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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0 회

제 3 편

제 1 장

5


정원에 정향꽃이 한창 피여나는 봄날이였다.

온 나라에 천리마의 발구름이 지동치고 사람마다 분망한 나날을 보내던 1958년의 봄이였다.

매번 그러하지만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 회의에 나오실수 있다는 기대와 예감에 가슴을 울렁이면서도 그이께서 막상 회의에 나오시면 이 바쁜 때에 여기에 참석하시다니 하고 놀라움과 반가움에 휩싸이는 심정들이다.

려관에서 들은 라지오보도에 의하면 어제 하루도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모내기로 들끓는 멀리 황해도의 협동벌에서 현지지도를 하셨다는데 오늘 아침은 벌써 이렇게 과학자들의 협의회에 나오실줄은 그 누구도 미처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같기만 하다.

회의에서는 주로 제1차 5개년계획기간의 과학연구방향들이 토의되였다. 각기 부문별로 토론자들이 연구방향과 성과, 공업화전망을 내놓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석단에 앉으시여 연탁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며 이따금 물으시면서 주의깊이 들으시였다.

비날론연구집단을 대표하여 림창직이 연단에 나가려고 객석사이길로 걸어나갈 때 리승기는 그의 뒤모습을 주시하면서 이처럼 가슴이 불안해지는것이 무엇때문인지 딱히 알수 없었다. 여러날동안 공업화전망의 과학적타산을 위해 기초자료들을 준비했었지만 림창직이 연탁앞에 서서 첫번째 종이장을 번지기 시작하자마자 곧 그 서면준비가 빈종이장들로 보이면서 자신이 애써 갖고있던 침착한 마음의 여유가 도리여 이 순간에는 아주 쓸모없고 그릇된 자만심으로만 돌이켜지는것이였다.

수령님께서는 가끔 연단에서 토론하는 림창직을 보시다가는 머리를 끄덕이시였고 얼굴에 만족한 빛을 띄우군 하시였다. 구태여 수첩에 적지도 않으시였는데 그 문제는 그이의 구상속에 너무도 환하신 모양이다.

객석에 앉은 리승기는 림창직을 쳐다보며 그가 덤비지 않고 조리있게 말하는것에 놀라며 다소 마음이 놓이였다. 언제 그한테 저런 언변이 있었던가싶었다. 입술을 정확히 놀리면서 또박또박 발음했기때문인지 그 입귀에서 금이발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하여 그의 의젓하고 겸손하고 좋은 인상이 마감까지 유지되는것만 같았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1차 5개년계획기간에 년산 2천톤의 비날론공업화를 실현할수 있다고 봅니다.》

림창직이 토론을 맺고 연단에서 내려와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하는 그런 순간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의자등받이에 몸을 약간 젖히시면서 림창직을 향해 말씀하시였다.

《동무네 연구집단에서는 그렇게 보고있단 말이지?… 2천톤이라, 2천톤…》

중간공정들이 처한 지금의 형편에서 그것이 작다는것인지 많다는것인지 알수 없었다.

《어쨌든 동무네는 괜찮아. 200키로중간공장에서 애를 먹고있으면서도 벌써 앞을 내다보는 그 혁명적락관주의정신이 좋단 말입니다.… 한데 그 2천톤이라는 수자는 아무래도 작은것 같아.… 어떻소? 좀더 통이 크게 능력을 잡아볼수 없을가.… 여기 리선생도 참가했는데 돌아가 연구집단에서 한번 다시 토론해보십시오.》

그래도 김일성동지께서는 퍽 만족하신 표정으로 량쪽에 앉은 일군들을 번갈아 돌아보시며 무슨 말씀인지 하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림창직이 내려오자 리재업이 올라갔다.

리재업은 합성고무연구정형과 그 생산전망에 대하여 말하고있었다. 리승기는 이상스러운 일이지만 사위의 토론을 듣는 이 순간에야 비로소 자기가 이제껏 그한테 몹시 무관심했던것 같이 느껴졌다. 공학에 밝은 리재업을 비날론중간공정완성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보면서도 그의 합성고무연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방조를 주지 못했었다는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급하게 돌이켜보게 되는것이였다.

리재업이 토론하는 내용이 다 잘 아는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매우 생소하게, 귀설게 들려왔다. 무엇때문에 저 토론내용들이 불안을 주는지 얼른 그자신도 알아차릴수가 없었다.

리승기는 얼굴을 쳐들고 주석단쪽을 살피였다.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는 리재업의 토론을 들으시면서 점점 표정이 굳어져 엄엄한 낯빛이 되시더니 마침내는 리재업의 토론을 중단시키시는것이였다.

《가만… 동무의 연구방향이 어떻게 그렇게 되였소?》

장내는 긴장해졌다. 리승기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며 연탁앞에서 당황해하는 리재업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순간이 지나갔다. 불시에 평상시와는 다른 수령님의 음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이의 목소리가 이처럼 신랄하고도 준절히 울리는것을 리승기로서는 처음으로 듣게 된다.

《고무 1톤에 10톤의 알콜이 필요한데 이만한 알콜을 만들자면 20내지 22톤의 감자가 있어야 한단 말이지?… 그런데 동무는 어떻게 되여 석회석을 줴버리고 감자로 넘어갔소?… 석회석과 무연탄에서 카바이드도 만들고 거기에서 유기화학합성품을 바꾸려는것은 우리가 해방직후부터 내놓고 강조해온 문제인데 동문 어떻게 그걸 알면서도 이 방향을 줴버렸습니까?… 해방직후 우리 과학자, 기술자들이 일본놈들도 만들지 못한 알콜과 초산을 자체로 합성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건 우리의 원료, 우리의 기술이기때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긍지와 자부심은 다 어디로 가고 남이 하는대로 따라가기 시작했습니까?… 한쪽에서는 면화가 잘되지 않고 경지면적이 제한된 우리 나라 실정에서 석회석과 무연탄으로 합성섬유를 뽑겠다고 하는데 다른쪽에선 감자알콜로써 막대한 경지면적을 잘라먹으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입니까!… 내가 동무를 해방후에 첫 류학생대렬속에 넣어 외국의 연구원에 보냈는데 그래, 거기 가서 이런걸 배워왔단 말입니까?… 정말 섭섭하오, 섭섭해.》

김일성동지께서는 믿음과 기대를 잃으신것으로 괴로와하시는것이였다.

리승기는 그이의 음성이 그대로 곧추 제 머리우에 떨어지는것 같아 점점 깊이 숙어지는 고개를 쳐들수가 없었다. 차라리 김일성동지께서 자기를 불러세워놓고 《이것을 알고있었습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것을 곁에서 보고도 못 본체 했습니까? 재업동무보다 리승기동무한테 더 잘못이 있습니다.》라고 질책하신다면 도리여 이처럼 죄스럽지는 않을것 같았다.

수령님께서는 못내 안타까우신듯 다소 음성을 낮추시며 타이르신다.

《재업동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동무의 머리속에 사대주의, 교조주의가 있다나니 이런 결과를 빚어냈습니다. 과학자가 과학자인것은 남이 걷지 않는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는 용감성과 창조적본분때문입니다. 그런데 동문… 흔히 실력이 약하면 남부터 넘겨다보는 페단이 있는데 동문 내 보기엔 실력두 괜찮은데 어째서 이렇게 됐습니까? 문제는 머리에 있는것 같습니다.》

그이께서는 스스로 더 애타하시는 어조였다.

다음은 누가 나가 무슨 토론을 했는지 리승기는 기억할수 없었다. 회의가 끝나 어떻게 제가 숙소에 돌아왔는지, 식당에서 어떤 좌석에 앉아 무엇을 먹었던지 알수 없었으며 더구나 리재업을 찾아 어느 방에 들어가 마주앉을 그런 생각도 미처 못하였다. 자기부터 돌이켜보는데 습관된 그로서는 스스로 자책하는것에 온 정신을 쏟고있었던것이다.

리성을 회복하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것을 몰랐을수가 없었다는것이다. 도이췰란드나 쏘련에 갔을 때의 리재업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거니와 그전에 벌써 이따위 감자알콜이 그의 머리를 취하게 하고 중독시킨것이 분명하다. 새끼황새에 대한 이야기, 사위는 그 의미심장한 뜻을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흥미거리로 알고있었던것이 확실하다.

그런 방안을 누구와 의논도 하지 않고 협의회에까지 내놓을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들자 그 즉시에 방하민의 얼굴부터 눈앞에 떠올랐다. 둘이 합성고무문제로 여러번 마주앉아 협의했다는것이 상기되였다. 도이췰란드로 떠날 때도 방하민은 리재업더러 쏘련에 들려 감자알콜문제를 알아보라고 했었다는것을 리승기는 알고있다. 그러니 방하민이 리재업한테 감자알콜을 권고했을것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당사자인 제 사위를 둬두고 남을 칭원할수 없으며 원망할수 없는게 아닌가.… 허나 지금 당장 리재업을 만나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아까 김용석이 리재업을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가는것을 피끗 띠여보았는데 그들대로 무슨 이야기가 있을것이였다.

그러는데 뜻밖에도 방하민이 찾아와서 풀기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리선생, 밖으로 좀 나가봅시다, 얘기를 나눌게 있어서.》

마침 그라도 만나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던 리승기는 그를 따라 현관밖으로 나갔다.

두사람은 나란히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만 하였다.

대동강가에 이르렀다. 리승기는 정신을 차린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녁어스름이 깃드는 때였다.

두사람은 련광정아래 강안유보도의 장의자에 앉았다. 뒤에는 황혼에 잠긴 련광정지붕의 추녀가 무겁게 드리워 그들을 내려다보는것 같았다. 대동강물우에서 이따금 쭐렁… 하고 밤고기가 뛰여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하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본인을 위안도 했지만 일이 참 맹랑하게 되였습니다.… 아, 글쎄 난 그저 실험실적방법으로 한번 연구를 추진시켜본다구만 생각했더랬는데…》

《그럼 방선생은… 이걸 함께 토론한적 있었습니까?》

《있었지요.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리승기는 리재업의 뒤에 방하민이 서있으리라던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웬일인지 오히려 리재업대신 그를 나무람할수 없다는것을 더욱 깊이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설사 방하민의 풍에 리재업이 춤추었다 해도 어떻게 지금 방하민을 탓할것인가. 장본인은 리재업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장인의 립장에서 그럴수는 없다.

불현듯 방하민의 론문이 생각났다. 자기의 탐구와 힘을 믿지 않고 중간공장단계로 확대시키는것을 두려워하는 그의 립장… 그것은 어딘가 남을 쳐다보는 리재업이와 깊은 련관이 있는것만 같았다.

허나 자신의 실책을 두고 혼란에 빠진 그의 사고는 그 련관이 무엇인지를 오래 파고들 여유를 가질수 없었다.

방하민과 나란히 앉았던 리승기는 그 어떤 순간적인 충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하민이 의아하니 쳐다보는것도 못 보며 리승기는 장의자앞을 뒤짐을 진채 성급한 걸음으로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리승기는 리재업과는 따로 만나기로 작정을 했으나 그렇다고 이 마당에서 방하민한테 하고싶은 말을 피해선 안된다는것도 절절히 느끼였다. 그것이 질책인지 충고인지 안타까운 하소연인지 딱히 알수 없었으나 아무튼 이 자리를 지나면 그럴 기회는 다시 있을것 같지 않았다. 평상시에 보면 방하민이 리재업의 학술적인 권위를 찬양할 때가 많다. 생활은 어떠한가. 독선적인 사람이 남을 정도이상 칭찬할 때는 거기서 오히려 제 몫을 찾을 때가 많은 법이다. 제가 누구보다 사람의 가치를 볼줄 알며 아량있게 남의 성과를 대할줄 안다는것을 시위하려는 일종의 소총명과 자기과신에 불과한것이다. 남을 칭찬하면서 자기를 높인다는것을 그자신은 상상이나 할수 있으랴.… 이것은 남에 대한 비난이나 험구를 앞세우는것만 못지 않게 유해로운것이다. 서로 춰주고 남의것만 같이 쳐다보면서 그들은 한짝자꿍이 된것이다.

리재업이보다 먼저 방하민에게 추궁이나 비판을 한다는것은 안된 일이였으나 일이 이렇게 되였으니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리승기는 자기와 방하민과의 사이에 얽혀진 남다른 인연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 자리에서 물러설수가 없는것이다.

리승기는 문득 머리를 쳐들어 어둠에 잠겨드는 고색창연한 련광정추녀를 쳐다보느라니 세월의 무궁한 흐름속에서 어느 한 갈피가 뒤번져지며 얼핏거린다. 이 순간 그는 여직껏 방하민에게만 하려고 가슴속에 간직했던 그 말을 터쳐놓고싶은 강렬한 충동을 받았다. 그는 방하민의 바로 앞에 우뚝 멈춰서며 뜻밖에도 가라앉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조용히 말하는것이였다.

《방선생… (그 부름은 공식적이면서도 어느 동생벌 되는 사람에게 하듯이 애정이 울리는 음성이다.) 오원배로인을 통해 알아보던… 아니, 저… 선생의 그 아버님 있지 않습니까?》

《네?… 네.》

《양아버지 서경조, 그분을 내가 알구있다면 방선생은 퍽 놀랍겠지요?》

《뭐라구요?》

방하민은 장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떠듬거리였다.

《무슨 말인지요?》

리승기는 그 어떤 진실을 이제야 터놓음을 무척 미안해하듯 그러면서도 반가운 회포에 잠기는 그런 흥분에 떨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의 고향은 목포… 그래서 어릴적에 그분을 난 목포큰아버지라구 불렀댔소. 우리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우였고 내 어린시절의 스승이였소. 계몽기학자라구 할수 있는 그분은 그 뜻을 나에게… 우리들에게… 허나 그는 그렇게 이국땅 만리에서… 하지만 방선생을 키워 조국에 보냈으니…》

《아! 그렇습니까?… 이거 정말 뜻밖입니다.》

방하민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리승기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봄날의 밤대기에 식었던 그들의 손은 잠시 함께 뜨거워지고있었다.

《그렇소, 그렇소.》

리승기는 중얼거리며 다시금 장의자앞을 거닐었다. 밤의 강바람이 한줄기 불어오고 그의 외투자락이 펄럭이였다.

어째선지 방하민은 두다리에서 맥이 빠진듯 장의자에 도로 주저앉았다.

방하민의 얼굴빛은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얼을 잃고 앉은 사람처럼 리승기의 움직임만 따라 낯을 돌리고있을뿐이다. 리승기가 말했다.

《오원배로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오동진선생의 독립군에도 참가했으나 추측컨대 그뒤로는 길을 잃고 헤매였던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방하민의 침묵은 그것을 긍정하는듯…

리승기는 그렇게 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을, 우리 조선을 문명케 하려는 그 애국적지조만은 내내 잃지 않았을게라구 생각하우. 그는 나이로 보아 아직 생존해계실수두 있었는데 만약 그가 살아서 돌아와 우리의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오늘의 이 조국땅을 보았더라면… 민족사에 류례없는 이 현실을 보았더라면…》

잠시후에야 방하민이 조용히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저한테 친아버지나 다름없습니다. 저의 어머니를 구원해주시고 제가 네살때부터…》

방하민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리승기는 그냥 선채로 그의 말을 기다리다가 불시에 약간 높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 내 더욱 말해야겠습니다. 헌데 어째서 서경조 그분과는 달리 방선생은 뭐라구 할가, 어쩐지 이 땅에 아직 발을 못 붙인것 같구려. 외국땅에서 자라났다구 해서, 단지 그것으로만 해서 그럴수는 없소. 나두 물론 그렇지만 선생두 우리 나라, 우리 현실을 잘 모르는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리승기자신도 이 말이 지내 가혹하다는것을 말하는 순간에 깨달았다. 과학과 기술로 조국을 문명케 하려는 애국심이 있었기에 방하민은 조국에 달려나왔었다. 한데 선진국가를 따라배우고 그 경험대로 해나가야 한다는 마음은 강한데 어떤 립장에서인가 하는것이 명확치 못할뿐이 아닌가.

방하민이 조용히 말했다.

《리선생, 말씀이 너무 지나칩니다.》

아니다. 방하민은 자기한테 민족허무주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대학시절에 외국청년들속에서 조선사람의 두뇌에 대한 자부를 가졌으니 조선사람의 머리가 너무나 오랜 봉건의 질곡속에서 피여나지 못했을뿐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방하민은 말하였다.

《내가 민족적인것을 무시했거나 거세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리승기는 어둠속에서 그를 찬찬히 지켜보았다.

《말이 지나쳤다면 용서하오만… 아니요. 선생의 생활에서, 과학연구에서… 일체 사고방식에서.》

《리선생, 말이 났으니 말이지 과학실천에야 무슨 민족의 경계선이 있습니까?》

《경계선이라…》

(이건 누구의 말이던가? 누가 또 이렇게 말한적 있었던가. 그렇지, 이건 지태규가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기 전에 한 말이였지.)

《리선생, 털어놓고 말해 세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우리 나라 과학이야 과거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 나라에 수레바퀴밖에 없었다면 그건 너무 허무한 말이란걸 최근 좀 알기는 했지만… 더구나 화학이라는 학문의 견지에서 말하면… 벼짚에서 재물이나 우려내서 그 알카리성분으로 빨래를 한다든가 하는 정도이고…》

《가만… 방선생, 서경조 그분이 우리 나라를 얼마나 자랑했는지 아시오? 선생두 많이 들었을텐데… 내 기억에두 그가 해주던 얘기들이 오늘까지 남아있소, 우리 아버지가 하던 말보다 오히려 더 많이…》

《알만 합니다. 저두 우리 아버님한테서 많이 들었구 조국에 나와서두 많이 알게 됐습니다, 민족적자부심이 생기는것두 사실이구…》

방하민은 1955년 12월에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주체를 세울데 대한 교시를 주신 뒤에 대학교재와 과학기술발전사집필에 관여하면서 자주 서경조의 얘기들을 상기하게 되였었다. 또한 쏘련에서 공부할 때 들은 지식과 비교하면서 비록 많지는 않지만 그 발명의 년대들이 유럽보다 앞선데 놀라며 새롭게 알게 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배우고 습득한 지식과 문명의 바다에서는 하나의 잔물결이나 물방울같이 생각되는것이였다.

하지만 자신이 민족적자부심을 운운했고 또 자기의 지식이 너무나 무시당하는것을 참을수가 없었던것만큼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려 하였다.

한데 그는 여기서 자신을 자제하였다. 리승기에 대한 반발심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기껏해야 총명한 중학생의 자랑이나 되는것을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말을 참아낼수가 없을것 같이 생각되며 그것이 그냥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그는 기억력이 훌륭한 사나이였다. 자, 내가 우리 민족의 자랑을 모르는줄 아는가?… 이런 어감이 짙게 풍겨야 할 그 말들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최무선은 물질의 분자구조를 모르고도 화약제조법을 연구했다. (순 경험에 의해서일것이다.) 김정호는 삼각측량에 관한 책을 읽지 않고도 훌륭한 지도를 만들어냈다는것 그리고 고등수학의 힘을 빌지 않고도 장영실은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를 정밀하게 제작해냈다는것을 우선 말해야 했다.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든 1441년보다 200년이나 늦은 1639년에야 서양에서는 이딸리아의 가스델리가 처음으로 그것을 만들수 있었다. 금속활자를 말한다 해도 도이췰란드의 구텐 베르그가 1450년에 만들었지만 우리 나라는 그보다 200년전에 만들었다.… 자, 이래도 내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방하민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중학교교과서에 다 있는 내용들을 여기서 구태여 말해 뭘하겠습니까?》

그러자 리승기는 이렇게 말했다.

《옳습니다. 아이들의 교과서에도 이젠 민족의 자랑들이 다 적혀있는데 오히려 과학자들자신이 아직두 그걸 잘 모르구 민족허무주의가 있다구 생각합니다.… 방선생, 우린 이러니저러니 다 사대주의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아니요? 우린 이 점에서 중학교교과서부터 다시 공부해야 된다구 생각합니다.》

《그러니 리선생은 날 그 뭐… 사대주의… 그런 분자로 보시는게 아닙니까?》

《그런거야 나두 있구 선생한테두… 그리구 리재업한테두 있지요.… 우린 과학연구에서 항상 이런 각도에서 놓구봐야 한다는걸 오늘 더욱 깊이 깨닫게 되였습니다.》

과묵한 성미의 사람들이 일단 말을 시작하면 더 열렬히 주장하고 더 오래동안 말하고싶어하는것 같다. 더구나 마음속으로 기다리던 방하민과의 가슴터놓는 그 해후가 이렇게 이루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것으로 하여 그의 흥분은 곱절이나 더해진것 같다.

《좀 들어보우, 내 생각엔 오늘날 우리들한테서 남을 쳐다보는 나쁜 버릇이 민족의 자랑이나 우수한 전통을 잘 모른다는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겁니다. 우린 과학이 앞선 나라들에서 공부를 했으니 자칫하면 우리 나라 현실과 구체적인 조건을 떠날수 있다는걸 난 오늘 우리 수령님의 뜻에서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방선생두 나처럼 생각이 깊었으리라구 봅니다.》

두사람은 나란히 장의자에 앉아있었다. 강변에는 어둠이 짙어갔다. 련광정의 추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강건너의 불빛이 강물에 떨어져 갈가리 부서지고있었다.

방하민은 리승기에게 서경조의 운명에 대한 많은것을 이야기하였다. 독립군과 간도《토벌》그리고 원동에서의 흑하사변에 환멸을 느끼고 멀리 중앙아시아로 가버린 그의 인생행로에 대하여…

리승기는 새삼스레 서경조의 리념이 그 민족주의라는 테두리안에 머물러버렸음을 깨닫게 되였다. 리승기의 마음속에 간직된 그 서경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것이였다. 문명과 진보에로의 서경조의 몸부림을 보았고 그것이 리승기의 가슴속에 아버지의 뜻과 함께 깊이 새겨져있었던것인데 그후에 그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고말았단 말인가.

리승기는 어쩐지 이것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어릴적에 생각하던것이 자라나서는 그 의미가 달라질 때 누구나 느끼게 되는 그런 심정이다.

하지만 서경조의 운명이 끝난 그 지점에 방하민이 서있고 그 방하민이 서경조가 상상도 못했던 그러한 현실에서 참다운 학자로 살리라는 기대를 가져보면 어지간히 마음의 위안도 되였다.

그제야 리승기는 옆을 돌아보고 방하민이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두리번거리였다. 몇발자국 떨어진 어둠속에 방하민이 누구와 서서 뭐라고 말을 하다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리선생, 나 여기 있습니다. 쏘련연구원을 나온 친구를 만나서…》

이 순간에 그 밝고 쾌활한 목소리의 임자가 방하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수가 없었다. 방금 신중하고도 무거운 분위기에 잠겨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것이였다.

그와 마주 향해 어둠속에는 중절모를 쓴 어떤 사나이가 서있었다.

리승기는 꿈속에서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 맞다들린듯 잠간 멍하니 거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승기의 머리속에는 문득 방하민이 서경조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는것이였다.

장의자에서 일어선 리승기는 방하민과 이름모를 사람을 어둠속에 남겨두고 먼저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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