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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려운형편



경력

• 1886년 4월 22일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 1918년 신한청년당 조직.

• 1919년 상해조선인거류민단 단장.

• 1920년 고려공산당 입당, 이전 쏘련에서 열린 제2차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가.

• 1926년 중국국민당 제2차대회 참가.

• 1929년 대전형무소 수감.

•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 1944년 건국동맹 조직.

• 1945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직, 위원장으로 활동.

• 1945년 10월 조선인민당 조직, 당수로 활동.

• 1946년 남조선민전, 좌우합작위원회 조직.

• 1947년 7월 미제와 반통일분자들에 의해 피살.

• 1990년 조국통일상 수상.


1999년에 남조선의 한 잡지가 서울에 있는 정치, 사회, 문화, 교육단체를 상대로 《해방후 남조선에서 가장 뛰여난 정치가가 누구인가》라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 려운형이 앞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라가 해방된 후 남조선에는 얼마나 많은 혁명가, 애국자, 지도자들이 출몰했던가. 심지어 해방과 함께 청산되였어야 할 친일분자들도 미국의 비호밑에 되살아나 자기를 《애국자》로 자처하며 설레발을 치고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려운형이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도 이렇듯 제노라고 하던 인물들을 다 제치고 남조선인민들로부터 인정받고있는것은 그의 높은 인격에 대한 반증으로 된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 눈을 틔워준다는 말이 있다.

려운형이 반통일분자들의 흉탄에 쓰러졌을 때 그의 장례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의 희생을 통하여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그렇듯 거대한 애도의 물결을 만들었던가.


독립의 길을 찾아 수만리


외세의 침략을 막고 부패한 봉건왕조의 개혁을 꿈꾼 젊은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때로부터 두해가 지난 1886년에 경기도 양평의 어느 한 량반집에 새 생명이 태여났다. 이름은 려운형.

그러나 이 명문가의 집안에도 망국의 락조가 비끼였다. 망해가는 나라의 운명을 두고 통탄하던 그의 할아버지는 가문의 기쁨이였을 손자의 출생에 《몽양》이라는 호를 선물했고 그 손자는 후날 망명시절에 자기는 《꿈에도 해가 그리워 몽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려운형의 당대 사회에 대한 반항의식과 애국심이 싹텄는지 모른다.

그는 부모의 3년상을 치르며 당시 국권회복을 목표로 벌어지던 국채보상운동에 뛰여들어 웅변을 하기 시작했다. 뛰여난 웅변가로 소문난 그를 두고 사람들은 《입을 열면 청중을 웃기고 울리기를 자유자재로 한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려운형은 독립운동을 위해 가정내의 개혁부터 단행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치자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집안에 있던 력대 신주들을 땅속에 묻어버렸으며 하인들을 모두 모여놓고 그들의 눈앞에서 종문서를 불살라버리고 그들을 해방하였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들을 다 해방시키겠다. 이제부터 저마다 제 마음대로 움직여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종도 없다. 그러므로 서방님이니, 아씨니 하는 말부터 입에 올리지 말아. 사람은 날 때부터 똑같다. 상전과 종으로 나누는것은 어제까지 풍습일뿐이다. 오늘부터는 그런 낡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제 뜻대로 살아가라.》

그는 어린시절부터 가문의 과격한 계급사상을 배척하면서 신분의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량반과 상민의 차이가 심했던 당시 려운형은 불쌍한 친구들을 측은하게 생각할줄 알았고 상민이나 하인들이 량반에게 천대와 억눌림을 당하는데 대해 늘 동정적이였다. 성장해서는 동네에 상사가 나면 종이든 상민이든 가리지 않고 발벗고 나서서 보살펴주었다.

한번은 전염병에 걸려 죽은 이웃마을 청년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까지 치러주었다고 한다. 그 시절 량반집 도련님이 종과 어울리고 종의 상여를 멘다는것은 하늘이 뒤집히는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였다.

일제가 강요한 망국의 치욕은 순박했던 그를 봉건가정의 대문을 벗어나 직업적인 정치가로 되게 하였다.

강원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청년교육에 전념하던 그는 반년만에 《한일합병》소식에 접하자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금강산 등 강원도의 여러곳을 떠돌았다. 그러나 105인사건(일제의 초대총독 데라우찌암살미수사건)이 발생하는 등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려운형은 외국망명의 길에 올랐다.

1913년 상해로 건너간 려운형은 다음해에 남경의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며 여기서 손문, 진독수 등 당대의 중국지식인들과 사귀게 되였다.

1918년 12월 상해망명객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생겼다. 상해에 날아든 미국대통령 윌슨의 특사가 다음해 1월에 개최되는 빠리강화회의에 중국도 대표를 파견할것을 중국의 국민당정부에 권유하면서 그 회의야말로 세계 여러 약소민족들이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따라 독립을 이룩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던것이다.

미국의 28대대통령 윌슨은 그해 1월에 미국회 상하원합동회의에서 제1차 세계대전종결후의 강화조건으로 《14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그중 제5조는 《식민지종주국의 요구와 해당 식민지주민의 권익을 대등한 립장에 놓고 주권을 결정짓는 원칙에서 자유롭고 솔직하고 공평하게 식민지요구문제를 조정한다.》는것이였고 제14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았다.

이 두 조항을 통칭하여 《민족자결론》이라고 하였다.

《민족자결론》은 다민족국가인 쏘련을 내부로부터 분렬와해시키며 사회주의10월혁명의 영향력을 막고 식민지약소국가 인민들을 서로 리간시키는 한편 전패국들의 령토를 더 많이 차지하려는 목적을 노린 탐욕적이고 위선적인 구호였다.

그러나 려운형은 이 《민족자결론》에 큰 기대를 걸고 상해에 가서 윌슨의 특사를 만났다.

그는 특사에게 빠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참상과 일본의 야만적침략상을 폭로해야겠다고 하면서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특사는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사실 려운형은 미국에 큰 기대를 가지고있었다. 배재학당시절에 알았던 미국인들은 약소국의 은인처럼 보였다. 그는 미국의 도움으로 조선독립을 해보자고 미국인선교사 챨스, 알렌, 언더우드 등과 친교를 맺었다.

려운형은 바로 그 미국인들이 우리 민족의 벗이 아니라 원쑤이며 후날 자기의 비참한 최후가 미국의 모략의 산물임을 아직은 알수 없었던것이다.

윌슨의 특사의 위선적인 약속에서 힘을 얻은 려운형은 빠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자면 조선민족의 독립의사를 정식 표명할만 한 민족단체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동료들과 함께 상해에서 급기야 신한청년당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한편 그는 천진에 가있던 김규식을 불러 신한청년당 대표로 빠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독립진정서를 작성하여 대표로 가는 김규식에게 보내는 한편 미국의 특사에게도 한통 주어 조선대표가 참가하지 못하는 경우 강화회의에 제출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려운형을 비롯한 민족주의인사들이 이처럼 미국과 《민족자결론》에 기대를 건것은 그들의 머리에 미국에 대한 환상이 그만큼 뿌리깊이 남아있었기때문이였다.

윌슨의 이 특사란자는 빠리강화회의에 려운형에게서 받은 독립진정서를 아예 전하지조차 않았다.

한편 빠리에 간 김규식은 강화회의에 참석한 미국대통령과 영국수상, 프랑스정부수반에게 《조선독립에 관한 탄원서》와 《조선민중의 주장》이라는 문서를 제출하였으나 윌슨을 비롯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 대표들은 조선독립청원 같은것은 이번 회의성격에 맞지 않으니 새로 창설될 국제련맹에나 제출해보라고 하면서 거부해버렸다. 이렇게 되여 김규식은 빠리강화회의가 진행되는 베르사이유궁전문앞에 가보지도 못한채 주저앉고말았다.

윌슨의 《민족자결론》의 기만성은 이렇게 증명된셈이였다. 미국은 이미 1905년 7월에 미륙군장관 타프트와 일본총리 가쯔라 다로의 도꾜밀약에 따라 일제의 조선침략을 적극 협력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보호통치》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인정받았던것이다.

이것을 알리 없는 려운형은 미국에 대한 기대와 독립의 푸른 꿈을 안고 김규식을 빠리로 떠나보낸 후 북만주와 서북간도, 씨비리, 이르꾸쯔크와 할빈 등을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3.1인민봉기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피어린 반일투쟁과 독립운동자들의 활동을 《어리석은 행위》로, 《일본의 조선통치는 당연한것》이라면서 일본을 도와나섰다.

려운형은 실망하였다. 이제는 미국도 믿을수 없었다. 간도의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도 파쟁과 일제의 탄압속에 지리멸렬되여가고 자신이 관여하고있던 상해림정도 믿을수 없었다.

당시 림정은 파쟁에 혈안이 되여있었고 인두세와 구국의무금으로도 모자라 나중에는 공채까지 발행하고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관찰사, 군수, 면장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장》이라는것을 주고 그 직함에 따라 해당한 금품을 받아들이는 매관매직까지 하였다.

려운형은 처음에는 림시정부수립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일단 림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림시의정원 의원과 외교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림시정부의 선전활동에 힘썼다. 그후 림정이 유명무실해지자 독자행동에 들어갔으며 국제공산당과 련계를 가지는 등 자기식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맑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공동으로 발표한 《공산당선언》을 1922년에 우리 말로 처음 번역한 사람이 려운형이라고 할 때 그의 학구적태도와 새 사상에 대한 열망을 과히 짐작할수 있다.

려운형은 쏘련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자주 만났다.

이미 빠리강화회의에서 드러났듯이 미국과 렬강들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것이 명백해진 반면 사회주의10월혁명을 통해 등장한 쏘련은 아시아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하겠다고 나섰기때문이였다.

그는 국제공산당과 련계하는 과정에 고려공산당에도 가입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도 참가하여 레닌을 비롯한 쏘련공산당 지도자들과 회담하면서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려운형은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상해에서 기자로 일했고 중국국민당 당수 손중산과도 련계를 가지며 자기딴의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각지로 다니며 독립을 부르짖었다. 1929년 7월 그는 필리핀에 가서 이 나라 미국계신문 《필리핀 프레스》 기자가 초대한 환영회에서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서 일본과 유미제국주의를 쫓아내자고 연설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은 마닐라경찰을 통해 그를 체포하고 려권을 빼앗았으며 상해로 추방된 그를 일본경찰이 체포하도록 일본에 통보하였다.

독립의 길을 찾아 이역의 수천수만리를 발이 닳도록 동분서주하였지만 일제의 마수에 걸려 끝내 조선으로 압송되여 몇년간의 감옥살이를 한것이 그에게 차례진 운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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