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19회


19


봄절기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날씨는 상당히 맵짰다.

영혜는 몸에 꼭 붙는 미색외투에 하르르한 목수건을 걸치고 아침일찍 공장에 출근했다.

부지런한 명금이가 벌써 복도청소를 시작하고있을뿐 누구도 나온 사람은 없는것 같다.

2층으로 올라가던 영혜는 밥쟁반을 들고 울상이 되여 내려오는 식당근무처녀와 마주쳤다.

《연구사선생이 또 식사를 안한 모양이구나.》

《벌써 몇번째인지 몰라요. 식어서 내려왔다 덥혀올려갔다.…》

《아니, 어째서?》

《콤퓨터에 한번 마주앉으면 굳어진 조각상처럼 움직일줄 모르는군요. 계산이 끝나기 전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아요, 아무리 말해도 듣지 못하고… 그런 땐 입도 귀도 다 눈이 되고마는지…》

《그래?…》

《정말 무서운 정열가예요. 매일 밤 꼬박 불이 켜져있는걸 보면 도무지 잠이라는걸 모르는 사람같애요.》

《아니, 그러다 앓아눕지 않겠니?》

《글쎄 말이예요. 지배인동지가 이런 때일수록 영양보충이 중요하다면서 매끼 고기와 닭알을 빠지지 않게 보장해주긴 하는데… 제때에 식사를 해야 말이지요? 정말 속상해.》

처녀는 호― 한숨을 쉬며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갔다.

영혜는 생각깊은 눈길로 연구사의 방문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느닷없이 이름 못할 충동이 가슴에 차올랐다. 숭고한 목적을 위해 침식도 잊고 분투하는 그를 어떻게든 도와주고싶은 의협심 아니, 의협심이라기보다 그를 위해 무엇이든 깡그리 바치고싶은 헌신의 갈망이였다.

하지만 어떻게?…

영혜는 이때처럼 대학공부를 못한 자신이 한스러워본적은 없었다. 학력으로 그와 나란히 설수 없고 지식으로 그를 도울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을수록 자격지심은 더해갔다. 허나 생활적인 면에서라도 사심없이 그를 돕고싶었다.

이때 연구사의 방문이 열리며 세면수건을 걸친 림정우가 나왔다.

영혜는 당황해서 《저… 아침식사 아니, 밤새 안녕하셨어요?》하고 엎어말이인사를 했다.

림정우는 피곤이 가득 실린 부석부석한 얼굴을 비비며 건숭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세면장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걸음이 휘친거리는것 같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영혜는 련민의 정이 더해지는것을 느끼며 잠시 서있다가 급히 연구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면하고 식사를 하는 동안 방안청소를 하려는것이였다.

물걸레질을 하느라 책상우를 정돈하던 그는 구석쪽에서 물고뿌와 함께 속이 빈 아스피린봉지를 발견하였다.

(아니, 이게 뭐야? 연구사동무가 앓고있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것 같았다.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일을 하는 연구사가 아닌가, 대책이 있어야 해.

부리나케 방걸레를 치고 침대밑의 빨래감을 걷어안고 일어나는데 림정우가 들어섰다.

《영혜동무가?》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만이 아닌 질책과 나무람이 어려있는듯싶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난 자신이 그 누구의 부담이 되는걸 좋아하지 않소.》

《그래요? 자기 울타리가 좁다고 날 비판할 때 같아선 진짜사나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 옹졸하군요.》

《허, 내가 옹졸하다?》

《그럼요. 난 군인출신이예요. 전우들과 생사운명을 함께 하는데 버릇됐구 네것내것 따로없이 살아왔어요. 연구사동지는 장군님의 리상을 실현할 하나의 목적으로 우리와 한전호에서 싸우는 귀중한 전우예요. 그러니 이제부터 제가 이 방의 청소와 관리를 전적으로 도맡아하는데 대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거예요.》

영혜의 도도하고 담찬 어조에 림정우는 입만 벙긋하고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두손으로 숱많은 앞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영혜는 때를 놓칠세라 계속했다.

《그리고 동지로서 충고합시다. 왜 자신의 건강에 대해 그리도 무책임하세요?》

《예?》

《연구사동진 자신이 시대앞에 지니고있는 무거운 사명을 다 아는것 같지 못해요. 식사도 제때에 안하고 휴식도 전페하고 감기에 걸려도 몰래 앓고… 그러다 병이 심해지면…》

《아니, 몰래 앓는다는건 또 무슨 소리요?》

《아니라는건 또 무슨 소리예요? 이 약봉지가 다 말해주는데두요?》

《아, 그것 말이요?》

림정우는 좀 당황한 표정이 되여 머밋거리더니 할수 없다는듯 실토했다.

《사실 그 약은 감기때문이 아니라 수면억제를 위해 쓴거요.》

《수면…억제?》

영혜는 귀에 선 말이여서 그 뜻을 인차 깨닫지 못했다. 수면제라는 말은 들었어도 수면억제라는 말은 처음 듣는것이다.

《졸음이 오거나 머리가 무거울 때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맑은 정신을 되찾을수 있소. 그래서…》

《아니, 그렇게 강제적방법으로 잠을 억제하면 건강이 어떻게 됩니까?》

《어찌겠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제품개발의 열쇠를 찾을수 없으니…》

《하지만 그건 너무해요. 전 지배인동지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겠어요.》

《필요없는 일이요. 지배인동지는 이미 알고있소.》

영혜는 깜짝 놀랐다.

《예? 그런데도 대책이 없다는거예요?》

림정우는 책상서랍에서 자주빛가루봉지 한개를 꺼내보였다.

《왜 없겠소? 이건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는 뇌부활제요. 지배인동지가 의학과학원 약학연구소에서 새로 개발한것을 구해온거요.》

영혜는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자, 이젠 서로의 일을 방해하지 맙시다.》

림정우는 콤퓨터가 놓인 책상앞 의자에 삑 돌아앉아 열심히 건반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영혜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콤퓨터화면에 현시되는 수자와 글자, 영상들의 흐름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연구사가 피곤한듯 몸을 뒤로 젖히더니 두손으로 량쪽눈을 힘껏 문질러댔다. 그리고는 몇번 눈을 감았다떴다해보고 머리를 흔들어보기도 했다.

영혜는 심상치 않은 그 거동을 더는 보고만 있을수 없어 가까이로 다가갔다.

《눈이 아파서 그러는게 아니예요?》

《아니… 눈에 뭔가 들어간것 같기도 하구 앞이 자꾸 흐려지는게 깨끗칠 않구만.》

《콤퓨터화면을 너무 오래 보면 시력이 떨어진다더니… 혹은 수면부족으로 오는 결막염일수 있어요. 병원에 가서 눈약을 넣고 오는게 어때요?》

《1분1초가 새로운데 언제 그럴새가 있소? 그런대로 바쁜 고비는 넘기고봐야 할텐데…》

림정우가 안타깝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영혜는 부리나케 녀성호실로 가서 구급약함을 뒤지였다. 언젠가 쓰던 눈약이 생각났던것이다.

다행히 액체가 절반쯤 차있는 약병이 눈에 띄였다. 그것을 가지고 연구사에게로 다시 달려갔다.

《자요, 당장은 이 눈약을 넣고 이삼십분만 눈을 감고 있어보세요. 그럼 꼭 나을거예요.》

《그럴가?》

연구사는 하도 안타까왔던지 순순히 약을 받아들었다.

영혜가 군대때 위생지도원을 하던 솜씨대로 연구사의 두눈을 차례로 뒤집고 약을 한방울씩 떨구어주었다. 그리고는 연구사가 침대에 눕는것을 보고서야 발볌발볌 물러나왔다.

영혜는 그것으로 연구사의 눈문제는 해결된것으로 보았었다. 눈병에도 여러가지가 있으며 그에 따라 써야 할 약도 다르다는것을 미처 몰랐던 그는 자신의 경험에 따른 일반적이며 피상적인 진단처방이 어떤 후과를 초래하게 될지 전혀 예상할수 없었다.

한편 림정우는 시간의 촉박감으로 하여 눈상태가 점점 나빠지는것을 방임해둔채 일에만 더욱더 몰두했다. 마늘향꼴바싸의 기술지표계산을 최종단계에서 다그치고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계산을 채 끝맺기 전에 우려했던 일은 닥쳐오고야말았다. 눈이 몹시 아파나고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절망감에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고 머리속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림정우는 눈을 싸쥐며 침대우에 쓰러졌다.

아, 제발 이것이 한순간의 악몽이였으면…

바로 그때 손기척소리와 함께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눈을 떠보았다.

뿌연 형체가 얼른거린다. 안개에 가리운듯 몽롱하다.

《누구요?》

대답이 없다. 이상해서 눈을 비벼보았으나 미지의 형체는 까딱 움직일줄 모른다.

《허상인가?》

정우는 맥없이 자리에 다시 누웠다.

그러자 영혜의 놀란 목소리가 덮치듯 다가들었다.

《연구사동지! 정말 제가 안 보입니까? 네?》

《아, 영혜동무구만.》

영혜는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의 불찰로 연구사가 이렇게 되였다는 죄의식이 심장을 비틀었다.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요. 제발 조용해주우. 이제 조금만 계산을 더 하면 되겠는데…》

영혜는 핑 고여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문밖으로 나왔다. 곧장 지배인실로 향했다.

박수혁은 콤퓨터앞에 마주앉아 훈증로설계를 모의실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배인동지!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아니, 왜 그러오?》

《연구사동지가 눈이… 앞을 보지 못합니다.》

《뭐라구?》

박수혁은 깜짝 놀라 일어섰다. 부르쥔 주먹이 우르르 떨린다.

급히 연구사의 방으로 달음쳐갔다.

《림동무, 정말 앞이 안 보이오?》

《너무 걱정마십시오. 신신펀펀하던 눈이 아무렴 실명이야 되겠습니까? 좀 안정하면 나을겁니다.》

《아니, 이러고있을 때가 아니야. 자, 일어나오. 더 심해지기 전에 빨리 치료를 받아야겠소.》

림정우는 더 버틸래야 지배인의 완력을 당해낼수 없었다. 영혜도 옆에서 부축해주었다.

그들을 태운 승용차는 얼마후 안과병원에 이르렀다.

수혁은 곧장 기술부원장실을 찾아들어갔다.

환자의 눈을 깐깐히 진찰하고난 기술부원장은 간호원을 불러 치료실로 데려가게 했다.

《어떻습니까? 인차 회복될수 있겠지요?》

수혁이 떨리는 소리로 다잡아물었다.

부원장은 투시하는듯 한 눈으로 한동안 상대방을 지켜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백내장입니다.》

《예?! 백내장?》

수혁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되받아외웠다. 대뜸 난치의 병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순간 영혜는 자기가 마치도 사형선고를 받은듯 한 절망감에 휩싸여버렸다. 백내장―그것은 곧 소경을 의미하지 않는가, 더는 이 세상을 볼수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니야, 그럴수 없어! 그래선 안돼!

영혜는 부원장이 오진했을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제발 그러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말했다.

《부원장선생님, 다시한번 진찰해주십시오. 네?》

그러나 이 말은 영혜의 마음속에서만 울렸을뿐이였다.

박수혁지배인이 저력있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부원장선생님, 어떻게 최신기술을 다 동원해서 시력을 회복시켜줄수 없겠습니까? 부탁합니다. 이 동무는 우리 공장을 도와주러 나온 과학자인데 저때문에 이렇게 되였습니다. 제가 할수 있는껏 모든걸 다 하겠으니 좀 도와주십시오, 네?》

영혜도 그의 팔을 붙잡고 간절히 애원했다.

《부원장선생님,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을 피운다는데 마음먹고 달라붙으면 못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혹시 각막이식이 필요하다면 저의 각막을 떼여주십시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시력이 떨어지면 뭐랍니까? 부탁입니다, 부원장선생님!》

안타까와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하는 영혜의 두눈엔 어느새 눈물이 함빡 차서 흐르고있었다.

부원장은 그만 젖어드는 눈시울을 슴벅이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알겠소. 협의회를 열고 최선을 다해봅시다.》

영혜는 나오다말고 또다시 들어가 곱씹었다.

《각막이 필요하면 꼭 저를 찾아주십시오. 기다리겠어요.》

《처녀는… 환자와 어떤 사이요?》

뜻밖의 물음에 당황해난 영혜는 그저 연구사를 존경하는 로동자라고 대답하려다가 고쳐 생각했다.

평범한 사이라고 하면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것 같지 않아서였다.

《저… 연구사동진…》자기의 한마디 대답여하에 연구사의 생명이 달려있기라도 한듯 영혜의 심장은 쿵쿵 높뛰였다.

《애인인가?》

영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된다는 생각이 다른 모든 생각을 뒤로 밀어버렸다.

부원장은 마치도 자기의 친딸을 바라보듯 정에 겨운 눈길로 처녀의 얼굴을 어루쓸어보았다.

《마음놓으라구, 우리 의사들도 자기 할바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리고는 밖에까지 따라나와 걱정말고 어서 가라고 거듭 안심시켜 등을 떠밀어보냈다.

지배인과 함께 공장으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영혜는 자기의 실책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부원장선생이 애인인가 물었을 때 부정하지 못한 사실이 엄청난 의미로 확대되여 압박해오는것이였다. 어마나, 애인이라니? 림정우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가? 아연해지겠지, 어처구니없어 웃을지도 몰라. 그러자 부끄러움에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활랑거렸다.

금시라도 되돌아가 부원장에게 사실을 실토하고싶었다. 그러다가 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이 무슨 새빠진 생각이람? 연구사가 실명되느냐 마느냐 하는 때에 그따위가 무슨 큰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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