지사였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의 령도권쟁탈로 인한 파벌싸움에 환멸을 느낀 허헌은 독립의 방도를 찾으려는 한가닥의 희망을 안고 일본과 미국에도 가서 그 나라의 정계, 법조계, 교육계, 언론계의 중진인사들도 만나보았다.

미국체류시에는 백악관에서 미국대통령을 만나 조선독립운동에 대하여 력설하였으나 랭대를 받았고 미국의 정객들도 만나보았으나 그들중 단 한사람도 조선인민을 지지동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그는 아일랜드, 영국, 네데를란드 등을 돌아보고 벨지끄에서 열리는 국제약소민족대회에도 참가하였다. 기자의 신분으로 회의에 참가했던 그는 여러 나라들에서 온 대표들과 사회정치활동가들을 만나보았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를 국제무대에서 폭로단죄하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을 여러 나라 인사들과 법률가들속에서 여론화시키고 지지와 성원을 모색하려던 그의 노력은 응당한 화답을 받지 못하였다.

이어 대회장에서 만났던 일본공산당 지도자인 가다야마 센의 권유를 받고 모스크바에 간 허헌은 근로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주인이 된 현실을 보고 나라를 찾으려면 진정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손을 잡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였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와의 회견시에 《이미 변호사업을 그만두고 민족적, 사회적인 큰일에 전력하고싶은 생각이 불붙는듯 하다.》고 한것은 그의 이러한 결론의 반증이였다.

허헌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변호사로서 아무리 무고한 사람들을 변호해보았댔자 그것으로는 식민지노예의 처지에 빠진 조선민족을 구원할수 없음을 절감하였으며 변호사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였다.

1920년대 중엽이후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무대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두개의 세력이 존재하고있었다. 민족해방과 민족자주권의 부활에 동일한 리해관계를 가지고있는 두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해온 리상재, 홍명희, 허헌을 비롯한 애국인사들에 의해 1927년 2월에 서울에서 신간회가 창립되였다.

민족을 대표한다고 말할수 있는 량대세력의 공동전선이 실현됨으로써 신간회는 발족한 순간부터 전민족을 대표하는 거족적인 유일조직으로 되였다. 이 단체의 창립취지는 그 발기인들이 《고목신간》이라는 뜻에서 신간회라고 한 명칭자체에 잘 반영되여있다. 《고목신간》이란 오랜 나무에서 새 줄기가 자란다는 뜻이다. 명칭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신간회는 새로운 기초우에서의 민족력량의 총집결을 지향하였다.

신간회운동은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각성을 촉진하고 민족적단결을 공고히 하며 일체 기회주의를 부인한 강령의 내용도 혁신적이였으며 회원들의 구성도 다양하고 광폭적이였다.

초대회장은 청년련합회 회장, 교육협회 회장, 조선일보사 사장 등을 하면서 민족주의운동에 헌신하던 리상재였다. 그는 병으로 창립총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당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등 좌우익정치세력들모두의 인정을 받는 존재였으므로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되였다. 리상재가 병으로 인차 사망한 후 허헌이 신간회 제2대 회장으로 되였다.

수만명의 회원을 통솔하는 신간회의 회장이 된 허헌은 합법적인 수단을 다 동원하여 민족의 리익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민족의 얼을 일깨우기 위해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으며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일제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허헌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을 이룩하고 반일애국력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파괴공작에 의해 신간회는 나온지 4년만에 해체되고말았다.

허헌은 이때 적들의 암해책동과 파괴공작을 물리치고 조직을 능숙하게 이끌어나갈만 한 령도의 중심, 단결의 중심이 없는것을 사무치게 절감했다고 한다.

한편 허헌은 교육계와 언론계에도 관여하여 인민들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자신이 직접 교직에 종사하기도 했으며 학교를 건립하는데 재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했고 《동아일보》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반일애국인사인 그에게는 항상 요시찰인이라는 딱지와 함께 감옥생활이 따라다녔다. 1932년 1월 병든 몸을 끌고 서대문형무소를 나서고보니 가정형편은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정도였다.

그때 그가 저들에게 협력하면 변호사로서의 생활은 물론 병도 치료해주겠다는 왜놈들의 유혹을 받아들였다면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누릴수도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민족적량심을 지닌 허헌은 왜놈들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때 《독립》이니 《투쟁》이니 하며 돌아치던자들이 감옥신세를 한번 지고는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 넘어가 전향서에 지장을 찍을 때 불의에 대한 타협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던 허헌은 왜놈들이 유혹할수록 가슴속에 간직된 반일애국의 뜻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였다.

그는 자기의 딸(허정숙)이 한갖 온실의 꽃처럼 자라는것을 원치 않았고 두 자식까지 있는 그를 반일애국의 길로 흔연히 떠나보냈다.

그는 항일유격대를 찾아갈 결심을 품은 딸이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나기 저어하는것을 보며 어서 마음놓고 떠나거라, 조선의 뜻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찾아가는 길인데 거기에 무슨 주저가 있을수 있겠느냐, 네가 아들이였다면 벌써 오래전에 너를 총을 쥐고 왜놈들과 싸우러 떠나보냈을 내다, 하지만 네가 남자가 아니라 녀자이다보니 이래저래 마음을 써오다가 오늘에야 뒤늦게 결심을 내린것이니 여기 걱정일랑 말고 어서 마음을 굳게 먹고 떠나거라, 조선의 용사들이 항일의 총성을 높이 울릴 때마다 너도 잘 싸우고있겠거니 생각하겠다, 만주바람은 꽃바람이 아니다, 아무쪼록 몸조심해라, 나라가 독립되는 날 우리 서로 떳떳하게 다시 만나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산천초목은 눈서리에 파묻혀서도 봄을 기다린다. 허헌은 딸에게 약속한대로 암흑의 세상에서도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떳떳하게 살았다.

그러던 그에게 1937년 6월의 력사적인 보천보전투는 그야말로 재생의 봄을 알리는 따스한 빛발이였다.

이제는 조선이 해방되게 되였다, 우리 조선에 그처럼 바라던 위인이 오셨다, 왜놈들이 쫓겨갈 날도 멀지 않았다고 온 겨레가 가슴들먹이였다. 총대로 왜놈들을 쳐부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축지법을 쓰시고 신출귀몰하신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삼천리강산에 메아리쳤다.

보천보전투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재생의 은인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뿐이시라는것을 확신한 허헌은 그이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자료들을 수집하여 인민들에게 소개선전하였으며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녀사께서 파견하신 정치공작원과 만난 다음부터는 그와 련계를 맺고 반일투쟁을 하였다.

그는 일제의 패망을 앞둔 시기에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소식을 비롯하여 국내외정세자료들을 단파라지오를 통하여 입수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주는것을 자기의 의무로 간주하였다.

일제는 저들이 벌려놓은 침략전쟁의 형세가 기울어지자 그것을 숨기기 위해 발광하였다. 처음에는 《단파라지오청취금지령》을 내리고 모든 단파수신기의 리용을 중지시키였으며 나중에는 외국인들이 가지고있던 라지오까지 모조리 압수하는 추태를 부리였다.

국내외정세자료와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던 선이 끊어지게 되자 허헌은 서울방송국에 있는 조선인기술자들의 도움으로 해외방송자료들을 입수하군 하였다.

일명 《단파라지오방송사건》으로 하여 그는 일제에게 또다시 체포투옥되였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한번은 조선인형사가 고문하려고 허헌의 팔을 잡았을 때 그는 날쌔게 형사의 아래도리를 꽉 움켜잡고 《이놈, 너도 조선사람이냐?》라고 호통쳤다. 불시에 급소를 제압당한 그자는 《선생님, 다시는 이런짓을 안하겠습니다.》라고 죽는소리를 지르며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그후로는 다시 그놈이 나타나지 못했다.

감옥에 면회를 갔던 그의 안해의 회상에 의하면 허헌은 감옥안에서 야만적인 고문으로 페인이 되였지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 몹시 격분하여 아이들 이름을 절대로 일본식으로 고칠수 없다, 학교를 못 보내더라도 창씨개명을 절대로 못한다고 큰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허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언젠가는 일제로부터 해방되리라는 신념을 잃지 않았기에 백두산을 바라보며 꿋꿋이 지조를 지킬수 있었던것이다.

해방전에 《삼천리》잡지에는 허헌을 소개한 글과 함께 그가 쓴 자필이 실렸다.

《대의는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큰뜻은 명예와 리익에 두지 않는다.》

그는 40여년의 그 암흑의 식민지시기에 자신의 이 신념대로 정의인, 량심인으로서의 지조를 지켜 살았고 해방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통일애국투사로서의 참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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