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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회


려운형편


백두산을 우러르며


려운형의 반일투쟁과정에는 우리 겨레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일화들이 적지 않다. 그중의 대표적인것이 려운형의 일본방문일화들이다.

거족적인 3.1인민봉기를 계기로 조선민족의 견결한 독립의지에 질겁하여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꾼 일제는 《문화통치》의 생색을 내기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서 1919년 8월경에 려운형을 도꾜에 초청하는 놀음을 벌려놓았다.

일본당국은 상해림시정부의 외무차장직에 있으면서 상해조선인거류민단 단장으로 활동하는 려운형이 비교적 중간파적인물로서 조선의 민족주의자들과 청년학생들속에서 일정하게 인기가 있다고 보았다. 대조선정책작성에 필요한 의견을 듣는다는 명분으로 그를 일본에 불러다 《한일합병》의 정당성을 납득시켜 널리 여론화하면 효과가 클것으로 타산하였던것이다.

한편 이 기회를 리용하여 3.1인민봉기에 떨쳐나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할 생각을 품은 려운형은 효자가 남의 눈치를 보면서 부모를 섬기지 않듯이 자기의 결심에 대한 확신을 안고 주위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당국의 초청에 응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상해독립운동가들은 찬반론으로 분분했다고 한다.

려운형은 일본당국의 《안전한 신변보증》담보를 받고 3주간 도꾜에 머무르면서 일본 륙군상, 내각상, 체신상 등을 만났다. 일제의 고위관리들은 려운형을 회유도 하고 한편으로는 협박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는 즉각적인 독립외에는 자치고 무엇이고 용납할수 없다.》고 시종일관 주장했다.

그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라는자가 도꾜에 와있었는데 그를 만난 려운형은 악수를 하면서 《서울역에서 강우규의사 폭탄에 얼마나 무서웠는가?》고 야유했다.

그의 이 말은 서울역에서 조선총독 사이또를 처단할 목적으로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렬사의 의거를 념두에 둔것이였다. 그러나 강우규렬사의 폭탄은 명중하지 못하여 옆에 있던 수원 몇명만 부상시켰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이자는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던것이다.

단도직입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려운형의 기습에 당황한 그자는 얼굴이 시뻘개졌다고 한다.

약이 오른 그자가 얼마후에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는가?》라고 묻자 려운형은 즉시 《그대는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그의 뛰여난 순발력과 기지, 담찬 배짱을 보여주는 순간이였다.

려운형과 동행했던 한사람은 당시를 회고하며 몽양 혼자 일본의 실권자들과 정의로 맞서싸우는데 나는 처음 정의가 무섭다는것을 깨달았다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꼴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고 통쾌하다고, 그때 그자의 거동은 몽양앞에 선 어린애 같았다고 했다.

어느날 려운형은 일본의 한 각료와 마주한 자리에서 《조선의 만세운동은 개 한마리가 짖으니 모두 따라짖는 격》이라는 야비한 말을 듣게 되였다.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3.1인민봉기를 모독하는 이 말에 려운형은 즉시 《새벽이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닭은 일제히 울기마련이다.》라고 응수하여 상대방을 압도해버렸다.

그리고는 일본의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계 각국의 특파기자,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등 500여명앞에서 《어느 집에서 새벽에 닭이 울면 이웃집 닭도 따라울기마련이다. 그러나 그 닭은 다른 닭이 운다고 우는것이 아니고 때가 와서 우는것이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량심적으로 발작된것이 조선의 독립운동이요,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것이 아니다.》라고 언명했다.

이 말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여있었다. 당시 일본놈들이 조선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론거는 《조선인들은 독립이나 근대화를 리해 못하는 몽매상태에 있다.》는것이였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민족자결주의》의 의미도 리해하지 못한채 주견이 없이 남의 주장을 덮어놓고 따른것이 바로 3.1인민봉기라고 빈정거린것이다.

이에 대해 려운형은 3.1인민봉기가 민족적자주권과 독립을 절절히 바라는 우리 민족의 시대정신에 대한 자각에 그 근원이 있다는것을 밝혔던것이다.

이날 려운형은 무려 1시간 20분에 걸치는 독립웅변을 토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것은 우리의 자의가 아니고 일본의 강박에 의한 절대부당한 일이다.

조선독립은 조선국민을 위해서뿐아니라 일본의 평화를 위해서도 필요한것으로서 나는 조선의 독립을 엄숙히 선언하는바이다.》

《조선이 자주독립하는 길은 우주, 자연의 법칙이며 신이 명하는 민족의 권리이다.》

이날의 려운형의 발언은 《조선의 청년지사 독립을 주장하는 기자회견》, 《제국수도 한편에서 불온언사 란무》라는 제목으로 각 신문들에서 크게 보도했다. 이 독립웅변으로 하여 일본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려운형을 구슬려 독립의지를 꺾으려던 일제는 약속하였던 총리대신과 왜왕면담을 취소하였고 쓴입을 다시며 하는수없이 그를 상해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다음해초에 열린 일본의회는 《려운형 독립연설 규탄의회》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론쟁을 벌렸고 려운형을 중죄인으로 체포하지 않은 내각은 궁지에 몰리게 되였다.

일본 도꾜에서의 열렬한 독립웅변으로 하여 려운형은 일약 유명한 반일독립투사로 공인되였다. 려운형이 상해로 돌아오자 림정기관지 《독립신문》 등은 일본에서의 그의 활약상을 대서특필했다.

그때로부터 스무해가 지난 다음의 일이지만 1940년대초 려운형은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주선으로 또다시 일본에 갔다.

민족적자존심이 강한 그는 일본말에 능했지만 조카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다.

일본 총리대신을 만났을 때였다. 그는 려운형앞에서 남작의 칭호를 봉하며 대만총독으로 임명한다는 왜왕의 칙령을 내리읽고 그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려운형은 남작, 총독보다 더 높은 벼슬을 준다 해도 독립된 조선에서 머슴군으로 사는것보다 못하다고 단마디로 잘라말했다고 한다.

그때 려운형이 도꾜에서 왜왕과도 당당하게 면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조카의 표현에 의하면 려운형은 놈들의 심정을 살펴가며 어떤 때는 호령하고 어떤 때는 어루만지기도 했다는것,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는것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뜻과 대중적신망으로 하여 려운형은 일제당국이 볼 때는 《먹기도 뱉기도 어려운》 존재였다.

상해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조선으로 압송된 후 대전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그 이듬해 봄부터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다음해에 조선체육회를 뭇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조선말 3대신문으로 불리우던 《조선중앙일보》는 렬세상태에 있었는데 웅변가이고 이름있는 정치가인 그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일약 인기신문으로 되였다고 한다.

그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에 국내를 들었다놓은 일장기말소사건이 일어났다.

어느날 베를린올림픽경기대회에 참가하게 된 손기정이 려운형을 찾아왔다.

《선생님, 일장기를 달고라도 과연 올림픽에 나가야 합니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때 려운형이 한 대답은 얼마후에 열렸던 선수단환송식에서 한 그의 말이 대신해주고있다.

그리스도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선수단환송식에서는 려운형에 앞서 친일파의 거두인 윤치호라는자가 환송사를 했다. 그것을 쥐여짜면 《일본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라는것이였다.

이때 려운형은 마이크를 나꿔채며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덜미에는 조선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리준, 안중근의 후손답게 반드시 이겨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보여주라.》

1936년 8월 베를린에서 진행된 제11차 국제올림픽경기대회에서 손기정선수가 마라손경기에서 1등을 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리 나라의 남승룡선수는 3등을 하고 동메달을 쟁취했다.

그러나 베를린의 하늘가에 휘날린것은 저주로운 일장기였다. 손기정선수의 가슴에도 일장기가 걸려있었다.

그때 《동아일보》에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발간했는데 이 사진이 나가자 온 민족이 통쾌감으로 법석 끓었다.

이 일로 하여 일제는 《동아일보》에 무기정간처분을 내리고 사장이하 편집지도일군 11명을 검거하였다.

일본당국자들이 국제마라손경기에서 우승한 조선사람 손기정을 얼마나 일본사람으로 인정하고싶어했는가 하는것은 그때로부터 80여년이 지난 2020년 3월 도꾜에 세운 올림픽박물관에 손기정을 일본사람인듯이 소개한것만 보아도 그 집요성과 끈질긴 야욕을 잘 알수 있다.

려운형은 매일 축구선수복차림으로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나와 서울시내 청년학생들과 휩쓸리며 친숙하게 지냈다.

이 과정에 그는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속에서 인기있는 체육애호가로, 정치가로, 반일애국지사로 떠받들리웠다.

이미전부터 백두산에서 조선군대를 무어 항일무장투쟁을 벌리고계시는 김일성장군님을 마음속으로부터 무한히 경모해오던 려운형은 1937년 6월초 보천보전투승리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인솔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부대가 일제의 견고한 국경방어진을 뚫고 국내에 진출하여 대승리를 거둔 소식에 접한 려운형은 너무도 감격하여 그날 저녁 친지들과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승을 축하했고 《조선중앙일보》에 특별보도로 이를 게재하게 하였다.

이튿날에는 택시를 세내여 보천보에 가서 불타버린 일제의 기관들을 보며 기쁨을 금치 못하였으며 백두산에까지 올라가 김일성장군님을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려운형에 대한 일제의 전향작전은 더욱 심해져 어느때에는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추천하겠다고 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으며 총독 미나미가 직접 자기의 비서를 보내여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부하였다.

1942년 4월 일제는 시국문제를 협의한다는 구실로 려운형을 불러 협력을 강요해나섰다. 이 일은 관록있고 조선인민들속에서 신망이 높은 려운형을 어떻게 하나 돌려세워 저들의 식민지정책실행에 써먹으려는 왜놈들의 책략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잘 보여주었다.

이에 대처하여 려운형은 경기도 양주군 산골인 봉안리와 고향 양평군 룡문산의 인적드문 곳으로 피난해있기도 했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 비밀리에 반일동지들을 규합했고 1944년에는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였으며 고향인 경기도 양평일대의 농민들을 기본으로 하여 농민동맹도 조직하였다.

언제나 백두산을 우러르며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련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던 려운형은 이 시기에 백두산으로 련락원도 파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려운형의 반일활동을 오래전부터 알고계시였으며 일제의 박해속에서도 민족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그를 언제나 잊지 않고계시였다. 그래서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실 때에는 그를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내세우기도 하시였고 그가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반일단체를 내온것에 대하여 과시 려운형다운 배짱이라고 평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려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을 내온 다음 인차 나에게도 사람을 보내고 조선독립동맹에도 련락원을 파견하였다고, 아쉽게도 그가 보낸 련락원은 우리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려운형의 련락원이 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것은 우리가 그 당시 쏘련의 훈련기지에서 활동하였기때문이였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려운형이 보천보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우리를 만나려고 각방으로 애를 쓴것처럼 우리도 려운형과의 합작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려운형은 건국동맹안에 군사위원회를 내오고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배후를 교란시키기 위한 계획까지 세웠다고, 이 계획은 우리가 지향하고있던 전민항쟁로선에도 부합되는것이였다고 하시였다.

이처럼 려운형의 마음속에는 이때 벌써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만이 전조선의 유일한 령수이시라는 확신, 그이의 전사로 살려는 신념이 꽉 차있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민족이 낳은 절세의 위인을 따르는 그의 신념과 깨끗한 량심을 엿볼수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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