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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려운형편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선을 헤치고 추운 겨울에 서울을 떠나 평양에 온 려운형을 뜨겁게 맞아주시였다.

려운형이 그후에도 늘 잊지 못해한 그날은 1946년 2월 11일이였다.

려운형은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영명하신 모습을 우러르며 과거 산에서 일제와 싸우시느라고 수고하셨다고 정중히 인사를 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려운형을 만나고싶으시였다. 백두산에서 항일대전을 벌리실 때에도 그와의 련계를 가지려고 공작원을 파견하신적도 있었으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성사시킬수 없었던것이였다.

그런데 그처럼 만나고싶으셨던 그가 찾아온것이다.

자기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너그러우신 인품에 끌린 려운형은 어려움도 잊고 그간 남조선에서 겪은 고충과 애로를 솔직히 말씀드리면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나서서 자기의 주장을 웨치고있는데 해방된 조선이 나아갈 길을 그이께서 밝혀주실것을 간절히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청을 쾌히 받아들이시여 그가 알고싶어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당시 조선이 나아갈 길을 두고 남조선에서 어떤 사람들은 미국식《민주주의》간판을 들고나오는가 하면 일부 사람들은 당장 사회주의혁명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는것과 관련하여 그 부당성을 명철하게 분석하시고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된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가 나아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식으로 건국사업을 해나가야 합니다. 조선사람에게는 미국옷도 맞지 않고 쏘련옷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맞지도 않는 다른 나라의 옷을 입을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조선식옷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려선생도 알고있는바와 같이 우리 나라는 장기간 일제의 식민지로 있었기때문에 해방이 되였지만 사회의 모든 분야에 악독한 일제잔재와 봉건잔재가 그대로 뿌리깊이 남아있다고, 일제잔재와 봉건잔재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완전독립도, 사회의 민주주의적발전도 이룩할수 없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현 단계에서의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조선혁명의 이러한 성격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조선식민주주의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조선식민주주의는 인민대중이 정권의 주인으로 되게 하고 전체 인민이 누구나 다 동등한 정치적권리를 가지게 하며 인민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이라고, 우리 인민은 오직 이 길을 따라 나아가야만 나라의 완전자주독립과 조국의 무궁한 번영을 이룩할수 있으며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려운형은 《조선식옷》, 《조선식민주주의》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쏘련식이냐 미국식이냐 하던 그때에 단호히 그것을 부정하시고 조선식을 들고나오신 김일성장군님의 사상과 배짱, 담력이 얼마나 위대한가.

려운형은 조선사람은 조선식옷을 입어야 하듯이 조선민족이 나아갈 길도 조선식의 진로가 되여야 한다는 주체리념을 모르고 살아왔다.

어둠속을 헤매인 사람일수록 해빛의 귀중함을 더 잘 느낀다고 하였듯이 해방정국의 혼탁된 정세속에서 방황하던 려운형은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서 세계를 풍미하던 기성의 사상과 리념에 종말을 알리는 민족자주사상의 힘찬 맥박을 느끼였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이젠 점심식사하러 가자고 하시였다.

려운형은 따라일어서며 어데로 가시려는가고 물었다.

그이께서는 웃으시며 가기는 어델 가겠는가, 기별도 없이 왔으니 집에 가서 조밥이나 같이 들자고 하시였다.

초면인 자기를 이토록 허물없이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너그러우신 풍모에 가슴뜨거움을 금치 못하며 려운형은 혹시 국수집에라도 보내면 어찌나 했노라고 스스럼없이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근하신 어조로 국수집에는 왜 가겠는가고, 국수집에 가면 더 맛있는것이 있겠지만 우리 집에 가서 된장국이라도 같이 들자고 하시였다.

허물없는 사이에만 이루어질수 있는 일화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온 한 애국자에게 뜨거운 정을 주시였는데 그것은 그대로 허식과 가식을 모르는 믿음이고 사랑이였다.

려운형은 기쁨을 금치 못하며 자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저택에 가자 항일의 녀장군으로 명망높으신 김정숙녀사의 소탈하신 성품과 화기에 넘친 가정적분위기에 휩싸여 마치 자기 집에 온것처럼 저고리를 활활 벗어놓고 마시지 않던 술도 들면서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 끊었던 술을 40년만에 처음으로 마셨다고 하면서 꿈속에서만 그리던 장군님을 만나뵈온 오늘은 자기가 세상에 다시 태여난 날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에 기대를 걸고 독립청원서를 써서 빠리강화회의에 보낸 일도, 길 잃고 헤매는 고아마냥 독립의 푸른 꿈을 안고 동서방의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뛰여다닌 일도 스스럼없이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물도 많고 과실도 많은 그의 과거를 탓할 대신 모진 괴로움과 역경속에서도 끝까지 민족적지조를 지켰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으며 그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 여생을 값있게 바칠수 있도록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려운형이 겪고있는 여러가지 고충을 리해해주시고나서 조선혁명의 전반적리익의 견지에서 큰 도량을 가지고 분렬이 아니라 단결을 위해 적극 힘써야 한다고 그를 고무해주시였으며 민주주의적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서 나서는 방향과 방도들을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에 우리 민족이 나아갈 진정한 길이 있고 민족통일과 번영의 지름길이 있음을 몽양 려운형은 그이를 처음으로 만나뵈온 그날에 벌써 페부로 절감했다.

가슴속에 고패치는 매혹과 흠모의 정을 금치 못하며 려운형은 청춘을 다시 찾은 기분이라고, 오늘부터 독립운동을 새로 시작하겠노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장군님말씀을 들으니 답답하던 가슴이 후련해지고 우리 조선이 나아갈 길이 환하게 내다보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남조선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의 이름있는 정치가들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만 장군님 같으신분을 만나뵙기는 처음입니다.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만 장군님께서 계심으로 하여 우리 조선에 대통운이 텄습니다.》

망국민의 설음을 안고 꿈에도 해가 그리워 자기의 호를 몽양이라고 했던 려운형, 일제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찾아주신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겨 평생소원을 이루었던 그날에는 아마도 꿈에도 잊을수 없는 민족의 태양만을 따르는 전사로 변함없이 살 맹세를 담아 자기의 호를 다시 지을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 돌아간 려운형은 로당익장의 정열로 위대한 수령님의 통일전선로선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서울 그리스도교회관에서 있은 시국강연회에서 한 《청년들이 나아갈 길》이라는 연설에서 수령님의 주체적인 건국로선을 해설하였다. 또한 자기 집에 찾아온 많은 청년들과 인사들에게 그이의 위대함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뛰여난 인품에 대해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언제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려운형선생이 나를 만나고 서울에 나가 서울대학교 학생들앞에서 내가 평양에 가서 만나본 김일성장군은 당년 34살의 청년장군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너무 좋아 만세를 부르고 모자를 벗어 올려던지면서 굉장히 환호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왜 김일성장군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아끼고 따르는가, 그것은 김일성장군이 백두산이 낳은 조선의 명장이시고 일제놈들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투쟁을 벌려 조국을 광복한 민족의 영웅이시기때문이다, 지난날 우리 나라에 의병이나 독립군이 있었지만 김일성장군이 거느린 군대처럼 무장투쟁으로 왜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해방한 그런 군대가 어디 있었는가, 진수성찬을 차려 장군님께 대접하고 그분을 높이 받들어모셔야 하겠는데 우리 3천만 백성들이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있는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기성세대가 못다한 일을 당신들, 청년들이 맡아 해달라고 하면서 김일성장군이 내놓으신 건국로선이야말로 자기의 신념이며 오직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고 조국이 나아갈 진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해방전부터 민족의 령도자로 끝없이 흠모하고 숭배하던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민족이 나아갈 진로를 받아안은 려운형은 남조선정계에서 무시할수 없는 발언권을 가지게 되였고 그의 정치적영향력은 날로 높아갔다.

민중들속에서 날로 높아가는 려운형의 인기에 놀란 미군정과 친미매국노들은 려운형이 평양에 다녀왔다고 비난하면서 압력을 가했다.

《내 집에 내 마음대로 다니는데 내가 웃방으로 가건 아래방으로 가건 왜 간섭이요. 나는 내 집안일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고 왔소.》

이것은 평양에 갔다온 일을 두고 간섭해나서는자들에게 려운형이 배심당당하게 한 말이다.

《내 집안일》,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그이의 확고한 민족자주의 리념에 매혹된 려운형이 그 심원한 뜻을 자기의 신념으로 간직했다는것을 말해주었다.

하기에 어느날 려운형을 찾은 하지가 미국과 손잡고 일하자며 회유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 조선사람은 조선옷을 입어야지 미국옷을 입어도 안 맞고 쏘련옷을 입어도 안 맞는다고, 우리 나라에서 우리가 우리 정신을 가지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하지의 회유를 뿌리쳤다.

미군정당국이 두 딸을 미국에 류학보내라고 회유했으나 려운형은 두 딸을 평양으로 떠나보냈다.

이것은 60평생 우여곡절속에서 그렇게도 그리웠던 태양의 빛을 찾은 려운형이 자신뿐아니라 자식들의 운명을 수령님께 맡기고 그이의 전사로 살려는 투철한 신념의 재확인이였다.

려운형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 만나뵙던 자리에서 자기에게 두 딸이 있는데 그들을 북에 보내여 키웠으면 하는 의향을 표시하였었다.

그의 소청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런것을 왜 벌써 이야기하지 않았는가고 하시면서 그애들을 평양으로, 우리 집으로 보내라고, 내가 우리 집에 함께 데리고있으면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그가 보낸 두 딸을 직접 댁에 두고 공부시키시였으며 외국류학도 보내주시고 중요한 초소들에 세워주시였다.

려운형은 생애에 5남4녀의 자식을 두었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던 그 시절에, 더구나 선의보다는 악의가 뒤따르던 독립운동자의 신분으로서는 너무도 많은 자식이 아닐수 없다. 그리하여 그의 가정은 자식을 보는 기쁨보다 몇갑절이나 더 큰 상실의 아픔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자식들중에 연구와 원구를 비롯하여 공화국의 품에 안긴 형제들은 행복한 삶을 누리였지만 다른 형제들은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하기에 언제인가 수령님을 만나뵈웠을 때 려연구는 《우리 형제 아홉남매중에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형제들만 살아있습니다. 나머지 형제들은 다 제명을 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씀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의 진정어린 이 말에 곡절많은 길을 걸어온 려씨가문을 따뜻이 안아 보살펴주신 위대한 생의 은인에 대한 고마움이 짙게 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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