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려운형편
해방정국의 와중에서
망국 40여년의 긴긴밤이 지새고 해방의 새 아침이 밝아왔다.
하나의 민족이 사는, 하나의 지맥으로 이어진 삼천리강토는 해방만세의 환호성으로 진감했다. 눈물은 슬픔의 말없는 말이라고 했지만 이때 우리 민족은 눈물은 기쁨의 말없는 말임을 새롭게 절감했다. 조선사람 누구나의 가슴에서나 기쁨의 샘줄기가 터져올라 두볼을 적시였다.
해방을 맞으며 《매일신보》 지면에는 《오! 고난의 밤은 가고 엄숙한 민족의 아침은 밝았다. 우리들의 하늘, 우리들의 바람, 우리들의 신성한 국토‐오! 우리 사랑하는 3천만 형제자매들아!》라는 글이 실리여 노예의 사슬을 벗어던진 민족의 환희를 더욱 북돋아주었다.
당시 《매일신보》는 려운형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는데 그가 호외특보(조선독립을 선포하는 내용을 담은것) 몇만부를 인쇄하여 뿌릴것을 지시하여 8월 15일에 서울바닥을 덮었던것이다.
하지만 해방의 환희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외세에 의해 두 부분으로 갈라진 우리 조국의 남쪽땅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대신 미군정통치라는 간판바꿈으로 새로운 외세의 지배를 받는 비극적사태에 놓이게 되였다.
남조선에서는 혼란된 정국과 사회적무질서속에서 매일같이 새 정당, 새 단체가 속출되고 입개나 놀리는 사람은 저마다 애국자로, 정치가로 자처하면서 좌파, 우파, 중도파요 하는 무정부주의적인 파벌세상으로 화했다.
해방천지를 만난 민심은
이런 가운데 려운형은 서울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하고 남조선정계에 등장했다.
건준결성의 목적은 치안을 유지하고 건국에 필요한 힘과 기구 등을 잘 보존하고 육성하여 새로 탄생되는 국가를 되도록 건전하게 건설하자는것이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직후의 공백기에 남조선에서 준정권적기관으로서의 자치능력을 발휘하였다.
초기의 건준은 좌우익인사를 고루 포섭해 좌우합작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했다. 려운형이 좌우합작에 집념했던것은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의 영향을 받았기때문이였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도 중국에서처럼 좌우합작이 성사될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던것이다.
그러나 건준의 기구와 영향력이 커감에 따라 계파간 리해관계가 드러나면서 주도권을 둘러싼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분으로 려운형이 의도한 좌우합작의 의미는 빛을 잃게 되였으며 건준은 발족한지 얼마 안되여 해체되였다.
려운형은 그해 10월 조선인민당을 조직하고 당수로 되였다.
한편 미국은 인민들속에서 신망이 높은 려운형을 저들에게 끌어당기기 위해 그를 회유하려고 애썼다.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하지는 소위 《국가고문위원회》라는것을 설립하면서 려운형을 고문으로 내정하려고 하였다. 고문으로 임명된자들중 대다수가 악명높은 친일파들이였다. 그는 고문직을 즉석에서 거절하였다.
이번에는 미군정장관 아놀드가 려운형에게 미군정청의 고문이 되여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려운형은 《그대가 나의 고문이 되여야 옳은 일이다. 내가 그대의 고문이 되는것은 주객이 뒤집힌 일이다.》라고 하며 고문의 취임을 거절하였으며 친일파들을 고문으로 임명한것은 조선인민에 대한 극심한 우롱이며 모독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매국배족적인 죄행을 폭로하는 《배신자와 애국자》라는 소책자를 써냈다.
한편 일제의 패망과 함께 목을 움츠리고있던 친일파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머리를 쳐들고있었고 부르죠아민주주의길로 가야 한다느니, 당장 사회주의혁명을 해야 한다느니, 구황실을 복귀시켜야 한다느니 하는 이른바 《정객》들의 목소리가 남조선인민들의 의식을 흐리게 하고있었다.
여기에 남조선의 민주세력의 단합을 방해하고 북으로 향하는 민심을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책동도 더욱 우심해졌다.
이런 혼탁되고 엄혹한 정세속에서도 려운형이 흔들리지 않고 진행한 사업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국해방의 위업이 성취되자 북조선의 인민들은
남조선에서도 광범한 사회계와 인민들의 관심속에 려운형, 홍명희, 허헌, 최원택, 백남운, 최일천 등 명망있는 인사들이
당시 서울에서는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전국농민조합총련맹결성대회가 진행되였는데 전농의 선전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긴급동의로 민족의
그의 제의는 열광속에 만장일치로 가결되였다.
이 대회에 참가하여 축사를 한 려운형을 비롯한 명망있는 인사들은 민족의
사실 김구를 위시로 하는 림정계요인들이
그래서 그들은 경교장을 찾아가 김구를 비롯한 림정계인사들을 만났다.
김구를 비롯한 림정계인사들은
이미 해방전부터 조선군대를 무어
당황망조해난것은 남조선주둔 미군사령관 하지였다. 이자는 려운형을 불러 리승만과 손잡고 미국을 도와달라,
그러나 려운형에게는 그런 협박과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드디여 1945년 12월 15일 서울에서는 23개 정당, 단체 대표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방직후 복잡하고 어려운 정국이 조성되던 남조선에서 이렇듯
이들의 한결같은 념원을 담아 려운형은 민족의
그는 편지에서 미군정의 실시로 어지러워진 남조선정세를 개탄하면서 이것을 수습하실분은 오직
사실 려운형은 해방후 애국의 일념을 안고 건국준비위원회도 내오고 인민당도 창당하였지만 소경 집짓는 격이였다. 그때 남조선에 진보적정당, 단체들이 많이 나왔는데 미국의 민족리간책동과 종파분자들의 파쟁바람에 향방없이 저마끔 제나름이였다.
려운형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미국의 식민지정책과 민주력량이 사분오렬되는 복잡한 정세의 소용돌이속에서 민족대단합의 길을 찾기 위해
1946년초 려운형은 날개가 돋친듯 가벼운 마음으로 북행길에 나섰다.
려운형이 평양에 찾아간다는것은 미군정과 리승만역도를 비롯한 반통일세력들이 그의 일거일동에 눈초리를 돌리고있는 당시의 정황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더우기 38°선에 대한 경계가 심해져 그것을 넘어선다는것은 생명의 위험도 무릅써야 하는것이였다.
그렇지만 해방전부터 민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