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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6 회

제 3 편

제 2 장

4


저녁에 집으로 찾아온 리재업이 리승기한테 한장의 편지를 내놓았다.

그는 편지를 내놓기 망설이듯 주저주저 말했다.

《일본에 있는 렴성근이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사실은 불상사가 생긴 그 이튿날에 온 편지였는데 리재업이 여태 내놓지 못하고 건사했던것이다.

《렴성근이?…》

리승기는 자기의 가슴속에서 고뇌의 어두운 그림자를 헤집으며 한가닥 반가움의 밝은 빛이 솟아오르는듯싶었다.

(13년전, 일본에서 내가 오사까헌병대에 잡혀갔을 때 렴성근이도 조선인학생반전그루빠혐의로 체포되여 와있었지. 해방의 날에 거기서 같이 나오며 얼싸안던게 엊그제같은데 렴성근이 지금은 일본땅에서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다니…)

리승기의 손에 편지를 넘긴 리재업이 조용히 설명을 달았다.

《편지는 3국을 통해 인편으로 온것 같습니다.》

렴성근이와 함께 공부했던 리재업은 편지를 일주일동안이나 간수하면서 내놓지 못했으나 지금은 장인이 겉봉을 뜯기를 조급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리승기는 길죽한 편지봉투의 웃머리를 뜯고 속지를 꺼내들었다. 그는 읽으려 했으나 얼른 첫줄이 잡히지 않았다.

제가 당하는 심적고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일들이 펼쳐지는것 같아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순간이 지나서야 그는 편지에 끌려들기 시작했다.

《선생님…

헤여진지도 13년세월이 가까와옵니다.… 귀체만강하온지?… 인편을 통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폴리비닐알콜중간공정이 성과적으로 되고 그에 따라〈합성1〉호 섬유생산을 공업화할 준비가 본격화된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여기 일본에서는 구라시까방직과 닛뽄방직이 경쟁적으로 비닐론(이 사람들은 이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공업화에 달라붙었습니다.

선생의 충실한 제자이던 가와가미 히로시도 선생님께 안부를 전해달라는군요. 그는 선생님이 북에 가서야 자기의 연구사업을 성과적으로 진척시킨다는 말에 무척 기뻐하고있습니다.…

저는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우리의 비날론공업화에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가 하는 생각으로 여러가지 책과 잡지들을 보고 연구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귀국이 실현되면 맨선참 선생님에게로 달려가 연구집단을 도와 조국의 비날론공업화에, 화학공업발전에 이바지하려는 크나큰 포부를 안고있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뵈올 날이 얼마 멀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꼭 귀국실현의 배길이 열리여 조국의 품속에 안길 그날만 기다립니다. 선생님도 아다싶이 저의 고향은 남조선에 있습니다. 하지만 조국은 김일성원수님께서 이끄시는 공화국입니다. 그래서 나의 진정한 고향은 공화국북반부인것입니다.…

…선생님, 얼마전에 미국에 있는 지태규선생이 일본에 왔다갔습니다. 저한테도 왔더군요. 다른 제자들과 동료들을 만난 뒤였습니다.

며칠후에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와서 한 그 유명한 강연회에 같이 참가하게 됐습니다.

일본의 한 청년지식인이 상대성리론에 대해서 까다로운 질문을 했을 때 아인슈타인이 통속적으로 답변하여 큰 강당안에 폭소가 터졌던 그 강연회입니다.…》

…그 강연회에서 돌아오는 지태규의 얼굴에서는 우울한 빛이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뜻밖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것이다.

《렴군, 난 미국에서 아인슈타인과 만나 면담을 한적 있네.…》

《그래서요?… 무슨 얘기들이?》

《난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영광의 상상봉에 올라선 행복한 과학자라고 생각했네. 고분자화학에서 슈타우딩거가 할아버지이고 풀로리가 아버지인것처럼 물리학에서는 뉴톤이 할아버지이고 아인슈타인이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엔 아인슈타인은 단순히 아버지인 정도가 아니지. 현대물리학의 창시자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담화도중에〈당신은 자신을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할 권리가 있지 않는가?〉하고 물었더니 웬일인지 얼굴에 쓸쓸한 미소를 띠우고 그는 당치않게도 나의 영어발음이 아주 류창하다는게 아니겠나. 내 말에 대한 대답을 피하는 그의 심중을 모르고 나는 모욕감을 느꼈지. 그러자 그는〈미안합니다.〉하고 사죄의 뜻을 표하고는〈당신도 나도 조상의 땅을 떠나 살지 않습니까?〉하는것이였네.》

이무렵 아인슈타인은 히틀러를 견제할 목적으로 자기들이 시작했던 원자탄개발이 수소탄을 비롯한 대량살륙무기로 확대되는데 따라 학자로서 절망적인 고민에 싸여 그것을 후회하면서 일련의 평화활동을 벌리려고 했었다.

지태규는 아인슈타인에게 물었다.

《아인슈타인씨, 당신들 유태인들의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생을 바이츠만대통령의 뒤를 이어 두번째 대통령으로 초빙했을 때 왜 거절을 했습니까?》

바이츠만은 유태인영국화학자로서 시온주의운동을 벌리다가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대통령으로 된 사람인데 아인슈타인과는 개인적인 친교도 있었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역시 담화중에 종종 보게 된 그 쓸쓸한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우선 난 과학자로서 정치에 관여치 않고싶습니다.… 물론 우리 유태인들한테도 나라가 생겼다고 볼수 있습니다. 헌데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리익을 침해할 때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말은 자기가 진정으로 조국이라고 생각할 나라가 없다는 뜻으로도 울리였다.

아인슈타인은 말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나는 나를 춰올리는 말을 들을 때면 나야말로 가장 불우한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명예의 봉우리와 내가 처한 인간적인 처지사이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있기때문이지요.》

중년기후에 아인슈타인한테는 별로 과학적성과도 없었으니 그가 더더욱 우울하게 지낼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아인슈타인과의 면담이후에 지태규는 자기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생각되였다고 한다.

렴성근은 편지에서 계속 이렇게 썼다.

《선생님, 저는 지태규선생을 맞대놓고 선생님은 조국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해놓았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대답을 못하며 한숨을 쉽디다. 남조선에도 가지 않는다는겁니다. 과학도 경제도 모르는 리승만이한테는 가기 싫다는것입니다. 그의 견해는 조국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남에도 북에도 가지 않는다는게지요. 그의 인생은 쓸쓸하게 흘러갈것입니다. 남북으로 분렬된 우리 나라를 두고 영 고민이 없지야 않겠지요. 말로는 미국의 과학에 의거해서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는 전부터 정치적으로도 숭미사대에 물젖었으니 이러한 그한테서 삶의 보람은 무엇이겠습니까. 하여튼 이번에 만나고 저는 영 기대를 잃고 실망해버렸는데 한편으로는 그가 측은하고 동정이 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멀지 않아 선생님과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곳 일본땅에서 선생님이 일찌기 여기서 민족의 얼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것처럼 그렇게 자신과 후대들에게 그것을 더욱 튼튼히 심어주기 위한 노력을 다하렵니다.…》

장문의 편지를 읽고난 리승기는 침착하게 되새겨보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향해 뒤짐을 지고 섰다.

편지는 이미 리재업의 손에 쥐여져있었다. 그는 방바닥에 앉은채로 편지를 읽고있었다.

창문을 내다보는 리승기의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첫마디는 이러하였다.

(렴성근이가 온단 말이지.…)

편지구절이 그의 목소리처럼 귀전에 들린다.

《조국의 품속에 안길 그날만 기다립니다.》

그가 이제 당장 왔으면싶은 기다리는 심정은 조급하고 절절한것이였다. 크나큰 상실로 텅 빈듯 한 가슴속에 편지가 날라온 위안의 감정은 한줄기 봄바람이 흘러드는것처럼 후더운것이였다.

리승기는 편지내용을 머리속에 더듬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지태규가 일본에 왔다고 했지.…)

미국이 떠드는 세계주의가 실현된다고 하던 지태규였다. 망명객과도 같은 부평초신세… 그한테는 명예도 돈도 있다. 하지만 그한테는 조국이 없다. 민족의 과학에 한몸 바치지 않는 그가 무슨 진정한 학자일것인가.…

그의 인생은 아인슈타인의 쓸쓸한 미소보다 더 서글픈것이다. 그 자신도 이것을 충분히 느낄지 모른다.

아니다, 세계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자립성이 생기고있으며 과학으로 하여 민족의 장래가 담보되는것이다.

리승기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도 거기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채 그저 내심의 충격에 못이겨 사색에로만 줄달음치고있었다. 그는 깊은 숨을 후― 내쉬였다. 림창직의 죽음이후에 처음으로 가슴에 흘러드는 힘을 느끼였다.

그러자 문득 아인슈타인이며 지태규며 그런 학자들의 운명을 합친것보다 림창직의 길지 않은 삶이 훨씬 더 빛나보이는것만 같았다. 미래를 향해 빨리 달리려는 지향때문에 그는 합성탑옆에서 쓰러졌다. 따라서 그가 세운 탑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기초로 탑은 자꾸만 자라오를것이다. 그 탑은 참다운 과학이란 사대와 교조를 배격하고 민족의 구체적인 풍토에 맞아야 한다는 열렬한 호소를 담은 비문을 새기고 다른 탑들속에 특별히 높이 솟을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강렬한 느낌은 림창직을 잃은 후에 리승기가 처음으로 딛고 올라서는 마음의 주추돌이다.

이때 분이가 문을 열고 웃방에 들어서더니 문가에 살풋이 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두 저… 성희 에미의 맏오빠 말대루… 맏오빠는 성희 에밀 기어이 고향으로 데려가겠다니… 거기 가서 교편을 잡으면 아이들두 친정어머니 손에서 잘 키울수 있다면서…》

창문가에서 돌아선 리승기는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이 순간 그의 눈앞에는 남편이 죽은 뒤에 학생들앞에 나섰던 금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야, 그를 내곁에서 떠나보낼수 없어.…)

안해가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성희 에미의 말이 리선생과 운명적으로 얽힌 남편을 생각하면 떠나고픈 마음이 없다면서…》

리승기는 그냥 선채로 안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옳소. 그는 우리곁에 있어야 하오. 연구소에… 연구조수로… 장차로는 연구사로…》

한편 렴성근의 편지를 다 읽은 리재업은 마치 그 편지에 이런 리유와 대답이 있기라도 하듯이 그것을 들어 가벼이 흔들며 말했다.

《옳겠습니다, 그렇게 하는것이.…》

리승기는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그리고나서야 마음이 다소 개운해지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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