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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71 회

제 3 편

제 5 장

4


리승기는 새로 준공된 공장구내를 차타고 다니지 않았다. 구내의 끝에서 끝까지 거의 십리나 되고 한복판에는 도시처럼 대통로가 뻗어있어 승용차를 타고다니기가 편리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땀방울이 채 마르지도 않은 그 길로 걸어다니기조차 송구한 마음인데 어떻게 관광이나 하듯 차에 앉아다닐수 있으랴.…

이것은 물론 준공 초기에 있은 일이다. 차츰 직장에서 급한 일이나 협의회가 벌어져 빨리 가야 할 때가 많아져 그때는 부득불 차를 타야만 하였다.

급히 다녀야 할 이런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였다. 그만큼 공업화의 첫시작은 예상한대로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어쨌든 일찌기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 어설픈 유리기구들로 되였던 자그마한 실험장치들이 지금은 어마어마하게 덩지 큰 직장으로 자라난 그것만 해도 흐뭇한 일이 아닐수 없다.

청수에서 키운 운전공들이 여기서는 직장장들로 되였고 1년전부터 청수에서 양성해온 운전공들이 매 직장마다에서 설비와 장치물을 다루고있었다. 리승기가 그렇듯 아끼고 사랑하는 특수용접의 명수인 한태호는 중합직장장으로 또 그 누구는 합성직장장, 방사직장장으로 자라났다.

매 직장에는 걸린 문제들이 수없이 많았다. 리승기는 각 현장들을 다니며 연구사들과 상론하였으며 저녁이면 공장시험소의 자기 방에서 그런 문제들을 협의에 붙이군 하였다. 공업실천은 그로 하여금 공학과 기계제작, 심지어 공업경영학분야에까지도 탐구의 심혈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나라의 화학공업은 여기저기서 리승기의 과학적인 지도를 기다렸다. 그중에서도 새로 일떠서는 원유화학기지들이 그러했다. 여러 나라와 국제학회들에서 초청장들을 보내여왔다. 거기에 자기를 대신해서 당당히 나설수 있는 수많은 화학자들이 자라났다는 사실이 비날론의 공업화에 못지 않게 그를 기쁘게 하였다. 과학은 인간의 재부인것은 사실이나 뭐니뭐니해도 과학의 재부는 인간 그자체이라는 철리가 가슴을 뜨겁히는것이였다.

어느날 김용석부소장이(그는 후에 과학원 분원 부원장으로, 다음에는 평성의 과학원 부원장으로 줄곧 과학행정일군의 직책을 력임하였다.) 리승기의 방에 들어왔다.

《선생님, 국제학회에서 초청장이 왔는데 쏘련과학원학회와 도이췰란드에서도… 그러니 세군데서 동시에… 선생님은 어디에 가시렵니까?》

잠시 김용석을 바라보던 리승기는 단호히 말했다.

《난 바빠서만 아니요. 딴사람을 보내도 된다고 보오.》

《그럼 누가 대신해서?》

《아니요. 나를 대리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학술적인 자격으로, 과학적인 견해로 당당히 갈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졌소. 내가 추천하겠소. 우선 부소장동무부터…》

그러면서 리승기는 제앞에 서있는 김용석이만 아니라 신현석, 옥지문, 오정해를 그리고 두말할것도 없이 리재업을 생각하고있었다. 청수에서부터 자란 사람들만 해도 수없이 많다. 이제는 방하민이나 렴성근이도 국제무대에서 우리 나라의 주체과학을 대표할수 있을것이 아닌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자라나 후일에 과학원 분원은 물론 본원에 있는 여러 연구소의 소장들로 되였고 이름있는 교수, 박사들로 성장했다.)

리승기의 방에는 저녁마다 연구사들이 모이는 시간이 정해져있었다.

어제는 모이자마자 앉기도 전에 맨먼저 합성직장을 담당한 연구사가 말했다.

《우리 합성에선 2만t의 능력에서도 비등식의 전망이 확고하다고 봅니다.》

일찌기 림창직이 그옆에서 쓰러진 합성탑은 지금 몇십배로 자라나 거창한 탑으로 솟았으니 합성공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들을 풀어놓고 간 림창직의 탐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공업화에서 응당한 빛을 내고있었다. 따라서 비등식이 확고하다는 이 연구사의 말을 누가 구태여 새삼스럽게 받아들이겠는가.

하루는 저녁모임이 끝나 모두가 밖으로 나갔으나 신현석이 주춤거리며 방안에 남았다.

《왜 그러우? 여기 와 앉지.》

신현석이 이렇게 따로 남을적엔 꼭 무슨 일이 있다.

그는 책상앞에 와서서 주저주저 말을 했다.

《저… 장혁동무의 결혼식을 우리 집에서 하려구 합니다.》

《결혼식을?… 아니? 그 동문 고향에 부모형제가 다 있지 않소?》

리승기는 의아쩍게 그를 쳐다봤다.

《글쎄, 그렇긴 한데 우리 집사람두 그렇구 저두 그렇구 그를 친동생처럼 여겨왔더랬는데.》

사실 신현석부부는 갓난애를 업은 신혼부부로서 청수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에게 다른 혈육은 없다. 신현석이 키우는 제자는 곧 그의 친동기나 같은것이다. 리승기는 그들의 뜨거운 정이 가슴에 마쳐왔다.

《한데 그 집 부모님들이 승낙할가?》

《처음에 고집을 부리더니 장혁동무가 가서 데리구 왔습니다. 비날론공장구경두 할겸 왔다는게지요. 잔치라야 그저 간단히 우리 연구사들이 몇명 앉아 축하하자는겝니다. 비날론공장이 준공된 이후 우리 연구사들속에서 첫 결혼식입니다.》

《참 그렇군. 우리 비날론과 함께 새 가정이 생기게 되는가.…》

리승기는 뜨거워지는 가슴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비날론섬유의 대량적인 생산은 1962년부터 시작되였다. 정상화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정상화의 궤도에 들어서기까지 그것은 간고하고도 영광스러운 나날이였다.

비날론-그것은 주체의 대명사로 되였으며 비날론공업은 주체공업의 본보기로 되였다. 그것은 화학공업의 기초를 다진 거대한 사변이였다.

리승기는 기쁨과 고난, 영광과 시련의 기슭을 헤치며 진리의 상상봉을 향하여 걸음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의 사색과 활동은 폴리비닐알콜공업과 비날론에만 그치지 않았다. 1960년대 중엽부터 시작된 대규모석유화학공업기지창설, 유기, 무기화학공업토대축성, 합성수지공업분야 등 화학공업의 여러 분야에 걸쳐 그의 과학적인 지도가 미치지 않는데는 거의 없었다. 십여개의 큰 연구소들과 몇천명의 연구사들을 가진 과학원 함흥분원의 원장인 그는 과학행정사업의 분망한 나날들을 보내면서 많은 외국의 과학자들을 만나주고 총련과 기타 해외과학자들의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런 속에서 그는 어느덧 칠순과 팔순을 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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