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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 회

제 3 편

제 2 장

1


방하민은 청수에서 마지막며칠을 보내려고 외래자호실에 들었다. 그는 여태 전쟁때부터 정해놓은 그 하숙집에 들군 했었다.

한데 이번에 와보니 이 집 늙은이들이 아들을 따라간다고 이사짐을 꾸렸고 이 집에는 다름아닌 오원배의 아들 오정해네 젊은 부부가 들게 된다고 하였다.

구식기와집은 신접살림에 너무나 커서 그 웃방에 얼마든지 기거할수 있었으나 청수에 다시 올것 같지 못하는데 괜히 들었다말았다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방하민이다.

마침 의주에서 아들집을 보러 왔던 오원배로인이 방하민을 만나 하는 말이 장차로는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이 청수동에 와서 뼈를 묻히고싶지만 아직 한두해는 살던 고장에서 떠나지 않겠다는것이다.

방하민의 속심을 모르는 오원배는 말했다.

《방선생, 마침 잘됐시다. 청수에 오면 계속 이 집에 있게 되였으니, 로친네와 함께 내가 여기 와두 집은 널직하니 걱정마시우. 또 집이 좁아서 못사는 법은 없시다. 마음이 좁아서 못살면 못살았지.… 이제 아라사에서 늙으신 어머님을 모셔오고 사모님두 온다 해두 평양에 살게 될터인즉 선생이 이 집을 제집처럼 다니게 되면 나로서는 더없이 감사한 일이웨다. 선생의 부친인 서경조, 그분과의 인연을 봐서두 내 집을 제집처럼 생각해주시우다.》

고마운 말이였으나 그것이 지금 방하민이 처한 심정에는 별로 위안이 못되였다. 제 론문에 대한 신심을 잃었던것은 둘째치고 리재업의 감자알콜사건으로 어지간히 마음이 혼란되였던것이다.

방하민은 신경이 과민해지고 사소한 일을 두고도 자신심이 없어질 때가 있었다.

(그까짓거 아무래도 쏘련에 갈거라면 구태여 그걸 바래선 뭘해…)

그는 제 론문을 두고 중간공장에로의 확대는 물론 그 론문자체를 포기할 심산까지 생겼다. 실상 론문은 청수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것이나 다름없다. 실험수치와 자료들이 거의나 리승기와 그의 방조자들 특히는 오정해의 많은 수고에 의해 이루어진것이다. 자기는 그저 리론적인 일반화를 하면서 많은 외국문헌을 참고해가며 맞춰놓았을뿐이다.

방하민은 자기의 론문을 공개심의에 붙여도 좋고 안 붙여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기한테는 이제 불원간 생활의 변화가 있을것이기때문이다.

쏘련의 박사원에 가려는 그의 지망이 인차 실현될것 같았다. 모교의 알렉쎄예브교수도 최선을 다해주겠노라고 약속을 해왔다. 평양에서 만나고 온 과학원원장도 방하민의 전망설계를 들어보고 쾌히 동의해나섰다. 방하민이 고분자화학의 최신분야인 원유에 의한 합성수지연구에 달라붙겠노라고 했으니 원장도 말을 들은것이였다.

그는 물론 합성수지연구에서 봉우리를 쌓을 야심을 품으면서도 자기의 희망과 속심을 리승기한테 터놓지는 않을것이다. 박사학위도 이왕이면 세계적인 판도에서 권위가 있는 쏘련학계가 인정하는것으로 받고싶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지금 명예에 대한 갈망이 쉬임없이 불타올랐으니 이 거치른 불길에 싸여 성실한 노력과 진지한 탐구의욕이 적지 아니 타버려 재처럼 된다는것을 그자신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감자알콜을 말하더라도 방하민은 저의 실책을 적당한 기회에 점잖은 말투로 돌이키면서 리재업이한테 은근히 못을 박았다.

《동문 문헌연구를 전면적으로 깊이하지 못했더구만. 내 그때 잡지 〈히미야〉에서 본걸 말했지만 후에 보니 어떤 문헌에는 다른 견해들이 피력되였더란 말이요. 쏘련학계두 합성고무연구분야에서 감자알콜을 두고 론쟁이 있은것 같애. 그러니 전면적인 문헌연구가 항상 중요한거요.》

그는 그때 이제껏 마음이 통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던 리재업이도 자기한테서 멀어져간다는것을 분명히 통감하게 되였다.

바로 그런탓으로 하여 일산 200키로비날론중간공장건물에 가려고 청수화학공장구내에 들어선 방하민은 아는 사람들의 인사를 점잖게 받으면서도 공장장인 리재업이부터 찾아갈 생각을 안했는지 모른다. 그가 합성공정의 뎅그런 건물안에 들어섰을 때 거기서는 뽐프의 스르륵거리는 동음만이 가벼이 들릴뿐 흔히 화학공장들이 그러하듯 겉으로는 조용하였다.

여전히 명랑한 사나이인 림창직이 휘파람을 슬슬 불면서 계기판을 들여다보다가는 한손에 받쳐든 공정일지에 무엇을 적다말고 방하민을 돌아보았다.

방하민이도 곰살궂게 인사를 건네였다.

《수고하누만, 잘돼가오?》

《뭘요, 그저 그렇지요.》

《한데 지금 무얼 하구있소?》

호기심보다 무관심이 더 많은 질문이였다.

허나 림창직은 일종의 자랑을 담아 말했다.

《우린 여기다 비등식을 도입했습니다.》

《아니, 벌써?》

그랬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방하민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빠르지 않소?》

그것은 이미 무관심이 아니라 자기의 견해가 담긴 목소리였다.

《제가 우겨서 이렇게 하구있습니다.》

《그렇다? 동문 언제봐도 급하다니까. 성미두 연구사업두.》

허나 림창직은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돼먹은걸.》

방하민은 여유있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경솔성과 열정이 다르다는걸 모르오? 전화로 들으니 리선생두 하는 말이 20키로단계에서 결함이 한두가지 나타난다구 하던데…》

《그렇긴 합니다. 허나 그건 해명되였구. 그래서 공정을 담당한 저한테 맡기라구 했습니다.》

그러다가 불시에 림창직은 저로서도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물론 신중해야지요. 우선 조작상요구에 주의를 돌리겠습니다. 규모가 큰 이 900키로합성탑에서 비등식이 처음부터 순탄히 되진 않을겝니다.》

한데 여기서 방하민은 웃사람다운 말투로 엄엄하게 말했다.

《비등식에 대한 신심이 부족해선 안되오. 리선생이 결심한 이상에는.》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여보이면서 다소 부드러운 어조로 《걱정말구 잘해보우.》하고 말하는것이였다.

사실에 있어서 그는 도이췰란드사람들이 고정식에 대하여 쓴 문헌자료들을 찾아보고 그것을 이번에 가방속에 가지고 내려왔다. 허나 림창직이 앞에서 서뿔리 그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그는 여기서도 종전대로 고정식을 했으면 했고 또 그것이 성공되기를 바라고있었다. 화학의 조상이라 할수 있는 도이췰란드에서 하는대로 하지 않으려는 이 청수사람들(특히는 리승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테 한번 본때를 보여주고싶은 얄궂은 심사를 어쩔수 없었다.

고정식은 장치가 복잡한 대신 실수률도 높은것이고 그자체에 다른 결함이 없다. 아무리 우리 실정에 맞는 비등식이라도 이제 난관에 부닥치게 되면 그 고정식에 되돌아갈수도 있다는 생각에 방하민은 마침내 림창직의 팔소매를 슬그머니 잡았다.

《그래 고정식의 장치제작에 대한 동무의 론문은 아주 버리였소? 내가 론문심사를 맡게 되여있지 않았소?》

《그건 무슨 말입니까? 버리기는 왜 버리겠습니까. 더구나 장치제작분야인데…》

《그야 그렇지. 학자란 제 창조물을 서뿔리 던지지야 않지… 그럼 내 말 좀 들어보우.》

그러더니 방하민은 림창직의 팔소매를 놓고 합성탕크를 눈여겨보며 말했다.

《도이췰란드잡지의 문헌에서 보니 과열기름의 온도와 압력에 문제가 있더구만. 아, 거 재업동무도 거기 가서 과열기름으로 200도의 반응온도를 얻는 거기에 무척 관심이 갔다지 않소.》

학자의 호기심과 관찰력이란 끝이 없는것이다.

림창직은 모든걸 알고싶어하는 성미라 대번 의문에 찬 시선을 방하민한테로 돌리였다.

방하민은 림창직이 든 공정일지를 달래서 그 뒤등에 종이 한장을 놓고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그는 정확한 기억력의 도움으로 수치들을 되살려 적으면서 제가 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말했다.

《도이췰란드학자들은 랭철한 실무가들이요. 빈틈이 없지. 원래 과학을 해먹게 되였다고 할가. 이것 보우 창직동무, 도이췰란드에서 하는게 앞선거라면 우리가 그걸 그대로 한다구 해서 그게 맹목적인 믿음이겠소?… 고정식을 우리가 해보지 않은것두 아니요. 기초두 있소. 그저 묘리와 비결을 찾지 못했달뿐이지.》

그는 여기서 자기의 지나친 말을 후회하듯 서둘러 동을 달았다.

《하긴 이건 지나가는 소리구… 하여튼 이제 동무가 앞으루 론문을 계속한다면 필요할가 해서 하는 말이요.》

그러다가 방하민은 다시금 참아내지 못하고 갑작스레 한손을 들어 허공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아차, 내 이 정신 봐. 바삐 정거장으로 나오다나니 그걸 넣구오구두… 그 도이췰란드문헌잡지를 가방안에 넣구 온것 같단 말이요.… 분명 가져왔어. 건망증이 이렇게 심해지다니 원.》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유럽사람들처럼 두팔을 쩍 벌려 유감과 사죄의 뜻을 표하는것이였다.

림창직은 그가 일부러 이제껏 그 말을 숨겨왔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그저 기쁜김에 소리치듯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당장…》

《아아, 바빠 마오. 오늘 저녁에… 참, 손님으로 초대받는 영광을 지닌다면 내가 손에 들구 집에 가지구 가지 않으리.》

불쑥 방하민은 마지막일지도 모를 여기 청수를 떠나면서 림창직을 마음의 벗으로, 마지막지탱점으로 삼아놓고 가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그는 함부로 다니지 않는 방문도 요청하다싶이 한것이다.

그들은 같이 밖으로 나오게 되였다.

작업복을 갈아입으러 현장휴계실에 들어갔던 림창직이 와이샤쯔우에 제낀깃의 웃옷을 입고 나왔는데 머리에는 처음보는 연회색중절모를 쓰고있었다.

《그 중절모는 어데서 난거요? 색갈두 좋구 꽤 멋진데… 역시 창직동문 옷차림에서두 신식이라니깐. 최신류행을 따를줄 알구.》

림창직은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리선생이 도이췰란드에 갔다오다 모스크바에서 사온겁니다.》

《그렇소? 외국방문기념품이란 말이지.》

림창직이 중절모를 벗어 손에 들었다.

《저보다 제 집사람이 더 기뻐하더군요. 한데 출장길이라면 몰라두 출퇴근때에두 꼭 중절모를 쓰라구 성화를 먹이지요. 녀자들이란 참.》

《안해들은 남편의 옷차림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법이요. 남보다 못하지 않게 차려 내세우려는게 현숙한 안해의 품성이지.》

생활에서도 선배연하는 방하민의 목소리는 그닥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방하민은 림창직의 손에서 중절모를 쥐여 제 머리우에 얹어보고나서 그걸 벗어 손에 든채 들여다보며 《이게 재질이 모직인가, 아니면?…》하고 중얼거리는것이 마치 그 재질을 아는것이 무척 중요하기라도 한듯싶었다. 그는 부러움이나 자기한테는 아무런 기념품도 없었다는 그런 섭섭함따위의 세속적인 감정에 잠긴것이 아니였으니 결코 그는 자신이 그런 옹졸한 인간은 아니라고 깊이 확신하는터였다. 이 순간에 그의 머리에 떠오른것은 제가 성의를 보여서 구해준 수정안경을 리승기가 왜 아직 끼지 않고있는지 하는 그것이였다. 굳어진 반응물을 까내다가 안경을 떨궈 깨먹은 뒤에 리승기는 본래부터 갖고있던 다른 안경을 썼는데 그건 테도 썩 좋지 못한것이였다. 방하민이 멋진 수정안경을 구해다주었는데도 리승기는 그냥 그것을 끼고다녔다. 물론 만년필이나 안경따위는 손에 익은것에 애착심이 생기는건 사실이다. 지금 방하민은 리승기가 그 수정안경을 끼고 자기와 마주앉게 된다면 훨씬 수월하게 그를 대할수 있을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그날 저녁 방하민은 도이췰란드잡지에 실린 문헌자료를 가지고 림창직이네 집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다시금 고정식합성법에 대한 자기의 견해(그것은 주로 외국문헌에 의한것이다.)를 설득력있게 피력했다. 외면상 그것은 림창직의 론문을 돕기 위한것으로 보였지만 그의 말투와 내심에는 고정식에 대한 미련과 함께 《너희들이 이제 비등식에서 실패하면 고정식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암시가 있었다. 아무튼 그는 금진의 음식솜씨로 후한 대접을 받았다. 난생처음 곱돌장사귀에 끓인것을 먹어보았다.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로씨야말을 섞어 너스레를 떨며 유쾌한 기분을 내여보았다. 허나 밤늦게 숙소로 돌아오는 그의 마음은 느닷없이 무거워지고 까닭모를 고독감이 엄습하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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