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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6 회

제 1 장. 방 황

5


대보름날 탈놀이판이 벌어지게 될 도독부앞 공지는 완산주 각지에서 모여든 군중들로 립추의 여지가 없이 붐비였다.

관가의 삼문앞에는 크고 화려한 차일을 친 좌석이 마련되여있는데 이곳에서는 완산주도독과 조정에서 내려온 고위급대신이 여러 귀족들과 함께 편히 앉아서 구경할수 있도록 되여있었다.

관가의 삼문은 물론 차일주변에도 물샐틈없이 어마어마하게 무장을 갖춘 군사들이 주런이 늘어서서 군중에게 위압감을 주고있다.

그앞에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스무자쯤 되는 자그마한 무대가 설치되여있고 무대 한복판에는 오늘 탈춤의 주인공소년이 황창을 형상한 가면을 쓰고 울긋불긋한 색동옷을 입은채 단정히 앉아있었다.

무대 좌우로는 키를 넘는 북들이 여라문개나 벌려서있었다.

역시 무대가까이로 군중이 함부로 범접할수 없게 수십여명의 군졸들이 날이 시퍼런 창을 들고 빙 둘러서있었다.

무대앞 공지에 삼삼오오 모여서서 대보름달이 뜰 시각을 고대하며 웅성이는 잡다한 군중들사이로 허리에 검을 찬 무사장정들이 패를 지어 천천히 오가고있으나 사람들은 벌써부터 잔뜩 흥이 올라 심상히 여기였다.

드디여 대보름달이 쟁반같이 둥근 자태를 환히 드러내였다.

색동옷을 간편하게 차려입고 머리에 색갈고운 머리쓰개를 쓴 소년들이 무대에 나와서서 자그마한 손북을 가락맞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명절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북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공지의 여기저기에서 작고 크고 둥글고 네모난 가지각색의 등릉이 앞을 다투어 불을 달았다.

삽시에 주위는 마치 대낮처럼 밝아졌다.

소년들이 가락맞게 두들기던 손북들이 걷히여나가고 이번에는 등거리만 걸치고 머리에 띠를 질끈 동인 우람한 장정들이 무대 량옆으로 뛰여나가 큰 북채를 잡고 키를 넘는 북앞에 섰다.

힘살이 울끈불끈한 맨팔로 쾅! 쾅! 북을 힘차게 두들겼다.

도독부의 삼문이 찌꾸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으리으리한 관복을 떨쳐입은 귀족들이 거드름스러운 자세로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완산주도독의 안내를 받으며 차일을 친 관람석 한가운데 앉은 조정에서 내려온 대아찬 김술이 이젠 시작해도 좋다는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북채를 잡은 장정들은 승벽이 나서 큰 북을 두드렸다.

겅중겅중 뛰기도 하면서 팔을 휘두를 때마다 둔중한 북소리는 군중의 머리우를 휩쓸고 멀리에까지 메아리쳤다.

드디여 무대 한가운데 앉아있던 능환이 황창의 탈을 쓴채로 일어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춤가락을 펼쳐보이다가 북소리가 자지러지는것과 함께 점차 춤동작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능환의 손에는 날이 시퍼런 쌍검이 쥐여졌다.

쟁강쟁강 검을 부딪치며 무대우를 빙빙 돌다가 번뜩 몸을 뒤집어 검에 의지한채 거꾸로 서서 걷다가 바로서기도 하면서 볼만 한 춤가락들을 펼쳐나갔다. 춤을 추면서도 능환의 시선은 줄곧 완산주도독과 조정에서 내려온 대신의 몸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순간 능환은 주위의 공기가 이상하다는데 주의가 미쳤다.

선뜩한 불안감이 가슴을 쿡 찔러 손발이 굳어지게 하는것이였다.

좌우를 황급히 둘러본 능환은 자신의 불안이 어디서 오는가를 깨달을수 있었다.

그것은 완산주도독과 귀족들이 앉아있는 차일쪽은 몰론이요 무대를 둘러싼 곳곳에서 살기가 뻗치고있음을 느낀 그 순간부터였다.

그제서야 능환은 차일주변에 배치된 병력의 수가 여느때없이 어마어마하다는것과 무대를 둘러싸고있는 군중의 대다수가 검을 찬 무사들임을 알아보았다.

춤이 끝나면 황창의 탈을 쓴 능환이 완산주도독과 대아찬이 앉아있는 당상에 오르게 되여있었다.

원래대로이면 그 시각을 노려 능환이 품에 넣고있는 단검으로 완산주도독과 대아찬의 목을 베는것으로 거사의 시작을 떼여야겠으나 지금 같아서는 손쓰기도 전에 붙잡힐것은 자명한 리치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수 없음을 잘 알고있는 능환은 계획을 바꾸리라 결심했다.

이제 춤가락이 고조되여 절정에 이르면 황창이 획 몸을 번득 뒤집으며 하늘로 솟구쳐오르는데 이때 공중으로 휘뿌려진 검이 떨어지다 검집으로 들어가 꽂히는것으로 춤이 끝난다.

능환은 바로 이 시각을 노리기로 하였다. 춤가락은 차츰 고조되고있었다.…

영창은 공지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언덕우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북소리가 멎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불안과 초조감으로 가슴을 조이고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는 지금 자기자신은 물론 온 가족의 운명을 걸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도박판에 뛰여든 심정이였다.

이 거사는 수년간이나 심신의 넋을 바쳐 준비한 거사였다. 아니, 백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로 영창이 평생을 건 싸움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최후의 싸움을 앞두고 이렇듯 불안과 초조감이 온몸을 속박하는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지금까지는 계획된 모든 일들이 거짓말처럼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그런데 마지막최후의 시각이 다가올수록 순조롭게 풀려나갔던 그 모든 거사계획들이 조목조목 가슴속 한귀퉁이에 꼭 달라붙어 불안감을 주는것이 아닌가. 그는 다시한번 미진된 일이 없는가를 곰곰히 따져보았다.

이제 마지막북소리가 멎고 당상에 오른 능환이 완산주도독과 조정에서 내려온 대아찬을 베여 거사의 시작을 떼면 자신은 거사를 위해 키워온 백여명의 식객무사들을 거느리고 연회장으로 진입하여 곧장 완산도독부를 공격할것이다.

때를 맞추어 오랜지기인 서발이 상단소속 호위무사들과 함께 완산성의 성문들을 장악하기로 되여있으니 완산을 통채로 장악하는데 필요한 요소를 다 갖춘셈이였다.

완산주만 장악하면 조정에서 토포군이 내려오기 전에 옛 백제유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불러일으켜 백제국을 재건할수 있으리라.

그가 이런 생각을 더듬고있는데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한명의 기마수가 곧바로 그에게 달려왔다.

말에서 뛰여내려 달려오는 기마수를 눈여겨보니 서발에게 파하였던 금달이라는 심복이였다.

《웬일이냐?》

영창은 까닭모를 불안에 가슴을 조이며 헐레벌떡 달려온 심복에게 소리쳤다.

《서…서발행수가 갑자기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소이다.》

심복의 말을 들은 영창은 아연하여 한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린 영창은 심복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쥐였다.

《뭐야?!… 그럼 연회장으로 들어가게 된 무사들은 어찌 되였느냐?》

《서발행수가 어찌했는지 무사들은 모두 헤쳐져버리고 남은 사람이 몇 안되오이다.》

순간 영창은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예감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그토록 괴롭혀온 그 모든 불안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공허감만 가슴에 가득 들어차는것이였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죽음의 고비고비를 넘어온 영창이지만 이 순간처럼 자기자신이라는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져본적이 없었다.

형제처럼 믿고있던 서발이 이렇듯 배신할줄은 꿈에도 생각이나 해보았으랴.

쿵- 또다시 울리는 북소리가 그를 절망에서부터 모진 현실세계에로 끌어내왔다.

영창은 이를 사려물었다. 이렇게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을것이다.

설사 모든 일이 다 굴러져버렸다고 해도 맥을 놓고 순순히 오라를 지지 않을것이다.

이제 그가 할수 있는 일이란 자기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외아들 능환이를 구원하는것뿐이였다.

그는 죽는게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죽기전에 한가지, 아들 능환이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거사의 명분을 가슴에 새겨주고 자신의 꿈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오직 한생각이였다. 권력과 부귀보다 더 귀한것, 세월의 년륜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넋을 물려주어야 한다.

그는 아들과 헤여지기 전에 그것을 알려주지 못한것이 몹시 후회되였다.

아들이 살아서 마지막까지 꿈을 이룬다면 더이상 여한이 없는 영창이였다.

영창은 평상시의 침착함을 되찾고 심복을 향해 돌아섰다.

《너는 어서 가서 남은 무사들을 규합해가지고 죽기로써 완산성의 동쪽성문을 열어라. 내 생각엔 관군이 앞질러 손을 쓴다고 해도 도성방향인 동쪽성문만은 방심하고있을것이니 우리가 실패하여 빠져나갈 길은 오직 그것뿐이다. 시각이 급하니 빨리 가거라.》

영창은 심복의 등을 떠밀어보내고나서 급히 식객무사들을 불러보았다.

거사준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리에 놀란 무사들이 웅성이며 모여들자 영창은 비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듣거라, 여기 완산성을 타고앉아 백제재건의 기치를 들려던 우리의 꿈이 배신자에 의해 깨여지고말았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물러서지 않으련다.

후세가 기억할수 있도록 싸우다 쓰러지면 쓰러졌지 절대로 의지가 꺾이여 주저앉지 않을것이다. 물러설자는 돌아가도 막지 않을것이다. 허나…》

영창은 자신의 열기를 그대로 넘겨받고 열광으로 눈을 빛내이는 무사들을 둘러보고는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우리의 죽음이 자기 자식들에게 나라잃은 유민의 설음을 가셔주고 백제국의 백성이 되는 날을 앞당겨주는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면 내뒤를 따르라!》

영창의 열변에 감동된 무사들은 일제히 검을 빼여들며 호응하였다.

《행수님을 믿고 끝까지 따르겠으니 우리를 이끌어주사이다!》

영창은 이를 악물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고서 도독부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곧바로 도독부를 칠것이니 죽음을 두려워말고 날 따르라!》

쿵- 마지막북소리가 울렸다.

능환에게 다시없을 기회가 차례졌다.

갑자기 뒤켠에서 무시무시한 함성이 울리고 연회장에 밀집한 군중이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귀전에 들려오는것이였다.

한순간 능환은 본능적으로 폭포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룡마냥 땅을 박차고 뛰여오르는것과 함께 량손에 들고있던 쌍검을 힘껏 휘뿌렸다.

그의 손에서 휘뿌려진 검은 공중으로 오른것이 아니라 곧바로 귀족들이 앉은 차일을 향해 윙-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검은 앗!- 하고 비명을 칠새도 없이 정확하게 날아가 하나는 조정에서 내려온 대아찬 김술의 가슴팍에 그대로 꽂히고 다른 하나는 완산주도독의 관모를 꿰면서 의자등받이에 박혀 후두둑 자루를 떨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날념도 하지 못하고 넋을 잃고말았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붙잡아라!》

칼이 날아올 때 얼결에 몸을 움직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완산주도독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듯 미친놈처럼 소리질렀다.

하지만 무서운 함성이 완산주도독의 비린청을 삼켜버렸다.

영창을 선두로 반란무사들이 연회가 배설된 공지로 뛰여들었던것이다.

삽시에 공지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여버렸다.

영창은 어떻게 하나 아들을 구출하려고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한치한치 전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것은 반란자들이였다.

대아찬 김술의 죽음으로 위축되였던 관군이 차츰 형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완산도독부에서 하얗게 쏟아져나온 관군이 반란자들을 겹겹이 둘러싸고 반격해왔다.

무대에서 뛰여내린 능환은 대아찬 김술을 따라온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힘겨운 싸움을 벌렸다.

어려서 검술을 익힌 능환이지만 직업무사들을 여럿이나 상대하자니 몹시 힘에 부쳤다.

아무리 검술이 뛰여나다고 해도 뼈도 채 굳지 않은 열다섯살의 소년이 어찌 무사들을 쉬이 당해낼수 있으랴.

세명의 무사가 그를 한가운데 몰아넣고 여유작작한 태도로 조여들고있었다. 셋중에 정면으로 마주선자는 키를 넘는 장창으로 배를 꿰려는듯 꼬나들고서 발을 지싯거리면서 다가들고 좌우에 벌려선자들은 검을 머리우에 추켜든 자세로 급습할 기회만을 노리고있었다.

그에 비해 능환은 반팔길이의 단검만 잡은채 두손을 척 떨구고있는 자세였다.

무사들은 능환을 잡겠다고 서뿔리 덤비지 않았다.

맹수사냥을 하듯 능환이가 물러서면 앞으로 조여들고 앞으로 다가들면 뒤로 물러서면서 얼마간의 사이를 만들어 그를 빠질수 없는 구석으로 몰고들어갔다.

계속 이렇게 피동에 몰리우다가는 패하고말것이라는것을 예감한 능환은 먼저 공격을 가하기로 작정했다.

능환은 별안간 한소리 크게 웨치며 발을 성큼 떼면서 장창을 가진자에게로 날아들어갔다.

갑자기 능환이 공격해오는데 당황한 무사는 장창을 정면으로 내대였다.

이것은 능환이가 바라던것이였다. 획- 배를 꿰려고 들어오는 창을 허리를 틀어 가볍게 피하면서 가까와진 상대의 가슴을 향해 단검을 싹 그어내렸다.

가슴팍에 깊은 상처를 입은 무사는 창을 떨구고서 두어걸음 나가다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쓰러져버렸다.

능환의 날랜 동작에 넋을 잃고 잠시 멍청해있던 무사들은 동료무사가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지자 눈에 불을 켜고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능환은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검을 피해 휘청 허리를 숙이면서 뒤로 빠져나갔다.

헛찌르고 비틀거리는 오른쪽무사의 옆구리가 환히 드러난것을 놓치지 않고 획- 칼을 휘두르며 달려지나갔다.

쿵! 하고 바닥에 나가넘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으려는데 휘익 칼날이 곧바로 머리우에 떨어지는것이였다.

본능적으로 칼을 쳐들어 막았으나 공격당한 힘에 못이겨 뒤로 넘어지고말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무사의 필사적인 공격이였다.

재빨리 몸을 굴리여 사이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로련한 상대는 그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누운 자세에서 박살내려는듯 연방 내리찍는다.

더는 빠질수 없는 구석에까지 몰린 능환은 마침내 기력이 모두 진해 두팔을 맥없이 떨구고 헐떡거렸다.

상대는 천천히 장검을 머리우에 쳐들면서 능환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보았다.

상대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오르는것을 보는 순간 능환은 아찔하여 두눈을 감았다.

칼에 찍히여 피를 흘리며 죽어갈 자기자신을 그려보고나서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으윽- 갑자기 터져나오는 비명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심장이 터질듯 방망이질을 하였다.

하지만 한순간이 지나자 그 비명소리가 상대방무사의 입에서 나온것이라는것을 깨닫고 번쩍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자기를 내리찍으려고 검을 추켜들었던 무사가 두눈을 흡뜨고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모양이 시야에 비꼈다.

힘을 가다듬어 일어나보니 아버지가 피묻은 검을 들고 지척거리며 다가서는것이였다.

그제서야 능환은 위급한 순간에 아버지가 달려와 자기를 구원했음을 깨달았다. 반갑게 아버지를 부르며 다가서던 능환이 흠칫 놀라며 한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아버지 영창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기때문이였다.

아들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영창은 웃음을 지어보려고 애를 썼으나 오히려 그러한 모양이 더욱더 무서운 공포를 낳았다.

끝내 영창은 힘이 진한듯 맥없이 쓰러지며 아들의 품에 안겼다.

능환은 아버지의 가슴에서 시꺼먼 피가 콸콸 쏟아지는것을 보고서야 방금 자기를 구원하다가 치명상을 입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아버님, 어서 눈을 뜨시오이다. 어서요!…》

능환이 안타깝게 소리쳐서야 간신히 정신을 돌린 영창은 피묻은 손으로 아들의 가슴앞섶을 힘껏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살아남거라. 반드시 살아서 이 아비의 한을 풀어라. 금달이를 동쪽성문으로 보냈으니 성문이 열려있을게다.…》

영창은 이 말만 가까스로 하고는 고개를 뒤로 떨구고 헐떡거렸다.

그가 딸꾹질을 할 때마다 시꺼먼 피덩이가 울컥울컥 올라왔다.

《아버님!…》

아들의 애타는 부르짖음에 눈을 뜬 영창은 마지막기력을 다해 《능환아, 이 아비가 이번 거사에… 나선것은 권력이나 부귀를 탐내서가 아니라…》 라고 말을 잇다가 그만에야 기력이 모두 진하여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능환은 품에 안았던 아비의 시신을 내려놓고 부쩍 몸을 일으켰다.

충혈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버지의 부하들중 살아남은자는 불과 이십여명…

전후좌우로 도독부에서 하얗게 쏟아져나온 관군이 창검을 갈밭처럼 늘여세우고 차츰 조여드는것이였다.

능환은 장검을 머리우에 비껴들었다.

능환은 온몸에 기합을 넣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앞을 막아서는자들을 사정없이 베고 찌르며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아버지가 림종의 시각에 당부한대로 완산성을 탈출하려는것이였다.

아버지의 부하들도 사방에서 달려와 그가 포위진을 빠져나갈수 있게 죽기내기로 싸웠다.

마침내 능환은 혈전끝에 동쪽의 포위진을 뚫고나올수 있었다.

차츰 그의 눈앞에 동쪽성문이 우렷이 자태를 드러내보였다.

대보름달의 달빛아래 드러난 능환의 얼굴은 피눈물로 범벅이 되여 하얗게 번들거렸다.

《아버님, 소자는 살아남겠소이다. 아버님이 비명에 돌아가신것은 우리에게 힘이 모자랐기때문이오이다. 소자 반드시 이 손에 천하를 움켜쥐고 오늘의 원한을 마음껏 풀겠소이다.》

능환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웨치며 쩍 벌린 맹수의 아가리마냥 스산하게 거밋한 성문으로 주저없이 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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