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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제 4 편 새세대들

3

회사에 돌아간 윤덕은 돌이켜볼수록 기분이 언짢았다. 그는 사장에게 사업보고를 하다가 저도 모르게 남웅이가 신의가 없고 의리가 없다고 한마디 하였다.

《좀 자세히 얘기하오. 그 사람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게 그러오?》

서관범사장이 다우쳐 물었다.

《됐습니다. 입에 올릴거리도 못되는 시시한겁니다.》

리윤덕은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였다.

《내가 알아야겠기에 묻는거요.》

《이건 나하구두 좀 련관이 있는 일이여서 말하기가 거북한데, 한마디로 학위론문때문에 그 사람이 경우가 없이 처신한거지요.》

《학위론문이 대관절 어떻게 됐다는 소리요?》

《그만합시다. 더 말하다간 나까지 저조해질것 같습니다.》

《그렇다?!…》

어느 고전작가는 애매한 말은 비방자의 말이라고 하였다. 리윤덕이 누굴 모해하자고 우정 애매한 소리를 한건 아니지만 시시하게 긴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대범하게 처신한다는노릇이 그만 예상외로 좋지 않은 효과를 나타냈다.

리남웅이 무슨 론문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도덕적인 비난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서진주는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다. 그 남자가 그렇듯 너절한 인간이였던가?!…

진주는 너무도 기가 막혀 그날 저녁에 곧바로 리윤덕의 새 집을 찾아가 맞대놓고 물어보기까지 하였다.

리윤덕은 처녀앞에서는 더욱 말을 삼가하였다.

《자, 이거 내가 주책없이 괜한 소릴 해놔서… 이보라구, 진주. 아예 안 들은걸로 치라구.》

《그건 사실이 아니지요, 네? 부사장동지, 어쩌면 그가 그렇게까지 한심하게 처신할수 있었을가요? 믿어지질 않아요.…》

《됐소, 이런 얘긴 그만하자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선 좋은 말만 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게 례의지.…》

진주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비참하게 깨여진 사랑이 그지없이 슬펐다.

아, 련애는 소경이라더니…

진주는 처음에는 그 총각이 장래에 큰 학자가 될 재목으로 정직하고 겸손하며 애써 결함을 찾아본다면 다소 수집어하는 그것뿐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가 연구소로 도로 내려갈 때 보니 남자가 주장을 못 세우고 남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것 같기도 하였다.

그후 진주가 연구소에 찾아가서 목격한바이지만 남웅은 실력면에서도 신통치 못했다. 전문가다운 제 견해가 없이 론쟁의 와중에서 우왕좌왕하는 꼴이였다.

게다가 이젠 그에게서 입에 올리기조차 무엇한 그 어떤 인간적인 결함까지 나타난 모양이였다.

서진주는 경박하고 무분별했던 자기를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다. 이젠 리남웅이라는 인간을 마음속에서 영영 지워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정작 결별의 뜻을 전하자니 속이 섬찍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맺고 끊듯 할수 있을가?!… 그러나 단호하고 매정한 편이 위선적인 친절함보다는 결국 나을것이였다.

처녀는 피치 못할 그 운명의 시각이 다가오는것을 두려움속에 지켜보고있었다.


리남웅의 눈앞에는 지난 5년동안 쌓아올리던 K방식풀이법이라는 커다란 탑이 다시 나타났다. 옛말에도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흰 종이를 펴놓고 이전에 전개하던 론문의 수식들을 되살려나갔다. 그는 지금 자기가 프로그람을 짜는지, 식사를 하는지, 배구를 하는지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편집광처럼 K방식전개에만 골몰하였다. 쓰고 지우고 또 써나갔다. 그러다가 막힌 고리를 풀려고 몇시간씩 한자리에 앉아 암중모색하였다.

그는 진수현실장이 지금 얼마나 바쁘게 지내는지도, 그의 시력때문에 오은경이까지 념려한다는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송춘도가 프로그람작업에 전심하지 못하는것도, 지어 그가 짠 통신프로그람을 시험해보고 거의다 다시 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자 본인은 물론 실장과 정철이까지 괴로와하는 사정도 무심히 스쳐버렸다. 대체로 알고는 있었지만 깊이 느끼지는 못하고있었다.

《남웅동무, 송동무를 좀 도와주자구.》

리정철이 귀띔했지만 리남웅은 여전히 그게 무슨 소린가 하였다. 그는 여전히 K방식의 꿈에서 깨여나지 못하고있었다.

《좀 생각해보라구. 저 통신프로그람부터 완성해야 다른 프로그람들도 시험해볼게 아닌가.…》

안타까이 말하는 리정철을 진수현이 슬그머니 한켠으로 데려갔다.

진수현은 지금 남웅이 K방식을 전개하고있다고 정철에게 알려주었다.

정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인차 결과식에 도달할것 같은가고 물었다.

진수현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건 시일이 어지간히 걸려야 할거요. 하지만 지금 한창 열이 올라서 다른 일을 생각하기는 힘들것 같소. 한동안 그를 K방식에로 계속 떠밀어주는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소.》

그리하여 리정철이 혼자서 송춘도의 통신프로그람을 도와주게 되였다.

열흘이 지난 어느날 밤 외래자합숙호실에서 잠자리를 펴기 전에 진수현이 리남웅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 K방식풀이가 얼마나 추진되였는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몇가지 조언을 주고나서 남웅에게 권고하였다.

《리윤덕동무의 론문초고도 참고하는게 좋지 않을가?》

《일없습니다. 내 힘으로 풀어보겠습니다.》

《물론 그 사람한테서 별로 취할것이 없을수도 있지. 그래도 첫 착상은 그가 젊었을 때 했다고 하더군. 원래는 참 뛰여난 머리였소. 그의 론문초고도 읽어보고 서로 토의도 하느라면 방도가 떠오를수도 있을거요.》

《알겠습니다.…》

리남웅은 생각이 깊어졌다. 자신은 명백히 리윤덕을 제쳐놓고 단독으로 K방식풀이를 완성하려고 생각한건 아니였지만 리윤덕의 실력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던것도 사실이였다.

진수현은 그에게 며칠 시간을 내서 과학원 도서관과 인민대학습당을 찾아가 이 풀이와 관련한 문헌조사를 더 해보라고 하였다.

《…평양에 갔던 길에 송화회사에도 들려서 윤덕동무와 론문추진방향을 토론해보오. 그 사람이 반가와할거요. 그리고 서관범사장한테는 내 편지를 전해주고…》

진수현은 그닥 가까운 사이는 아니였지만 서관범사장에게 보내는 문안편지를 남웅에게 주어보냈다. 그는 딱히 말은 안했으나 리남웅이 이번에 서관범과 딸을 만나 서로 리해를 두터이 하기를 바랐던것이다. 박사론문이야기도 하면서…


리남웅은 연구소의 박사원실에도 들려보았다. 콤퓨터앞에 앉아서 론문타자를 치던 최일은 썩 반갑지 않은 기색으로 그를 맞이하였다. 언제나 도고하고 자존심이 강한 최일의 성격을 잘 아는 남웅이는 그저 심상하게 여기였다.

최일은 남웅에게 지능공학실에 들려보라고 말했다.

《아마 임동무가 안경을 보낼거야.》

《무슨 안경을?…》 남웅이가 얼떠름해서 물었다.

최일이 마뜩지않게 대답하였다.

《가보면 알게 아닌가.》

지능공학실의 대리실장을 하고있는 임창만은 찾아온 남웅을 붙들고 반가와 어쩔줄 몰라했다.

《실장선생님 눈은 좀 어때?》

《…》

리남웅은 대답이 궁했다.

《치료는 어떻게 받나? 거기에두 병원이 있겠지?》

《글쎄… 큰 공장이니까…》

《전번에 실장선생님을 복도에서 만났는데 사람을 아예 가려보지 못하잖겠어. 그래 난 실장선생님보고 〈그새 절 잊으신게 아닙니까.〉하고 우정 섭섭한 소릴 했지. 실장선생님은 버릇처럼 안경다리를 만지더니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알아보지 못했다면서 웃어보이더군. 점점 시력이 더 떨어지는구나 하구 생각했지. 그래 베이징에 갔던 길에 이 안경을 하나 사왔어. 공장에 가면 실장선생님한테 드리라구.》

안경곽을 열어본 리남웅은 의아해서 물었다.

《안경알이 얇구만?》

《그래뵈두 곡률은 큰거야. ―9라구.》

《음…》

리남웅은 그제야 까닭을 짐작하였다. 이렇게 도수가 높으면서도 얇고 가벼운 안경알을 만들려면 엄청나게 직경이 큰 오목렌즈를 만들고 그 가운데 부분을 도려내야 하였다.

임창만이 헤여지면서 당부하였다.

《곁에서들 실장선생님을 잘 도와드리라구. 너무 무리하지 않게 말이야.》

《알겠어.…》

안경곽을 받아들고 복도로 나온 리남웅은 낯이 뜨거웠다. 그래, 난 인정도 의리도 없는 놈이였어. 여태 내 생각에만 옴해서 살아왔으니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괴로움이 눈에 보일리 만무였지. 실장선생이 치료를 받을새도 없이 부랴부랴 공장으로 찾아오게 전화를 한것도 내가 아닌가!…

그는 방금전에 최일이가 왜 그처럼 자기를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맞이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아마 최일은 공장에 있는 애인이 가끔 전자우편으로 알려주는 덕에 그곳 소식을 환히 아는 모양이였다.

남웅의 눈앞에는 공장에서 겪은 가지가지 일들이 새로운 시점으로 하나둘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책이 가슴을 쳤다. 과제부책임자인 내가 실장선생을 곁에서 잘 도와야 할게 아닌가. 지금처럼 K방식에만 끌려서 돌아다닐 겨를이 있는가! 이건 하루이틀에 풀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실장선생은 나한테 시간을 주었지. 그럴수록 내가 생각하는게 있어야 할게 아닌가.… 리정철은 작업량이 제일 많은데도 춘도를 관심하고 이끌어주고있고 학준이도 짬짬이 그를 도와주고있다. 오은경이도 눈이 어두운 실장선생의 지팽이가 되여주려고 애쓰는데…

그는 최일에게 다시 가면서 추상같은 질책을 듣게 되리라고 예감하였다.

남웅은 최일과 다시 마주 서자 그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자기를 돌이켜보며 띄염띄염 공장소식을 이야기하였다.

성미가 불같은 최일이 역시 자책에 모대기고있었다.

《내 잘못이야. 그때 내가 공장에 나갔어야 하는건데… 여기에 떨어져서 외국어경연을 준비하고 론문을 쓰고있는게 막 짜증이 나고 조바심이 나서 못 견디겠어. 실장선생님이 저렇게 무리하게 일하다가 완전실명이라도 오면 어떻게 하겠나, 응…》

최일은 자기를 탓하고있었다.

괴로와하는 그앞에서 리남웅은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난 그의 책망을 들을만 한 자격도 없는 인물이다.…)

남웅은 모대기던 끝에 공장에 전화를 걸어 진수현실장을 찾았다. 그는 실장에게 자기는 한가하게 평양에 다녀올수 없다, 이제 돌아서서 일손이 딸리는 공장으로 곧장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진수현은 그러지 말고 리윤덕부사장을 생각해서라도 꼭 찾아가보라고 다시 권고하는것이였다.

리남웅은 할수없이 인민대학습당에 들렸다가 송화기계무역회사로 갔다.

리윤덕은 외국출장중이였다. 여러 장치들과 설비들을 사러 간것이였다.

서관범사장은 덤덤한 기색으로 남웅이 가져온 진수현의 문안편지(거기에 유연생산체계도입과 관련한 실무적인 글줄도 있을것이였다.)를 뜯어보더니 뭔가 내키지 않는듯 《그래, 진주를 만나보겠나?》 하고 묻는것이였다.

《예.》 하고 리남웅이 대답하였다.

그는 그사이 전화로 진주를 여러번 만나본터였다. 전화가 거듭될수록 통화내용은 점점 짧아졌었다.

남웅은 이제 직접 그 처녀를 만난다 해도 랭담하게 멀어져가는 그를 되돌려세울것 같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한번은 명백한 결말을 지어야 할게 아닌가. 아니, 결말이라니?! 아직까지 진주는 내게 불만을 터뜨리기는 했어도 아예 인연을 끊자는 소리같은건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그래, 일시 토라졌을뿐이다! 이번엔 결정적으로 돌려세워야 한다. 사내다운 아량을 가지고!… 이제 내가 론문을 추진하게 되였다는 얘기를 하면 그의 옹쳤던 마음도 어지간히 풀릴수 있다.…

총각의 미련은 이렇듯 검질긴것이였다.

이런 오만가지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에 어느덧 봄날의 저녁이 찾아왔다.

록음이 짙은 보통강변에서 그들은 다시 만나 나란히 앉았다. 이전에 사랑을 속삭이던 그 의자였다.

처녀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퇴근길에 곧바로 여기로 온듯 은회색양복차림에 가방을 들고있었다. 차거운 물방울같은 귀걸이가 한들거렸다. 오연하고 랭담한 처녀의 자태는 총각의 눈에 범접하기 어려울만치 눈부시고 황홀하게 보였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녀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침착하고 여유가 있었다.

총각은 주눅이 들어 허둥거리며 자꾸 말을 더듬었다.

《난 이번에 리윤덕동지한테 론문을 합작하자고 말하려고 들렸댔소. 이건 큰 주제라고 할수 있소. 사실은 전번에 이런 제의를 했어야 하는건데 내가 제 생각에만 옴하다나니…》

《이젠 가책이 좀 되는가요?》

《그렇소… 한데 그건 왜 묻소?》 리남웅은 뗑해졌다.

처녀는 서글픈 시선으로 석양이 비낀 보통강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전에도 남웅동지에게 이런저런 의견이 있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완전무결할수는 없다는 생각도 해보았어요. 그래 서로 남남으로 헤여지는 경우에도 좋은 인상만을 간직하고싶었어요. 그런데… 남웅동지에게 남들의 도덕적인 비난까지 받는 면이 있을줄은 몰랐군요.》

《누가 날 비난한다는거요? 혹시…》

남웅은 억이 막혀 말소리가 떨렸다.

《윤덕부사장이 그랬소? 론문때문에?… 그건 근거없는 소리요.…》

《아까는 좀 후회하시는것 같더니… 결함은 주관에서 먼저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 처음에 내 생각만 했던건 사실이요.… 하지만 내 말을 좀 듣소. 난… 그때 생각하기를…》

《이런 이야기는 더 하지 않는게 아마 나을거예요.》

《…》

리남웅은 금시 토할것처럼 속이 후리후리해졌다.

사연을 밝히려 하면 할수록 도리여 복잡해지고 자기만 더 우습게 보일것이였다.

처녀는 이미 남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려는 기분이 아닌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편을 책망하고 배척하려는 기색이였다. 남웅은 이것을 륙감으로 느꼈다.

(이젠 정말 헤여지자는건가?!…)

이것은 리남웅이 몇달전부터 부정하려고 애쓰던 두려운 예감이자 눈앞에 다가온 엄연한 현실이였다.

지금까지 남웅은 멀어져가는 처녀의 마음을 돌려세워 이전의 관계를 회복하고싶어 낯이 뜨거울 정도로 자세를 낮추면서 애원하다싶이 했었다. 과학원지구로 따라오기를 꺼리는 그를 탓할 대신 떠나는 자기를 믿어주기를 바랐고 공학의 초보도 모르는 그가 전문가의 자질을 제멋대로 저울질하면서 핀잔을 줄 때에도 그것을 애정이 담긴 관심으로 받아들이며 피차 리해할 때가 올거라고 공손히 대답을 했었다. 무엇때문에 그앞에 허리를 굽혔던가? 그 처녀가 사랑스럽고 우리의 애정이 귀중했기에…

결과는 어떻게 되였는가?

아니, 시초부터 잘못되였다.

그렇다, 모든것이 허망했다. 후기인상파그림같은 서툰 솜씨의 정물화, 갓을 쓴 《리생원》, 도전하는 처녀의 얄궂은 매력, 어이없는 화해… 그것은 련애도 사랑도 아니였으며 일종의 희떠운 유희였고 객기였다. 신기루였다. 그 녀자의 감추어진 리기심과 심술이 도리여 귀엽고 매력있게 보였던것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나는 어째서 그를 바로 보지 못했던가? 나 역시 그와 다름없는 인간이기때문이 아닌가?!…

쌓이고쌓인 오뇌가 폭발하는 순간 남웅은 그 처녀뿐아니라 자기 내부까지 새롭게 투시해보게 되는것이였다.

그는 처녀의 랭대와 비난을 감수할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달았다. K방식론문과 관련된 사연에는 억울한 점이 없지 않지만 동무들이나 진수현실장을 대함에 있어서는 자기본위적인 사고로 하여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 많았던 자기였다. 자기자신은 진주와의 관계에서도 량심의 호소에 따라 원칙적인 선을 긋지 못하고 그를 얼리고 달래는 방법으로 애정관계를 유지하려 했었다.

이런 졸렬한 놈을 어느 녀자가 좋아하겠는가?…

남웅은 자기자신을 알게 되자 자기를 배척하며 랭기를 풍기는 매정한 상대를 어느 정도는 리해하게 되였고 그만큼 자신이 너그러워지는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 진주를 자꾸 따라다니며 괴롭힐게 있는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의 표정은 한결 침착해졌다.

진주는 그의 괴이한 침묵에 아까부터 놀란 기색이였다.

《왜 그래요? 대체 무슨 얘길 혼자서 하는거예요?》

《나자신하구 말하고있소. 그렇소, 난 의리도 인정도 없는 한심한 인간이였소.》

《…》

《자기밖에 모르는 나같은 인간이 무슨 가치가 있겠소. 랭대를 받는게 당연하지. 우리 관계도 어차피 끝난것 같소.》

《?…》

《진주동무, 그간 번거롭게 굴어 미안하오.》

리남웅은 의자에서 움쭉 일어났다.

처녀는 저도 모르게 따라일어났다.

《그러니 이것으로… 끝이라는거예요?》

이 말을 하는 처녀는 새삼스레 아연실색한 표정이였다. 아마 처녀편에서 먼저 결별선언을 하고싶었겠지만 뜻밖에도 그 말을 남자한테서 듣게 되자 안도감보다도 놀라움이 앞서는 모양이였다.

《마감으로 진주동무한테 한가지 부탁을 하고싶소.》

리남웅이 말했다.

놀라고 당황해하던 진주는 그 무슨 부탁이라는 소리에 약간 깔끔해졌다.

《말씀하세요.》

《우리 실장선생님의 눈에 좀더 관심해달라는거요. 그 병원에 등록된 환자 아니요. 그러다 실명이 올수도 있다는데… 실장선생님은 지금도 눈을 혹사하고있소. 바로 나같은게 제구실을 못해서…》

그는 앞으로 이런 부탁을 할 기회가 없겠기에 이 자리에서 말하는것이였다.

《자, 그럼 안녕히…》

《…》

리남웅은 그 자리를 떴다.

결별이다. 이전의 남웅이와도 결별이다. 그렇다, 새 출발이다!

그러나 가슴은 후련하기는커녕 여전히 예리한 그 무엇으로 찌르는것처럼 아파났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심장이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 뛰고있는지, 심장의 아픔이란 어떤것인지를 알게 되였다.

그는 은정구역으로 내려갔지만 어머니에게도 이 사연을 이야기할수가 없었다.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이튿날 점심에 기차를 타고 저녁녘에 진흥기계공장에 가닿았다.

그는 기술과사무실에서 프로그람작업을 하는 동무들을 만났다. 며칠이 아니라 몇년만에 그들을 다시 대하는 심정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간 리남웅은 머나먼 심리적로정을 밟아온것이였다. 심리세계에도 시공간의 상대성원리가 적용되는 모양이였다.

남웅은 수현실장이 가있다는 공장 기술문헌자료실로 찾아갔다.

거기서는 진수현이 오은경과 함께 콤퓨터로 CD자료들을 후열하고있었다. 그것은 공장에서 수입한 첨단장치들에 따라온 문헌자료들인데 연구사들에게 보여주어 참고하게 하려고 실장이 하나하나 선별하고 기록하고있었다. 그 자료는 수만페지에 달하는것이였다.

진수현은 남웅이 자료실에 들어선것도 모르고 콤퓨터화면을 바투 들여다보고있었다. 심한 근시여서 다른 사람들보다 눈과 화면사이의 거리가 절반나마 가까왔다. 빛세기는 빛샘으로부터의 거리의 2제곱에 반비례한다고 하였다. 뉴톤은 이런 빛의 성질로부터 중력도 두 물체사이의 거리의 2제곱에 반비례할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고 그것을 실증하여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내놓았다.

지금 리남웅은 실장의 눈이 단위시간내에 상대적으로 얼마나 센 빛을 받겠는가를 가늠해보고있었다. 그것은 남들의 4배가 넘었다. 그러니 눈이 어떻게 견디여내겠는가!…

리남웅은 비로소 이런 심각한 결론에 이르렀다.

실장은 갑자기 안경을 벗고 두눈두덩을 비비더니 피곤한듯 두눈을 감고있었다. 한참동안 마우스가 움직이지 않으니 보호화면이 펼쳐졌다. 그 검은 《공간》에 알락달락한 4면체가 나타나 둥둥 떠다니며 빙글빙글 돌더니 모양을 바꾸어 6면체로, 다시 8면체, 12면체, 20면체, 구로 변하는것이였다. 위상기하에서는 이 도형들이 《동등하다》고 증명하고있는데 지금 이 정다면체들은 련속 다른 도형으로 변환되면서 콤퓨터가 아직도 기동하고있으며 사용자의 지령을 기다린다는것을 보여주고있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앉아있는 그는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에 서서 그를 지켜보던 오은경의 눈가에 안타까움의 눈물이 감돌고있었다.

리남웅은 진수현실장을 이윽토록 쳐다보았다. 조종장치실 실장으로 온 뒤 1년 남짓한 기간에 여러 연구사들을 지도하느라고, 그보다 먼저 자기자신을 준비하려고 얼마나 남모르게 자습하며 고심했겠는가. 새 연구분야에 온 실장으로서 《그렇소.》, 또는 《아니요.》하는 한마디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얼마나 뒤에서 노력해야 했을것인가!…

더우기 젊은 연구사들에게 들인 품은 그 얼마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나는 그의 관심과 노력을 남의 생활에 대한 주제넘는 간섭으로 여겼댔지. 확실히 난 남의 사정은 어찌 되였든 자기 일에만 골몰하였고 또 그것을 응당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지 않았는가. 내 생활에 실패와 곡절이 많은 까닭이 바로 그런 관점에 있는게 아닐가?!…

쓰라린 회오에 잠겨 자기를 돌이켜보던 리남웅은 오은경이 자기를 발견하고 실장에게 대주는 바람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진수현이 반가와하며 그에게 갔던 일은 어떻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남웅은 문헌조사를 하고 송화회사에 찾아가니 리윤덕부사장은 외국출장을 떠났기에 만나보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사장은 만났소?》

진수현이 궁금한듯 물었다.

《예, 편지를 전했습니다.…》

리남웅은 다시금 북받치는 괴로움을 애써 누르며 간단히 대답하였다.

진수현은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문헌조사는 어떻게 했는가고 물었다.

남웅은 K방식풀이와 관련한 문헌들을 조사한 정형을 이야기하였다.

진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론문을 한편으로 계속 추진해봅시다. 어느 순간에 해법이 떠오를수 있소.》

《예.…》

남웅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방안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리남웅이 임창만이 보낸 안경을 꺼내주자 진수현은 짐짓 활기를 띠였다.

《어, 눈이 막 시원하구만. 확실히 다른데!》

진수현은 사방을 둘러보며 기뻐하였다. 곁에 있던 오은경이도 표정이 밝아졌다.

리남웅은 이젠 자기가 CD자료를 후열하겠노라고 나섰다.

진수현은 그를 보고 먼길을 다녀왔는데 먼저 숙소에 들어가라고 만류하였다. 싱갱이끝에 수현은 남웅에게 그 자리를 내여주었다.

남웅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연구사들에게 필요한 자료들을 골라내기 시작하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부담으로 여겨지던 이런 일이 이렇게 가치가 있어보이고 마음을 거뜬하게 해준다는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남웅이였다.

오은경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조심히 실장에게 상기시켰다.

《두번째 강의시간이 거의 되였는데…》

《응, 가야지.》

《일없겠습니까, 눈이?…》

오은경이 저으기 걱정되는 모양이였다.

《이렇게 새 안경이랑 끼지 않았소. 자, 남웅동무. 이젠 들어가 식사를 하지.》

《예.》

진수현은 오은경의 부축을 받으며 공장대학쪽으로 떠났다.

남웅은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강의도 한 절반은 자기가 대신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어느덧 훈훈해지는것이였다.

그는 동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나와 콤퓨터와 마주앉았다. 침실에 혼자 있으면 또 고민에 부대낄것 같았다.

리정철은 송춘도곁에 붙어앉아 통신프로그람의 수정방향을 의논하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리정철을 보고 아래준위프로그람문세에는 아예 삐치지 말라고 터세를 쓰던 송춘도가 지금은 절에 간 색시처럼 정철이 조언을 주는대로 고분고분 응했다.

이튿날 새벽에 남웅이 잠에서 깨여보니 학준이가 체육복차림으로 정철을 따라 합숙마당을 달리고있었다. 리남웅도 송춘도를 깨우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잠시후에 노트콤을 들여다보던 실장까지 나오자 그들은 떠들썩하며 배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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