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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회

1. 빛을 찾아

재생의 빛을 찾아

《소년고수》


남조선에서 발행되였던 《자유신문》 1945년 12월 11일부는 해방직후 고향 평양으로 돌아온 김사량의 사진을 싣고 《태행산서 삼천리를 보행》이라는 제목아래 그의 귀국로정에 대해 상세히 전하였다.

그렇다면 이 《자유신문》이 김사량작가가 태행산에 들어가 있었다는것을 어떻게 알았으며 왜 그의 조국행 행보를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렸는가.

오늘도 사람들은 70여년전 한 문학가가 해방의 기쁨에 벅차오르는 마음을 진정하며 귀국길에 오른것에 대해 쓴 기사를 명망높다는 신문사가 사진을 받쳐서까지 게재한것은 전례없는 일이였다고 하고있다.

하지만 그때 김사량이 걸은 귀국의 려정을 놓고보면 그 리유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태행산에서 장편기행문 《노마만리》를 쓰고난 후 김사량의 마음은 언제나 백두산쪽으로 달리였다. 글로써 김일성장군에 대하여 노래하는것만이 아닌 그 영용한 항일빨찌산대오에 참군하고싶은 불같은 욕망이 나날이 더욱 거세차게 불타올랐다. 그가 오매불망 바라는것은 오직 하나 김일성항일빨찌산대오에 참군하는것이였으며 그를 위해 할수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가지로 설명할수 있으나 주요하게는 인위적인 장애때문이였다. 후날 해방된 조국에서 그가 회억한바와 같이 태행산의 조선인부대에서 주요위치에 있던 일당이 집요하게 김사량의 백두산행을 반대했고 음으로양으로 막아나섰다.

그러는 속에 김사량은 10여명의 무장소조와 함께 태행산에서 멀리 떨어진 적강점지역으로 선전공작을 나가게 되였다.

그때가 1945년 8월 14일이였다.

김사량과 일행은 출발지를 떠난지 5시간이 되여서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였고 방금 토기를 구워낸 가마속처럼 따갑던 대기도 어느덧 시진하여 건들바람이 불어오고있었다.

11명이나 되는 소조일행이 이미 정해놓은 집(지하조직성원의 집)에 배낭을 풀어놓는 그 시각에 김사량은 왜왕 히로히또가 도꾜궁내성의 집무실에서 다음날 정오에 도꾜방송으로 날릴 항복선언을 록음하고있는줄은 꿈에도 알수 없었다.

《교전을 계속한다면 마침내는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아니라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까지도 파괴하게 될것인즉 이리되면 짐은 무엇으로써 억조의 적자를 보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 사하겠는가. 이것이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까닭이다.》는 그럴듯한 감언리설로 항복행위를 미화분식한 그 결정에 따라 8월 14일 23시 정각에 일본외상은 포츠담선언수락에 관한 조서의 원고전문을 스위스와 스웨리예정부에 발신하였고 그 전파를 잡은 《동맹통신》본사에서는 즉시로 경성(한성)의 지사에 전문으로 날려보냈으며 경성지사에서는 지사대로 지체없이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다.

하여 총독부에서는 총독과 정무총감, 총독비서를 비롯한 거의 모든 관리들이 왜왕의 항복선언원고를 놓고 육성록음을 하기도 전에 항복이 확정되였음을 알았으며 그 순간부터 저들도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더럽고도 비렬한 궁리를 짜내고있었다.

잠간 눈을 붙이였던 김사량과 일행은 날이 밝아오자 각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려 담당한 곳으로 나갔다. 사량은 혼자서 행동하였는데 점심이 가까와올무렵에는 숙소로 돌아와 다음번에 리용할 선전문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때 집주인이 들어오더니 오늘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는데 라지오가 있는 집에 모여 모두 들으라는 파출소의 훈시가 있었다고 이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중대방송?!)

무엇인지 알수는 없지만 중대방송이라니 어쨌든 큰 사변이 생긴것만은 틀림없었다.

이윽하여 점심을 먹으려 숙소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일행은 제나름으로 환상을 날리였다. 제2의 태평양전쟁의 폭발인가 아니면 식민지를 더 말리려드는 새로운 법령이라도 선포되는가, 그것도 아니면 지구와 달이 부딪쳐 깨지기라도 하는가?

숙소로 정한 집에는 마침 라지오가 있었다.

12시가 되자 일본의 유명한 방송원이 《지금부터 중대방송이 있겠습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일어서주십시오.》라고 하는 말이 찍찍거리는 잡소리와 함께 섞여나왔다.

그리고는 《기미가요》가 울리더니 갑자기 째지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궁내에서만 쓰는 어려운 말인데다 잡음까지 섞였으니 보통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가려듣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일본말에 정통한 김사량만은 귀를 바싹 도사리였다.

왜왕의 방송이였던것이다.

난생처음 왜왕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귀신이라던 왜왕이라는것이 저런 목소리로 주절대는것인가 하는 모양으로 어리둥절해하였다.

《짐(왜왕자신을 말함)이 깊이 세계의 대처와 제국의 현상에 비추어… 아메리카합중국, 영국, 중국 및 쏘베트련방정부에게 이들 여러 나라 정부의 공동성명의 조건을 수락할것을 통과시켰노라.…》

일본말깨나 안다는 사람들조차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러나 김사량만은 라지오에 귀를 강구느라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얼이 나간 모양 눈을 크게 뜨고 일행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처음에는 낮게, 다음에는 크게 부르짖었다.

《망했소.…》

일행은 어안이 벙벙해서 사량을 쳐다보았다.

《?!…》

《일본이 망했소! 왜왕이 항복선언을 했소. 조선은 독립되였소. 동무들! 우리 다같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릅시다!》

너무나도 뜻밖이고 너무나도 벅차고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소식에 일행은 그만 어리둥절하여 잠시 아무 말도 못한채 서로의 얼굴을 놀란 눈길로 마주보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 눈들에서는 인차 뜨거운것이 돋아 번쩍이고있었다.

금시 몸이 허궁에 둥 떠오르고 온 천하가 몽땅 우리 세상, 조선사람들의 세상으로 돼버린듯 한 환각에 사로잡힐만치 가슴벅찬 희소식이였다.

김사량이 먼저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다가 흠칫 멈춰섰다.

여기가 태행산의 해방지역이 아니라 적구라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것이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본이 다 망한 판에 어느 놈이 우리의 행동거지를 걸고든단 말인가.

모두가 조선사람인 일행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가 선창을 뗐는지 《조선독립 만세!》, 《김일성장군 만세!》의 웨침이 울려퍼졌다.

너도나도 목청껏 만세를 부르며 집집마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또 다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김사량이네가 있는쪽으로 만세를 부르며 물결쳐왔다.

사량은 사람들속에 섞이여 만세를 목청껏 웨치고 또 웨치였다.

별안간 울려퍼지는 만세소리에 제일 당황한것은 일본순사놈들이였다.

도이췰란드의 위성도시인 포츠담에서 어떤 선언이 발표되였는지 알지도 못하는 그들은 방금 제귀로 듣고도 정말 《천황》이 항복성명을 했는가고 저희들끼리 따지며 야단이였다.

일본의 1억 국민이 모두가 구슬처럼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용맹하게 싸워 《대동아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1억옥쇄》를 노래처럼 고창하던 놈들이였다.

중국땅의 곳곳에서 만세의 함성이 터져오르는 시각과 때를 같이하여 조선국내에서도 지지리도 짓눌렸던 사람들이 쩍 가슴을 펴고 거리로 떨쳐나와 조선독립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합창하고있었다.

도처에 신궁과 신사를 만들어놓고 조선사람들에게 일본정신을 주입하려 하면서 일제가 명승절경인 모란봉에 지어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신사는 그날 저녁으로 하늘에 치솟는 불길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다. 전국적으로 제일먼저 신사를 불태워버릴만큼 평양사람들의 반일기세는 높았던것이다.

파쑈도이췰란드의 괴멸이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게 되리라는것은 누구나 예상해온바이지만 오매불망으로 고대하고 고대하던 해방의 날이 이렇게 급작스레 닥쳐오리라고야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조선해방!

조선인민과 전세계 진보적인류는 환희에 넘치였다.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께서 령도하시는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에 의하여 조국은 근 반세기에 걸치는 일제의 통치를 짓부시는 해방의 새날을 맞이하였다.

왜놈들이 그렇게 우상화하던 왜왕 히로히또가 창피를 무릅쓰고 만천하에 항복한다는것을 라지오로 방송한것도, 일본침략군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며칠어간에 물거품 사라지듯 한것도 꿈아닌 현실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함께 조선의 방방곡곡에 타번진 전민항쟁의 거세찬 열풍에 의하여 일제침략군은 사면팔방에서 얻어맞고 비참하게 시들어버리였다.

사량은 두팔로 무장소조의 책임자를 와락 그러안고 목쉰 소리로 부르짖었다.

《자, 어서 태행산으로 달려갑시다. 조국으로 나갈 행장을 꾸려야지요.》

무장소조책임자라는 사람은 남조선의 《자유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탈출하여 태행산으로 들어왔었는데 사량과는 특별히 각별하였다. 그는 년장자였지만 사량을 이름있는 작가로 높이 존경하고있었다.

사량과 소조책임자는 서로 어깨겯고 푸른 하늘을 끝없이 우러렀다.

조국으로 나갈 행장!

얼마나 소박하면서도 깊은 뜻이 담겨져있는 심장의 토로인가.

사량의 청높은 소리에 일행모두가 눈시울을 적셨다.

하나의 민족이 사는, 하나의 지맥으로 이어진 삼천리강토는 해방만세의 환호성으로 진감했고 단군이래 처음 보는 환희와 격정의 해일에 산천초목도 춤을 추었다. 조선사람이라면 누구의 가슴에서나 기쁨의 눈물이 샘줄기가 되여 터져올랐다.

망국의 설음속에 조상의 땅을 떠나갔던 수백만의 동포들이 나라의 해방과 함께 귀국하고 이 나라의 항구와 철도역들은 날마다 귀국, 귀향의 길에 오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징용, 징병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통통배를 타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40여년동안 줄곧 조국을 떠나 해외로 흘러나가던 조선사람들이 홀연 발걸음을 돌려 제땅으로 물밀듯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수십년동안 역홈에서, 부두에서, 동구길에서 눈물을 뿌리며 리별에 리별을 거듭해온 마을과 거리에 상봉의 감격이 차넘치고있었다.

북간도에 갔던 사람들, 일본에 끌려갔던 사람들, 군대로 강제징집당했던 청년들, 억울하게 가족과 생리별을 하며 《보국대》로 갔던 장정들이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가족들과 정든 사람들을 만나고있었다.

태행산으로 돌아온 김사량은 격동된 심정을 안고 환희속에서 조국에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부대의 모든 조선사람들이 조국에로의 귀환을 열렬히 바라면서 귀국순서를 기다리고있었다.

김사량은 선견대와 함께 태행산을 출발하였다. 그가 탄 렬차는 장가구, 열하를 거쳐 조국을 향해 속력으로 내닫고있었다.

렬차안은 온통 조선판이였으며 발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꽉 찬 그속에서도 사량은 희열에 넘친 눈빛으로 무엇인가 생각하고있었다. 일반평백성들도 끓어오르는 격정으로 달아오른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있을진대 사변적인 현실을 눈앞에서 목격하고있는 작가의 심장이 불타오르지 않을수 없었다.

렬차가 승덕을 향해 달릴 때였다.

방송에서 또 하나의 격동적인 소식이 전해지고있었다.

민족적영웅으로 흠모하여마지 않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침내 조국에 개선하여 40만 평양시민과 뜻깊은 인사를 나누시였다는 감격적인 소식이였다.

(아, 민족의 재생을 안아오신 김일성장군께서 드디여 조국에 개선하시였구나!)

사량은 뿜어오르는듯 한 환희에 진정할수 없었다.

반만년 오랜 력사에서 우리 민족이 그토록 그리고그리던 민족의 령도자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모란봉공설운동장(지금의 김일성경기장)에서 수십만 평양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속에 개선연설을 하셨다는 희소식은 작가 김사량의 가슴에 류다른 감흥과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고향집이 바로 그 모란봉공설운동장근처에 있었던것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두볼로 흘러내리는 감격의 눈물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달리는 렬차안에서 수첩을 꺼내여 격동된 자기의 감정을 글로 써내려갔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김사량에게 주위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였다. 책장에 눈길을 박고있던 량옆의 두사람이 입을 크게 벌리고는 닫을념을 안했다.

김사량이 이렇게 자신의 격앙된 심정을 피력하여 렬차안에서 써낸것이 유명한 수필 《소년고수》였다.

그는 수필에서 《짓눌렸던 울적한 가슴속에 휘황한 해발이 비쳐옴을 느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장군이 계시여 신음의 대지도 노래를 잊지 않았고 원한에 잠겨 오열하는 거치른 밤도 빛을 섬기였고 그이의 걸음발과 숨길이 미치는 곳마다 산하초목도 너울거렸다. 우리의 장군님께서 돌아오셨다는 보도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희망과 기쁨과 힘을 퍼부어주었다.

〈장군께서 돌아오셨다!〉

〈령수께서 나타나셨다!〉

장군의 이야기로 차안이 흥성거렸다. 해방의 기꺼움이 더욱 가슴속에 벅차오르는듯 하였다.

위대한 령수를 모실수 있다는것은 참으로 행복하고도 영광스러운 민족이기때문이다.》

글은 길지 않았지만 김사량의 전모를 보여주는 짧고도 주장이 강한 맵짠 글이였다.

수필은 민족을 옳바른 길로 이끌어줄 령도자가 없었던탓으로 이 나라가 겪었던 피눈물의 력사를 누구보다 예리한 작가적안목으로 가슴아프게 체험하였던 김사량이 벌써 그 시기에 누구보다 그 문제에 대하여 예민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나라가 해방되여 새 조국건설의 력사적위업이 절박하게 나서고있던 초시기 장군님의 개선을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게된 민족의 영광과 행복으로 열렬히 노래한것은 작가 김사량의 높은 정치사상상태를 보여준것이였으며 피어린 장구한 투쟁으로 나라를 찾아주신 민족적영웅을 높이 우러러모시려는 그의 인간적순결성과 숭고한 도덕의리심의 표현이였다.

식민지백성의 뼈저린 생활체험은 그에게 사회적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며 기초적인 관점인 민족의 령수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립장을 세워주었다.

그의 이러한 관점과 립장은 심양에 도착하여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8.15해방후 그곳은 중국내륙 각지에 있다가 귀국하기 위하여 모여든 각계각층 조선동포들의 림시집결처였다.

그는 허정숙도 여기 와서 다시 만났고 정률성부부와도 만났다. 그밖에 제노라 하는 적지 않은 정치망명객들도 알게되였다. 그런데 이들, 정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남의 나라 해방지구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실속없는 말공부질만 하던 이들은 조국이 해방된 이 기회에 저마다 귀국하여 한자리하겠다고 아침저녁으로 무슨 내각이니 각료명단이니 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쑥덕공론을 벌렸다.

평생 탐위와 파쟁으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에까지 종파의 보따리를 메고 가려는것이였다.

여기에 제일 반발해나선 사람이 전장에서 총을 쥐고 싸운 허정숙과 같은 사람들이였다. 그는 파쟁군들과 정면에서 대결하는 한편 진정한 애국인사들을 각성시켜 그들의 정체를 발가놓았다.

불과 두석달밖에 해방지구에서 생활해보지 못한 김사량은 종파군들의 악습을 깊이 몰랐지만 허정숙의 말을 듣고는 참을수 없었다.

나라의 해방을 누가 시켰는데 남의 집에서 식객노릇이나 하던자들이 감히 주인행세를 하려드는가? 대바르고 정의감이 강하며 언변이 좋은 김사량은 가차없이 음모군들과 론전을 벌렸다.

《해방대업을 이룩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시여 건국의 기틀을 쌓고계시는데 여기서는 무슨짓을 하자는것인가?》

자기들의 정체가 드러난데 당황한 종파놈들은 음으로양으로 바른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물어메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는 오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련락원을 보내시여 심양에서 대기하고있는 재중인사들을 귀국하도록 부르시였다.

김사량은 허정숙, 정률성 등 여러 사람들과 일행이 되여 그날중으로 단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조국땅에 들어섰다.

신의주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특별히 파견하신 일군들이 영접준비를 해가지고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렬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한 김사량의 감회는 류달리 컸다.

왜놈이 없는 조선! 민중이 주인된 나라!

평양이 고향인 김사량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부르시여 귀국한 일행의 한사람이라는 가슴벅찬 감격을 안고 그립던 가족들을 만났다. 로모와 처자들은 왜놈들이 쫓겨가자 인차 장광섬에서 평양으로 올라와있었다. 모두 무사한것을 보니 숨이 활 나왔다.

김사량은 그 드바쁜 속에서도 렬차안에서 쓴 수필 《소년고수》를 출판물에 내는것을 잊지 않았다. 해방의 환희로 설레이는 민중의 가슴에 김일성장군찬가를 어서빨리 들려주고싶었다.

수필은 나가자마자 온 북녘땅을 열정의 도가니로 더 세차게 끓게 했다. 38°선을 넘어 남녘땅에도 김사량의 글이 파다하게 퍼졌으며 바로 그래서 남조선의 《자유신문》도 김사량의 귀국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였던것이다. 태행산에서 김사량과 함께 있었던 기자출신의 그 무장소조책임자가 여기서 기본역할을 놀았다는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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