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제 3 편
제 2 장
2
리승기는 지금 자기와 책상을 마주하고 당당히 서있는 림창직이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있었다. 그를 이처럼 키워놓은것이 제자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듯싶었다. 문득 비날론전망안을 토의하던 중요한 회의에서 침착하게 설명을 하던 림창직이 생각났다. 그때 그를 무척 대견히 바라보시던
리승기가 다시금 책상우의 공정일지를 들여다보는데 림창직이 책상앞으로 한발 다가서며 말한다.
《선생님, 어째서 두번째 시험을 늦춥니까?》
일산 200키로중간공장에 비등식합성법을 처음으로 실현해보고 제딴의 확신에 차있는 림창직이였다. 그는 자기의 고정식장치제작에 대한 론문에 필요한 기초자료들을 200키로에서 확증하는것도 밀어버리고 리승기의 주장에 공감하고는 지체없이 비등식을 도입했던것인데 그 과정에 약간의 결함들이 나타났다. 일부 사람들은 작은 규모의 20키로에로 되돌아가 그 원인을 명백히 알고서 다시 2차시험에 들어가자는 견해였다.
한데 이상하게도 리승기는 그 견해에 동의하는듯 한 눈치였다. 림창직은 성급한 욕망과 지나친 완만성을 다같이 경계하면서 반복되는 실험의 속도와 균형을 유지하는 리승기의 평상시의 놀랄만 한 기질을 모르는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림창직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말입니다. 가스를 치환하는 조작상결함일뿐입니다. 저도 운전공들도 처음 해보다나니. 두번째부터야 뭐 그리 걱정할게 있습니까?》
《가스치환이라?…》
리승기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뒤짐을 지고 림창직을 더는 보지도 않은채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뚝 멈춰서며 림창직이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아니, 그렇지 않을수도 있소.》
《선생님.》
림창직은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하루라도 시간을 앞당겨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던 림창직이 그 순간에 생각났는지 거의 부르짖다싶이 말했다.
《차라리 20키로와 200키로에서 병진시키면 그 결함의 원인이 더 명백해질게 아닙니까?》
리승기가 림창직을 향해 다시 돌아서며 말없이 지켜보았다. 바로 안경너머의 그 눈에서 어떤 긍정의 뜻을 보자 림창직은 도리여 움츠러들며 더 말을 못하고있었다. 제가 지나치게 성급히 굴지 않았는가 하는 일종의 자중이 생긴것이다.
한데 바로 그때 리승기는 《그럴수도 있소.》하고 말했다. 뒤이어 그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림창직은 벌써 뒤돌아섰다. 리승기는 방에서 나가는 림창직을 말리지 않았다. 대견함과 불안감이 뒤바뀌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뿐이였다. 그가 곧장 현장으로 가리라는것을 알면서도 가만 놔두었다. 한 학자에게서 독자성과 독창성이 형성되게 하려면 무엇보다 남을 넘겨다보지 않고
그날 오후부터 림창직은 줄곧 합성공정에 붙어있었다.
사실상 리승기의 관심도 요즘 온통 이 합성공정에 가있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거기에 드나들군 하였다. 그는 금진이가 남편한테 저녁밥까지 날라오군 하는것도 보았다. 구내식당에서 먹을수도 있었으나 안해는 남편한테 제가 지은 음식만을 먹이고싶어하는것 같았다.
리승기는 금진이를 보고 남편이 늦도록 있지 못하게 신칙을 하고 밥을 날라다주지 말라고 하려다가도 그들의 금술을 자못 대견히 여기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그만두고말았다.
사실 금진은 전문학교교원의 체면도 별반 개의치 않고 밥그릇을 들고나와 남편곁에 앉아서는 손을 깨끗이 씻고 숟가락을 들라거니, 찬물을 지내 마시지 말라거니 하면서 다심하게 타이르며 지켜보군 하였다. 남편이 하는 일까지 거들어주느라고 하다가는 불시에 불룩한 가슴을 움켜쥐고 두번째로 난 갓난애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는것이였다.
리승기가 들어섰을 때 림창직은 작업대우에 허리를 구부리고 그리 작지 않은 수첩에(그안에는 실패한 실험조작도, 성공한 다른 공정의 도해도 그리고 앞으로 하고싶은 연구에 대한 륜곽까지도 다 있어서 누군가는 그것을 《옥편》이라고 하였다.) 무엇인가 그려넣던 참이였다.
《무얼 또 그렇게 열심히?…》
리승기는 수첩의 한 갈피에서 어떤 형태의 뽐프구조를 보았다.
《이건 또 뭐요?… 동무의 이〈옥편〉에 무엇이든 다 있는건 좋지만 너무 이것저것…》
고정식합성에서의 장치설비가 림창직의 론문에서 주요부분인것만큼 그것을 리해해주지 못할 리승기는 아니였다. 하지만 그때 리승기는 서둘러 강조하였다.
《어쨌든 중심을 놓치지 마오. 이제 비등식으로 여기 있는 이 900키로탕크를 5톤, 10톤짜리로 높이 탑을 쌓아올려야 할게 아닌가, 탑을 말이네.》
이 순간에 리승기는 스스로도
《한데 창직동문 너무 넓게 알구 넓게 시작하구… 말하자면 박식이 상식으로 그치면 무식한거나 같애.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랬다구.》
《선생님, 우물을 깊이 파자면 넓게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리승기는
《창직동문 지금 우물이 아니라 탑을 생각하게, 탑을… 우리한테는 이게 생명선이 아닌가.》
《알구있습니다. 그런데 저… 전 지금 한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선생님네 혜연이 어릴적에, 지금이 열여덟살이라니까 아마 열두살때인가 아버지가 했다면서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옛날의 어떤 학자가 하늘의 별만 보다가 그만 우물에 빠졌다나요. 그래서 곁에서 한사람이〈선생님은 하늘에 대해선 잘 아시지만 땅에 대해선 통 모르시는군요.〉라구 말했다지요. 난 그 말을 리상만 쳐다보다가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지, 말하자면 제가 딛고선 땅에 대해서 잘 몰라서는 안된다는 말로 들었습니다.… 땅이란 현실적인것과 함께 한편으로는 지식의 대지를 뜻하는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무한한 하늘을 쳐다보며 리상을 꿈꾸는것도, 지식의 대지를 가슴에 그러안는것도 다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그러니 리상주의자이며 랑만주의자인 자네가 이제는 현실주의자로도 되였단 말이지.》
리승기는 웃으면서 그런 말을 이만 하자고나 하듯 작업대우에서 1차시험때의 합성탕크안에서의 반응속도, 온도, 압력 등을 적은 공정일지를 보려고 그것을 번지였다.
그런데 림창직이 오늘은 웬일인지 검질기게 말을 걸어온다.
《말이 났으니 말입니다. 후에 어느 책에서 보니까 하늘만 알고 땅을 모른다는 그 얘기는 고대그리스의 철학가 탈레스란 사람을 두고 한 말이더군요.… 그런데 선생님, 좀 들어보십시오. 그 탈레스란 사람이 얼마나 허무주의자인가, 그가〈생명쯤 대단한것이 아니야.〉하고 말해서 그 말을 듣던 사람이〈그러면 생명을 한시바삐 버려도 좋지 않은가.〉하자 탈레스는 〈그러나 죽음이라는것도 대단한것이 아니니까.〉하고 말했다는겁니다. 얼핏 보면 기지가 있는것 같지요. 하지만 생명과 죽음을 두고 마치 그 모든것을 초월한듯이 말하면서 롱담을 하는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사람한테는 분명 허무주의가 있단 말입니다. 생을 놓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리승기는 그의 말을 연신 긍정하면서 고개만 끄덕이였다. 뜨거운 애정으로 얽혀진 행복한 가정, 과학의 봉우리를 매진하는 그 열정과 탐구정신 이것이 림창직한테서 생의 아름다움인것이다.
(한데 그 빌어먹을 탈레스란 사람은 생명도 죽음도 다 티끌같다는 식으로 말하다니.)
어느새 림창직은 해체해놓은 뽐프로 달려가 그걸 들여다보느라고 벌써 곁의 사람을 까맣게 잊은것 같았다.
리승기는 공정일지를 접어 탁자우에 놓았다. 그는 림창직한테 빨리 다그쳐 뽐프조립을 마무리해야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면 또 오늘 밤 늦도록 여기서 떠나지 않을가봐 오히려 이렇게 당부하였다.
《오늘은 좀 일찌감치 들어가우.》
저녁무렵 리승기가 퇴근시간이 지난 다음에 거기에 가보니 여전히 림창직이 그 합성탑의 뽐프앞에 앉아있었다.
리승기는 짐짓 노염기를 띤 목소리로 말하려고 했다.
《운전공들은 다 어디로 가구 동무가 계속 지금까지 여기 있소?》
《네, 네.… 이젠 다 돼갑니다. 이놈의 뽐프에서 바킹이 말썽을 일으켜 다시 해넣느라구.》
그러면서 림창직은 가위로 썩썩 베던 바킹감을 황황히 뭉그리며 두손을 움츠리였다.
리승기는 의아하게 지켜보았다. 그것은 자기가 외국에 갔다오면서 그한테 기념으로 준 그 중절모가 분명했다.
림창직이 바킹감을 두손으로 부둥켜안으며 일어나 낯이 벌개지기까지 하였다.
《선생님, 이거 정말… 아까 글쎄 가위를 대구보니까… 도로 붙이지두 못하구…》
림창직은 우물우물하였다. 바킹감을 여기저기서 찾다가 휴계실 옷걸이에 걸어놓은 중절모가 맞춤해보여 마음이 앞선 나머지 가위부터 댄 모양이였다.
리승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긴 그게 제격이긴 제격이겠구만. 한데 나보다 성희 에미가 더 섭섭해하겠는데 어쩐다? 나보다 성희 에미한테 사죄해야겠소. 내가 일러바쳐야 할가보우.》
《선생님, 선생님은 역시… 한데 아직은 제발 집사람한테 말하지 마십시오.… 바람에 날려 압록강에 들어갔다구 적당히 말하면 안될가요?》
리승기는 난 몰라 하는 식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뭐 금진인 자네가 그걸 압록강에 날려보냈다는것보다 이 합성탑에다 썼다면 외려 가만히 있을수 있어. 자네 성미를 아니까. 바로 그것때문에 금진이 자네를 열렬히 사랑하는것인데.)
리승기는 잠간 섰다가 인차 끝내고 나오라는 말을 남기고 거기서 물러났다.
그때 리승기는 림창직이 뽐프를 조립해놓고나서 이밤으로 반응조작을 시작하려고 시간을 지체할것만 같이 생각되다가 어째선지 오늘 저녁만은 중절모때문에라도 안해한테 달려가 사죄하느라 일찍 집으로 들어가리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문간에서 주춤거려지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 나와버린것이다.
저녁밥상을 물린 뒤에 자기 방으로 올라가 책상에 마주앉은 리승기는 최근의 과학원학보를 보고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이상한 폭발소리가 들리자 공장에서 가까운 주택마을의 이 집에서 거기에 맨처음 주의를 돌린 사람은 리승기였다. 그는 공장쪽에서 울린 이 둔중하고도 웅글은 음향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였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그는 밖으로 나와 어둠속에서 공장구내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불빛이나 그 어떤 다른 변화는 없어보였다. 그가 다시 방안에 들어가 불안감에 잠겨 서성거리고있을 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승기는 급히 문을 열었다. 김용석이 숨을 헐떡거리며 서있었다. 방안에서 내비친 불빛에 그의 두눈은 흥분에 번쩍이고 그 시커먼 눈섭이 푸르르 떠는것만 같다.
《선생님, 창직동무가…》
리승기는 덮칠듯이 그한테 바싹 다가서면서도 공포와 불안에 떨며 그를 보기만 했다. 리승기와 마주선 김용석이 주춤 뒤로 물러나며 가쁜숨을 삼키고 말을 했다.
《창직동무가… 위급합니다. 지금 병원에…》
《뭐라구?》
리승기는 웃옷도 걸치지 못한채 신발만 신고 김용석을 따라 달려갔다. 거리가 멀지 않은 병원에 당도한 그는 황황히 어느 문을 밀고 들어갔다. 지독히 풍기는 소독약냄새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이 에워싼 침대에로 다가가려는 자기를 누군가 부축해주려는것을 어렴풋이 느낄뿐 무서운 침묵과 정적에 휩싸인 방안의 공기는 그의 의식을 반나마 앗아가버렸다.
침대머리에 서서 리승기는 이상하게 창백해진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가 림창직이 아니라 어떤 낯모를 사람임을 보았다. 피기가 없이 굳어진 얼굴… 유쾌한 웃음과 함께 반짝이던 그 금이발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합성탕크폭발시에 쇠붙이가 경동맥을 치며 지나가 너무도 큰 출혈을 일으켜 림창직은 최선의 구급대책을 취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던것이다.)
리승기는 가슴이 쿵 하고 허물어져내리는 절망감에 두손으로 머리를 부둥켜쥐였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희 아버지!》하고 부르는 녀인의 애절한 웨침이 먼곳에서 들리듯마듯 아득히 울려왔다. 리승기는 실신상태에 빠지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