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손전화홈페지열람기
날자별열람


제10회

려운형편

숭고한 의리속에 영생하는 삶


두 딸을 평양으로 보낸 후 려운형은 위대한 수령님의 건국사상과 민족통일전선로선을 받들고 민주세력의 단합과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더욱 정력적으로 투쟁하였다.

한편 쏘미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로 들어가자 리승만역도는 드디여 《단독정부》수립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내놓았다.

미국과 리승만도당의 민족분렬기도를 파탄시키자면 위대한 수령님의 뜻대로 애국적민주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워야 하며 여기서 급선무는 애국적정당들이 하나로 합당하는것이라고 본 려운형은 남조선공산당, 신민당, 인민당의 합당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그런데 남조선의 공산당안에서는 두 파벌간에 의견상이가 생기고 신민당과 인민당안에서도 반대파가 대립하였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이미 있는 당들마저 깨질 위험이 있었다.

복잡하고 험악한 남조선정세와 관련하여 려운형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려고 그해 9월말 또다시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찾아왔다.

그는 그사이 남조선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상세히 말씀드리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았다.

서울로 돌아간 려운형은 각당 당수들과 만나 3당합당을 하루빨리 실현할 대책을 토론했다. 한편 인민당원들과 신민당원들속에서 합당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근기있게 해설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였다.

마침내 려운형과 허헌을 비롯한 애국인사들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남로당창립대회가 열리였으며 남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이 창립되였다.

하지만 남로당내의 종파분자들의 책동으로 하여 통일적정당으로서의 역할을 거의나 할수 없었다.

그러나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여 외롭지 않았고 자신심과 열의에 충만되여있던 려운형이였기에 그는 남조선의 광범한 중간계층을 튼튼히 묶어세워 그들을 미국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고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로 조직동원하였다.

지칠줄 모르는 정열로 좌절을 모르고 남조선민주세력의 단합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려운형의 활동에 극도의 불안을 느끼게 된 친미반동분자들은 어떻게 하나 그를 암살하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하기에 려운형의 신상에는 항상 테로의 검은 그림자가 비껴있었다.

젊어서 환난을 많이 겪으면 늙어서 풍랑을 겁내지 않는다고 하더니 려운형은 신상의 위험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해방후 2년도 안되여 그는 여러차례의 크고작은 테로를 당했다. 당시 측근들은 테로정보를 접하고 그에게 몸조심할것을 여러차례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측근들의 경고를 매번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47년 7월 19일 반동분자들에 의하여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타리에서 테로를 당하여 희생되였다.

그때 려운형은 최후의 숨을 몰아쉬며 《조선…》이라고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려운형이 눈을 감으면서도 불러보고 그토록 뜨겁게 사랑했던 조선, 그 조선은 바로 민족의 위대한 어버이를 높이 모신 통일된 조국이였다.

려운형의 암살은 남조선에 친미정권을 조작하고 식민지지배정책을 실시하려는 미국과 그와 야합한 친미독재세력의 음모의 산물이였다.

비보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녀사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괴로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려운형선생이 죽다니, 죽어도 조국통일을 보고 죽겠다던 선생이 벌써 가다니. …》 하시며 려운형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시였다.

려운형이 쓰러졌을 때 수십만 남녘인민들이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왜놈도 못했거늘 어찌 선생을 죽였느냐.》, 《선생의 피와 함께 인민은 살아있다.》, 《아! 우리의 지도자 몽양선생, 인민의 벗, 혁명에 흘리신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있나니… 반동의 총탄에 쓰러진 몽양 려운형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 노래! 몽양의 유해를 둘러싸고 젊은 청년들이 흐느껴운다. 고이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쑤 갚으오리다. 몽양선생 추모의 노래는 오고가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장례식은 8월 3일에 서울운동장에서 인민장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였다. 서울시내전체가 애도의 분위기에 잠겼다.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3.1인민봉기를 촉발한 고종의 장례식보다 려운형의 장례식이 더 성대했다고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에서도 대규모의 중앙추모회를 조직해주시였으며 후날 회의석상이나 해외인사들을 만나신 자리에서도 그의 통일애국행적에 대하여 회고하시며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려운형에게 못다 주신 사랑과 은정을 그의 자녀들에게 다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려운형선생은 조국통일위업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고 하시면서 그의 자녀들에게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였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 통일애국의 길에서 빛나게 살도록 이끌어주시였다.

려운형이 희생된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1991년 11월 16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려운형의 자녀들을 친히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갑다고 하시면서 나는 동무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한다고, 동무들도 나를 친아버지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몇달전부터 동무네 4형제를 다시 만나려고 하였으나 시간을 내지 못하였다고, 어제 저녁에 한 일군에게 려연구가 언제 서울로 나가는가고 물어보니 25일경에 나간다고 하기에 오늘 동무들을 오라고 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때 려운형의 딸 려연구는 서울에서 진행되는 《아시아의 평화와 녀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그이께서는 려연구에게 서울에 나가면 아버지묘소에 가보아야 하겠다고, 내가 려운형선생의 묘에 나의 이름으로 화환을 보내려고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때로부터 며칠후인 11월 25일 서울의 수유리 우이동에 있는 려운형의 묘소앞에는 많은 사람들속에 둘러싸인 가운데 한 녀성이 눈물에 젖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운채 머리를 숙이고 서있었다.

그가 바로 40여년만에 아버지의 묘소를 찾은 려운형의 딸 려연구였다.

묘소앞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보내신 화환이 놓여있었다. 화환에 드리운 댕기에는 《고 몽양 려운형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이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숭엄한 감정에 휩싸이게 하였다.

이날 려연구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반동들의 테로에 희생된 후에도 령전에 달려올수 없었던 이 딸이 40여년이 지나서야 이렇게 아버지의 묘소에 섰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참된 뜻이 있어 우리의 김일성장군님과 같으신 절세의 애국자를 민족의 영웅으로, 스승으로 모시였고 그 길에서 신념과 의지를 굽히지 않으셨기에 영생하고계신다는 참으로 감동적인 추모사를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신 화환과 려연구의 말을 통하여 참가자들은 려운형과 그 후대들이 안긴 은혜로운 품에 대하여 가슴뜨겁게 새겨안게 되였다.

하기에 그날 남조선의 려운형추모회 회장은 《묘소에 따님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준비를 하였지만 이렇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직접 보내주신 화환이, 그것도 생화가 와닿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서 어떻게 50년가까이 정사를 보시게 되였는가 하는 의문이 단번에 풀립니다.》라고 감동어린 어조로 말하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인덕은 의리속에 더욱 빛나는 가장 숭고한 인덕이며 그 뜨거운 인간애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이 없는 사랑중의 사랑이다.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기였기에 몽양 려운형은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한 값높은 삶을 살수 있었고 오늘도 온 겨레가 잊지 못하는 통일애국인사로 영생하고있는것이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