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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1


실구름이 부드럽게 수놓아진 남빛하늘이 굽어보는 록새벌을 가로지른 포전길을 따라 리병원 의사 홍현희가 걸어가고있었다. 미색작업복우에 왕진가방을 메고 평소에는 위생모밑에 꼼꼼히 밀어넣군 하던 숱많은 함함한 머리칼을 하늘색수건으로 가뜬하게 동여맨 그는 이따금 정겨운 눈길로 누런 벌을 휘둘러보군 하였다.

어디선가 선들바람이 향긋한 과일향기를 간간이 실어왔다. 잔잔한 옥천강물속에 거꾸로 비낀 옥련봉이며 외로운 그림자를 벌우에 끌며 너울너울 날아예는 해오라기며 저기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논배미사이 소로길로 명랑하게 웃고 떠들어대며 멀어지는 모습 그리고 벌언저리에 과일동산을 배경으로 오붓하게 모여앉은 아름다운 문화주택들의 아기자기한 풍경이 다 그의 생활에서 한시도 뗄수없이 소중한것으로 안겨왔다.

눈에 보이는 모든 정겨운 가을날의 류다른 정취가 오늘따라 그의 마음에 한결 차분히 안겨들어 기분은 금시라도 날듯이 상쾌해졌다.

오랜 도시생활이 몸에 푹 배인 현희는 자기가 불과 한해남짓한 사이에 이 고장에 그리도 쉬이 정들고 그리도 쉬이 익숙될줄은 미처 몰랐었다.

사실 금주리는 남편 김인혁에게나 현희에게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땅이였다. 여기는 남편의 남다른 어린시절이 흘러간 애틋한 고장이고 현희의 고향도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편 학창시절 방학때마다 인혁이와 함께 정답게 거닐던 못내 그리운 잊지 못할 고장이였다.

이로 하여 그는 세월의 갈피속에 멀리 사라진 옛시절의 갖가지 추억을 밟으며 왕진의 길을 오갈적마다 저도 모르게 무엇인가 감미롭고 애모쁜 심정에 젖어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한해전까지만 하여도 현희의 생각은 오늘과 같지 못했었다. 대학졸업후 남편이 군당과 도당에서 사업하였으므로 도시생활에 젖어온 그였던것이다.

남편 인혁이 문득 나라가 전례없는 어려움을 겪고있는 시기 고향에 돌아가 금주땅을 훌륭히 꾸려보고싶다는 의향을 내비쳤을 때 현희는 선뜻 그 뜻을 따르지 못했다.

그러한 현희였지만 그는 남편이 실지로 금주리에 리당비서로 부임되자 자기의 마음속 우려와 이러저러한 타산을 즉시에 단념했었다. 더우기 적잖은 위안으로 된것은 하나밖에 없는 혈붙이인 동생이 이웃리에 있다는것과 남편과 쌍둥이처럼 자라 생활의 한 궤도우를 걸어온 조수환이 이곳 관리위원장으로 사업한다는것이였다. 그래서 현희는 남편이 이곳에 부임된 후 이내 세간뒤거두매를 해가지고 따라온것이였다.

정작 새로 와 살림을 펴고보니 혈육을 맞듯 하는 마을사람들의 다심한 정과 흙내 풍기는 아늑하고 차분한 생활환경이 곧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 고장에 애착을 느끼게 하였다.

현희는 본래의 찬찬하고 부드러운 성미로 하여 사람들과 인차 친숙해졌으며 《홍선생》으로부터 《순이 엄마》로 친근하게 불리워지게 되였다.

금주땅에 와서 평온해진 현희의 마음을 휘저어놓은것은 마판진수렁정리와 관련된 문제였다.

마판진수렁공사는 마치도 잠자던 호수에 난데없는 바위돌이 굴러떨어진듯 삽시에 온 농장을 마구 뒤흔들어놓았다.

마판진수렁은 록새벌 한쪽면에 흉터마냥 남아있는 적잖은 면적의 수렁구역이였다. 대략계산으로도 20정보가 넘는다고 하였다.

인혁이 이곳 리에 와서 첫눈에 거슬리는것이 그 진수렁이였는데 그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벌써 이 수렁판을 논으로 전변시킬 생각을 해왔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농한기에 접어들어 이 수렁판을 없앨 결심을 굳히게 되였다.

마판진수렁공사가 정식으로 확정되자 온 농장이 물끓듯 하며 각이한 반응을 일으켰다.

선군시대에 록새벌의 면모를 일신시키는 공사, 전야의 흉터를 깡그리 메우고 수많은 농경지를 통짜로 얻는 실리있는 공사라며 신바람나서 당장이라도 무슨 일 칠것처럼 윽윽하는 청장년들이 있는가 하면 농장의 운명을 건 위험천만한 공사라고 우려하는 사람, 미타해하는 사람, 애당초 머리를 흔드는 사람, 아무튼 가는데마다 이것이 큰 화제거리로 되였다.

사람들의 이렇듯 각이한 반응과 태도는 현희의 마음을 자못 착잡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몇해전에 관리위원장 조수환이 마판진수렁을 우습게 보고 접어들었다가 예상외의 거듭되는 참패에 그만 넋을 잃은 다음부터 단념한 공사였는데 새 당비서가 오면서 다시 제기된 문제였기때문이였다.

당시 조수환이 하면 농장앞에 나선 그 어떤 일이건 드팀없이 해제끼는 일손이 걸싼 완력형의 일군으로 군적으로도 널리 알려져있었다.

그랬던 그도 넋이 나가 단념한 공사를 이 고장에 아직 생소하고 농장일에 손이 선 남편이 하자고 발기했다는것이 현희에게는 너무나도 놀랍게 생각되였다.

현희에게는 혹시 이 공사를 기화로 하여 뿌리깊은 인연으로 각별해진 그들사이가 본의아니게 버그러지지나 않을가 하는 생각까지 생겼다.

조수환으로 말하면 자기와 인혁이간의 평생인연을 맺어주고 가정을 이루게 해준 잊지 못할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와서 정붙이고 사는 집도 그의 온 가정이 떨쳐나 장판도배도 말끔히 새로 하여 새집처럼 정성껏 꾸려주었었다. 조수환의 내외는 현희가 도병원에 있으면서 이내 따라오지 못한것때문에 이곳에서 합숙생활을 할 때에도 남편의 뒤바라지를 끔찍이 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농장일군들의 충분한 사전합의를 거쳐 공사를 하자고 결정하였을것이다. 그러면 관리위원장은 왜 자기가 실패의 고배를 맛보고 단념한 공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견이 없이 순순히 동의했을가? 그것이 우선 현희의 마음에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현희는 어쩐지 오래동안 농장일이 몸에 밴 대틀인 조수환과 육체적준비가 따라서지 못할것 같은 남편사이에 조화롭지 못한 일들이 생기지 않을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

이곳에 갓 왔을 때 아낙네들이 쉬쉬하던 말이 상기되였다.

《새로 온 리당비서가 관리위원장과 배짱이 맞을가.…》

사람들은 일손이 드세고 목청이 높다 해서 관리위원장 조수환을 확성기관리위원장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인혁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였다. 그는 남들의 제나름의 평처럼 겉보기에는 아련할것 같지만 실지는 무슨 일이든 일단 결심하고 설계하면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기어코 끝장을 보고야마는 완강한 기질을 가지고있었다.

오늘 왕진을 나갔을 때 나많은 7작업반장은 자기의 건강치 못한 몸상태를 한탄하며 안타까운 호소를 하였다.

《아마 농장적으루 나만큼 그놈의 마판진수렁때문에 간을 말리구 경난을 겪은 사람은 없을겁니다. 내 원래 1작업반장을 오래하면서 작업반 한가운데 틀고앉은 그 진수렁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왔수다.

그런데 리당비서가 그 원망스러운것을 정리할데 대한 큰 용단을 내리자 나는 자리에 누워서도 환성을 올렸댔지요. 사실은 내가 먼저 제기했어야 할텐데, 참…》

그는 이 공사를 절대다수의 농장원들이 좋아하며 적극 지지한다는것, 단지 관리위원장의 실패에서 얼이 뽑힌 일부 사람들이 도리질을 하고있다고 나무랐다.

현희에게는 그 말이 자기를 안심시키려는 말같았지만 고맙게 들리였다.

(오늘이 그이가 오겠다고 한 날인데…)

출장간 남편을 기다리며 현희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힐수 없었다. 집에서 퍼그나 떨어진 청년작업반에 노상 나가 사는 딸 순이가 벗어놓고간 작업복의 터진 소매를 꿰매려 했으나 웬일인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가끔 바느질손을 멈추고 바야흐로 어둠이 짙어가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은 유별나게도 갈피없는 생각이 련속 꼬리를 물고 머리에 갈마들었다.

엊그제 출장간 아버지가 왔는가 하여 집에 들렸다가 하던 순이의 말이 귀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엄마, 아버지의 발기가 얼마나 대단한건지 알아요? 알곡증산의 예비를 찾는데서 관건적인 공사래요. 우리 청년작업반은 막 부글부글 끓어요. 그래서 벼가을 첫날계획부터 두배이상 넘쳐하기로 궐기했어요.…》

순이는 그때 문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나지 않나 귀를 기울이며 아버지를 초조히 기다리다가 밤 9시가 되자 작업반에 나가 자겠다고 하면서 서둘러 떠났었다.

어쩌다 집에 들려도 감자를 껍질벗겨 자름자름 고르게 썰어 늄남비안에 소복이 담아놓든가, 부뚜막이며 가시장을 알른알른 닦아놓고야 가군 하는 딸을 두고 이젠 다 컸구나 하는 후더운 생각과 함께 곁에서 하루밤 재우지 못하고 돌려보낸것이 어쩐지 알찌근하였다.

순이가 돌아간지 얼마 안되여 인심이 후한 조수환의 안해가 큼직한 싸리바구니에 다 자란 흰토끼 한마리를 넣어 안고와서 현희의 마음을 또 한번 휘저어놓았다.

《요새 리당비서의 얼굴이 축갔다구 별옥 아버지가 걱정하길래 곰이라두 만들어 몸보신하라구.…

신살림이나 같은데 불편한게 많을거예요. 별옥의 아버지는 내가 순이네한테 등한해할가봐 그저 잔소리라우.…》

무슨 영문인지 그 공사와 관련한 웅성웅성하는 분위기, 토끼곰이야기… 이것이 이상스럽게 한선우에서 돌이켜지며 현희의 마음을 든장질하였다.

(내 마음이 오늘 왜 이래질가. 애아버지를 위하는 지나친 위구때문일가.)

현희가 이렇듯 착잡한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인혁이 불쑥 집에 들어섰다.

《인제야 오세요? 먼길에 고생하셨지요.》

현희는 인혁의 들가방을 받아 앉은책상우에 놓았다.

《고생은 무슨 고생, 사무실에 좀 들렸댔소.》

갸름한 얼굴에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웃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던 인혁은 문득 책상모서리에 차곡차곡 쌓아둔 책에 눈길이 미쳤다.

《이건 무슨 책들이요? 으음, 순이가 왔던게구만.》

《왔댔어요. 아버지를 만나겠다구 기다리다가 갔지요.》

현희는 밥상을 차리며 말했다.

《걔가 무슨 타지방에 가서 살기라도 하는것처럼 말하오. 래일이라도 만나면 되는거지.》

《무엇때문인지 아버지를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다면서…》

《갑자기 무슨 일이게.》

《글쎄, 고 앙큼한것이 속을 줘야 알지요. 아버지한테 직접 말씀드릴 일이라면서 나한텐 비밀이라나요? 하여튼 당신은 애들을 잘두 키웠어요.

원, 언제나 아버지편이구… 어쩌면 고 깜찍스러운게 제 이모를 닮은것 같기두 하구.》

현희의 악의없는 지청구에는 쌍둥이 두 아들들을 군대에 내보내고나서 외동딸 순이를 의대에 보내려던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한데 대한 알찌근함도 없지 않았다.

인혁은 《허허허.》하고 웃으며 책상앞에 다가앉아 책제목들을 훑어보았다. 기술서적도 있고 장편소설도 두어권 있었다. 맨 우의 책갈피속에는 또박또박 박아쓴 쪽지편지가 끼워있었다.

《명령! 어느 하루도 책보는 일을 번지지 마세요.》

인혁이 저녁상을 물리자 안해는 상을 거둔 후 부엌에서 싸리바구니를 들고 들어와 그앞에 놓았다.

《자, 보세요. 별옥이네가 보낸 토끼예요.》

《뭐, 토끼?》

인혁은 의문스러운 눈길로 안해를 피끗 쳐다보았다.

《당신이 몹시 상했다고 몸보신하라구 보낸거예요.》 현희는 다소 갈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정말 끔찍한분들이예요. 가까운 친척이면 이에서 더하겠나요. 너무 신세만 지니 미안스러워요.》

인혁은 안해의 말을 들으며 바구니안의 토끼를 들여다보았다.

《그놈 우량종이군. 부둥부둥 살이 올라 뼈가 잡히지 않는군.… 사람두 참…》 하고 인혁은 목이 메여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현희는 바구니를 창밑에 옮겨놓았다.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겨 묵묵히 앉아있던 인혁은 움쭉 일어나 들가방을 열고 사업수첩갈피에서 공책크기만 한 사진 두장을 꺼내여 책상우에 나란히 놓았다.

《여보, 이걸 좀 보우. 삼룡리에서 가져온 사진이요. 얼마나 멋있소. 한장은 토지정리전 사진이고 다른것은 오늘의 삼룡리요. 마침 그곳에 토지정리전에 찍어둔 사진도 있더군.》

현희는 얼른 인혁의 곁에 다가앉아 그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삼룡벌의 두 사진은 너무나 대조적이였다.

한 사진은 벌가운데 스산하게 움푹 패운 수렁에 물이 고여 누덕누덕하고 벌가에 살림집들이 띠염띠염 널리여 살풍경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반대로 다른 사진에는 논벌이 장기판같이 네모반듯이 펼쳐지고 자로 그은듯 한 논두렁사이의 일매진 배미마다 푸른 벼숲이 융단처럼 무연했다. 그리고 멀리 기복이 부드러운 야산변두리에 문화주택들이 규모있게 모여앉아있었다.

현희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인혁은 무척 감심해하는 안해의 옆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수렁규모는 우리것보다 작았지만 정말 잘 정리했소! 나는 거기서 우리 금주리의 래일을 보았소. 금시 다 정리된 우리 농장벌에 푸른 벼바다가 남실남실 설레이는 풍경이 눈앞에 선히 그려지더란 말이요!》

《…》

《우리도 그새 많이 달라졌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할일이 더 많소.

위대한 장군님께서 펼쳐주신 대자연개조구상을 받들고 전국이 떨쳐나섰는데 우리는 어쩐지 우물거린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요. 조건에 눌리워 더 전진하지 못하구… 훌륭한 경험을 창조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배우러 다닌다는게 좀 창피한감도 없지 않지만 어찌겠소.… 배우는거야 창조를 위한 전제가 아니겠소. 직접 가보았으니 이런 자극도 받게 되는게 아니겠소. 우리 마판진수렁도 당장 없애버릴 결심이 굳어지구.…》

현희는 남편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마판진수렁 없애는것 같은 엄청난 공사를 지내 수월하게 생각지 않는가 하는 우려와 걱정도 없지 않았다.

《여보, 삼룡리는 조건이 좋다는데 여기는 거기와 형편이 다르지 않나요. 그런데 당신생각에는 이번 공사가 그렇게 쉽게 될것 같아요?》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어디 있겠소. 누구나 할수 있는 일보다 남들이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내는게 우리 일군들의 일본새고 투쟁방법이 아니겠소.》

《오랜 경력자로 알려진 관리위원장이 랑패를 보고 단념한 공사를 당신이 부득부득 주관해나서는게 어쩐지 걱정스럽고 두려워서 그래요.

공사때문에 어렸을 때 형제처럼 자란 당신과 관리위원장사이에 의가 날가봐 겁나요. 두사람사이에 의난다면 농장일이 버그러지는데로 이어질수도 있지 않나요.》

인혁은 안해의 말을 자못 심중하게 새겨들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한참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말하였다.

《물론 수환동무가 그때의 실패로 머리를 저을수도 있소. 하지만 부모의 피와 넋이 깃든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야 어데 가겠소. 너무 걱정마오. 나는 금주리사람들을 믿소. 그들도 제 손으로 제고장을 락원으로 꾸리려는 자각이 큰것만큼 이 공사를 얼마든지 해낼수 있소.》

현희는 남편의 립장에 수긍이 되면서도 막연한 불안은 덜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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