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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 1 장. 방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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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충청도)지역의 국사봉에서부터 발원하여 옛 백제의 중부지역을 비스듬히 가르며 동남쪽으로 구불구불 뻗어내린 로령산줄기를 따라섰다가 대곡창지대인 호남벌쪽으로 급격히 떨어지면 백제시기 대교역장으로 유명했던 완산성(지금의 전주)과 맞다들게 된다.

로령산줄기의 서쪽기슭에서 광대한 호남벌로 나가는 지대에 우뚝 솟은데다가 사방 길이 뻗어있고 바다가 가까운것으로 하여 완산성은 신라의 서남지역의 상권이 가장 밀집된 지역이기도 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비상벌 또는 비중벌로 불리우다가 757년에 진사군으로 고쳐졌고 그후 인차 다시 완산성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였다.

나라가 멸망한지 이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까지 백제의 유민으로 자처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반신라감정은 보통이 아니였다.

그것은 중원의 당나라군을 끌어들인 신라의 비렬한 배신적인 공격으로 옛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이 무너졌을 때에도 완산성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항전한것을 놓고보아도 잘 알수 있었다.

이러한 리유로 하여 일찌기 라당련합군이 완산성에 입성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을 붙잡아 타고장으로 강제이주시켰으나 이주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대를 물려가며 언제가든 반드시 백제가 다시 일어서리라 갈망해왔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항전군의 중심이 되였던 곳이라 항간에는 변성명하고 신분을 감추고서 시정에 묻혀사는 왕족들과 대귀족출신의 후예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지금 한창 완산의 상업계를 좌우지하는 영창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영창의 조상은 백제를 떠받드는 기둥이라고 불리우던 대귀족가문들인 8대성씨중 가장 유력자인 진씨의 후손이였다.

진씨는 시조왕인 온조왕이후로 수백여년간 백제의 파란많은 력사속에서 언제한번 빛을 잃어본적이 없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대귀족가문이였다.

나라가 멸망할 당시 진씨는 어라하(백제왕)의 외척으로서 그 위세와 세력이 왕권과 견줄만큼 대단했었다.

그러나 백제건국이후로 수백여년간 축적한 그 많은 재부와 광대한 토지도 나라가 멸망하면서부터는 한순간에 하늘로 날아났다.

다른 유력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진씨가문의 많은 귀족들이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갔다.

그중 한명이 호송도중에 당나라군사들을 죽이고 완산으로 도망쳐 변성명하고 살게 된것이 결국 진씨가문의 대를 끊기지 않게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목숨은 비록 건지였으나 막대한 재부와 광대한 전장을 하루아침에 잃은 처지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하긴 그의 처지에서는 남의 나라 땅에 개처럼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이름과 가문의 래력, 출신을 숨기고 살자니 우선 입에 풀칠하는것이 급하여 결국은 시정배로 지체가 굴러떨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반드시 이 원한을 씻고 잃어버린 모든것을 되찾으리라 이를 악물었다.

이전에는 천하게 여겼던 행상에 뛰여들어 온갖 굴욕과 수모를 다 참아가며 장사를 벌렸다.

이렇게 시작된 보잘것없던 행상이 차츰 펴이더니 그 후손인 영창의 대에 와서는 무시할수 없는 재력과 힘을 지니고 종내 일어섰던것이다.

영창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조상을 뛰여넘어 완산주를 한손에 그러쥐였다.

그의 꿈은 백제국의 재건이였다. 그는 오직 백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로 한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가 바라는 때가 바야흐로 다가왔다.

부패한 조정내부에서 때없이 벌어지는 권력싸움으로 인하여 정치가 혼란되고 흉년과 련이어 닥치는 재해로 나라의 경제는 엉망이 되여버렸으며 귀족들의 수탈과 전횡에 격분한 수많은 백성들이 도처에서 폭동에 궐기해나섰다.

완산에 틀고앉아 전국각지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소요와 조정내부에서 일어나는 귀족들의 추악한 권력싸움에 대한 소식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포착하고있은 영창은 지금까지 여러 대를 내려오며 축적한 모든 재산을 내놓아서라도 백제재건의 기치를 들기로 작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지금껏 축적한 거액의 재부로 비밀리에 무기를 사들여 자기가 가지고있는 상단의 일군들과 완산성의 빈민들을 무장시키고 완산을 타고앉을 결심이였다.

그러면 반신라감정이 타고장에 비할바없이 강한 이 지역사람들의 지지와 호응으로 삽시에 여러개의 주, 군, 현을 손쉽게 얻을수 있고 나중에는 백제국의 재건에로 이어질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세는 결코 그가 바라는대로만 흐르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굴러내리는 수레처럼 위태로운듯 하였으나 아직 신라의 힘이 모두 진한것은 아니였다.

영창이 뜻을 같이하기로 한 동료중에는 같은 상인출신으로 서발이라는자가 있었다.

부귀와 영달에만 눈이 어두운 서발은 영창의 뜻을 알게 되자 겉으로는 동조하는척 하면서 이것을 자신이 일어설 좋은 기회로 여겼다.

일찌기 영창이 가지고있는 상권과 재부를 몹시 탐내고있던 서발인지라 그를 제끼고 자기자신이 완산의 세력자가 될 야망에만 미친 나머지 배신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던것이다.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밤이면 옛 백제의 오랜 도시인 완산성에서 큰 탈춤판이 벌어지군 하였다.

조정에서 시찰의 명목으로 내려온 이찬이나 대아찬급의 고위귀족의 참석하에 벌어지는 이 탈춤놀이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의 주인공인 황창을 위로하기 위해 벌리는것이였다.

전설에 의하면 황창이라는 신라사람이 백제의 도성 한복판에서 칼춤을 추었는데 그 솜씨가 황홀하고 춤가락이 절묘하여 구경군들이 많이 모여왔다는것이였다.

어느덧 이 소문은 백제왕의 귀에 전해져 황창은 왕의 부름을 받고 궁성에까지 들어갈수 있었다.

백제왕이 황창에게 대청우로 올라와서 칼춤을 추게 하였더니 황창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을 찔렀다고 한다.

황창은 분노한 백제사람들에게 잡혀죽었고 그 전설의 내용을 가지고 검무를 만든것이 황창무인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바로 이러한 황창무를 완산성사람들앞에서 추게 함으로써 그들이 백제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말살해버리려고 작정하고 해마다 년례행사처럼 성대한 춤판을 벌려놓았다.

처음에는 백제유민들의 격렬한 반항을 낳았지만 차츰 세월이 흐르면서 정월대보름날 밤에 성대한 탈춤을 벌리는것은 어느덧 완산성의 년례행사로 굳어져버렸다.

그래서인지 이날이 되면 계림에서 우정 높은 급의 고위귀족이 완산으로 내려와 큰 연회를 배설하고 황창무를 구경하는것이 년중 관례로 되여버렸다.

정월대보름날 보름달이 뜨면 완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에게 황창을 형상한 탈을 씌워 검무를 추게 하였는데 완산주 각지에서 모여든 구경군들로 사태를 이루군 하였다.

바로 영창은 정월대보름날 밤에 거사를 치르려고 작정한것이였다.

영창에게는 이제 열다섯에 난 능환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검을 다루어 검술에 능할뿐아니라 몸이 날래기가 비호같았다.

영창은 이날 춤판을 주도하는 관리에게 많은 뢰물을 찔러주어 아들 능환을 탈놀이춤판의 주인공이 되게 할 잡도리였다.

능환이 황창의 탈을 쓰고 황창무를 추다가 당상으로 뛰여올라 계림에서 내려온 조정대신과 완산주도독을 찔러죽이면 이것을 바로 거사의 신호로 삼으려는것이였다.

이것은 영창이 오래동안 무르익힌 거사계획으로서 승산이 있는 싸움이였다.

완산성은 신라의 주요곡창지대를 끼고있는 교통의 중심이고 서남해안지대의 군사적요충지이며 완산주의 도독부가 자리잡고있는 곳이라 대보름날 밤에 거사가 단행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할것이였다.

더우기 이날을 위해 영창이 자기의 전 재산을 내여 비밀리에 무예가 뛰여난 많은 무사들을 준비시켰으며 거사당일날에 완산주 각지에서 모여올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호응까지 계산한다면 그것이 문제로도 되지 않는것이였다.

옛 백제의 향토의식이 강한 완산주를 타고앉아 근본으로 삼는다면 백제를 재건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였다.

하지만 영창은 자기자신이 그토록 고대하고 가문이 조상대대로 숙원했던 백제재건의 꿈이 곁에 있는 배신자에 의해 무참히 짓밟힐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영창의 거사계획을 내탐해낸 서발은 곧 심복을 시켜 밤도와 계림으로 달려가 이것을 알려주도록 하였다.

서발의 고변을 받게 된 신라조정은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만약 이 거사가 성공하면 가뜩이나 혼란된 정국에 어떤 충격을 주게 될지 계림의 대귀족들이 모를리 없었던것이다.

곧 임금의 어전에서 중신들의 비밀회합이 열렸고 소란을 떨어 《반적》 들이 사전에 기미를 채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거사당일에 일망타진하리라 락착이 되였다.

오랜 무관출신인 대아찬 김술에게 밀지를 내려 완산으로 파견하여 완산주도독에게 조정의 의도를 알려주어 미리 방비하도록 하다가 예정대로 성대한 탈놀이춤판을 벌리고 《반적》이 모두 모여들었을 때 일망타진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위해 왕궁의 시위부소속의 시위무사들을 상인대렬로 꾸려서 완산으로 내려보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면서 애써 마련하고 키워왔던 그 모든것이 배신자에 의해 무서운 음모의 함정에 빠져들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있은 영창은 예정대로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일을 추진시키고있었다.

드디여 영창이 그토록 고대하던 정월대보름날이 밝아왔다.

거사에서 성공하면 백제재건의 꿈을 이룰수가 있고 실패하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것을 잘 아는 영창은 집을 나서기 전에 비장한 각오로 아들 능환이와 단둘이 사랑방에 마주앉았다.

영창은 열다섯살 어린 나이라 하지만 어디 내놓아도 짝지지 않게 대장부로 자란 아들의 우람한 몸을 대견하게 굽어보며 이런 말을 하였다.

《드디여 때가 왔다. 이 아비가 그토록 로심초사하고 온 가문이 고대하던 시각이 왔구나. 능환아, 너의 그 검에 천하가 바뀔것이니 부디 일을 그르치지 말거라.》

아비의 간절한 당부를 받은 능환은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여 말하였다.

《아버님, 소자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아버님께 한말씀 올리겠나이다.》

《무슨 말이든 다 하거라.》

영창은 수락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능환은 정색한 얼굴로 가깝게 다가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어찌하여 조정에 항거하여 칼을 뽑으려고 하시나이까. 우리가 비록 백제의 유민이였다고는 하나 이미 대세가 바뀐지 오래된 지금에 와서 옛것만을 고집할수가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우리 고조부님들은 일조에 모든것을 잃어버려 옛날을 그리워한것은 당연하지만 아버님은 신라의 치하에서도 막대한 재부를 가지지 않으셨나이까. 그런데 실패하면 온 가문이 멸족당할 가시덤불로 굳이 걸어가려고 하시니 소자는 참으로 의문스럽소이다.》

《그래 죽는게 두려우냐?》

영창은 아들의 두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능환은 아비의 말에 벌컥 화를 내였다.

《무슨 말을 하는것이오이까? 죽는게 두려우면 애초에 아버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것이오이다.》

영창은 아들의 항변에 묵묵히 버릇처럼 허리에 차고있는 검만 어루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도척을 아느냐?》

《도척이라면… 저기 중원의 전국시대에 이름났던 도적이 아니오이까?》

능환은 아비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싶어 두눈이 커졌다.

영창은 보기 좋게 기른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 흉악한 도척에게도 제 주인을 몹시 따르는 개가 한마리 있었다. 어느날인가 한 성인군자가 도척을 몹시 꾸짖었지, 사람구실을 하라고 말이지.… 헌데 가관은 그 개란 놈이 제 주인이 욕을 먹자 성이 나서 성인군자를 보고 짖어댔다는것이 아니겠니. 아무리 무도한 도적일지라도 저를 먹여준 주인이니 개가 짖어댈수밖에… 내가 평소에 늘 너를 가르쳐온것이 무엇이냐. 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은 효도가 기본이며 백성은 의리를 지켜야 하느니라. 뭐, 내가 조상이 누리던 복락과 재부를 가지자고 위험천만한 불구덩이로 뛰여들려는줄 아느냐. 백제가 멸망할 당시 너의 고조부께서는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재건의 꿈을 가지셨다면 대를 물려오는 우린 조부모님과 부모님에 대한 효도, 백제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고 이 길에 나선것이란다. 네 말대로 계림의 귀족들이 내게 많은 재부를 주었다 해도 난 도척의 개처럼 백제를 위해서 짖어댈것이다.》

그래도 능환은 잘 납득이 안된다는듯 다시 입을 열었다.

《백제국을 재건하겠다는 대의명분은 옳은것이나 백제가 재건되여서도 우리 부자의 처지가 장사군으로만 있을바에야…》

《그럼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능환은 아비가 이렇게 되묻자 용기를 내서 말하였다.

《소자는 권력을 쥐고싶소이다. 우리 조상이 가졌던 권력을 이 손에 틀어쥐는것이 소원이오이다.》

영창은 아들의 기색을 찬찬히 눈여겨보며 저력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권력이라… 하긴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너의 그 뜻이 성취되자고 해도 백제는 반드시 재건되여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오늘의 거사를 반드시 성공하여야 한다.》

능환은 아비의 당부를 다 듣고나서야 마음속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을 벗어놓은 사람처럼 한결 밝아진 표정이 되였다.

《소자는 오늘에야 아버님의 의도를 똑똑히 알게 되였나이다. 그럼 소자는 이길로 떠나겠소이다.》

능환은 아비에게 절을 하고나서 밖으로 나갔다.

영창은 저도 모르게 아들의 뒤를 몇걸음 따라서다가 문득 멈추어섰다.

백제국을 재건하려는 대의명분에 대해서 어린 아들에게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보다 능환이 이번 거사를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하자는데로 마음이 기울어졌던것이다.

그는 뒤돌아봄이 없이 당당한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아들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웨쳤다.

《능환아, 부디 성공해다오. 이번 거사에서 성공하면 권력과 부귀보다 더 귀한것이 있다는것을 깨닫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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