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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2 회

종 장

세월이 흐른 뒤

1


일생 일세대는 폭풍우와 같다는 말이 있다. 더구나 영광과 보람으로 가득찬 세월은 더 빠른 법. 리승기는 제 나이 87살에 이르렀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두 마음은 아직 청춘이지.)

흔히 늙은이들이 자신을 두고 하는 생각이다.

옛사람들이 세월의 흐름을 흐르는 물에 비유한것은 옳은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 세월의 류수를 막을수는 없다. 허나 그보다 인간의상과 행동, 창조적탐구와 열정은 더 막을수 없으며 그것은 세월의 흐름을 앞질러 걷잡을수없이 미래에로 달린다.

리승기는 느닷없이 이런 상념에 잠겨 가락맞게 은은히 들려오는 밤렬차의 차바퀴소리에 귀기울이고있었다. 그는 상급침대 하단의 푹신한 자리에 몸을 반쯤 뉘이고 무릎관절의 로쇠로 하여 말을 듣지 않는 제 다리를 원망스레 내려다본다. 벌써 1년째 자신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병원과 가족과 친지들이 치료를 힘써주는데도 그 기름기가 말라버린 관절(그자신의 비유이다.)이 본시대로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누워서라도, 남의 시중에 얹혀서라도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조선지식인대회라는 큰 회의에 참가한다고 생각하니 어린애마냥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런 성대한 회의에 처음 참가하는 사람처럼 왜 이토록 흥분하는것인가?

1년전만 해도 최고인민회의는 물론 나라의 정사를 론하는 큰 회의들에 가면서 엄숙한 심정에 휩싸이기가 일쑤이더니 지금은 자기의 간절한 소망이 실현되였다는 그 한가지 사실로 하여 마음이 그저 들떠지기만 하는것이다.

은근한 만류, 로골적인 걱정, 진심으로 되는 동정… 곁의 사람들이 표시하는 그 모든 형형색색의 감정을 다 물리치고 어쨌든 초지를 굽히지 않고 대회장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그는 자못 흐뭇하기까지 하였다. 말석에라도 참가해서 더없이 영광스러운 이 자리를 양보할 마음은 없었던것이다. 흔히 늙은이들이 제 고집이 꺾이지 않았을 때 느끼는 그런 일종의 쾌감에 잠겨 약간 몸을 돌려 어둠에 싸인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캄캄한 바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창유리는 침대칸의 불빛을 반사할뿐이다. 방금까지 발치에 앉아있던 서기도 상단으로 올라가 잠이 들었다. 여러 사람이 불편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그한테 왔다가 갔다. 모두 지식인대회에 같이 참가하는 대표들이다.

그를 걱정하여 왔다간 사람들중에는 지방당책임일군들은 물론 과학원안의 박사들과 소장들이 있었으며 맨나중에는 국제과학토론회에 갔다온지 열흘밖에 안되는 한 젊은 연구사도 찾아왔었다.

한 연구소의 소장으로 이제는 일흔살을 훨씬 넘긴 리재업이도 그리고 석유화학과 합성수지분야에서 권위자로 된 방하민교수도 같이 와서 불빛에 희슥한 머리칼을 은빛으로 번쩍이며 앉아있다가 갔다.

늙고 젊은 많은 원사, 교수, 박사, 연구사들이 이 통행렬차에 함께 타고 평양으로 가고있다. 그들은 떠나서 오래동안 흥분을 누르지 못해 매 침대칸마다에서 담소들을 하더니 지금은 잠이 들었는지 침대칸의 복도조차 조용해지였다.

렬차는 분수령으로 치달아오르면서도 별로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불빛이 환한 어느 한 역구내가 지나간다. 역명판이 피끗 보이다 사라졌다, 마치 이 로정의 한 구획을 표시하는 리정표와도 같이.…

문득 지나온 인생에서 큰 전환점으로 된 리정표들이 얼핏얼핏 머리속에 떠오른다.

리정표… 리정표…

그중에서 1968년 6월에 있은 일… 함흥지구를 현지지도하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함남도당회의실앞에서 리승기박사한테 청진에 며칠 먼저 들어가 화학섬유공장의 실태를 료해할 과업을 주시였다.

과학서기와 함께 청진에 들어간 리승기는 실태료해과정에 공장의 기술개건사업보다 기술자들과의 사업에 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과학원 함흥분원의 실태까지 겹치여 마음속의 번민에서 벗어날수 없었던 리승기는 무엇인가 수령님께 말씀드리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심정으로 바재이고있었다. 그 마음을 알아주신듯 수령님께서는 검열총화가 있은 날 저녁에(모임은 휴양소문화회관에서 있었다.) 리승기한테 말씀하시였다.

《리선생은 오늘 저녁 여기서 나하구 같이 쉬면서 얘기나 좀 나눕시다.》

휴계실의 천정에서는 무리등이 고요히 빛을 뿌리고 방안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

문득 수령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나두 리선생한테 하고싶은 얘기가 있구 리선생두 나한테 할말이 있을거라구 생각해서 이렇게 저녁을 함께 지내자구 했습니다.》

《수령님.…》

결심이 확고했던 그만큼 리승기는 수령님을 우러르는 믿음과 격정에 목이 메여왔다. 평상시엔 온화하면서도 때로 놀랄만큼 곧은 성미인 리승기도 이 순간에는 약간 좀자르지 않을수 없었다.

수령님께서는 한손으로 리승기의 팔소매를 감싸듯 잡아주시면서 그의 말을 재촉해주시였다.

《난 지금 리선생의 조언을 받구싶은 심정입니다.… 우린 손잡구 주체공업을 창설했는데 무슨 간격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오늘 총화모임에 참가하고 리선생두 생각되는바가 있었으리라구 봅니다.》

《수령님, 고맙습니다. 제 그럼…》

《말씀하시오, 말씀하시오.》

《제 보기엔 지금 당의 의도에 맞지 않게 인테리혁명화가 일부 잘못 집행되는것 같습니다.》

리승기는 자제력을 발휘하면서도 숨김없이 터놓기 시작했다. 과학원안에서도 사상문제를 곧 사람문제로 보는 편향들을 이실직고하면서 하나하나 터놓기 시작했다.

리승기의 말을 주의깊이 들으시던 수령님께서는 심뇌의 표정으로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여기에서 느낀것두 그 문제입니다.… 과학원실태두 제때에 말씀해주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리선생이니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지 누가 해주겠습니까.… 인테리의 혁명화문제에서 편향이 있다는걸 평양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생각했구 이번에 올라가면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려구 했더랬습니다.》

그이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주체를 세우자고 인테리들을 혁명화, 로동계급화하는데 일부 일군들은 마치 혁명화가 목적인것처럼 생각하면서… 말하자면 목적과 방도가 뒤바뀌였단 말입니다. 과학자들의 혁명화란 과학실천과 연구사업을 통하여 하는것인데… 리선생의 얘기까지 듣고보니 하루라도 빨리 바로잡아야 할것 같습니다.》

리승기는 그 순간이 길었던지 짧았던지 후일에도 기억하고 가늠할수가 없었으니 다만 위대한 수령님의 곁에서 매번 그러하지만 이 시각에도 자신이 또다시 새로이 태여난다는 그 숭고하고도 명백한 느낌을 가슴깊이 체험할뿐이였다.

흥분과 격동에 못이겨 리승기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수령님, 감사합니다.》

《이런 일을 도와줘서 내가 도리여 리선생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바로 그 이튿날이 6월 14일이였었다. 하루면 다녀올수 있는 북부탄광지구에 대한 현지지도도 뒤로 미루시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경북도안의 지식인들이 모인 휴양소문화회관의 소박한 회의장소에서 후일 그이의 저작집에 수록된 《우리 당의 인테리정책을 정확히 관철할데 대하여》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불후의 고전적로작으로서 그 의의와 생활력이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진 연설, 인테리들의 운명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된 연설은 이렇게 한 과학자와의 담화가 있은 그 다음날 아침에 세상에 발표되였던것이다.

…렬차는 평양으로 계속 달리고있었다.

차창밖에 비낀 어둠속에 언뜻 불빛을 받으며 나타나는 역명판… 역이름을 분간해서 읽을수도 없이 순간에 지나간다. 허나 그것 역시 지나간 나날에 있었던 수많은 리정표들의 하나처럼 생각된다.

불시에 떠오르는 1983년의 봄날…

금수산의사당(당시)에서 과학자들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들만 참가한 협의회때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앞줄에 과학자들을 불러내여 앉혀주시고는 그들을 대견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우리 당과 함께 변함없이 걸어온 과학자동무들과 이렇게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로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대규모화학기지들을 건설할 토론을 하게 되니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란 말입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우고계시였다.

리승기는 자기의 옆자리에 앉은 리재업을 보시고 수령님께서 말씀하실 때 함께 미소를 띠우지 않을수 없었다. 수령님께서는 리재업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시였다.

《재업동무도 그새 많은 일을 했지. 남흥화학을 하면서 로력영웅칭호두 받았구… 사대주의주장과 서양사람들의 거만한 코대를 꺾구 공장조립을 우리 주장대로 해서 기일을 훨씬 앞당겼거던… 그러니 재업동문 주체가 섰지. 감자알콜로 고무를 만들겠다고 하던 때가 옛날이란 말이야.》

김일성동지께서는 크게 웃으시였다. 그러시던 수령님께서는중을 둘러보시며 못내 서운하신듯 말씀하시였다.

《오늘 이 자리에 강영창동무랑 없는게 참 섭섭한 일입니다. 그는 과학원원장으로서도 많은 일을 했는데… 이런 자리에 그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수령님께서 언제나 잊지 않으시는 강영창이다. 강영창은 김두삼, 리재업과 같이 맨처음 수령님의 품으로 찾아왔을뿐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오직 수령님만 믿고 따르는데서 참으로 귀감이 될만 한 학자이며 일군이였다. 리승기도 그를 잊을수가 없었다. 나이는 자기보다 아래지만 수령님의 뜻을 받드는데서만은 항상 자기를 이끌어주다싶이 했었다. 수령님으로부터 무슨 과업만 받으면 밤중이라도 전화를 걸어주면서 의논을 했었다. 때문에 그를 과학원원장으로뿐아니라 인간으존경하고싶은것이 어쩔수 없는 심정이였었다.

얼마후에 수령님께서는 리승기한테 말씀하시였다.

《리선생이 나와 약속한대루 매일 만보걷기운동을 하고있다니 좋은 일입니다. 정신로동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육체적으로 너무 몸을 놀리지 않으면 인차 로쇠가 옵니다. 그러니 하루 만보걷기운동을 꼭꼭 하십시오. 우리 더 늙지 맙시다, 할일이 많은데.…》

리승기는 팔십이 다 돼오는 자기를 두고 오늘까지도 만나실 때마다 세심히 건강을 념려해주시면서 인생의 말년에도 삶의 보람을 잃지 않게 해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하해같은 사랑앞에 그때마다 목이 메이군 하였다. 운명의 로정에 서있는 리정표들처럼 역명판들이 어둠속에 나타났다 뒤로 사라져버렸어도 추억에 뚜렷이 남은 이런 순간들을 어찌 잊을수 있으랴.

렬차는 어느 한 역에 멎었다.

대표들을 인솔하기 위해 함흥에서부터 동행하는 당중앙위원회일군이 침대칸으로 조용히 들어와 새벽 3시라고 상기시키면서 리승기가 여전히 자지 않는것이 걱정스러워 《선생님, 조금이라두 눈 좀 붙여야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의무적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어조가 오히려 고맙게 들렸다.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불을 끌가요?》

《네.》

일군은 나가면서 불을 껐다. 그러자 차창밖으로 가까이 또는 멀리로 불빛이 보이였다. 산간마을의 탈곡장외등같기도 하고 어느 광산의 자그마한 갱구앞 불빛같기도 하였다.

리승기는 렬차의 가벼운 진동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희붐히 밝아오고있었다.

렬차는 평성을 지나고있었다. 새벽어둠을 밀어제치며 과학원청사와 리과대학건물이 보였다.

《저 리과대학을 졸업한 창직의 딸 성희도 이젠 우리 분원 연구소에서 당당한 연구사로 자라났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일찌기 리승기는 림창직의 자식들을 데려다 양딸로 자기 공민증에 올리고 공부를 시키였다.

그는 창직의 딸 성희가 제 아버지가 받은 위대한 수령님의 표창장을 귀중히 보관하는것을 보고는 목이 메여서 《성희야, 아버지, 어머니가 너희들한테 물려주는 이보다 더 훌륭한 가보가 어디에 있겠니.》하고는 눈물이 헤픈 촌늙은이처럼 눈시울을 슴뻑이였었다.

성희는 리과대학에 갔고 리승기는 그의 학부형이 되였다. 성희의 결혼식도 리승기네 집에서 하였다. 림성희는 리과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바로 아버지의 제자였던 조상국의 밑에서 연구사로 일하고있다.…

렬차가 평성을 지나자 리승기는 흥분에 못이겨 아예 일어나앉았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그렇지 일어나 침대칸복도에 나서서 거기를 지나다니는 어느 대표든지 만나서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다. 허나 막상 렬차가 평양역에 미끄러져들어가자 웬일인지 그의 마음은 갑자기 안정을 잃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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