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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제 1 장. 방 황

1


5월의 패강(대동강)의 새벽은 어둡다.

새까만 먹물을 풀어놓은듯 시꺼먼 하늘에서는 안타깝게 소리도 없이 금빛번개불이 번쩍이고 솨솨 거품이 일며 재빠르게 흘러내리는 강물우로 별찌들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메마르고 따뜻한 바람이 씁쓰무레한 초원의 쑥냄새를 인가로 날라올제 물가의 버들숲에서는 축축히 물에 젖은 이끼풀과 감탕, 습지의 슴슴한 냄새가 멀리까지 풍기고있었다.

뜸부기울음소리로 소란스러운 강기슭의 나무숲은 마치 옛말에나 나오는 그것처럼 젖빛의 안개에 포근히 감싸여있었다.

…어둠은 여전히 삼라만상을 꼼짝달싹 못하게 결박해두고있었다. 어둠속에서도 밤새들이 먹이를 찾아 기슭에 점잖게 내려앉는다.

사품치며 흐르는 물결우로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첨벙첨벙 뛰여올랐다.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불시에 그쳐버리자 기슭에 가득 내려앉았던 밤새들도 무엇에 놀란듯 황급히 깃을 치며 날아올랐다.

숲속과 이어진 강기슭의 모래언덕에서 재빛의 작은 형체가 옴지락거렸던것이다.

그것은 눈에 잘 띄우지 않는 미미한 동작으로 몸을 움직이고있었다.

어스름한 허공중에서 기슭으로 내려앉던 밤새들이 놀라서 황급히 나래를 퍼덕이며 버둥거렸다.

재빛의 작은 형체는 안타깝게 한치한치 숲속으로 기여가고있었다.

어둠은 차츰 물러가고 주위의 산줄기들이 발가우리해졌다.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모든 물체들이 자기의 자태를 드러내보였다.

기슭의 감탕을 지나 모래언덕에 이르기까지 온밤 기여온듯싶은 형체가 제모습을 드러내보였다.

아래우 할것없이 감탕으로 매닥질되여있는데 산산이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찢기고 째져 너덜너덜해진 치마폭은 눈뜨고 보기 참혹한 모습이였다. 거기에 배까지 불러 만삭이였으니 누가 보아도 애처로운 녀인의 모습이였다.

감탕을 헤여 한치한치 기여와서인지 그가 지나온 자리를 따라 도랑이 길게 째졌다.

마침내 기력이 모두 진했는지 녀인의 가냘픈 몸부림마저 멎어버렸다.

몇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모래판우를 날아예던 새들이 안심하고 주위에 내려앉았다.

녀인의 몸은 산 생명체라고 생각할수 없을만치 참혹했다. 온몸이 감탕에 절어 번들거리는데다가 산산이 흩어진 머리카락에는 물이끼까지 가득히 걸려있었던것이다. 할퀴우고 찢겨진 살결에서는 피가 점점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점차 동녘하늘이 희읍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새벽추위에 얼어들었던 숲속은 후더운 기운을 받아 생기를 되찾았다.

이른봄을 찾아온 철새들이 점점이 하늘에 나타났고 먹이를 찾는 새들이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있었다.

강기슭을 따라 뻗어있는 행길로 세명의 사나이들이 말을 몰아가고있었다.

야차처럼 독한 얼굴에 산발이 된 머리, 몸에 걸친 털가죽옷은 마치 강건너 야인들을 방불케 하는 모습들이였다.

허리에 활과 화살을 차고 간편한 차림새를 갖춘것으로 보아 새벽사냥에 나선 모양인듯싶은데 살기가 배여나오는 눈초리는 그들이 례사 사냥군이 아님을 보여주고있다.

그들은 잠간 말을 멈추고 손채양을 하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패강의 지류 남강기슭에는 아직까지 사냥군들이 자주 다니지 않아 여러가지 새들과 짐승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나이들은 주위에서 인기척에 화닥닥 놀라 달아나버리는 짐승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엇을 급히 쫓아가는지 능란하게 고삐를 조종하여 말들을 비좁은 강기슭을 따라 몰았다.

맨 앞장에서 말을 몰아가는 사나이가 급작스레 말을 멈추어세우더니 호용하는 말에서 뛰여내려 도랑처럼 길게 째진 흔적을 찾아내고는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아직 자리가 생생한것으로 보아 그년이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네.》

《지독한 년… 이제 붙잡으면 다신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힘줄을 끊어놓든가 해야지 늘 우리가 그년을 쫓아다닐수 없지 않는가.》

무리의 두목인듯싶은 사나이가 이렇게 소름끼치는 말을 내뱉고는 박차를 질러 말을 몰아갔다.

사나이들은 관청의 수족이 되여 도망친 노비들을 붙잡아오는것을 업으로 하는 무리였다.

이들을 가리켜 추노군이라고 불렀는데 남의 불행같은것은 안중에도 없이 돈 몇푼에 살인도 꺼리낌없이 벌리는 야차와 같은자들이였다.

사나이들은 이렇듯 참혹한 모습으로 강기슭에 쓰러져있는 녀인을 향해 다가가고있었다.

바로 같은 시각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나이가 갈대가 무성한 강기슭에서 사냥에 열중하고있었다.

나이는 서른가량 되였는데 눈매가 서글서글한 잘생긴 사나이였다.

드디여 좋은 사냥감이 나타났다.

말발굽소리에 놀란 물오리가 급히 날아오르면서 날개를 퍼덕이는것이였다. 사나이는 재빠른 동작으로 시위에 화살을 먹여들고서 별로 겨냥하지 않고 깍지낀 손을 놓았다.

살에 맞은 물오리는 날개를 접고 돌덩이처럼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는 말등에서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사냥물을 집어들었다.

화살은 그가 겨눈대로 물오리의 멱에 정확히 꽂혀있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사냥물을 구럭에 넣고난 사나이는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말을 몰아갔다.

그의 이름은 검용, 패강의 지류인 남강기슭에 자리잡은 버드내마을의 오랜 토호출신의 인물이였다.

버드내마을은 말그대로 버들가지로 갖가지 수공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정착하여 사는 곳이다.

그들이 평상시에 수공품을 만들고 그것으로 표를 삼게 된것은 하도 까마득한 옛날이여서 오랜 토배기들도 언제부터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전해오는 말에 옛날 고구려가 멸망하여 도성인 평양성이 함락된 후 당군의 포로로 끌려가던 장공인들이 도망쳐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곳에 정착한것이 마을이 생겨난 연원이라고 했다.

당장 먹고 살기가 급하여 강기슭에 흔한 버들가지를 엮어 여러가지 살림살이도구를 만들어 팔아 근근히 입에 풀칠하게 된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이러한 일로 먹고 사는것이 어렵게만 되여갔다.

련이은 자연재해와 신라귀족들의 탐욕스러운 수탈로 땅을 잃고 류랑하는 류랑민들의 무리가 강변에 정착하여 장공인으로 되는 현상이 자꾸 늘어나 수공품에 대한 수요가 계속 떨어졌던것이다.

마을에서 경작하는 조밭은 너무도 협소하여 새로 야산들에 화전을 일구어 어떻게 해서든 처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으나 버드내마을사람들의 살림은 나날이 쪼들려만 갔다.

여기에 관가의 폭정과 재해와 역병이 수시로 덮치여 마을사람들의 처지는 차마 눈뜨고 바라보기 어려웠다.

바로 이러한 버드내마을에 재생의 활력을 부어준 인물이 검용이였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대가 굳세기로 소문난 검용은 한때 변방지역을 수비하는 수비군의 군직까지 지냈었다.

꾸준한 노력으로 뛰여난 무예실력을 소유하였을뿐아니라 지경을 넘어들어온 북방의 야인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여러번 무공을 세웠다.

하지만 출신이 패강지역출신이고 조상이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리유로 승진마저 거부되였다.

문벌과 골품만을 중시하는 썩어빠진 신라골품제도에 환멸을 느낀 검용은 군직을 벗어던지고 고향인 버드내마을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일을 돌보는 장자로 선출된 검용은 빈곤한 마을사람들의 앞날을 모색하다가 장사에 나서는 길만이 마을이 살아갈 유일한 방도라고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가 구상하고있는 상업활동은 마을사람모두가 행상에 나서게 하는것이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구상은 그 첫시작부터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마을의 늙은이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며 하던 일을 버린다는것이 말이 되느냐고 펄쩍 뛰였고 젊은 축들은 그들대로 지금 도처에서 《도적》이 들끓고 관가와 결탁한 상인들이 지방과 고을을 단위로 구역을 정해놓고 전횡을 부리는데 행상이 가능한가고 도리질하였다.

당시 신라사회는 부패한 조정내부에서 때없이 벌어지는 권력싸움으로 극도로 혼란되여있었다.

사치와 향락이 풍조로 만연되여 귀족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악착하게 짜내였고 관가의 폭정과 귀족들의 수탈에 더는 살래야 살수 없는 백성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도처에서 들고일어났다.

나라의 통치체계가 혼란되니 지방과 지방, 고을과 고을사이의 련계가 끊어지고 이러한 혼란을 리용하여 관권과 결탁한 상인들은 저저마다 구역을 정해놓고서 저들끼리 상권분배를 위한 추악한 싸움질을 벌리고있었다.

이통에 죽을고에 든것은 바로 버드내마을과 같은 장공인들과 힘없는 령세상인들이였다.

하지만 검용은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행상을 벌릴 결심으로 하나하나 완강하게 추진해나갔다.

시전상인들의 부추김을 받은 고을관청에서는 애초에 행상권마저 거부하였고 상업자금을 류용해올데도 없었다.

검용은 락심하지 않았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전장을 팔고 집까지 저당잡혀 행상을 시작할 자금을 마련하였고 관가에 찾아가 행상을 허락한다는 허가증인 체찰도 받아내였다. 마을의 늙은이들을 꾸준히 설복하고 젊은이들을 불러일으켜 끝내 자기가 목적했던바대로 이끌수가 있었다.

검용은 마치도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듯싶었다.

불과 1년도 못되여 패강을 중심으로 근 수백리지역의 행상권을 장악하였을뿐아니라 차츰 여러 고을들에까지 그 령역을 확대시키였던것이다.

변방수비군의 군직을 지낼 때 실지 체험한 변방지역의 정세와 변경을 벗어나 야인을 비롯한 북방종족들의 풍물에 대해서 환히 꿰고있는 검용인지라 협소한 신라의 행상권 같은것은 문제로도 되지 않았던것이다. …

검용은 이른새벽에 벌써 여러 마리의 물오리를 잡았는지라 흐뭇한 기분으로 말을 몰았다.

이른새벽의 대기는 차거웠지만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해서인지 몸이 후더워졌다.

한껏 불어오는 강물이 귀전을 간지럽히며 들물처럼 흘렀다.

이때 말이 갑자기 무엇을 보고 놀랐는지 앞굽을 쳐들고 일어서는것이였다.

강기슭의 나무가지에 앉았던 새들도 나래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검용은 머리칼이 쭈뼛이 일어서는듯싶은 공포의 전률을 느꼈다.

야인들처럼 차려입은 야차와 같은자들이 참혹한 몰골의 한 녀인을 무지막지하게 채찍으로 내려치는 스산한 광경과 맞다들렸던것이다.

놈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죽기내기로 항거하는 녀인이 만삭의 녀인임을 알아본 검용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였다.

검용은 더이상 지켜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매운 채찍질에 놀란 말이 살같이 달리였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린것처럼 난데없는 무사가 짓쳐들어오자 사나이들은 공포에 질려 허둥지둥했다.

추노군들은 살인을 떡먹듯 하는 놈들이였으나 무예가 뛰여난 검용의 상대가 못되였다.

한바탕 혼전이 벌어지자 살기를 띠고 접어들던 놈들이 차돌같은 검용의 주먹에 얻어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검용은 사나이들을 쓰러뜨리자마자 말등에서 뛰여내려 녀인에게로 달려갔다. 방금전에 추노군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죽기로 항거해나섰다가 혼절하여 쓰러진 녀인은 숨결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용은 조급해났다.

죽은듯이 축 늘어진 녀인을 안아일으켰으나 곁에는 누구 하나 조력해줄 사람도, 인가도 없다는것을 그제서야 느꼈던것이다.

무작정 녀인을 안고 말에 올라 인가를 찾아 헤매이던 검용은 은은한 풍경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검용이 말을 몰아가는 곳은 나한암이라고 불리우는 자그마한 암자였다.

나한암은 녀승들인 비구니들만 수도하는 곳으로 암자의 암주는 어렸을 때 검용을 친오라비처럼 따르던 해명스님이였다.

암자에 다달은 검용은 무작정 비구니들만 있는 곳으로 들어갈수도 없고 하여 동자승에게 해명을 찾도록 하였다.

동자승의 전갈을 받은 해명이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맨발로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오라버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오니까?》

난데없이 이른새벽에 축 늘어진 참혹한 몰골의 녀인을 둘쳐안고 들어서는 검용의 모습에 해명은 어리둥절해졌다.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어디 조용한 곳에 이 녀인을 눕혀 구완해주렴.》

해명은 뒤따라나온 비구니들에게 녀인을 암자로 들이라고 지시하고는 검용에게로 돌아섰다.

《저 녀인은 어찌된 연고로 오라버님이 여기까지 데리고온것이오이까?》

해명의 차거운 눈빛과 어조에서 류다른것을 느낀 검용은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허… 날 못 믿겠느냐? 새벽에 사냥을 나왔다가 저기 기슭에서 무지막지한 놈들에게 쫓기는 녀인을 구원하여 이곳으로 데려온 길이다.》

해명은 검용의 차림새를 눈여겨보고는 그제서야 눈초리가 누그러져 안으로 청했다.

《그럼 오라버님은 내 방에 들어가 좀 쉬시오이다.》

검용은 비구니들만 있는 암자에 들어가기가 뭣하여 《난 여기서 기다려도 괜찮으니 어서 들어가보렴.》 라고 말하고는 뒤로 물러서버렸다.

해명도 더 권하지 않고 곧 암자로 뛰여들어갔다.

검용은 그제야 숨이 나가는지 말께로 다가가 축축히 땀에 젖은 말의 목덜미를 툭툭 손으로 두드리고 안장끈을 조이고 편자를 신긴 발통을 살피면서 시간을 보내였다.

두어식경이 지나 대문이 찌쿠덩 다시 열리면서 해명이 천천히 마주나왔다.

《어찌 되였니?》 검용이 초조한 어조로 물어보자 해명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급한 고비는 넘겼으나 워낙 만삭의 몸이라 피여나겠는지 장담할수 없군요. …》

검용은 하얗게 질린 낯색으로 해명에게 매달렸다.

《어떻게든 손을 써보렴. 처음엔 죽어가는 인명이라 어찌할바를 몰라 갈팡질팡하였는데 갑자기 네 얼굴이 떠오르더구나.… 그래서 이렇게 렴치불구하고 널 찾아오게 되였다. 네가 의술도 높고 하니 꼭 좀 살려주렴. 내 꼭 인사를 하겠다. …》

해명은 손에 든 념주를 주무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님은 어렸을 때 그토록 따른 내게는 몇해동안 발길조차 안하시더니 생면부지의 녀인에게는 참으로 극진하시군요.》

검용은 당황하여 급히 두손을 저었다.

《아, 무슨… 사실 지금껏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만 그것은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검용이 두서없이 중얼거리자 해명은 그제서야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되였어요. 원, 고지식한 그 성미는 여전하시군요. 오라버님이 부탁하지 않아도 사람을 살리는것은 불자의 도리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다. 그럼 저 녀인이 완쾌되면 다시 찾아오겠다.》

검용은 해명에게 녀인을 부탁하고서 곧 말에 올라 암자를 내렸다.

해명은 검용과 같은 버드내마을출신이였다.

검용의 이웃집에서 태여난 해명은 어렸을 때 그를 친오라비처럼 따랐다. 해명이 열살되던 해 버드내마을에는 역병이 돌아 마을사람들이 수십명이나 병에 걸려 죽는 참사가 벌어져 불행하게도 그는 역병으로 부모를 다 잃고 이 세상에 외롭게 홀로 남게 되였다.

해명이뿐아니라 버드내마을에서는 여러명의 고아가 생겨났다.

해명의 처지를 동정한 마을사람들은 함께 의지해살자고 저저마다 집으로 끌었으나 누구도 어린 마음에 영원히 아물수 없는 상처로 남은 그의 불행을 가셔줄수가 없었다.

그후 해명은 검용이 잡는것도 뿌리치고 비구니가 될것을 결심하고 산으로 올랐다.

어린 해명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부처님을 모시는 불도가 되면 중들이 입버릇처럼 늘 외우듯이 속세의 죄를 벗으리라 여겼던것이였다.

검용은 친누이동생처럼 여겼던 해명이 그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것이 너무도 한스러워 한사코 만류해나섰으나 그 결심을 끝내 꺾을수가 없었다.

남달리 총명하고 사내들 찜쪄먹게 성격이 굳센 해명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 그날부터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후 많은 학식을 쌓고 포교활동을 활발히 벌려 삽시에 명성을 떨쳐 당대의 유명한 승려인 도선대사의 눈에까지 들게 되였다.

도선의 뒤받침과 높은 명성과 인망으로 하여 비천한 출신의 녀인으로서는 생각도 못하게 이렇듯 나한암의 암주로까지 될수 있었던것이다.

검용은 해명이 불문에 들어간 후로 이전처럼 자주 찾아가 만나지는 못했으나 그를 도울 일이 생기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군 했다.

검용이 버드내마을사람들이 행상으로 일손을 바꾸게 한 후로 마을의 살림살이형편이 조금씩 펴이게 되자 쓰고 남은 일정한 량의 재부는 해명이를 통해 빈민구제사업에 돌려졌다.

해명 역시 고향마을일이라면 즐겨 발벗고나서군 하였고 차츰 나이가 들어갈수록 검용을 친오라비처럼 따르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음날 검용은 나한암에 있는 녀인의 신상이 념려되여 많은 량의 곡식을 하인들에게 지워가지고 암자를 찾았다.

이전과 다름없이 해명이 두어명의 비구니들을 휘동하고 나와서 검용일행을 맞이하였다.

하인들이 지게에 지고온 곡식을 암자의 고간으로 날라가라고 이르고는 오래간만에 해명의 방에 들어가서 차를 대접받았다.

지금까지 아무리 혈육처럼 자별한 사이라도 해명의 방에 들어가기가 뭣하고 하여 될수록 삼가해왔으나 어제 자기가 이곳에 데려온 녀인의 신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물어보기도 점직하여 못이기는체 들어가앉았던것이다.

녀인이 거처하는 방이여서 그런지 해명의 방은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방에는 해명이 직접 그린 소박한 병풍과 문갑밖에는 별로 눈에 띄우는것이 없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다른 절의 화려하고 사치하게 차린 주지들의 방보다 더욱 아늑하고 정갈하게 여겨지는것이였다.

《아직도 그림을 그리느냐?》

해명이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검용이 인사삼아 묻는 말이였다.

해명은 한가할 때면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군 하였는데 그 솜씨가 흘륭하여 린근에 소문이 자자했던것이다.

《네가 언제부터 완성되면 주겠다는 그림은 어찌되였느냐?》

검용이 짐짓 섭섭하다는듯 엄한 기색을 짓고 따져묻는데 해명은 말없이 상글상글 웃기만 했다.

웃을 때 뺨에 살짝 보조개가 생기는것이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어 검용은 별수없이 따라웃지 않을수 없었다.

마침내 해명이 입을 열어 침묵을 깨였다.

《오라버님은 생각나세요? 어렸을 때 오라버님은 제앞에서 늘쌍 무사가 되여 전장에 나갈것이라고 뽐내셨지요. 철없는 저는 눈물이 글썽하여 함께 데려가달라고 떼를 썼구요. …》

《새삼스럽게 그런 말은 무슨… 참 좋은 시절이였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너와 함께 대말을 타고 어치잡이나 다니고싶구나. 그런데 이렇듯 운명은 날 행상인으로 세워놓고 널 부처를 섬기는 불도가 되게 하였구나.》

검용이 비감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자 해명은 곧 화제를 돌렸다.

《참, 오라버님은 상처한지 오랜데 왜 아직까지 홀로 외롭게 지내시는가요?》

이야기가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가지를 치는것만 같아 검용은 한순간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그런 말은 왜 꺼내느냐?》

해명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옛날 어느 유명한 명장은 원정의 길에서 버려진 처녀애를 만난것이 인연이 되여 그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였다 하더이다. 오라버님도 어디선가 그런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될지 어찌 알겠소이까?》

검용은 해명의 말에 놀라서 두눈을 크게 떴다.

실없는 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해명의 태도가 너무도 진지했던것이다.

《허, 날 높이 쳐주는것은 고맙구나.…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을게다.》

검용이 롱을 하듯 가볍게 물리치자 해명은 밖에 대고 소리쳤다.

《게 누구 없느냐?》

비구니 한명이 다가와서 공손한 태도로 분부를 기다렸다.

《시주님께 잠간 나와달란다고 전하거라.》

비구니가 분부를 받고 물러가자 해명은 정색한 얼굴로 검용에게로 돌아앉았다.

《오라버님은 참으로 좋은 일을 하셨나이다. 예로부터 9층불탑을 세우는것보다 사람의 인명을 살리는것이 더 큰 공덕을 쌓는것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

《원, 무슨 말을 하는것이냐. 너의 고명한 의술과 성의가 인명을 살린것이다.》

바로 이때 장지문이 바시시 열리더니 한 녀인이 조심히 안으로 들어와 검용에게 나부시 절을 하는것이였다.

검용은 당황한듯 《이러지 말고 어서 일어나시오.》 라고 녀인을 만류했다.

녀인이 절을 마치고 얼굴을 드는 순간 검용은 깜짝 놀랐다.

어제 자기가 살려낸 녀인의 얼굴이 부은것이 내리자 수려한 얼굴모습을 드러내였기때문이였다.

비록 초라한 베옷을 걸쳤고 아기를 가진 몸이였으나 녀인은 너무도 아름다왔다.

하지만 검은 눈에 비낀 푸르죽죽한 그늘만은 녀인이 지금껏 부대낀 파란만장의 세파를 보여주는듯 했다.

어느새 검용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늘같은 은혜를 입어 천한 몸이 다시 살아날수 있었나이다.》

검용은 녀인의 말에 놀란듯 황급히 두손을 저어보였다.

《무슨 말을 그리 하시오? 그대를 살린것은 여기 나한암의 해명스님이올시다. 나는 그저 인간법도대로만 행동했을뿐이니 그런 말은 거두어주소이다.》

그는 차마 녀인을 제 손으로 일으켜세울수가 없어 우물쭈물했다.

《저같은 천한 몸은 은혜와 원쑤로 이 세상을 살아옵나이다. 쇤네는 머리칼을 베여 신을 삼아서라도 꼭 이 은혜를 갚겠소이다.》

검용은 난처한 기색으로 해명을 돌아보았다.

해명은 여전히 상글상글 웃으며 손으로 념주만 헤아리고있다.

《이러지 마시오. 우선 배안의 아기를 잘 돌봐야 하니 몸조리를 잘하시오.》

검용은 녀인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이르고는 허둥지둥 해명의 방에서 나와버렸다.

해명이 념불을 외우며 뒤따라나왔다.

검용은 대문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해명에게로 돌아섰다.

《내가 힘자라는껏 쌀섬과 피륙을 올려보내겠으니 네가 저 녀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당분간 도와주면 좋겠다.》

《그가 암자에만 머물러있겠다고 할가요? 오라버님께서 이왕지사 인명을 살린바에는 그의 슬픔까지도 걷어안아주는게 좋지 않을가요? 어제 그 녀인과 밤새껏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남편을 잃은 불행한 녀인이더군요. 가까운 혈육도 없는 이곳에서 그가 누구에게 의탁하겠나요?》

해명의 말에 검용은 급히 도리질하였다.

《나의 처지에서 그렇게는 차마 못하겠다. 더우기 한 녀인의 불행을 기회로 내 욕심만 채우려 한다면 그게 무슨 사내라고 할수 있겠느냐.》

해명은 자기의 주장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온 하루 저 녀인의 곁에서 구완하면서 지켜보니 여간 얌전하고 슬기로운 녀인이 아니예요. 그래서 의협심이 많고 도량이 큰 오라버님이라면 능히 저 녀인의 슬픔도 걷어안을수 있으리라 생각한것이랍니다.》

《물론 저런 녀인이 배필이 되여준다면 연분이라 하겠지만 절대로 인간법도를 어기지는 않을것이다. 나는 세상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다.》

검용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해명도 검용의 태도를 보고는 더이상 권고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나한암을 뒤에 두고 떠나는 검용은 녀인의 얼굴을 계속 눈앞에 떠올리려고 애를 쓰는 자기자신의 마음을 의식하고는 깜짝 놀랐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앉으나서나 자신이 우연히 구원해준 나한암의 그 녀인의 얼굴이 눈앞에서 항상 떠날줄 몰랐다.

자신이 아기를 가진 그 녀인을 마음에 두는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스스로 도리질해보았으나 이름도 모를 녀인에 대한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덧 검용은 그 녀인의 기박한 처지를 동정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로부터 며칠후 집을 나서려고 대문을 열던 검용은 깜짝 놀라 굳어져버렸다. 검용의 완고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 녀인이 암자를 떠나 이렇듯 스스로 찾아왔던것이다.

당황한 검용은 바쁜 일이 있어 상론할새가 없으니 오늘은 그만 암자로 돌아가라고 이르고는 총총히 집을 나섰다.

검용은 절대로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상처한지 여러해가 되여 홀아비로 지내는지 오랜데 녀인이 집에 들어오면 남들의 말밥에 오를것이다.

그는 그길로 나한암으로 뛰여가 해명대사를 만났다.

해명은 검용의 하소연을 다 듣고나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님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소녀는 이것이 정말 좋은 연분이라 생각하나이다. 기막힌 처지의 녀인을 동정만 할것이 아니라 그 운명까지 거두어주는것이 진짜 활인이 아닐가요? 소녀는 오라버님이 생각을 잘하기 바라오이다.》

비록 해명의 말은 길지 않았으나 검용에게 암시하는바가 참으로 컸다.

검용은 나한암을 떠나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고적하고 쓸쓸하던 집안팎이 눈이 부실 정도로 윤기가 나고 질서가 바로잡혀있었던것이다.

검용이 집을 나선새에 녀인은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손이 미처 가지 못해 잡초가 무성하던 마당의 꽃밭을 가꾸고 검용의 옷가지들을 빨아널었으며 쌀을 씻어 가마에 안쳐놓았던것이다.

홀아비살림에 적막하고 쓸쓸하던 집안이 온통 따스한 훈기가 감돌고 어디라 할것없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듯싶었다.

검용이 녀인을 나한암으로 도로 올려보내려던 생각은 불과 반나절새에 부드러운 감정으로 바뀌였다.

이렇게 되여 결국 검용은 이름도 출신도 알수 없는 녀인을 받아들이게 되였다. 그들이 이렇듯 인연을 맺게 된것은 나한암의 암주 해명대사의 힘이 컸다고 할수 있었다.

그는 검용의 호협한 도량과 따뜻한 인정미라면 얼마든지 이름도 모를 녀인이 겪은 불행과 운명의 세파를 모두 품을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것이다.

검용 역시 상처한지 오래되여 홀로 외롭게 사는것만큼 사랑과 가정의 안착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검용은 이렇듯 이름도 출신도 래력도 모를 한 녀인과 기이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였으나 절대로 녀인의 기박한 처지와 슬픔을 동정하게 된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녀인이 남편을 지성으로 섬기였고 집안팎을 알뜰하게 거두었기때문이였다.

동네에서 괜히 녀인의 처지에 대해 입을 삐죽거리던 아낙네들과 입이 다사한 사람들조차 이제는 길가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게쯤 되였다.

자그마한 일이 생겨도 공연히 떠들썩 부산을 피우는 촌동네에서는 좀처럼 맞다들기 힘든 화제거리였으나 하도 검용의 새댁이 성품이 얌전하고 남편을 지성으로 받들기때문에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를 저어하는것이였다.

그들이 부부가 되여 검용의 처는 곧 아기를 낳게 되였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였으나 검용은 제 친아들이나 다름없이 좋아했다.

그들부부는 아기를 안고 나한암으로 찾아가 부처님께 치성을 드리고 해명의 권고대로 아들의 이름을 응통이라 지었다.

때는 879년 3월, 신라 헌강왕 5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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