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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제5장. 미루지 말라

5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화려하게 단장된 돌미산의 하늘가로 백학들이 너울너울 날아예고있었다. 본격적인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이였다. 그러나 청년작업반원들은 그것을 품놓고 구경하며 감탄을 터뜨릴 사이가 없었다. 벌써 이틀째 시험포전의 씨왕고구마수확에 전념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대체로 미루벌에서는 9월 20일이 지나면 첫서리가 내리므로 예민한 작물인 고구마가 쉽게 얼굼피해를 받아 썩거나 흑반병으로 넘어가기 쉬운것이다.

유금이 단 한알도 허실하지 말며 특히 껍질손상이 없어야 한다고 구태여 강조하지 않아도 반원들은 긴장하고 주의깊이 일손을 놀렸다. 준우연구사의 재배시험결과가 이 수확으로 판정된다는것을 모두 알고있었던것이다.

한쪽에서는 캐는족족 계량하면서 저장지로 후송했다. 밭머리에 설치한 증폭기가 건드러진 민요가락을 넘기는 가운데 뜨락또르가 퉁탕거리고 맞들이를 든 청년들이 저울앞으로 북나들듯 했다. 계량에 모두의 관심이 가서 돼지사양에 바쁜 효분이마저 짬시간에 위생복을 걸친채 달려나와 저울눈금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날이 저물녘 마침내 씨왕고구마의 정보당수확고가 나왔다. 지난해보다 약간 높은 35t이였다. 준우는 좀 상심한 기색이였지만 역빠른 효분이 제꺽 두둔해나섰다.

《아, 까먹은게 하나 있어요. 여름에 농약을 씻어내서 썩인 고구마!… 그것까지 가산하면 40t은 문제없었을거예요. 거기에 겹재배로 거두어들인 보리가 4t이니까 정당 44t을 거두어들인셈이지요 뭐.》

청년들은 자기들이 봄내, 가으내 땀흘려 익힌 열매였지만 그 수자를 직접 귀에 담아보고는 새삼스레 놀라와 한마디씩 하였다.

《허, 땅이 꺼지지 않은게 이상하군.》

《보라구, 꿈에서 그리던 호박만 한 고구마가 다 있잖나.》

《이 많은 열매를 익힐라니 땅속기름이 다 빠지지 않았을가?》

그러자 즉시 볼을 잔뜩 불군 효분의 맵짠 공박이 날아들었다.

《누가 그런 무식한 소릴 해요? 우리 축산분조에서 낸 두엄이 얼마게… 해마다 더 살찌지 않나 두고보라요!》

그가 소리칠만도 했다. 올해에 100마리를 목표로 한 축산분조의 돼지가 현재 20마리나 초과되여 새 돼지우리를 더 지을 계획이 세워져있었던것이다.

유금은 준우도 고무할겸 제꺽 그의 말을 긍정해주었다.

《옳아요. 우리가 온 겨우내 고생하며 태양열온실 겸 축사를 세운게 은을 냈어요. 우리 청년작업반같이 제일 척박하고 일기조건도 나쁜 지대에서 이만한 수확을 거두었으니 다른 평지농장들에서 얼마나 나겠는가 하는건 따로 계산할 필요가 없어요. 우린 준우연구사선생이 내건 재배시험목표를 달성한셈입니다.》

《야!》 하는 환성과 함께 짜락짜락 박수소리가 터졌다. 유금은 절로 눈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 한해 헐치 않은 연구사업에 몸을 혹사한데다가 가정적인 마찰로 마음고생도 적지 않은 준우가 끝내 그모두를 이겨내고 성공의 령마루에 올라선것이였다. 유금에게도 자그마한 긍지가 있었으니 강냉이울타리식재배방법의 착안으로 이 높은 수확량이 로력의 대폭 절약이라는 흥겨운 작업으로 이루어진것이였다.

날이 아주 어두워서야 일을 깨끗이 마무리한 청년작업반원들은 기세좋게 노래부르며 숙소로 향했다.

마침 작업반실앞에서 유금은 하루전에 고구마의 농마와 당분함량을 분석하려고 군농업전문학교로 떠났던 수련이와 맞다들렸다. 수련은 아래우에 모두 산뜻한 연쑥색옷을 차려입었는데 응호에게 각막을 떼주었음에도 별빛같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하여 한결 청초하고 매력있어보였다.

《분석결과가 나왔어요!》

수련의 저으기 흥분된 목소리에 숙소로 들어가던 청년들까지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그를 둘러쌌다. 수련은 손에 든 종이장을 내보이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반고구마의 농마함량이 20~25%이고 당분이 5~8%라는것은 상식이예요. 그런데 이번의 씨왕고구마는 농마 27%, 당분 10%로서 최고기록을 돌파했어요. 왕고구마가 수확량은 높지만 당분함량은 상대적으로 낮던 결함이 이번에 완전히 시정됨으로써 가공식품으로 널리 리용될 전망이 확고히 열렸단 말이예요. 어디에 비결이 있었겠어요?》

수련은 어째서인지 얼굴을 살짝 붉혔으나 곧 도담하게 뒤말을 이었다.

《알다싶이 우리 미루벌은 강산성토양인데다가 특히 카리성분이 적은데 카리가 당함량과 직결된다는것을 파악한 리응호동무가 후민산카리비료를 완성함으로써 그 성분이 아주 과학적인 수치로 고구마에 섭취되였기때문이예요.》

이번에도 청년들은 열렬한 박수로 응호의 공적을 치하했는데 당자는 쑥스러운듯 코허리에 손을 올려 안경을 바로잡는 동작을 했다. 그러다가 안경이 잡히지 않자 게면쩍게 씩 웃으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자기 자랑 못해서 괜히 남을 춰주는군.》

《난 너무 칭찬받아 이젠 물렸다는걸 모르세요?》

질세라 수련이 드러내놓고 눈을 빨며 맞불을 걸었다. 둘의 관계를 잘아는 청년들은 모두 허리를 젖히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모두의 눈굽에는 맑은것이 반짝거렸다. 연갈색안경밑에 안대를 댄 상한 눈을 해가지고 비오나 눈오나 포전에서 내굴을 들쓰면서 후민산용액을 끓이군하던 응호의 모습이 상기된듯 했다.

청년작업반원들이 흩어졌을 때 수련이 환한 얼굴로 유금앞으로 다가와 귀속말을 했다.

《언니, 응호동무의 대학예비시험결과가 합격으로 평가되였어요.》

《그래? 됐구나.》

《이제부터가 더 중요해요. 제 응호동무의 종아릴 때리면서 공부에 요구성을 더 높이겠어요. 일없지요?》

《나야 좋지만 우리 응호가 또 뿔을 세워 받개질하지 않을가?》

《그럼 책임비서사위가 돼서 우쭐해볼 기회를 놓치게요.》

최근에 들어와 우쭐해진것은 수련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색을 내려는 의도보다 응호의 사랑을 쟁취한 처녀의 행복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활달함이 표현된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유금은 기본적인 분석결과도 좋게 나온데다가 응호의 소식 또한 기쁨을 더해주어 홀가분한 기분으로 준우와 마주앉았다.

《이젠 군에 상정시켜 해당한 결론도 받자고 하는데 어때요?》

어째서인지 준우는 고개를 짓수굿하고있다가 놀랜듯 눈을 들었다.

《어떤 결론 말이요?》

《씨왕고구마재배시험이 성공했다는걸 공포하고 보여주기사업도 하자는거지요.》

《성공을 공포한다?》

《그렇잖음요. 수확량도 그래, 농마나 당분함량도 그래, 모두 목표를 초과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고구마씨채취도 정보당 20kg이니까 그닥 많은 량은 못되지만 래년에 우리 청암농장전역에 씨왕고구마를 심기에는 충분해요. 그러니 성공이 아니겠어요.》

《흠, 작년엔 전혀 달리 나오더니…》

비로소 유금은 준우의 어조가 그닥 시답지 않다는것을 깨닫고 눈섭을 치켜올렸다.

《어쩐지 반가와하는것 같지 않군요, 예?》

준우는 두꺼운 도수경을 밀어올리며 후 한숨을 내쉬였다.

《왜 반갑지 않겠소. 당함량이 높아진건 확실히 큰 성공이요. 강냉이울타리식재배로 손포를 크게 던것도 성공이고… 그건 얼마든지 세상에 공포하고 보여주기사업을 진행해도 되오. 유금동무로서는 지금껏 할수 없는 일까지도 해놓았소. 이젠… 마음놓고 청년작업반을 뜨시오.》

어떤 날카로운 가시같은것이 가슴을 콕 찌르는것 같아 유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준우는 바로 자기의 연구때문에 유금이 시집을 가지못한다는 가책으로 속에 없는 권고를 하고있는것이였다. 노여움이 치밀어 유금은 저으기 곱지 않은 말이 나왔다.

《이제 보니 준우선생의 생각도 참 기특하군요.》

《이건 내 진심이요. 이젠 내 할일밖에 남지 않았단 말이요. 유금동무가 작년에 비판한것처럼 씨수확량을 높이지 못한데다가 비싼 농약을 쓴건 올해도 다를바 없으니 그걸 마저 시정해야 할게 아니요.》

《준우선생, 가만 계셔요.》

유금은 자기가 빨리 시집가지 못해 안달아한다는 인상을 줄것 같아 좀 주저되였으나 사실은 사실이여서 그대로 터놓았다.

《비싼 농약이야 과수원조성으로 복숭아진디물이 생겨서 우연히 쓴거지 재배방법에 문제가 있는거야 아니지 않아요.》

《그 우연까지도 미리 예견하고 방비책을 확립해놓았어야 하는게 과학자지.》

요란한 전화종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어버렸다. 송수화기를 드니 군에 회의를 갔던 주룡천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구마수확을 다 끝냈다지?》

《예.》

《마침이요. 래일 청년작업반에 할 일이 생겼소. 방풍림보강을 위한 군적인 식수사업이 있게 된다오.》

유금은 너무 반가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렇습니까? 기다렸는데 군당책임비서동지가 끝내 약속을 지켜주었군요. 우리도 힘껏 돕겠습니다.》

《그래야지. 참, 수확량이 35t으로 확증되고 당분함량도 크게 올라갔다지?》

《그렇습니다.》

《그래 어떻게 하려고 결심했소?》

그것은 방금전 유금이 준우에게 던진것과 같은 내용의 물음이였다. 유금은 어쩔수없이 준우의 기색을 훔쳐보게 되면서 애매하게 대꾸했다.

《그건 연구사당자의 결심에 달려있는건데… 가만, 바꿔드리겠어요.》

준우는 마지못해 송수화기를 잡았으나 목소리는 저으기 단호했다.

《아버님, 실물로 40t을 내기 전엔 성공이라고 할수 없기때문에 전 한해 더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야 고구마를 떠나선 존재명분이 없는 사람이니까 차라리 잘되였다고 보아야지요. 검은고구마도 겨우 풍토순화나 시킨 정도이므로 할일이 오죽 많습니까.》

유금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주룡천이 또 한해 늘어날 딸의 외로움을 두고 어떤 반응을 보일것인지 절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초예가 보영을 어떻게 답새겼는가를 이미 알고있는 그였다.

징― 전류흐르는 소리가 동안을 두고 계속 울리더니 마침내 주룡천이 헌헌한 웃음으로 수화기진동판을 울렸다.

《내 딸의 허물까지 메워주는 임자앞에 머릴 숙이네. 그게 내가 도무지 따를수 없는 선군시대 과학자의 자세지. 미루벌을 미뤄두지 않는 진짜주인들이 생겼거던. 유금이도 그래, 임자도 그래… 장하네!》

《고맙습니다.》

《참, 보영이가 한번 내려오겠다고 하던데… 나도 싫은 소리를 했네만 정신이 들게 단단히 신칙해주게.》

주룡천은 딸이 무엇때문에 내려오겠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준우는 몹시 불쾌한 인상이였으나 유금이앞이여서인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때문에 유금동무가 또 우리 처한테서 초달을 받을게 아니요?》

유금도 마주 웃으며 롱비슷이 말했다.

《녀자들이 앙탈을 부리는건 남편을 제 의사대로 주무를 자신이 있을 때예요. 헌데 준우선생의 결심이 굳건한데야 항복하는 수밖에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가정이 아주 깨지고말텐데.》

《허, 시집가본 녀자같이 말하누만.》

《늙은 처녀 귀신이 된다는걸 모르세요?》

준우는 그 말이 아팠는지 이마를 찌프리더니 솔직히 툭 털어놓았다.

《난 이번 결심을 하기가 매우 힘들었소. 내가 성공이라고 긍정한다면 유금동무도 마음놓고 청년작업반을 뜰수 있을것이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는게 옳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요. 정말 동무의 문제는…》

유금은 얼른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시켰다.

《됐어요. 뭘 자꾸 걱정하는지 알만 한데 방금 관리위원장동지가 우리더러 진짜주인이라고 하던 말을 뭘로 들었어요? 과학의 주인이 그 과학을 기만하면 과학이라는 집이 주저앉을거예요. 또 농장의 주인이 농장을 버리면 농장이 페허가 될것이구요. 준우선생이 고구마를 떠나 존재명분이 없듯이 나도 미루벌을 떠나 살 보람을 찾지 못해요.》

그는 마치 눈앞에 진범이 있기라도 한듯 나직하나 또박또박 그루박아 혼자말을 내뱉았다.

《이제야 전 깨달았어요. 우리 장군님의 마음속에 언제나 아프게 매달려있어온 이 미루벌을 미루어버리지 말고 낟알더미가 높이 솟았다는 의미의 미루로 만들자면 누구든 자기의 개인적인 행복을 미루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것을요. 그것까지 미루지 않고 쟁취하기에는 이 미루벌이 너무도 크고 그것을 안아일으켜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거예요. 그래서 전 모든걸… 사랑마저도 미루고 이 땅을 가꾸어야만 하는거예요.

그 사랑을 열번백번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미루벌만은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사회주의선경으로 만들어야 하는거예요!》

…해가 뜨기 바쁘게 각종 나무모들과 사람들을 가득 실은 수십대의 자동차행렬이 돌미산을 드렁드렁 울리며 들이닥쳤다. 거기에는 나팔들을 둘러멘 기동예술선동대원들의 차도 있었다. 첫차를 타고온것은 윤도영책임비서였고 다음차에서 잇달아 라옥현부국장과 함께 뜻밖에도 간밤 꿈에서 그토록 매정하게 후려갈겼던 강진범이 내렸다.

윤도영은 자기를 마중한 유금에게 눈을 끔쩍여보이고는 누구에게라 없이 소리쳤다.

《자, 오늘 식수의 기술지도는 도과수총국 기사장 강진범동무와 청년작업반장 리유금동무들이 맡게 되오. 나를 포함하여 모두 절대복종해야 하겠소.》

이미 두사람이 바람곬에 심을 여러 수종의 나무모를 확정했다는것을 알고 주는 과업이기는 했으나 유금에게는 군당책임비서가 여전히 자기들을 가깝게 해주려고 우정 기회를 마련해주는것처럼 여겨져 몸이 굳어졌다. 하지만 진범은 얼마전의 그 결정적인 충돌은 까맣게 잊은듯 서글서글 웃으며 유금에게 다가왔다.

《그럼 이렇게 분담합시다. 유금동문 구뎅이자리를 정해주고 난 수종을 골라주는걸로… 어떻소?》

그 스스럼없는 어조가 유금의 어색한 마음을 저으기 눅잦혀주어 그 역시 활기있게 대답했다.

《반대없어요.》

곧 사람들이 나무모들을 부리느라 떠들썩거리고 기동예술선동대의 주악도 시작되였다. 그속에서 진범이 지나가는 말처럼 유금에게 속삭였다.

《내 유금이가 괘씸했지만 약속만은 지키기로 결심했소, 언젠가 편지에 쓴것처럼. 알겠소?》

그다음 사람들속으로 냅다 달려가며 손을 내저었다.

《아, 그 민아카시아는 부리지 마오. 좀더 가야 한다니까!》

유금은 망연히 그 자리에 굳어져버린채 자기도 모르게 진범의 말을 아프게 뇌여보았다.

《언젠가 편지에 쓴것처럼!…》

그 편지에서 진범은 유금이가 시집가는것을 보기 전엔 자기도 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유금은 눈물이 나오는것을 참으려고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새벽녘 그리도 모질게 마음을 다졌건만 잊혀진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도!

그러나 유금은 새벽녘의 그 결심을 새롭게 가다듬지 않을수 없었다. 현재는 잊어야 하고 영영 헤여질 각오까지도 가져야 한다!

수천그루나 되는 나무모심기는 요란한 악대소리에 흥취를 돋군 사람들의 비등된 열의속에 오전중으로 끝났다. 눈뿌리 아득하게 뻗어나간 방풍림은 평양단풍나무며 민아카시아, 소나무, 은행나무 등 새 수종의 나무들로 보강되여 아호비령의 찬바람을 완전히 차단하는 하나의 거대한 혼성림울바자를 형성하였다.

유금은 이미 계획한대로 청년작업반의 명의로 식수자들전원을 청년원에 초대했다. 실컷 한증도 시키고 식사까지 푸짐히 대접하려고 준비시킨것이였다. 윤도영은 만족하여 유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역시 유금반장이 할줄 알거던. 그 값도 치러야겠는데… 방풍림다음엔 또 뭐가 있더라?》

《고맙습니다. 래년엔 바람피해를 받지 않고 편히 농사를 지을수 있게 되였습니다. 헌데…》

유금은 너무 군당책임비서에게 매달리는것 같아 좀 망설이게 되였지만 내친김에 털어놓았다.

《이건 우리 군에 해당되는것만은 아니지만 전기사정으로 저수지의 물들을 마음대로 퍼올리지 못해 갈수기에는 애를 많이 먹습니다.》

《그래, 옳소.》

윤도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미루벌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신곡저수지를 비롯하여 무려 십여개나 달하는 저수지가 건설되였는데 그 물을 2~3단의 양수기로 퍼올려 어디서나 마음껏 써왔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부터 전기가 부족하고 낡아진 설비들도 미처 교체하지 못하여 눈아래 뻔히 물을 보면서도 제대로 퍼올리지 못하고있었다. 거기에 소요되는 전기만도 무려 수만kw나 되였다.

《우리 나라의 공업구조가 날로 커가고 새 살림집지구도 계속 늘어나고있기때문에 전기는 앞으로도 계속 긴장할거요. 그래서 물을 자연흐름식으로 끌어보는게 어떨가 하고 궁리는 하고있는데… 좌우간 그 문제도 어떻게든 풀도록 노력해봅시다.》

식수자들이 모두 떠나간 다음 청년작업반에 돌아온 유금은 마침 마당복판에서 말파리의 말을 풀어내는 장춘삼아바이와 맞다들었다.

《또 어디 가셨댔어요? 그만큼 쉬라고 했는데…》

유금이 가볍게 책망하자 장춘삼은 말목을 다독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내 그러지 않아도 이젠 말파리와도 작별해야 할가부다 하고 서글프게 생각했는데 오늘 멋진 일감이 생겨 춤추며 달려봤네. 누굴 모셔왔는지 아나?》

《?…》

《자, 어서 방에 들어가보라니.》

유금은 절로 긴장해졌다. 이미 떠나간 진범이 되돌아올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침에 마음의 구속을 주는 말을 던진 그가 안심치 않아 또 뒤를 다지려고 할수도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정작 방문을 열자 그에게 총알처럼 날아와 매달린것은 웬 쬐꼬만 처녀애였다.

《유금이모!》

유금은 고사리같이 야들야들한 손의 감촉에 심장이 뚝 멎는것 같았다. 별빛같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이며 빤히 올려다보는 처녀애는 틀림없이 먼 어린시절의 주보영이였다. 유금은 가슴이 찌르르하여 냉큼 처녀애를 얼싸안아올렸다.

《네가… 네가 미향이구나. 이렇게 다 크도록… 이렇게 말을 다 번지도록…》

가벼운 향수냄새로 유금은 방안에 또 한사람 보영이가 와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보영은 이미 창문으로 유금이 들어서는것을 내다보았는지 방복판에 우뚝 선채 움직일념을 않고있었다. 발치에는 려행용트렁크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보영이 남편이나 한번 만나고 돌아가려는 걸음이 아니라는것을 보여주고있었다. 하지만 유금은 선뜻 입이 열려지지 않아 말없이 보영을 뚫어지게 마주보기만 했다. 보영은 그 눈길을 면바로 받기가 괴로운지 시선을 방바닥에 떨구었다. 둘의 침묵이 싫었는지 미향이 먼저 재잘거렸다.

《나 사진이랑 보면서 고운 이모들 있다는걸 알았다. 리유금이모, 송초예이모… 그렇지, 엄마?》

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는데 꽃술처럼 곱게 휘여든 속눈섭에 맑은 눈물방울이 매달려있었다. 그 눈물이 모든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아니, 자기와 초예를 이모라고 불러준 미향이의 말이 친구들을 잊지 못해 어린 넋속에 그 모습들을 새겨준 보영의 심정을 그대로 담고있었다. 그만 유금은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미향을 더 꼭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언제든 이렇게 찾아와줄줄 알았다.》

《정말?…》

《정말!》

《유금아!》

보영은 그만 목멘 부름을 터뜨리며 유금의 어깨를 감아잡았다. 그다음 떨리는 소리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내가 미련하고… 어리석었어. 그동안 못되게 군걸 생각하면… 날 욕해줘. 아니, 성이 풀릴 때까지 실컷 때려줘. 그다음… 다시 친우로 받아주렴. 꼭 구실하는 진짜친우가 되겠어, 응?》

보영이 너무 간절하게 청하는 바람에 유금은 그만 호호 웃어버리지 않을수 없었다.

《좋아, 네가 백살구꽃수건을 도로 내라고 호통치면 그땐 내 친우다.》

보영도 웃으며 나무라듯 눈을 흘겼다.

《그러잖아도 백살구꽃수건을 달라고 요구하려던 참이였어. 그걸 버렸을 때부터 미루벌도 미루어버렸다는걸 난 여태 깨닫지 못했댔어. 이젠 절대로 내 몸에서 떼여놓지 않을래.》

그다음 다시 심각한 표정을 하고 발밑에 놓은 트렁크를 스쳐보더니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너와 꼭 의논할게 있어. 아무래도 난 네 의견을 듣지 않고는 결심할수 없어. 말하자면… 내가 아주 여기에 내려오면 어떨가 하는거야. 이미 하던 육종도 계속하고 미향이 아버지의 연구사업도 곁에서 돕고…》

유금은 뚫어지게 보영을 쏘아보았다. 두드러지는 맑은 얼굴살갗과는 대조를 이루며 보영의 눈가장자리에는 검버섯이 둥그렇게 끼여있었다. 그것은 그가 최근에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고민에 몸부림쳐왔다는것을 웅변으로 보여주고있었다.

하지만 유금은 북받치는 노여움을 참을수 없어 왈칵 성을 냈다.

《너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한게 아니냐? 여기서 남편의 뒤바라지나하면 널 곱다고 쓸어줄줄 아는데 그건 초예의 충고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나 같아. 자, 봐라. 난 이렇게 미루벌의 딸이 되여 나타났다. 이래도 할말이 있느냐? 하는… 대학졸업때 내 벌써 말했지. 어디서 무얼 하든 미루벌을 잊지 않고 그 미루벌에 기여하면 그게 진짜 미루벌의 딸이라고 말야. 너 박사원을 괜히 나왔니? 대학의 종합분석실처럼 육종사업도 그렇고 남편의 연구도 그렇고 미루벌을 위해 네가 착실히 이바지할 초소는 다시 없어. 그게 네가 이 땅의 진짜 자식구실을 하는 길이야!》

보영은 고개를 푹 떨군채 꼼짝하지 않더니 어푸러지듯 유금의 다리를 부여안으며 흐느낌을 터뜨렸다.

《내가 이런 친우를… 이런 친우를!…》

준우가 두꺼운 안경을 밀어올리며 성큼성큼 방안에 들어선것은 그때였다. 얼굴이 환한것으로 보아 그도 장춘삼아바이로부터 보영이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내려왔다는것을 전해들은 모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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