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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김구편

상해에서 중경까지


1919년 4월초 김구는 중국의 상해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상해에 도착한 김구는 상해림정에 발을 붙이게 되였다. 대부분이 현지에 있지도 않는 인물들로 조직된 림정은 간판은 내걸렸지만 정부청사라는데서는 몇사람이 낡아빠진 책상 하나씩 차지하고 방을 지키였으며 김구는 접수, 경비를 맡아 처리하였다.

그는 몇달후에는 림정의 경찰수장격인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였다. 1920년 1월에 일제경찰이 작성한 문건에는 림시정부 요인가운데서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다섯사람을 꼽았는데 그중에 김구도 속해있었다. 그는 총장은 물론 차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에게는 안창호와 리동휘 다음가는 실력자로 인식되여있었던것이다.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거국적인 정부》라고 자칭하던 상해림시정부내에서는 자치파니, 독립파니 하는 파벌을 이루고 서로 치렬한 감투싸움을 벌리였다. 림정의 수뇌자리가 빈번히 교체된것도 그때문이였다. 지어는 한해에 두번씩 내각개조놀음이 벌어진 때도 있었다.

림시정부의 요인들은 빠리강화회의때 조선독립청원서가 미국을 비롯한 협상국대표들의 방해책동으로 회의의정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던 사실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을 대신 민족의 존엄을 훼손시키면서까지 비굴하기 짝이 없는 청원놀음을 계속하였다.

심지어 미국회 의원 동양시찰단이라는것이 상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왔을 때에는 국내에 있는 친미사대주의자들을 부추겨 미국회 의원들에게 인삼과 은제품을 비롯한 여러가지 값비싼 물건들을 섬겨바치게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런 림시정부조차도 1920년대 중엽에 와서는 자금난으로 그 허울마저 유지하기 어렵게 되였으며 나중에는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에 얹혀다니면서 구차스럽게 지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 때에 림정의 국무위원이 된 김구는 림정을 종전의 무맥하고 맹목적인 존재로부터 반일투쟁의 자세로 개편한다고 선포했다.

림정의 이름으로 일제의 고위인물들에 대한 암살을 단행하면 그 존재가 내외에 알려지는 동시에 림정에 대한 지지자, 동정자도 많아지겠으니 그이상 좋은 일이 또 어데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어깨를 늘어뜨렸던 림정의 법통고수파들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어 상해에서 김구를 단장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이 조직되였고 그 서막이 연출되였다.

1932년 1월초 애국청년 리봉창이 폭탄을 차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폭탄 두개는 김구가 중국군장교와 군인을 통해서 구입한것이였다.

도꾜궁성의 앵전문밖에까지 접근한 리봉창은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벌리는 륙군관병식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는 왜왕의 쌍두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서 폭탄은 왜왕을 때리지 못했다. 리봉창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여 도꾜의 지하감방에 갇혔다가 그해 10월에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리봉창의 희생적인 의거는 조선과 일본은 물론 중국대륙에도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한편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침략군 상해파견군 사령관 등을 폭살시킨 홍구공원사건은 다시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홍구공원사건이 있은 후 중국사회계의 명사들이 련이어 이 사건의 조직자이며 배후조종자인 김구에게 위로면회를 청해오거나 위로금을 보내왔다.

이등박문을 격살한 안중근이 민족적영웅으로 찬양되고 리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국내는 물론 미국, 연해주, 만주 등지에 널려있던 온 교포사회가 법석 끓고있던 시대적분위기를 타고 김구의 테로주의는 적개심에 불타는 조선의 많은 청년들을 현혹시키였다.

그러나 한두번의 테로는 일제와 대결하려는 조선민족의 반일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하고 중국의 광범한 계층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단편적인 사변으로 될뿐 일제에게 결정적타격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더 큰 탄압과 보복의 구실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일제는 림정계요인들에 대한 수색과 감시를 더욱 강화하고 김구에게는 60만원의 현상금까지 걸고 그를 체포하려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당시 로동자의 하루임금이 1원이였던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아닐수 없었다.

김구를 비롯한 림정세력은 하는수없이 중국의 여기저기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림정은 거처지를 빈번하게 옮기였다. 국민당정부를 따라 소재지를 자꾸 바꾸다보니 간판이나 겨우 유지할 정도로 고달픈 처지에 있었다. 어떤 때에는 짐보따리를 풀어보지도 못한채 려관구석에 앉아있다가 전쟁의 참화를 피해 다른 고장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끊임없는 파쟁과 개각으로 진통을 겪는 림시정부는 초보적인 생존조건과 신변의 위험때문에도 고충을 겪었다.

오죽했으면 후날 김구가 경제적곤난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도 막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군월급이 20원미만이였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번 송사를 당하기도 하였다, 나는 림정청사마루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거지중에서도 상거지였다고 하였겠는가.

류랑과정에 김구는 괴한의 총격을 받아 죽음직전에 다달은적도 있었다.

장사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4당 대표들이 모여앉아 통합문제를 놓고 토의를 하였다. 그때 종파분자들의 충동을 받은 한 청년이 회의장에 뛰여들어 권총을 란사하는통에 소동이 일어 회의는 류산되고말았는데 이때 김구는 치명상을 입었다.

의사는 진단후 가망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했다가 세시간이 지나도록 숨을 거두지 않자 그제서야 치료를 시작했다. 김구는 1개월간의 입원치료를 받고 회복되였으나 가슴에 받은 탄알자리로 인한 신경증으로 손을 떨게 되였으며 그때부터 붓글씨를 쓰면 획선이 꼬불꼬불 파상선으로 되였다고 한다.

이처럼 파쟁분자들로부터 테로를 당한 때로부터 그의 반공사상이 더 굳어졌다고 할수 있다.

당시 김구를 비롯한 우익민족주의자들이 가지고있던 격렬한 반공의식은 진짜공산주의와 가짜공산주의를 식별하지 못한데 기인한것이였다.

당시 김구는 《조선에 쏘베트정부를 수립하여 쏘련의 가맹공화국으로 되여야 한다.》는 망발까지 줴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망동을 부린 가짜공산주의자들의 언행을 보고 들으면서 반공을 자신의 리념처럼 받아들였고 민족주의세력을 덮어놓고 배척모해하는 《공산당》을 모조리 잡아죽이겠다고 벼르면서 극단적인 보복행동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김구는 반공두목이라는 비난과 조소를 받게 되였던것이다.

파쟁과 남의 집 곁방살이로 시달리며 방황하던 김구를 비롯한 림정의 민족주의인사들에게 재생의 빛발이 비쳐들었다.

1937년 6월 4일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거느리시고 일제의 삼엄한 경계선을 뚫고 조국으로 진군하시여 보천보를 들이친 소식은 국내외에 폭풍같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국신문들을 통해 보천보전투소식에 접한 림정계민족주의인사들은 얼마후 국내의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입수하여 보천보전투의 상세한 소식을 알고 통쾌감과 민족적자부심으로 흥분을 삭이지 못했다.

김구는 이미전부터 무력항쟁에 관심을 가지고있었는데 그가 1920년대초에 조직한 로병회라는 단체도 규모는 보잘것없지만 실은 무력항쟁을 지향한 단체였다고 한다. 그는 무저항주의적인 실력배양이나 외교적인 방법으로 조선독립을 성사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의 한은 군대를 큼직하게 꾸려가지고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벌리지 못하는것이였다고 한다. 그러다나니 김일성장군님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있었는데 보천보전투소식을 전해듣자 몹시 흥분되였던것이다.

김구에게 있어서 보천보충격은 민족이 낳은 절세의 위인에 대한 매혹과 흠모심을 간직하게 한 계기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였다.

《안우생의 말에 의하면 김구도 보천보전투에서 이만저만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안우생은 오래동안 상해림시정부를 따라다니면서 김구의 서기로 있었다.

어느날 김구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보천보전투소식을 읽게 되였는데 어찌나 흥분했던지 창문을 열어제끼고 배달민족은 살아있다고 몇번이나 고함을 질렀다는것이다.

김구는 그때 안우생에게 지금은 시국이 험한 때이다, 중일전쟁이 림박하니 운동을 한다던 사람들은 뒤골목으로 다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판국에 김일성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까지 쳐들어가서 왜놈들을 정면으로 후려친것은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이제는 우리 림시정부가 김일성장군을 후원해야겠다, 수일내에 백두산쪽으로 사람을 보내자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비단 김구 한사람만이 아닌 림정계요인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였다.

이미 안창호와 길림행을 같이했던 림정인사들로부터 김일성장군님의 걸출한 위인상에 대해 전해들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보천보전투승리소식이야말로 조선민족이 낳은 전설적위인에 대한 실증이고 력사적확인이였던것이다.

그 당시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지지와 동경을 표시하면서 련계를 절절히 바란것은 림정뿐이 아니였다.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을 비롯한 중국관내의 반일단체들과 조선인운동자들은 물론 려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을 비롯한 국내의 애국인사들도 조국해방의 기본력량인 김일성장군님부대와 련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미 1940년대초에 김일성장군님부대와의 련계를 위해 밀사를 파견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던 김구는 1944년 12월 중순 림정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림정의 인사를 전해드리고 림정의 차후행동방향을 통보하기 위해 김일성장군님께 다시 밀사를 파견하려는 자기의 결심을 피력하였다.

김구는 조선독립운동의 주류세력을 이루고있으며 2천만겨레의 일치한 흠모를 받고계시는 김일성장군님과 한번의 편지거래도 없이 《3.1의 피의 결실》이니, 《법통정부》니 하는 공념불만 외우고있으니 이 얼마나 게면쩍은 일인가고 하면서 김일성장군님께 가까운 시일안으로 첫 편지를 드리는 련락원을 파견하자고 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의 일치한 찬동속에 김구는 조소앙, 엄항섭, 최동오 세사람을 편지초안작성위원으로 정하였다.

편지에서 그들은 조종의 산 백두산에 사령부를 두고계시는 김일성장군님께 삼가 이 편지를 올린다고 하면서 우리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거느리시고 만주광야와 백두산일대 북부조선의 넓은 지역에서 백만관동군과 일만군경을 상대로 혈투를 벌리시며 올린 그 혁혁한 전과에 고무되여 조국해방의 희망을 잃지 않고 림시정부법통을 고수해왔다고, 한데 겨우 몇십명밖에 안되는 망명집단으로서의 우리 중경림시정부는 조국해방의 최후결전에 림할 힘도 위신도 없다는것을 자인하고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김일성장군의 조국해방운동대렬에 합류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였다고, 우리의 밀사를 보내오니 김일성장군님께서 접견하시고 림정에 대한 련계와 합작의 방도를 명시한 회신을 보내주시기 바란다고 하였다.

편지는 안우생이 명주천에 붓글씨로 두통 써서 림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의 도장을 찍은 다음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리충모의 웃옷과 바지에 각각 한통씩 넣고 바느질로 꿰매였다고 한다.

밀사의 출발준비와 출발시일은 김구외 몇사람만 아는 극비에 붙였다. 밀사는 1945년 새해 첫새벽에 백두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밀사를 백두산에로 떠나보낸 김구를 비롯한 림정계인사들은 미구에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민족독립세력의 일익으로 조국해방의 결전에 참여할수 있으리라는 부푼 희망과 기대를 안고 해방년을 맞이하였다.

그때로부터 몇해후에 이루어진 김구뿐만이 아니라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오하영, 최동오를 비롯한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의 련공에로의 인생전환이 이때에 벌써 그 기초가 닦아졌다고 보는것이 력사의 순리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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