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김구편
민족사의 한 페지에 오르다
5월 5일 저녁 김구와 그일행은 서울에 도착하였다. 남조선의 언론들은 《백범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데 대하여 크게 전했다.
이튿날 김구와 김규식은 내외기자들앞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북 제 정당 련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서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수 있다는것을 또 한번 행동으로써 증명한것이다. 이 회의는 자주적, 민주적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미쏘 량군철퇴를 요구하는데 의견을 일치하였다.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력사적신발전이며 우리에게 큰 서광을 주는바이다. …
우리가 이것으로써 만족을 느낄수는 없는것이다. 이미 거두어진 성과를 가지고 최후의 성공을 하는것은 오직 우리의 애국동포전체가 일치하게 노력하는데 있을뿐이다. …》
그날 기자회견에서 김구, 김규식은 《우리는 이번에 평양에 가서 영명하신
북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나쁘다는것은 미국인들의 말이다.》라고 하면서 미군의 남조선강점과 《단선단정》책동을 견결히 규탄배격하였다.
사람들은 경교장, 삼청장으로 모여들었고 련석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대표들을 찾아다니였다.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북에 다녀온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김구는 자기 친지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한편 서울로 돌아온 남북협상파세력은 회의를 열고 당면한 5.10단선반대투쟁방략을 토의확정하였다.
남조선에서의 5.10단선반대투쟁은 비합법적투쟁과 합법적인 투쟁이 서로 결합되여 고조를 이루었다. 여기에 호응한 광범한 대중의 5.10단선반대시위로 하여 말그대로 온 남녘땅은 반미반파쑈투쟁으로 들끓었다.
특히 이미 그해 4월 3일에 무장봉기를 일으킨 제주도인민들은 5.10단선을 전후하여 그 대오를 확대하고 섬안의 경찰서와 경찰지서, 선거사무소들을 습격, 파괴, 소각하고 악질경관, 주구들을 처단하여 단독선거책동을 완전히 파탄시키였다.
서울시로동자들은 5월 8일 단선반대총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호응하여 남조선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망국단선반대투쟁에 떨쳐나섰는데 선거당일에는 도처에서 각계층 인민들이 마치와 낫을 들고 경찰지서와 선거사무소, 투표소들을 들부시고 악질후보자와 경찰, 반동단체두목들을 처단하였다.
모든 사실은 5.10단선의 완전한 파탄을 의미했다.
하기에 선거를 감시한다고 하는 《유엔림시조선위원단》 성원들속에서 선거결과가 조선문제의 해결에 공헌하리라는것을 의심하는 대표도 있었고 남조선의 선거를 전국적인 선거로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는 대표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미국은 자기식의 강도적론리를 가지고있었다. 미국은 우선 선거결과를 날조해놓은 다음 친일파, 친미파, 민족반역자들로 이른바 《국회》를 구성했다.
리승만은 《이 국회에서 수립될 정부는 3.1운동으로 수립된 림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정부》, 《이 국회가 우리 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이라고 지껄여댔다.
그러자 김구는 격분을 금치 못하며 《현재의 반쪼각 정부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며 《정부를 하나 아니라 열개를 만들었대도 법적으로 조직이 안된 정부는 법통을 계승할수 없다.》고 단언했다.
김구는 유엔총회에서 괴뢰정권을 승인한데 대하여 남조선《정부》는 분단《정부》이므로 림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부》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조선에서는 괴뢰대통령취임식이 진행되고 리승만이 《초대대통령》으로 되였다.
리승만은 자칭 반일독립운동가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극구 찬양하고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을 모독한 주일공사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렬사의 법정통역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게 되자 테로범이라는 리유로 통역을 외면한 반역자였다. 리승만은 일본을 몰아내주면 조선을 미국의 위임통치령으로 내주는 조건으로 미국힘을 빌리자고 주장하다가 독립운동진영에서 쫓겨나다싶이 한 정치투기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나니 자기의 오랜 경쟁자이며 정치적적수인 김구와 같은
여기에 인디아의 이전
네루가 쓰고 다닌 모자는 인디아가 영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 그가 감옥에서 쓰고있던 모자이다. 몇차례의 감옥살이를 한 네루는 감옥밖에서도 그 모자를 벗지 않았다. 감옥안에 있으나 감옥밖에 있으나 영국의 수인과 다를바없다는 울분과
1950년에 인디아는 제헌의회에서 인디아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은 모두 네루가 쓴것과 같은 모자를 쓴 사람들이였다.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간 경력이 없는 사람은 한명도 국회의원으로 뽑히지 않았다.
그러나 남조선에서 조작된 《단독정부》는 일본식민지통치시기 일제에게 아부하고 그 하수인으로 전락되였던자들, 민족반역자로 지탄받고 처단되였어야 할 범죄자들로 구성되였으니 그 정통성은 더 말할것도 없고 그 생리자체가 반민족적, 반인민적일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6월초 보다 조직적으로 5.10단선무효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9월 하순 80여개 정당, 사회단체를 망라한 남북협상파세력은 대표협의회를 열고 통일독립촉성회를 련공통일, 평화통일을 지향해나가는 통일촉진협의회로 고치였으며 김구를
통일촉진협의회는 남조선정계와 광범한 각계각층 인민들속에서 《미군철수》, 《리승만과 그의 북벌전쟁도발책동반대》, 《친일파, 민족반역자처벌》, 《평화통일》, 《남북협상》을 위한 투쟁을 벌리였다.
김구는 통일촉진협의회 성원들과 친지들에게 조선을 바로잡을 영웅은
이렇게 되자 미국과 리승만도당은 그의 마음을 꺾어보려고 갖은 위협과 권모술수를 다 썼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김구는 남북협상과 미군철수에 대하여 일관하게 주장하였다. 이전 쏘련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1948년 중순부터 시작하여 다음해 1월 1일까지 조선주둔 쏘련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하면서 미국에 대해서도 남조선주둔 미군의 동시철수를 제의하였다.
김구는 쏘련군이 철퇴를 선포한것은 조선민족이 무엇을 갈망하고 주장하고있는가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정치행동이라고 하면서 미군주둔을 고집하는 미국을 강하게 규탄하였다.
통일촉진협의회는 경교장에서 상무위원회를 열고 김구와 김규식의 공동명의로 유엔사무총장에게 외국의 간섭이 없이 완전한 민족자결과 민주주의원칙에 의하여 조선의 통일적중앙정부를 수립하는것을 협조할데 대한 요구를 담은 편지를 보내였다.
1949년 봄 김구의 측근들은 그에게 테로분자들의 준동이 심상치 않으니 공주의 조용한 절간에 가서 은거할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끝까지 통일운동을 해야지 쉰다는것은 있을수 없다.》면서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해 6월 26일 김구의 련공통일운동에 극도의 불안을 느낀 미국은 군복입은 괴한을 시켜 그를 경교장 2층 그의 사무실에서 살해하였다.
살해범이 미군방첩대의 정보원이라는것, 범인자신이 후날 미국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였고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제거계획》 같은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미국의 가장 골치거리가 백범이였다고 증언한것은 김구살해의 주범이 누구인가를 적라라하게 립증하고있다.
괴뢰군당국에서 발표한 《범인의 진술》은 김구가 《단독정부》반대, 평화통일이름아래 공산당과 제휴, 남북정치협상에 의한 련립정부수립 기도, 미군철수 주장, 미국경제원조반대, 북조선찬양 등 불온선동을 하였기에 암살을 감행하였다는것이였다.
일제가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와 암살에 혈안이 되였지만 무사히 조국에 돌아온 그가 미국의 총탄에 해방된 조국에서 끝내 쓰러진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였다.
김구가 통일애국의 길에 한몸바친 기간은 짧았으나 70평생의 한순간에 찾은 진리는 거대하였다. 그는 실천으로 민족의
서울에는 김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국민장위원회가 조직되였다. 평소에 백범 김구를 두려워하고 극도로 미워하던 리승만은 큰 선심이나 베풀듯이 낯간지럽게 김구의 장례를 《국장》으로 할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장례주최측에서는 생전에 남조선의 《단독정부》를 통일정부로 인정하지 않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리승만의 요구를 거절하고 국민장을 치르기로 했던것이다.
1949년 7월 5일 김구의 장례식날에 남조선의 각지에서 모여든 군중은 수십만에 달하였다. 군중들은 백범추도가를 부르며 나라의 통일독립투쟁에
백범 김구는 련공애국의 길에서 북과 남의 인민들이 다같이
1990년 평양의 쑥섬에 건립된 통일전선탑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졌고 그는 조국통일상수상자로 민족사에 기록되였다. 2000년 6월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장소였던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는 백범 김구선생회고모임이 열리고 김구의 동향친구와 련석회의당시 김구의
김구가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되는 때에 남조선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그는
사람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기도록 삶을 빛내이는것은 바란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품어주고 보살펴주고 내세워줄뿐아니라 력사의 갈피에 기록될 일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민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