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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서 장


태고적 단군의 도읍지라 일러오는 구월산은 예로부터 골짜기가 깊고 산세가 수려하여 우리 나라 6대명산의 하나로 알려지고있다.

동으로는 마식령산줄기에 가닿고 북으로는 대동강의 지류까지 발을 뻗었으며 남서쪽으로는 추산을 따라 내려서다가 불타산을 우회하여 서해와 만난다. 구월산남쪽기슭에 자리잡은 황해남도 삼천군 달천리는 온천료양지로 이름난 곳이다.

2008년 가을 어느날 아침, 달천리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큰길로는 소형뻐스 한대가 기세좋게 달리고있었다.

뻐스안에는 민족유산보호지도국 일군들과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연구사일행, 공화국을 방문하고있는 해외동포들이 타고있었다.

수확을 앞둔 전야들과 거무스레한 보라빛산줄기들이 차창밖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모양이 참으로 이채로왔다.

평양에서 떠나 벌써 두시간이상 차를 타고 달리고있으나 흥그럽고 이채로운 가을풍경에 취하였는지 모두 흥분된 눈빛들이였다.

그중에서도 뻐스의 가운데좌석에 앉아있는 반백의 해외동포는 격정과 흥분에 못이겨 차창에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문화류씨대종회 명예회장 류기환이였다.

류기환은 이번에 맏아들 류영효와 함께 공화국을 방문한 길이다.

《류기환선생님은 구월산행이 처음입니까?》

력사연구소 연구사의 물음에 류기환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전에 공화국을 방문하였을 때는 갑자기 일이 생겨 찾아올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꼭 구월산을 찾으리라 결심하였지요. 이렇듯 직접 눈으로 볼줄이야. …》

류기환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차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그의 이번 공화국방문은 구월산남쪽기슭에 위치하고있는 조상의 분묘를 찾는데 있었다.

그의 조상은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통일위업에 큰 기여를 하여 고려삼한벽상공신으로 력사에 이름을 떨친 대승 류차달이였다.

우리 당의 문화보존정책에 의해 류차달의 묘와 그의 업적을 찬양한 신도비가 국가보존유적으로 등록되였다는 소식은 그를 무한히 흥분시켜 이렇듯 평양행에 나서게 하였던것이다.

드디여 뻐스는 신흥로동자구에 들어섰다.

바로 이곳이 옛날 고려시기를 걸쳐 조선봉건왕조시기 유주 또는 문화현으로 불리우던 곳이다.

이전에 광대산줄기로 불리우던 름름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서있는 골짜기아래 오붓이 자리잡은 신흥로동자구는 작은 구릉들과 야산들, 사방에 점점이 널린 밭뙈기들과 짙은 송림으로 하여 풍경이 아름답고 향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있었다.

소형뻐스는 신흥로동자구 묵방마을 동구길로 들어섰다.

소형뻐스의 경적소리가 한적하던 마을을 삽시에 활기로 끓게 하여주었다. 집집에서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뛰쳐나왔다.

일행이 차에서 내려 산으로 오르는것을 보고서야 마을사람들은 그들이 일반유람객이 아니라 류릉을 찾아온 손님들이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류릉은 대승 류차달의 묘와 그의 공적비가 있는 곳이였다.

드디여 일행은 옛날 묵방사로 불리운 사원터를 지나 류릉이 마주보이는 길우에 서게 되였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어오던 조상의 릉을 바라보는 류기환의 감정은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을는지 알수 없었다.

예로부터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고 하였다.

한강토에서 하나의 피줄로 련면히 이어오던 겨레가 외세의 강요로 국토가 갈라져 남남이 되여가는 이 비참한 현실로 하여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오늘에야 조상의 분묘를 찾아보는 슬픔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력사에 유명한 대승 류차달의 후손은 북과 남에 다해서 수십만에 이르고있었다.

그러나 천여년의 아득한 세월은 류차달의 후손들에게서조차 통일위업에 바친 조상의 로고와 공적을 머리속에서 지워내고있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수천년의 년륜속에서도 계속 이어지는것은 바로 넋이였다.

류기환의 이번 방문은 조상의 분묘를 찾자는데도 있지만 이국의 광풍속에서도 자신이 조선사람임을 잊지 않고 한생을 꿋꿋이 살아온 그정신, 그 넋이 가슴속에서 분출하였기때문이였다.

그래서 이번 방문길에 류기환은 맏아들인 류영효와 동행하였던것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한치한치 류릉이 자리잡은 언덕을 톺아오르는 류기환의 모습에서 일행은 한생을 바쳐 통일위업에 큰 공헌을 한 류차달의 후손답게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살아온 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드디여 언덕에 올라서서 류릉에 다달은 일행은 천여년의 세월속에서도 아직도 원상그대로 보존되여있는 류차달의 분묘와 비석앞에 서게 되였다.

세월의 거친 풍파속에서도 력사의 증견자마냥 오늘도 꿋꿋이 서있는 류차달의 릉과 릉비문!

그것은 력사가 대승 류차달의 공적을 찬양하여 세운것이였다.

해묵은 이끼가 파랗게 돋은 릉비를 손으로 쓸어보는 류기환의 눈에서는 어느덧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류릉과 신도비에는 국가보존유적 《제1777호》, 국가보존유적 《제 1778호》라는 글발이 명문으로 뚜렷이 새겨져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류릉과 신도비가 국가보존유적으로 지정된 사실에 반신반의하였던 그였다.

하지만 우리 당의 문화보존정책은 이렇듯 대승 류차달의 분묘와 신도비를 국가보존유적으로 지정하였을뿐아니라 크게 개건하기로 결정하였던것이다.

이 소식에 접하여 무한히 흥분한 류기환은 미약하게나마 류릉의 개건에 힘을 다할 결심을 피력했다.

류릉은 자기의 36대후손인 류기환을 자랑스럽게 맞아주었다.

류릉을 찾은 일행은 류차달의 공적을 새긴 비문을 한자한자 읽어가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문에는 파란많은 한시대를 풍미한 류차달의 모습이 긍지높이 부각되여있었다.

류기환은 일행에게 자신이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 할아버지가 또 자기의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가문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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