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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 회

제 3 편

제 2 장

3


며칠사이 시간은 한자리에 정지된듯도 하고 한정없이 흐른것 같기도 했다. 악몽속에서 허덕이는 사람처럼 눈앞의 현실을 도무지 믿을수가 없어 병원에서 나온 리승기는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탁상등을 켜놓은채로 자리에 누워있었다. 방금이라도 유쾌한 롱담과 웃음으로 입귀의 금이를 반짝이며 림창직이 문을 열고 들어설것만 같다.

(창직인가? 들어오게.…)

하지만 그가 없다니 이게 웬말인가.…

의식을 회복한 첫날 오전에 그는 병원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누가 들어와도 천정만 쳐다보면서 응대가 없었으며 그저 팔을 들어 버릇처럼 손을 내젓군 하였다. 실성한 사람의 손짓처럼 그 뜻을 알수 없었다.

그는 이 며칠동안에 온 생애가 다 흘러간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숨가쁘도록 가득차있으면서도 텅 비여있는듯 한 이 며칠동안 그는 사람들앞에 꿋꿋이 서있느라고 만신의 힘과 의지를 다해야만 했다. 이 동안 저녁에는 연구사들이 리승기의 집에 모여오고 같은 시간에 연구사의 안해들이 금진이한테 가있었다. 오정해의 안해 안명숙이 의사로서 금진이한테 련이어 캄파와 진정제주사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허나 그 어떤 약이나 위안도 실심한채 멍하니 앉아있는 이 젊은 녀인한테 소용이 없는것 같았다.

리승기는 몇사람과 함께 거기로 찾아갔다. 갓난애를 안고 앉았다가 일어서다말고 앞으로 꼬꾸라지듯 푹 고개를 숙이며 흐느끼는 그를 바라보자 리승기는 가슴이 찢기는 아픔에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다만 두손으로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 눌러 그를 다시 자리에 앉히였다. 세상모르게 잠든 어린 아기의 쌔근거리는 숨소리, 아기의 포대기에 떨어지는 눈물방울… 림창직이 《선생님…》하고 부르는것 같아 와뜰 놀라며 뒤돌아보는 순간, 문득 거치른 이역땅에서 만났던 그의 첫 얼굴이 떠오른다. 운전사인 형이 보내주는 돈을 보탬하면서 고학으로 겨우 고공을 나온 림창직이 다까스끼중간공장에 찾아와 《나도 조선사람입니다.》하고 자기앞에 나타났던것이 어제만 같다. 혼란된 남조선땅에서도 자기를 도와 섬유강좌를 꾸리려고 애쓰던 창직이, 조국통일성전에 남먼저 총을 메고 의용군에 나서더니… 비날론공업화를 눈앞에 둔 때에 이렇게 쓰러진단 말인가. 림창직의 입귀에서 반짝이는 그 금이발을 다시 볼수 있다면 아, 그 웃기 잘하던 유쾌한 사나이… 떠오르는 얼굴마다 림창직의 얼굴로 환각되여 깊은 밤에도 잠들수 없는것이였다.…

리재업이 웃방에 누운 리승기의 곁에 앉아 한숨 절반, 설명 절반으로 사고의 원인을 말하고있었으나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도 뇌리에 잡히지 않았다. 리승기는 다시한번 그한테 설명을 청해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였다. 문제는 그 가스치환때문이였다. 조작상결함이라고 하기엔 그것이 너무나도 믿어지지 않았다.

림창직은 비등식합성법을 한시바삐 실험해보려고 앞장섰다가 모진 광풍에 쓰러진것이다. 리승기는 그가 자기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반응조작의 한계점과 최대치를 밝혀낸것만 같았다.

(이건… 이건 내가 우유부단한탓이였어. 나의 우유부단성이 끝내 한 학자의 죽음까지도 가져온게 아니고 무엇인가?!)

심사숙고, 완강성, 침착성을 제일로 내세우면서 이제껏 결단성이 부족한 치명적인 결함을 내내 미봉하려 한듯이 생각되였다.

자기가 고정식합성법에 대한 미련을 채 가시지 않았고 또 비등식에 대한 결단도 내리지 못한 어중반한 상태에 있었다고 리승기는 자기를 사정없이 타매하였다. 자기의 확고한 결심으로 뒤받침해줄대신 림창직의 독자성을 운운하면서 자기를 숨겨왔지, 림창직의 곁에 자기가 서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것이였다.

리승기는 다름아닌 제가 그를 그런 비참한 죽음에로 몰아갔다는 절통한 심정에 다시금 와락 머리를 움켜쥐지 않을수 없었다.

아, 림창직이 그렇게 가다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였다. 생각할수록 쓰디쓴 회환과 상실감이 가슴을 저미고 아프게 하였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거기에 귀중한 학자의 생명이 바쳐지게 했는가. 한 과학자의 성스러운 제단앞에 백번 꿇어앉아도 자기는 용서받을수 없을것이였다. 이것은 학자로서의 나의 죽음과도 같은것이다. 한 생명이 밝혀놓고간것이 과학상의 큰 진리로 될지는 모른다. 허나 자신이 실책했다는것을 느끼면 아주 하찮은 문제를 놓친것만 같아 끝없이 통탄하게 되는것이였다.

사흘째되는 날 저녁에 그는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련이틀 억병으로 술에 취했던 현석실장이 오늘 저녁은 한잔도 입에 대지 않은채 정색해서 올방자를 틀고앉아 방바닥만 내려다보고있었다.

김용석이도 옥지문이도 오정해도 왔다. 리재업은 녀인들이 가있는 금진이한테 들렸다가 온다고 했다.

리승기는 이 며칠사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조용히 뇌이였다.

《모두들 모였구만.… 모였어.… 한데…》

그의 마음은 다 온것 같이 생각되다가 그만 불시에 가슴이 허전하다. 속에서 원통한 웨침이 터질것만 같다.

(창직이는 없구나.… 그만이 오지 못하는구나.)

좀 있다가 리재업이와 방하민이 함께 들어왔다.

리승기는 고개를 쳐들어 방하민을 낯선 사람처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달전에 본것 같기도 하고 며칠전에 본것 같기도 했다.

방하민이 겁먹은듯 한 눈길로 리승기의 얼굴을 살피고있었다. 진정으로 비감에 찬듯 그의 작은 두눈이 퀭해지도록 커지였다. 그는 어떤 위안의 말도 찾지 못한채 들어오자 고개를 숙이고 앉았을뿐이다. 슬픔에 뒤이어 공포감이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방하민이였다.

방하민은 이제와서 자기가 도이췰란드문헌자료대로 림창직한테 고정식을 우기던 그것이 마치 장애로 되고 그릇된 미련으로 되여 그의 죽음을 가져온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그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결코 비등식의 실패를 보고 고정식의 합리성을 다시 주장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는 림창직의 죽음에서 학자의 랭철한 눈으로 비등식의 가능성을 예감했으나 그것 또한 다행스럽지는 않았으며 이 모든 현실이 공포감만을 자아낸것이였다.

방안이 조용하고 모든 눈길이 저한테로 쏠리는것만 같아 머리를 쳐들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선생, 기운을 내십시오. 모두들 선생의 얼굴만 쳐다보는데…》

그리고는 용기를 내여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창직동문 정말 과학의 상상봉으로 오르다 기슭에서 쓰러졌습니다.… 화학사를 돌이켜보더라두 정말 화학은 다른 과학보다 더 많이 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지요.… 그는 리선생의 한쪽팔이나 다름없었구 선생을 받들어온… 기슭이였는데…》

그 말을 듣는지마는지 가만히 앉았던 리승기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조용히 말하는것이였다.

《아니요. 그는… 하나의 봉우리였소.》

방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 말은 사실이기도 하다. 림창직이 믿고 칭찬하며 키우던 연구사가 당장 그를 대신하여 합성공정을 담당하고 비등식합성법을 시험해야 한다. 그러니 그 연구사가 벌써 림창직의 기슭으로 된셈이다. 림창직은 화학과 화학공업에서 합성이라는 중요부문에서 여러가지 문제들을 실천으로 해명하여 피의 교훈을 남긴채 하나의 봉우리로 솟아오른것이 분명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이 순간에 방안의 모든 연구사들은 이런 감정에 휩싸여있었다.


×


연구소로 나간 리승기는 제 방에 들어갔다가 생소한 곳처럼 느껴져서 고적감에 쫓기듯 거기서 나오고말았다.

그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합성건물안으로 향해졌다.

주인을 잃은 집… 거기엔 합성탕크를 다시 설치하는 용접공들과 운전공들이 있었다.

용접면을 든 한태호가 얼핏 리승기를 보자 여느때처럼 감히 일어서서 인사도 못하고 애써 눈길을 피하려는듯 한사코 용접면에 얼굴을 묻는것이였다.

리승기는 합성탕크옆에 있는 엘모뽐프를 내려다보았다. 림창직이와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 저녁에 조립되여 반응액을 순환시키던 그 엘모뽐프, 그것이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허나 림창직이 중절모를 썰어서 끼운 바킹이 어느 틈사이에 있을 그 엘모뽐프는 합성탑에 액을 퍼올리는 심장부의 역할을 다하여 이제라도 산 사람의 박동과 숨결처럼 제 률동과 음향을 되찾아 쉬임없이 돌아갈것이 틀림없다.

(아, 헌데 그 사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누군가 곁에서 그한테 펼쳐진 공정일지를 내밀었다. 그는 누군지를 알려고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공정일지를 받아들었다. 리승기는 한껏 주의를 모아 거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무엇인가 안타까이 찾는듯싶다. 그날 저녁에 림창직이 반응조작을 하였던 그 류량, 온도 등이 기록되였지만 이상하게도 압력란에는 수자가 비여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자를 쓰려고 만년필을 대였다 뗀 자리가 보이는것만 같았다.

또다시 끓어오르는 마음을 누를길 없어 리승기는 거기에 더 서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키가 훤칠한 그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늦은봄의 해볕에 안경알이 번뜩이였다. 그 안경알은 서글픔에 젖어 뿌옇게 흐려지는가보았다.

구내길에서 연구사들은 그와 상론할것이 있어도 당장은 피하면서 그를 쳐다보고 사라지군 하였다. 그렇다. 그는 이 연구사들속에 서있는 봉우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그는 높은 산정처럼 해빛을 먼저 받는것이고 또한 스러져가는 석양의 노을도 마지막까지 그한테 비끼는것이 아니겠는가.

높은 산마루는 세찬 바람도 더 많이 맞는 법이라고 하였다. 쓰러지면서도 마음만은 꿋꿋이 버티여내야 한다.

(아, 그 어느때인가 아버지도 지리산정에서 본 그 꼭대기에 있는 나무얘기를 하였지. 누워서도 자라는 나무들!… 내가 감히 산정에 서있다고 자부하기엔 우스운 일같지만 어쨌든 사람들앞에서 나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야 해.… 무거운 책임감을 더욱 자각해야겠으니…)

점심시간이 퍽 지나서 리승기는 무엇때문인지 공장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기로서도 어디로 가자고 나섰던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잠시 섰다가 걸음을 떼였다. 가까이에 있는 화학전문학교 운동장에 들어선 그는 거기서도 어디를 갈지 방향을 모르는듯 주위를 두릿거리였다.

마침 그때 40대로 나보이는 학교교장이 그를 띠여보고 급히 다가왔다.

《선생님이 어떻게 이렇게 오셨습니까?》

《그저 좀… 볼일이 있어서…》

교장은 그를 제 방에 안내하려고 현관에 들어섰다. 그들은 2층 층계를 올라 교실의 출입문들을 지나 복도를 걸어갔다. 교장실로 가기 전에 세개의 큰 유리창문이 복도쪽으로 난 꽤 널직한 방이 있었다. 가운데 긴 탁자가 놓이고 벽면에 가득한 장마다 실험기구와 시약병들이 들어찬 실험실이였다. 한데 창문이 약간 열렸는지 거기로 한 녀교원이 강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창문옆에서 리승기가 걸음을 멈추고 교장도 따라섰다.

리승기는 그것이 금진의 목소리임을 확실히 알아들었다. 아직 집에서 출근 못하는줄 알았던 금진이, 그는 지금 저기 학생들앞에 서있다.

금진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명료히 울리였다.

《학생들은 지금 졸업학년의 마지막학기를 보내고있습니다.… 이제 동무들이 졸업하면 대부분 생산현장이나 연구소에 나가 실험공이나 현장기수로 될거예요.… 여러분, 화학은 흥미있는 학문입니다.》

금진의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문득 리승기는 51년 초여름 어느날, 금진의 초청으로 카바이드에 대하여 강의하던 일이 떠올랐다.

카바이드로의 연도를 지키다가 희생된 전로공의 딸이 터뜨리는 흐느낌앞에 말을 못하고 섰던 그때 자신이 받았던 충격이 되살아올랐다.

그때와 꼭같이 괴롭고 비장해지는 마음이였다. 금진의 음성은 눈물겹게 들린다.

《나라의 화학공업을 떠메고나갈 보람찬 래일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있습니다. 때문에 이번 졸업을 앞둔 실습에서는…》

리승기는 더 듣고있을수가 없어 창문을 지나 걸어갔다. 그러자 교장은 모든것을 깨달은듯 제 방으로 안내하면서 안락의자에 앉도록 리승기한테 자리를 권하고는 제가 먼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아마 리금진교원때문에 오신것 같은데… 그 선생의 일로 지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가능한한 도와주도록…》

리승기는 안락의자에 앉아 그 말을 듣더니 《고맙습니다.》하고 뇌이고는 조용히 일어났다.

교장은 더 만류하지 못하고 말없이 그를 따라서며 운동장의 한끝 교문밖까지 나왔다. 리승기는 교장한테 그저 머리를 끄덕여 인사와 부탁의 뜻을 보이고는 돌아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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