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손전화홈페지열람기
날자별열람


제3회

김구편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까지


1945년 8월 15일 정오, 왜왕 히로히또는 일본의 완전한 패배를 인정하면서 무조건 항복한다는것을 라지오중대방송으로 내불었다. 그처럼 기승을 부리던 강도 일제는 패망하고 조선은 해방되였다.

다른 나라 경내에서 조국해방소식에 접한 림정은 입국문제를 두고 신중한 토의를 거듭하였다. 그러던 림정에 새로운 장애가 나섰다. 미군이 남조선에 들어와 군정의 실시를 포고하였던것이다. 이에 따라 림정인사들의 귀국문제는 미군정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림정은 미군정에 림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할것을 요구하면서 입국후에 국내치안유지를 림시정부에 맡기며 미군정은 정치활동에 간섭하지 말데 대한 4대조건을 들이대였다.

8.15직후의 남조선형세를 가늠해보던 미국은 림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할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4대조건을 거부하였으며 김구가 림정의 집단귀국을 미군정당국에 간청해나섰지만 이것도 승인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손때묻혀 키운 리승만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림정을 인정하여 귀국시키는 경우 리승만을 내세우려는 저들의 기도가 합법적인 도전에 직면할수도 있다고 미국은 타산했던것이다.

미국은 림시정부의 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며 귀국한 이후에도 하나의 정부로서의 특권 같은것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할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군사령부의 요구를 놓고 론난이 벌어졌으며 결과 3주일이나 출발이 지연되였다. 김구는 어쩔수없이 서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게 되여 림정의 공식적이며 집단적인 귀국은 파탄되였고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림정의 요인들만 중국항공기편으로 중경을 떠나 상해로 나온 다음 상해에서 개인자격으로 11월 23일과 12월 1일 2개 조로 나뉘여 미군수송기편으로 귀국의 길에 올랐다.

림정관계자들은 이렇게 귀국은 하였으나 한많고 설음에 찼던 이국의 망명살이에서 풀려났다는 안도의 숨을 내쉴새없이 남조선사회의 파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림정인사들의 귀국이 알려지자 많은 시민들과 기자들이 김구의 숙소인 경교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날 기자들의 첫 질문은 38゜선문제였다. 김구의 대답은 신중했으나 한편 너무나 순진한것이였다.

《나는 조선이 남북의 두 점령지대로 분렬되여있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차 이 구분은 철페되리라고 믿는다. 미국과 쏘련은 우리 나라를 위하여 반드시 옳은 일을 하여줄것이다.》

김구는 해방이 됐으나 인민들의 생활은 더 피페해지고 모리배와 탐관오리들이 극성을 부리는 현실을 개탄했다. 왜놈통치시대에 순사질을 하던자가 경찰서장을 하는 등 친일파들이 오히려 활개를 치는 현실에 크게 실망을 했다. 그가 독립투쟁을 하면서 그렸던 조국의 모습이 아니였던것이다.

해방된 해의 12월말에 남조선땅에는 반탁이라는 랭혹한 회오리가 들이닥쳤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쏘, 미, 영 3국외상회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후 국제적으로 처리하여야 할 일련의 문제들을 토의하면서 조선문제를 토의결정하였다.

회의에서 미국측은 조선에서 쏘미 량군이 군정을 실시하며 그것이 끝난 다음 10년동안 쏘, 미, 영, 중 4개국이 《신탁통치》를 하여야 한다는 제안을 들고나왔다. 원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대조선정책으로 제기한것이며 미국은 그것을 테헤란회담과 얄따회담에서 거듭 주장하여왔다.

그들은 조선사람은 《자치》할 능력이 없기때문에 군정통치기간이 끝난 다음에도 쏘, 미, 영, 중 4개국의 대표들로 조선의 《립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행사하는 그 무슨 기관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미국측의 이 제안은 사실상 해방된 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자는것이나 같은것이였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쏘련측의 정당한 주장과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의 협의하에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하며 조선이 독립국가로서 민주주의적, 자주적발전을 이룩할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쏘, 미, 영, 중 4개국이 5년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후견을 실시한다는 결정이 채택되게 되였다.

그런데 문제는 남조선에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서 결정한 우리 나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의 협의하에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미국이 류포시킨 《신탁통치》라는 용어와 《5년》이라는 기한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는데 있었다.

미국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저들의 야망을 실현할수 없게 되자 3상회의결정을 쏘련이 내놓은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위한 결정인듯이 외곡선전하였던것이다.

남조선의 정치세력들은 폭탄을 맞은것처럼 혼란에 빠졌다. 미국과 쏘련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미고있다는 비난이 비발쳤다. 그가운데서도 김구의 언행이 가장 격렬했다.

해방전부터 국제공동관리론을 반대해온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림시정부세력은 즉각 강력한 반탁운동을 폈다. 남조선의 영구강점을 노린 미국의 계략에 넘어간 남조선의 이른바 《애국지사》들은 식민지로부터의 전진이 아니라 식민지에로의 복귀나 다름없는 국치이라고 하면서 반탁운동에 열중하였다.

림정세력의 반탁운동은 함께 반탁로선에 선 리승만친미매국세력에 큰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기고만장해진 리승만은 1946년 6월에 지방순회강연을 하던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쪽에서만이라도 림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력설했다. 이틀후에 전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강연회에서도 정읍에서 한 연설과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리승만의 이런 엄청난 발언은 미국과의 사전교감의 결과였다. 당시 미제는 남조선에서의 《단선단정》안을 검토하고있었던것이다.

리승만의 《정읍발언》은 벌집을 쑤셔놓은듯 한 파장을 일으켰다. 좌익정당들과 단체들은 일제히 《반동거두 리승만은 조급한 정권욕과 광포한 파쑈리념을 더 참을수 없어 다시 이러한 폭언을 토한것이다.》라는 등 신랄한 언사로 리승만을 공격했다.

좌익뿐만이 아니였다. 김구의 한독당은 《요즘 항간에는 〈단독정부〉수립설이 류포되고있으나 우리 당으로서는 이에 찬성할수 없다. 38゜선의 장벽이 연장되는 한 경제상파멸과 민족이 격리되여 력사적인 큰 비극을 자아내고있음은 민족통일에도 큰 방해라 아니할수 없다. 앞으로 이 상태가 그대로 계속되는 때에는 민족자체의 생존을 위하여 그대로 방관할수 없을것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의 책동에 의해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이 조작되였고 1948년 2월 유엔소총회에서는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안이 가결되였다. 조선의 분렬과 남조선의 영구강점을 노린 미국의 음모는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있었다.

김구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강력하게 항의하며 유엔소총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리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1948년 1월 남조선에 기여든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은 남조선정계지도자들의 의견을 청취한답시고 돌아쳤다. 매국노 리승만은 남조선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림정계와 통일진보단체들은 《단선단정》을 결사반대했다.

당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남조선에서만 유엔감시하의 단독선거를 실시할데 대한 유엔소총회의 제안에 대한 반대여론은 과반수에 달했다.

그때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두고 고뇌하고있는 김구를 격분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그해 3월초부터 진행되고있던 장덕수암살사건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하라는 미군정재판소의 소환장이 김구에게 떨어졌던것이다.

김구는 하는수없이 미군정청회의실에서 열린 재판정에 출두했다.

민심의 견지에서 보나 민족통일에 대한 지향으로 보나 리승만은 자기가 김구를 앞설수 없다는 불안에 사로잡혀있었다. 저들이 손때묻혀 키운 주구 리승만의 위태로운 정치적립지를 간파한 미국은 1947년 12월초에 발생한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암살사건을 계기로 그 혐의를 김구와 한독당에 들씌우고 그가 여러차례 검찰에 소환되여 취조받게 함으로써 그의 인기를 떨구고 모욕을 주었다.

김구는 그때 겪은 일이 너무도 부끄럽고 원통하여 남들에게 이야기도 못했다고 한다.

이무렵 김구, 조소앙, 조완구, 김규식, 홍명희 등 7명의 인사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서에서 그들은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하여 국제적승인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한다는 리승만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반쪽강토에 정부를 수립하려는 선거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이어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련맹은 행동통일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의 조종밑에 반통일세력들의 《단선단정》책동이 극도에 달하게 되고 분단위협이 시시각각 밀려오자 통일정부수립을 지지해온 세력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사실 해방후 서울에 돌아와 경교장에 거처를 정했으나 그가 택한 길은 의연히 반공의 길이였다.

김구가 1946년 2월 리승만이 총재로 있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총재로, 미군정자문기관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활동한것도 그의 이런 반공의식에 기초한것이였다.

하지만 리승만의 《정읍발언》후 반기를 들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로심초사해온 애국자의 민족적량심은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끌고가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단독정부》를 조작하여 우리 나라를 둘로 갈라놓으려는 미국과 리승만도당의 책동을 용납할수 없었다.

엄중한 사태앞에서 그는 민족적량심상 미국과 리승만의 민족분렬을 자초할 《단선단정》음모책동에 동조할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통일독립을 위한 출로도 찾지 못한터여서 몹시 고민에 빠져있었다.

반공관념에 사로잡혀있었던 김구로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하고있는 북과 련합하여 이 난국을 타개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있었다.

이런 때 그는 북으로부터 남북협상제의를 받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당면한 조치의 하나로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를 소집할것을 몸소 발기하시였으며 남조선에 직접 련락원을 파견하시여 김구를 위시한 림정계인사들과 각계 인사들에게 남북협상제안을 전달하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남북협상제안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김구를 비롯한 림정세력에게는 그야말로 어둠속의 빛과 같이 소중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북협상방안에 호응해나선 김구, 김규식에게 1948년 1월 중순 친히 편지를 보내시였다.

이에 고무된 김구, 김규식은 공동명의로 위대한 수령님께 드리는 회답서한에서 남북지도자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했으면 하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면서도 북의 공산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다 해소할수 없었던 김구와 김규식은 북의 진의를 타진하기 위해 밀사 두사람을 보내기로 했다. 련석회의개최를 불과 한주일 남짓하게 남겨놓은 시점의 밀사파견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구와 김규식이 들여보낸 밀사들을 친히 만나주시고 과거지사를 우려하는 김구, 김규식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시여 우리는 지난 기간 나라와 민족앞에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현재 그것을 뉘우치고 잘 나오면 과거를 묻지 않는다고, 이것은 우리가 일본놈들을 반대하여 산에서 싸울 때부터 견지한 시종일관한 립장이며 오늘도 그 립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제침략자들과 리승만괴뢰도당의 반인민적책동으로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영원히 둘로 갈라질 위험에 처해있는 이때 김구선생과 김규식선생이 유엔의 비법적결정을 반대하고 미군철퇴를 주장하며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거부하고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주장하고있는데 무엇때문에 과거를 묻겠는가, 지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비운에 처해있는데 그것을 타개해야지 지나간 과거를 론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는 최근 김구선생과 김규식선생이 담화와 성명을 통하여 표명한 립장을 잘 알고있다고, 우리는 김구선생이나 김규식선생과 과거를 론의하려는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앞에 가로놓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기꺼이 손을 잡을것이라고 뜨거운 동포애의 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을 비롯한 우익정객들의 충격은 컸다. 반공으로 살아온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인생말년에 이른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한점의 불티같이 깜박이는 우국지심을 귀중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품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믿음과 대해같은 도량에 가슴이 젖어들었다.

이미전부터 왜놈들이 그 존함만 들어도 벌벌 떨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끝없이 존경하고 흠모하던 김구는 그이의 부르심에 감격을 금치 못해하며 평양련석회의에 참가할 굳은 결심을 다지게 되였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련석회의참가소식에 당황해난 친미반동세력들은 북조선공산주의자들의 기만정책에 속지 말라느니, 북조선에 가면 다 잡아가둔다느니 하면서 련석회의참가를 필사적으로 방해해나섰고 종파분자들은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과거를 거들면서 《그들의 반공죄과때문에 평양에 가면 억류당할것》이라는 요언을 퍼뜨리였다.

한편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련석회의참가에 한생의 신조와 명예 지어 목숨까지도 걸었던 김구는 자기의 비장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남들이 갈라놓은 38゜선에 동족끼리 말도 한번 못하고마는 미욱한 민족이란 말을 듣기 싫다.》, 《만일 내가 북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김구는 통일독립을 위해서 끝까지 투쟁하였다고 3천만동포에게 전하여주기 바란다.》

김구의 이런 북행선언을 통해 알수 있듯이 김구는 자기의 북행길이 겨레의 한결같은 념원대로 미국과 리승만의 《단선단정》책동을 막고 북과 남의 통일정부수립의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김구의 평양행이 알려지자 경교장은 이를 만류하려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김구가 북으로 떠나는 날에는 이른새벽부터 미국과 리승만의 사촉을 받은 300여명의 극우익깡패들이 경교장을 포위하였고 떠나려는 김구의 자동차앞에 수십명이 드러눕는 추태까지 부리였다. 반동들은 자동차바퀴의 공기를 아예 뽑아버리고 흩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14시가 되여서야 김구일행은 뒤담을 넘어 경교장을 빠져나올수 있었다.

경교장에 있는 김구의 사무실에는 서산대사가 쓴 시구가 걸려있었다.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말아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뒤사람의 리정표가 되리니


백범 김구가 사생결단의 의지로 자못 엄숙하게 38゜선을 넘어서던 그날은 1948년 4월 19일, 북에서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가 시작된 날이였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