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제 3 편
제 3 장
1
6월 하순, 대지는 한껏 신록에 푸르렀다. 논판들에는 모살이를 하고난 벼포기들이 거름독이 올라 검푸르게 우줄우줄 자라며 아지를 치고있었다. 신의주교외의 벌판을 지나 의주로 가는 도로를 따라 몇대의 승용차가 달리고있었다.
벌써 정초부터 쉬임없이 현지지도의 길에 나서신
도로표식비는 의주까지 4키로메터를 가리켰다.
《차를 세우시오.》
웬 영문인지 몰라 눈이 둥그래지던 로인이 벙거지처럼 전이 처져내린 물바랜 밤색모자를 급히 벗는것이였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의주라면 거기까지 같이 가십시다. 거기서 또 어디로 더 가십니까?》
로인은 부관쪽을 바라보며 말해야 되겠는지 망설이는 눈치더니 대답을 재촉하시는듯 한
《예, 거기서 뻐스를 타구 청수까지 갑니다.》
《그럼 우리와 같은 곳으로 가는구만요. 어서 차에 타고 같이 가십시다.》
《예?…》
황송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로인을 부관이 뒤차로 데려가려 했으나 그때
《내가 로인님과 같이 타구 가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먼길을 떠났습니까?》
《예, 그저 좀 다녀올 일이…》
당황해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로인의 마음을 풀어주시려는듯
그제야 로인은
《사실은 청수에 아들녀석두 그렇구… 조카사위벌되는 사람이… 리승기박사밑에서… 돌에서 실을 뽑는다구 하면서 너무 수고하길래…》
《그래, 이게 무엇입니까?》
로인이 대답했다.
《토봉꿀입니다.… 과학자들이란 죽을둥살둥 모르면서 제몸은 통 돌볼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옳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지요.》
《이번에 가서 단단히 혼 좀 내우십시오. 몸이 쇠약해지면 과학두 무엇두 다 못한다구 말입니다.… 그래서 로인님이 직접 이번길에 곁에서 지켜보며 이것으루 몸보신을 잘 시키십시오.》
그러자 이제껏 앉을 자리에 못 앉은것 같아 오밀조밀해하던 로인은 마음이 풀려 제법 성수가 나서 말하는것이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두 협동조합에 나가 아직 일하는 몸이구 요새는 강냉이애벌김이 바쁜데 아 글쎄 아들녀석이 신접살림을 펴구 이사를 했지, 또 그녀석 말이 제 사촌매부되는 사람이 몸을 너무 돌보지 않으니 나더러 와서 좀 신칙해달라구 편지에 성화가 이만저만 아니올시다.… 한데 우리 애녀석은 전쟁때 리승기박사네 집에서 신세를 지며 실험공일을 하다가 대학엘 갔댔습니다. 그녀석이 대학을 졸업하구 딴데루 가려는걸 알구 저두 부랴부랴 달려와서 아들자식을 불러앉혀놓구 대판 욕을 해주었습니다. 하여튼 이래저래 그녀석이 다시 청수로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래
《제 아들은 오정해라구… 전 오원배라구 합니다.》
여기서 오원배는 마음이 흥떠지면서 그만
《전 본시 의주태생이나 청수동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왜놈들과 끝까지 싸우려던 그 독립군대장 오동진이와 항렬로는 오촌조카벌이 됩니다.》
《그렇습니까? 오동진선생네
《제 이래뵈두
승용차는 어느덧 옥강리를 지났다. 도로는 압록강을 왼쪽에 끼고 뻗어있었다. 차는 압록강의 흐름을 거슬러올라가는데
로인은 그때의 저를 뉘우치듯 이렇게 말하고있다.
《참, 그때 오동진오촌숙이 날 못 따라서게 했지요. 앓는 홀어머니를 두고 안된다는거였지요. 나두 젊었을 땐 혼자서 일본놈 대여섯은 단번에 제끼는 힘장사였답니다. 그때 나두 따라나섰더라면…》
그러자
《그랬더라면 우린 산에서 만날번도 했습니다.》
이 《산에서》라는 말뜻을 로인도 이내 알아차린듯 하였다.
《제가
《아닙니다. 로인님과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혁명은 보통사람들이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두요.…》
로인은 두손을 가슴에 얹으며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저같은거야…》
《그래 오동진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언제입니까?》
《그게… 그렇습니다.
오원배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그랬을겁니다. 두분은 참 자별한 사이였댔으니까요. 우리 아버님께서 청수동에 가신것만도 일곱번인가 된다고 합니다. 삭주근방까지 세면 더 많구요.》
《오실 때마다 중요한 연설과 회의들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우리 오동진아주버니의 안내로 동주성에 올라… 그게 어느해던가… 시를 읊으시였습니다.》
1918년 늦은가을의 추운 어느날.
《그 시를 나도 압니다. 로인님두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구말구요.》
로인은 잠시 길옆을 따라 흘러내리는 압록강의 물결을 바라보더니 운을 떼기 시작했다.
달밝은 완월루에 높이 올라서
동주성 바라보니 감개 깊어라
북변강 배사공의 구슬픈 저 노래
구봉산기슭에 메아리치네
네 모습 예로부터 아름다와서
길손의 시흥을 불러줬건만
왜놈의 학정아래 눈물지으니
달빛도 산천도 빛을 잃었네
굶주리는 민중아 슬퍼말아라
짓밟힌 동포야 일어나거라
판가리싸움에 이몸 바치니
사나이 총검이 분노에 운다
무도한 왜적들을 쳐물리치고
동주성 완월루에 다시 올라서
목청껏 독립만세 높이 부르자
무산민중 새 사회 세워나가자
차안에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차의 가벼운 진동만이 느껴왔다.
문득
《선렬들의 뜻을 받들어… 그래서 우린 지금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주의라는 인민의 락원, 인민이 주인된 사회를 말입니다.》
오원배는 감심하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로인님, 그래두 다니면서 봐야 기쁜 일두 있고 생각도 깊어집니다. 옛글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구 한번 보는것이 백번 듣는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내 이번에두 신의주쪽에 갔다가 갈에서 실을 뽑게 된걸 보구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비오는 날 배를 타구 갈밭이 있는 섬에 다녀오자구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구 〈수상님, 위험합니다.〉 해서 〈일없소. 이런 길이면 백번두 더 나서겠소. 비바람을 좀 맞으면 뭘하오.〉 하고 말해주고 우산을 들고 배전에 내려섰습니다.》
《저런, 비가 쏟아지는데 배우에서… 제발
《괜찮습니다. 난 산에서 싸울 때 별의별 경난을 다 겪은 사람입니다.》
《그래 청수에 갔을적에 돌에서 실을 뽑는걸 실험실에서라두 한번 보셨댔습니까?》
《네, 신기하긴 신기합니다. 헌데 지금 어찌나 고생들을 하는지…》
《과학이란 그런겁니다. 어떻게 일조일석에 되겠습니까. 석회석과 무연탄에서 실을 뽑는 그 일도 신심이 가는 일입니다. 우리의 원료, 우리의 기술로 하니까요. 꼭 될것입니다. 몇년후에 그 실로 짠 천으로 지은 옷을 맨먼저 로인님이 입어보셔야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참말 고맙습니다.…
그리고나서 오원배는 과학자들을 자랑하고싶고 또 제가 한 처사를 허물없이 말씀드리고싶은 심정에서 이렇게 말을 계속했다.
나한테 조카벌되는 녀맹사업을 하는 애한테 혼사말이 왔는데 그 애가 망설인다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밤중에 거기 당도해서 자는 아를 불러앉혀놓구 한바탕 해대였지요.
오원배는 2년전 그때 일이 떠오르며 저로서도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였다.
《잘하셨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문득 생각이 나신듯 그 손을 놓으시고 등받이에 몸을 젖히신채 승용차의 앞시창으로 마주 흘러오는 길을 내다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그런데 얼마전에는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연구사동무가 미처 손을 쓸새없이 잘못되였습니다.… 그 동문 나의 명의로 된 표창장을 준 동무였는데…》
오원배는 조용히 말씀드리였다.
《저두 그 선생을 잘 압니다. 우리 정해한테서 편지로… 불상사가 생겼다는걸 알구 이번 길에 들려보자구 사실… 그 유가족의 애들이 너무 어려서 어쩌는지… 에미곁에서 떨어질수 있으면 당분간 우리 집에라두 데려다두었으면 좋겠는데.》
《로인님… 정말 고마운 말씀입니다.… 모두 잘 도와줍시다.… 그렇게 되느라니 그 일을 책임지고 하는 리승기박사의 심정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우리 다같이 도와줍시다. 인민이 그를 돕구 내각수상이 그를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습니까?》
오원배는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말을 못한다.
승용차가 청수에 들어섰을 때는 정오가 가까운무렵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