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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제 4 편 새세대들

5

8월말까지 총총히 론문을 집필하여 심의에 넘긴 최일은 진흥기계공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기술과 사무실에서 콤퓨터작업을 하는 진수현실장과 남웅이네들을 반갑게 만났다.

그는 진수현에게 두 딸이 보낸 편지들을 전해주었다.

최일은 그 편지사연들을 대체로 짐작하고있었다. 맏딸 정임이는 대학에 다니면서 어머니의 일손도 자주 거들어주고 저녁이면 한구들 모여드는 동네아이들을 배워준다고 썼을것이였다. 정선이도 자기는 이젠 수학에 재미를 붙였으니 아버지가 더는 걱정 마시고 유연생산체계전투에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시길 손꼽아 기다린다고…

그 편지들을 눈바투 읽으며 웃음을 짓는 진수현의 수척한 모습을 지켜보는 최일은 은근히 가슴이 저리였다. 실장이 얼마전에 제5병원으로 가서 검진을 받고 돌아왔으며 앞으로 두눈을 수술하게 된다는 소문을 최일도 들었지만 실장은 점점 떨어지는 시력때문에 몹시 괴로와하는것 같았다.

그래도 실장은 노상 기쁜 얼굴이였다.

《최동무까지 오니 마음이 든든하구만!》

《좀더 일찌기 왔어야 하는건데…》

최일은 진정 아쉬웠다. 저 남웅이네들은 그사이 여기서 많은 일을 제끼지 않았는가. 초정밀공구측정장치의 프로그람을 해득한 소식은 연구소에까지 날아왔었다. 그 멋진 일이 이 최일의 참여가 없이 벌어지다니…

《남은 일감도 적지는 않소.》 진수현은 그를 위로하였다.

연구사들은 요즘 프로그람들을 완성하는 한편 공장기술자들을 도와 중앙조종콤퓨터와 조종장치, 싸보장치들을 공작기계, 운반대차 등에 결합시키고있었다. 이제 기계들과 장치들의 설치가 끝나면 그것들을 시험하는 프로그람을 따로 짜서 전반유연생산체계를 시험해야 하였다.

《현장을 좀 구경할가―》

최일은 마음이 들떠서 일어섰다.

송춘도가 넌지시 상기시켰다.

《설계연구소에서 누가 최동물 기다리는것 같던데…》

《설계연구소가 아니예요. 지금 도입현장에 있어요.》

학준이가 찍어서 알려주자 연구사들이 미소를 지었다.

최일은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유연생산체계를 도입하는 새 가공직장건물로 찾아갔다.

그안에는 벌써 여러가지 CNC공작기계들이 줄지어 늘어서있었다. 그 기계마다에 결합된 수자조종장치 《조종7호》를 보니 감회가 새로왔다. 천정기중기가 육중한 물동을 물고 오가고있었다. 기계들사이의 통로에서는 기술자들이 무인운반차시험을 하고있었다. 무인운반차는 이마빡에 빨간불을 번쩍이며 제법 《자기 의도》를 가지고 굴러가다가 곡선을 그리며 주행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멈춰서기도 한다. 그것을 따라가던 년장자가 뒤짐을 진채 무어라고 꽥 소리를 쳤다. 그가 아래사람들을 욕하는건지 무인운반차를 욕하는건지 대중할수가 없었다. 한쪽에서는 기술자들이 원기둥로보트의 머리부분을 뜯어놓고 들여다보고있는데 아직도 《뇌수》에서 본체에로 신호가 가는지 《팔》을 쑥 내밀기도 하고 원기둥을 축으로 빙 돌기도 하였다.

최일은 마침내 자동승강대차곁에서 로동자들과 이야기를 하는 그 처녀를 찾아냈다. 작업복 반소매샤쯔를 간편히 입은 처녀의 갸름한 얼굴과 두팔은 반투명한 도자기인형처럼 희고 매끄러워보이는데 호수같이 그윽한 두눈에서는 사려깊은 정숙한 기품이 내비치고있었다. 애인의 눈길을 륙감으로 느낀듯 처녀도 언뜻 이 편을 바라보았다. 연한 홍조가 두볼로 피여올랐다.

그들은 이미 전화로 약속한대로 퇴근시간에 만나자는 무언의 약속을 다시 하였다.

최일은 달아오른 가슴을 안고 기술과 사무실로 돌아왔다. 동무들이 그를 보고 휴식하라고 했지만 그는 함께 프로그람작업을 하였다.

시간은 오늘따라 한초한초 더디게 흘러갔다. 참, 세월은 날아가지만 시간은 기여간다고 했던가?!

퇴근시간이 거의 되였을 때 현장쪽에서 꽝― 하는 굉음이 울렸다. 뒤미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뒤따랐다.

최일이 달려가보니 500키로그람짜리 육중한 빨레트가 6메터높이에서 떨어지면서 바닥에 놓였던 기계부분품을 짓조겨놓았다. 자동승강대차가 립체창고에서 그 중량물을 꺼내는 시험을 하다가 이런 엄청난 《실수》를 한것이였다.

그 자리에서 복잡한 론의가 벌어졌다. 사고의 원인이 기계부분에 있는가, 아니면 조종계통에 있는가? 점차 조종계통쪽으로 주의가 쏠리면서 연구사들을 비난하는 소리들이 울려나왔다. 이를테면 자동승강대차의 외양은 아직 멀쩡하니 그 뇌수와 중추신경계통에서 고장을 찾아야 한다는것이였다.

최일과 오은경도 마주 서서 그 원인을 구명하였다. 둘 다 전문가들이라 실무적인 이야기가 깊이 들어갔다.

《그 응용프로그람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가요?》

《동무네가 거칠게 일한탓이요. 가공정밀도를 보장 못해서 유간이 커졌거던. 그런 상태에선 수감부가 구실을 할수 없지. 리치가 뻔하지 않소.》

최일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래도 오은경은 의문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였다.

《기계부분에 결함이 있다는거지요?》

《두말할것도 없소. 원인은 명백하니까.》

《그렇군요.…》

오은경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눈길을 떨구고 잠자코 있더니 조용히 돌아서서 어디론지 가버렸다.

최일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잠시후에 학준이가 최일에게 나무라는 기색을 보이면서 귀띔하였다.

《은경누이가 저쪽에서 혼자 우는것 같애요.》

《운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울상이예요. 왜 그러는지 몰라요?》

《…》

아까는 내가 좀 지나쳤나? 하긴 진실이 쓰거울 때도 있지. 그래도 이거야 감정으로 대할 문제인가, 리치를 따지는건데…

최일이 돌이켜보니 사랑하는 처녀와의 해후가 참 별나게는 되였다. 자기가 실패했을 때에도, 곤경에 빠졌을 때에도 변함없이 믿어주고 기다려 준 처녀와 만나자마자 거친 소리를 했으니…

언제나 최일을 제일로 믿는 진수현실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최동문 사고원인이 어디에 있는것 같소?》

《우리 조종계통은 아닙니다. 기계가공이 걸렸습니다.》

최일의 설명을 듣던 진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며칠전에도 이 비슷한 사고가 났댔소. 승강대차의 웜치차가 갑자기 역회전을 하면서 물건을 떨궜댔소. 기계설계자들은 웜치차가 웬간해서는 저절로 돌지 않는다는거요. 기타선조이개처럼 말이요. 정철동무가 짠 프로그람이 잘못된것 같다는 소리도 나왔소. 이상하더군. 거듭 시험해보니 역시 오유는 기계제작에 있더란 말이요. 이를테면 정철동무는 〈무죄〉로 인정된셈이지만 그 프로그람을 다시 짜서 사고를 2중으로 방지할수 있게 해놓았소.…》

최일의 뇌리에 착상이 떠올랐다. 그렇다, 프로그람적인 기교로 이런 사고도 미리 막을수 있었다. …그런데 그 착상때문에 기쁜것이 아니라 서글퍼지는 최일이였다.

(자기 성격을 고친다는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라. 결함을 남한테서만 찾던 자고자대하는 버릇이 아직 남아있거던.…)

최일은 오은경을 볼 낯이 없었다.

그래도 그를 찾아갔다.

지금 오은경은 로동자들과 함께 사고원인을 퇴치할 의논을 하고있었다.

최일은 자책에 잠겨 그 처녀를 바라보았다.

곁에서 어물거리던 학준이 그의 눈치를 보고 히쭉 웃더니 뿌르르 오은경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소곤거리는것이였다. 그러자 처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조심히 최일에게 다가왔다.

《저를 부르셨어요?》

《아니, 저…》

최일은 당황해났다. 저 깜찍한 학준이가 방자노릇을 했군.

처녀는 나직이 말했다.

《지금 수감부위치를 다시 조절하고있어요. 확실히 저의 설계에 빈틈이 있었어요. 가공정밀도도 보장되지 못했구요. 제 생각이 짧았댔어요. 아까는 몹시 답답하셨을거예요.》

《아니요, 프로그람측면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것 같소.…》

최일은 그 즉시로 동무들과 함께 승강대차의 조종장치에 들어가는 실행프로그람을 다시 수정하여 보호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다나니 2시간쯤 늦게 퇴근하게 되였다.

《이젠 저녁식사할새가 없어요. 곧장 문화회관에 가야 할것 같애요.》

학준이 팔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뭐, 공연하나?》 최일이가 시답지 않게 물었다.

《시내 학생들이 출연한대요.》

《그럼 가보라구. 난 오늘 좀 피곤해서…》

《최일동진 꼭 구경해야 돼요.》

《왜?》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요.…》 학준이가 싱글거렸다.

《됐어, 알겠어.》

《최동문 천천히 따라오라구.》 리남웅이 친절히 말했다.

《초대석에 두 자리를 내놓구 기다릴테니.》

《응…》

최일은 귀등으로 들었다. 이 좋은 밤에 아이들의 공연이나 보고있겠는가? 애인과 더불어 쌓이고쌓였던 회포를 풀리라 생각하였다.

동무들은 벌써부터 흥이 나는지 법석 떠들면서 눈이 어두운 수현실장을 안내하여 문화회관쪽으로 밀려갔다.

최일이 우정 늦게 사무실청사 현관으로 나오니 외등이 비치는 곳에서 꽃무늬 원피스차림의 오은경이 기다리고있었다. 그 처녀를 밤에 보니 더 눈이 부셨다.

《어데로 간다?》

최일이가 저으기 들뜬 소리로 처녀에게 물었다. 시내의 어느 식당아니면 강변으로 처녀를 데려가고싶었다.

《문화회관으로 가야지요.》

처녀가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였다.

최일은 기가 막혔다.

《아, 이 좋은 밤에?!…》

《학생들이 공연하는데 최일동지를 축하하는 종목도 아마 있을거예요.》

《난 오늘 왔는데?》

최일은 더욱 영문을 알수가 없었다.

오은경이 이야기하였다.

《이전에두 중학생들이 소편대를 무어가지고 현장에 와서 공연한적이 있었어요. 그때 수현실장선생님이 음악교원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젊은 연구사들가운데도 어려서 음악을 하던 동무가 있는데 머지않아 여기로 온다고 하셨어요. 음악교원은 그 연구사가 오면 알려달라면서 그를 축하하는 종목도 준비하겠다고 하더군요.》

《이거 좀 별나게 됐는걸?! 어쨌든 문화회관에 가야겠구만?》

《그래야 할것 같아요.》

그들은 나란히 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최일이 다정히 그의 손을 잡았다. 처녀는 공순히 손을 맡기고 걷다가 문화회관 불빛이 비치는 곳에 이르자 살며시 손을 빼냈다.

초대석에 그들을 위해 두 자리가 비여있었다.

이윽고 무대면막이 오르고 학생들의 공연이 시작되였다.

노래도 있고 기악도 있고 시랑송도 있었다. 종목이 바뀔 때마다 소개를 맡은 처녀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유연생산체계도입에서 혁신하는 공장사람들과 연구사들에게 축하를 보냈다. 리남웅과 리정철의 이름도 불리워졌다. 그때마다 관람자들이 박수를 치면서 초대석쪽의 혁신자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최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자기 이름이 불리워진다면 이처럼 난처한 일이 또 어데 있겠는가?! 난 오늘 왔는데…

다행히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거의 공연이 마감에 이른것 같았다.

간막이 드리웠다가 올라가면서 2관편성의 관현악단이 나타났다. 조명빛에 금관악기들이 번쩍거렸다.

이번엔 소개자가 나오지 않았다.

숙연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바이올린을 든 열서너살쯤 나보이는 소년이 무대복판으로 나왔다. 그는 바이올린과 활을 안은채 마이크앞으로 다가서서 말했다.

《오래전에 한 소년이 바이올린을 배웠답니다.

음악의 길에서 푸른 꿈을 키우던 그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을 다니고 공학자가 되였습니다.

그분이 바로 이 공장에 도입되는 유연생산체계에서 쓰이는 세계최첨단수준의 CNC장치 〈조종7호〉를 개발하는데 앞장섰던 청년과학자 최일선생님입니다.》

관람자들이 일제히 초대석쪽에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최일은 놀라 그 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과학자선생님은 자기의 연구활동으로 어릴적에 꿈꾸던 훌륭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노래를 어머니조국에 드리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무대에서 그 소년이 련습하던 바이올린협주곡 〈용광로가 보이는 바다가에서〉를 연주해드리겠습니다.》

박수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고 서주가 장중히 울리면서 랑만의 노을빛을 담고 굼실거리는 거창한 바다의 설레임을 재현하는 속에 바이올린의 음향이 진한 파문을 그리며 기슭으로 물결쳐간다. 그렇다, 그것은 정녕 파도와 같다. 파도와 파도가 연줄연줄 밀려가는 기슭에 떠오르는 거대한 산악같은 철의 기지, 용광로가 보인다!…

어제날의 음향들이 최일에게 들려왔다.

―과학을 발전시키지 않는 나라는 불피코 식민지로 되고만다.― 누구의 말이던가?!

이번엔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린다.

―아마 네가 옳은것 같다. 재능보다 더 귀한것이 있다. 그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바이올린선률이 절정에로 거듭거듭 육박하며 치달아올랐다가 주홍빛으로 끓으며 쏟아져내리는 장쾌한 쇠물의 폭포와 쇠물남비에서 창공에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오르는 천만갈래 불꽃들을 관객들앞에 펼쳐놓았다.

최일은 불시에 눈앞이 흐려졌다. 뜨거운 눈물이 두볼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그것은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주고 축복해주는 어머니조국에 대한 감격의 눈물, 감사의 눈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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