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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김구편




경력

•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교외 운방터골에서 출생.

• 1894년 갑오농민전쟁시기 해주에서 농민봉기군에 참가.

• 1896년 치하포에서 왜놈장교를 처단.

• 1910년 반일비밀결사 신민회 가담.

• 1911년 105인사건 혐의자로 체포.

• 1914년 황해도일대에서 농민계몽운동.

• 1919년 상해망명, 상해림정의 경무국장, 내무총장.

• 1928년 한국독립당 조직.

• 1932년 한인애국단 조직.

• 1946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 1948년 4월 남북련석회의 참가.

• 1949년 6월 26일 미제와 그 주구들에 의해 피살.

• 1990년 조국통일상 수상.


백범 김구, 파란많던 조선의 근현대사에 큰 자욱을 새긴 풍운의 사나이, 아마도 조선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에도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통일애국인사들이 적지 않은데 김구도 바로 그런 사람들중의 한사람이다.

해방후 통일이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싸움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던 량심이 하나가 되는것이라고, 분단문제를 권력유지에 리용하는 놈들은 민족반역자, 인륜반역자라고 하면서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미국과 리승만괴뢰도당을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백범 김구.

후세는 매 사람에게 그에 알맞는 경의를 표시해준다고 하였다.

여기서 력동적이면서도 파란많던 그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그가 어떻게 되여 세상을 떠난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남녘겨레뿐아니라 우리 공화국인민들의 기억속에도 살아있는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


《운양》호사건을 조작한 횡포무도한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이라는 섬나라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1876년 7월 중순 황해도 해주근방의 운방터골에서 어린 생명이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났다. 인간이 태여날 때 울음을 터뜨리는것은 앞날의 고행에 대한 예고라는 말을 립증이나 하듯 새 생명의 출생은 류례없는 난산이였다.

진통이 있은지 한주일가까이 되도록 아이는 태여나지 않았고 산모의 생명이 위험해졌다. 그러자 친척들은 산모에게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꼭대기에 올라가 소울음소리를 내라고 했다. 그런 뒤에야 아기가 태여났다.

몸집도 작은데다가 어린 나이에 고된 일로 많은 고생을 하다가 시집을 가서 겨우 본 아들이였는데 젖마저 부족하여 그의 어머니는 암죽을 끓여먹이면서 차라리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군 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바로 김구였다. 어릴 때 이름은 김창암.

석전경우로 집약되는 황해도사람의 기질을 체현한듯 어릴때부터 부지런하고 인내성이 강했다고 한다.

김구는 정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당에서 공부한것이 전부였는데 그래도 향학열이 매우 높았다.

김구는 이악하게 공부하여 17살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 돈이 없어 좁쌀을 지고 해주에 가서 과거시험을 쳤는데 돈에 의해 과거급제와 탈락이 결정되는 당시 사회환경에 환멸을 느끼고 붓을 꺾어버렸다고 한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인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략탈하는 부패한 봉건통치배들과 우리 나라를 지배하려는 외래침략세력을 반대하는 반봉건반침략적성격을 띤 우리 인민들의 투쟁이 전국각지에서 세차게 일어났는데 전라도 고부농민들이 일으킨 폭동이 대표적이였다.

당시 갓 천도교인이 된 김구는 갑오농민전쟁에 몸을 잠그게 되였다. 농민군에는 천도교도들뿐아니라 봉건적페단으로 생활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다.

선봉장 김구의 산포수부대는 해주성을 공격하는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되였다. 그가 선봉장으로 된것은 나이는 어리지만 평소에 군사학에 대한 조예가 있었기때문이였고 그의 부대가 주력이 된것은 순전히 산포수들로 꾸려져있었다는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그는 말에 올라 선봉이라는 사령기를 잡고 해주성으로 전진하는 농민군의 선두에 섰다. 5시간의 대혈전을 벌렸으나 외세의 간섭과 화력의 렬세로 무참하게 패하고말았다.

갑오농민전쟁이 실패한 후 전전긍긍하던 김구는 어느날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였다. 일본정부의 사촉을 받은 일본군대와 경찰대, 깡패들이 궁에 란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사태가 벌어졌던것이다.

명성황후살해사실이 알려지면서 왜놈들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전국적으로 끓어올랐고 곳곳에서 의병투쟁이 벌어졌다.

을미사변의 원쑤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김구는 어느날 안악에서 동북쪽으로 사십리쯤 떨어진 작은 포구인 치하포에서 조선사람으로 변장한 일본헌병 중위놈과 맞다들게 되였다.

분격을 참을수 없어 침략자 왜놈중위를 맨손으로 때려죽인 그는 놈이 가지고있던 천냥가량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한 후 부근의 한 집의 담벽에 국모를 시해한 원쑤를 갚기 위해 이 왜놈을 죽였다는 글을 적고는 피신하라는 친구의 권유도 마다하고 집으로 향하였다.

치하포사건은 을미사변에 따른 순간적의분으로 벌어진 돌발적인 행동이였지만 김구에게는 일생을 반일에 바치게 한 상징적사건이였다.

그는 해주감옥에 갇혔는데 이것이 그의 첫 감옥생활이였다. 김구는 몇달후 인천감옥으로 이감됐다. 갑오개혁이후 외국인관련사건을 다루는 특별재판소가 인천에 생겼기때문이였다.

법정에서 왜놈중위를 살해한것을 당당히 시인한 김구는 옆의자에 앉아 심문과정을 지켜보던 일본경찰에게 이렇게 웨쳤다.

《이 개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했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여, 또 살면 온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안 남기고 모조리 죽여버려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

와다나베라는 일본경찰은 김구의 서슬푸른 기상에 질겁하여 그 자리에서 황황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날부터 김구는 수인들속에서 우두머리가 되였다. 《중전마마의 복수를 위해 왜놈을 때려죽인 의로운 인간》인 김구를 보려고 면회를 청하는 사람들도 날이 갈수록 늘었다.

1896년 11월말 중죄인 5명과 함께 김구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종황제가 사형을 중지하라는 어명을 내리였던것이다.

김구는 기약없는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문맹의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억울하게 갇혀있는 사람들의 송사를 무료로 맡아주었다.

한편 왜놈들은 김구를 기어이 죽이려고 봉건정부를 압박하며 발악하였다. 감옥에서 값없이 죽을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기회를 노리던 김구는 드디여 탈옥에 성공하였다.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것은 바로 탈옥후의 도피생활때였다.

1905년 11월 일제는 대포와 총칼로 황궁을 포위하고 고종황제를 협박하다 못해 매국노들을 앞세워 나라의 최고주권자인 황제의 승인, 수표, 국새날인도 없는 불법무법의 《을사5조약》을 날조하였다.

《을사5조약》이 날조되자 김구는 진남포청년회 총무의 자격으로 서울에 올라와 조약파기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는데 그것은 그가 전국적인 규모의 사회운동에 관여하는 계기가 되였으며 이 과정에 이름난 인사들과 인연을 맺게 되였다.

《을사5조약》날조라는 치욕적인 위기상황속에서 학교설립운동은 일종의 애국운동으로 전개되였다.

안악으로 옮겨온 김구는 양산학교를 기반으로 하여 황해도전체의 교육계인사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양산학교에서 야학부도 맡아서 가르쳤다. 야학부에는 나무군아이들이 다녔는데 김구는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성심성의로 가르쳤다.

그후 황해도지역 교육총회의 학무총감이 된 김구는 황해도일대를 순회하면서 지방유지들을 만났고 환등기를 가지고 다니며 계몽강연도 하였다.

당시 학교설립운동에는 허울뿐인 봉건조정도 적극적이였다. 이러한 추세를 위험시한 통감부는 마침내 봉건조정으로 하여금 이른바 《사립학교령》을 제정하도록 강요하고 사립학교설립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07년 서울에서 반일적인 비밀정치단체인 신민회가 결성되였는데 그에 관여했던 김구는 그만 일제의 마수에 걸려 체포되였다.

서대문감옥에서 일제교형리들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그의 애국심과 항일정신은 더욱 굳어졌다.

어느날 출옥할 가능성이 보이자 그는 자기의 이름을 구라고 짓고 호를 백범이라고 지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자기가 이름을 고친것은 일본의 동화정책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였고 백정의 백과 범부의 범자를 따서 호를 백범이라고 한것은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정도의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에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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