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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8 회

제 3 편

제 5 장

1


방하민이 리승기한테로 간것은 오후무렵이였다.

그때 리승기는 뜨락의 나무들사이를 거닐고있었다. 오전에 공장시험소에 나갔으나 오후에는 의사의 지시를 지켜 나갈수가 없었다. 림세진은 당분간 오전에만 연구소와 건설장에 나가는것을 허용하였다.

리승기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림세진한테 화를 내려고 하였다. 그런 기미를 눈치챈 림세진은 오히려 흔히 희로애락이라는 그 정서의 변화가 이제는 리승기한테 정상으로 되돌아왔다는 제딴의 직업적인 타산에 의해 속으로 못내 기뻐했으며 따라서 너그러운 미소를 띄우고 롱담으로 굼때였다.

《아, 난 이젠…리선생한테 시끄러운 존재이니 인차 사라지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참구 제 말을 들어주시우. 옛날부터 간다는 사람의 소청은 들어준다는데… 안 그렇습니까?》

리승기는 하는수없이 허허 웃고말았다. 그 웃음 역시 림세진을 기쁘게 한건 두말할것 없다.

방하민이 들어서자 리승기는 그를 기다리던중이라 급히 다가와 방하민과 손을 마주잡았다.

방하민은 웬일인지 목이 메여와서 그저 떠듬거리며 《리선생! 그새…》 하다가 《요즘 좀 어떠십니까?》 하고 말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리승기는 반가운 인사와 함께 그의 손을 놓지 못하였다.

그들은 손들을 부여잡은채 같이 응접실로 들어가 쏘파에 앉아 서로 마주보기만 했다.

방하민의 얼굴은 희멀쑥한 혈색이 여전했으나 작은 두눈에는 그전처럼 예리한 빛이 아니라 두리두리한 얼굴에 퍼그나 조화되게 온화한 빛이 어려있었다.

앞차대의 한옆에는 화분우에 진홍빛제라니움꽃이 피여있었다.

방하민은 제가 구해준 수정안경을 쓴 리승기를 처음 보게 된다. 불시에 가슴이 뭉클해지는것 같았다. 그 수정안경알을 통해 내다보는 리승기의 눈빛이 몇년전보다 더욱 뜨거워보였다. 방하민자신이 그렇게 느꼈을따름이다.

두사람은 서로 나눠야 할 회포가 많은것 같기도 하고 이미 다 풀고나서 별로 없는듯이 느껴지기도 했다. 리승기는 자기들이 이제 해야 할 일부터 화제에 올리고싶어졌다.

방하민은 자리가 잡히는 차제로 리승기네를 찾아보겠다고 한 어머니의 말을 전달했다.

《아니, 내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지요. 고국땅을 밟아보며 어머닌 참 기뻐하시겠소.》

《네, 오늘두 려관방에 있지 않구 며느리, 손자와 함께 평양시내를 돌아다니실겁니다.》

《그럴테지요. 그럴테지요.》

그 어머니의 심정에 감심하는 리승기는 어쩐지 방하민이 친동기처럼 가깝게 느껴지였다. 그를 만나는 지금 리승기는 가슴속에 넘치는 뜨거운 정으로 하여 일상생활의 사리도 더 명료해지는것 같았다.

방하민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 특히는 그를 경원시하게 되였던 그 모든것들이 기억에 되살아났는데 이상하게도 그를 원망하는 감정은 없고 그것이 순전히 자기의 잘못과 불찰로 인하여 그렇게 된것만 같이 느껴졌다. 자기는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이 아니던가.… 정도이상의 자기비하의 감정 역시 아직은 병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일수 있으나 어쨌든 그것은 방하민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였다.

리승기는 방하민에게 물었다.

《그래, 새로운 합성수지개발에 관한 학위론문을 가지구 나왔다는데…》

이 말은 그 론문에 대한 질문보다 앞으로 어디서 일하게 되는가를 묻는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방하민은 그 뜻을 알아차린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그 론문을 덮어두겠습니다.》

《덮어두다니?》

《그건 원유에서 출발하는 합성수지개발이구…》

《무슨 말씀이요? 우린 앞으루 원유화학두 해얄게 아니요?》

《하지만 지금은 저두 비날론공업화에 참가하겠습니다.》

방하민은 (제가 도피자이지만 이제라도 허락된다면) 하는 생각을 말로 덧붙이지 못하는게 안타까왔다. 이 며칠사이에 굳혀진 결심 아니, 기차에서 내린 날 밤에, 비날론공장건설장을 정신없이 새벽까지 돌아치던 그밤에 이미 결정되다싶이 한 그 결심을 아무 주저없이 석연히 터쳐놓은것이다.

리승기는 잠간 아무말없이 방하민의 얼굴을 건너다보다가 《고맙소.》 하더니 《하여튼 짬을 내서 그 론문을 한번 보았으면 합니다.》 하고 부탁하는 어조로 말하는것이였다.

《그럴 시간이 있겠습니까?… 차차… 이제 앞으루 리선생의 방조를 바랄뿐입니다.》

방하민이 리승기앞에서 이렇듯이 허심한 어조로 말하기는(그와의 친교는 꼭 10년에 이르렀다.) 아마 이것이 처음일지 모른다.

그 순간에 리승기는 불현듯 방하민의 어머니가 《같은값이면 조선박사》라고 했다는 그 말이 생각났다. 그는 말했다.

《뭘요. 나두 합성수지는 아직… 하지만 같은 고분자화학자로서 함께 힘써봅시다.》

리승기의 말속에 울리는 호의를 감촉한 방하민은 다소 흥분에 겨워 음성을 높였다.

《리선생두 언젠가 말했지만 사실 여기 있을 땐 몰랐는데 전 2년동안 가있으면서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걸 느끼게 되였습니다.… 그 나라는 말입니다. 리론화학은 그렇다치구… 그건 그들이 멘델레예브와 같은 대학자를 가졌다는것으로도 리해가 갑니다만… 한데 응용화학은 우리가 결코 뒤지지 않았다구 생각했습니다. 몇달쯤 지나 거기 연구생들은 당신의 수준이 곧 조선의 수준이겠는데 그 수준이면 여기에 괜히 온것 같다구 말했습니다. 사실 폴리비닐알콜섬유는 물론이구 폴리비닐알콜공업자체두 우리가 앞섰지요. 제가 다시 예레반화학공장에 가보구두 느꼈지만… 이제 비날론공업화만 완전히 되면 섬유문제만 아니라 화학공업에서 큰 주추돌을 박는거나 같지 않습니까.… 이제 선생의 공적은 바야흐로…》

《가만…》

리승기는 손을 들어 상대방의 말을 가볍게 제지시켰다. 남한테서 자그마한 찬사라도 받는 이런 순간이 제일 멋적고 괴롭기까지 한 그였다.

허나 그는 방하민의 말을 끊어놓고 좀 당황해서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하였다. 남의 말을 중둥무이시키는 례는 그한테서 거의 없는 일이다.

리승기는 그럴 때 마침 안해가 방안에 들어오는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분이는 들어서며 대뜸 눈이 동그래지더니 《아이구, 이게 누구세요? 방선생이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어머니를 모시구 부인이랑 함께 나오셨다니 참말 반갑습니다.》 하고는 남편과 방하민을 번갈아보았다.

안해의 거동을 보며 리승기가 물었다.

《그 얘긴 이따 하기루 하구, 밖에 누가 오셨소?》

분이가 대답했다.

《네, 건설장을 돌아보겠다구 나갔던 오선생네 아버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럼 들어오시라구 하겠어요.》

분이는 방하민한테 회포는 이따가 풀자는듯 다정히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되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리승기는 방하민에게 말했다.

《참, 오원배로인이 오셨다는 말을 미처 못했군. 글쎄 그 먼 의주땅에서 로인들이 견학단인지 관광단인지 무어가지구 왔습니다. 로인님은 아들네 이사짐두 겸사 꿍져가지구 기차에 부쳐오구.》

그 말을 듣던 방하민은 문득 청수에서 제가 정하고 다니던 하숙집을 나중에 오정해네 신혼부부한테 빼앗기고 물러나던 일이 어제런듯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을 운명의 지꿎은 희롱이라고 속으로 자신과 남을 다같이 비웃던 그때의 그 회의주의자인 자기가 돌이켜져 부지중 미소를 짓지 않을수 없었다. 이번에도 자기는 오정해의 새집들이를 보게 되는것인가. 이 순간 그것은 매우 즐거운 일로 생각되였다.

로인의 턱수염은 흰 명주실처럼 부드러워보였고 몸에는 흰 모시로 시원한 여름옷을 입었다. 그것은 그가 생의 마지막날까지 벗지 않을듯싶은 그 고유한 조선남자옷이였다. 아래도리에 여기저기 흙얼룩이 져있었다.

리승기는 그것을 살펴보며 《저런, 다른 옷을 바꿔입으시구 나가실걸.》 하고 걱정하다가 되돌아서며 말했다.

《누가 왔나 보십시오. 방하민선생이…》

방하민이 두손을 합장해서 배허벅에 붙이고 꾸뻑 절을 하자 오원배가 황황히 다가서며 그의 두팔을 잡았다.

《오호, 이게 누구시오. 서경조 그분의 아드님이…》

가뜩이나 건설장을 돌아보느라고 흥분했던 오원배는 눈을 슴벅이다가 졸지에 눈물이 솟구치는지 손끝으로 눈굽을 누르고있었다.

방하민은 제가 앉았던 안락의자에 오원배를 앉히고 자기는 보통의자에 앉았다.

어느덧 오원배는 신이 나서 건설장을 돌아본 이야기부터 펼쳐놓았다. 큰 도시를 일떠세우는것 같아서 의주읍시내는 거기다 대면 촌마을이라는둥 그저 어마어마하고 통 무어가뭔지 모르게 억이 막힌다는둥… 저 건설이 보통건설인가, 농사군의 일이란 거기에 비하면 아이들의 소꿉장난이라는것이다. 앞으로 섬유직장이 자리잡는다는 그 건물안에서 흰솜이 쏟아진다는 그것을 꿈처럼 그려보며 좋이 한시간은 서있었다는것이였다.

리승기는 미소를 짓고 그 말을 들었다.

방하민이 고개를 쳐들고 추연한 빛에 잠겨 듣고있었다. 그는 지금 갑자기 떠오른 생각때문에, 바로 그 일을 함께 의논할 사람들이 한데 모이게 된 이 우연한 일치때문에 잠시 말을 못하였다.

그런데 얼마후에 오원배가 진정을 하더니 방하민이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물을줄이야…

《참, 선친의 혼을 모시구 나왔겠지?》

그것은 서경조의 유골을 념두에 둔 말이다.

방하민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서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네.…》하고는 더 말을 못했다.

《그래, 어디다가 모시자구 하나?》

오원배의 물음이였다.

방하민은 제 생각을 내놓기 앞서 리승기의 의향을 묻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리승기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야 청수동에 모셔야지요.》

그 말에 방하민은 뒤를 이었다.

《전 이미 그렇게 생각하면서두 여러분네들의 의향을 알구싶었댔습니다. 생각이 이렇게 같게 되니 저로서는 뭐라구 해야 할지…》

오원배가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암, 여부가 있소. 그분의 유골을 어디다 안치하겠소. 그 고장을 내놓구서 말이요.… 청수동 산마루에 서경조 그분의 유골을 안치합시다.》

그리고나서 그는 제가 할바를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방선생, 이제 평양에 같이 가서 그 길로 서경조 그분의 혼을 모시구 청수에 갑시다.… 리선생은 바쁜 몸이니 후일에 기회를 보아 한번 가서 잔을 부어드리시우.》

그는 이 일에서는 자기의 말대로 해야 하며 다른 의견이란 있을수 없다는 태도였다.

리승기는 로인의 말에 그만 쩌릿이 가슴이 저려오며 눈굽이 뜨거워올랐다. 무엇때문인지 그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말을 되풀이했을뿐이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청수동 산발에는 비날론을 위해 한몸바쳐 쓰러진 김용진이, 림창직이 잠들어있다.… 아, 독립되고 문명한 새 조선을 그렇듯 갈구하던 서경조를 그들곁에 묻지 않고 어디다 묻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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