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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47 회

제 3 편

제 1 장

2


과학자대표단은 베를린에 잠시 체류했다가 부나종합화학공장으로 갔다.

공장기사장이 조선에서 온 대표단성원들을 마중하고 응접실에서 공장의 연혁사를 들려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장이라는 말을 두번씩이나 했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 더 못하는것 같았다.

한데 공장참관을 시작했을 때 세사람은 동시에 놀라게 되였다. 우선 카바이드전기로들의 배렬과 생김새가 신통히도 흥남지구 화학공장의것들과 같았기때문이다. 다른 공정의 건물과 장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그들은 일제가 20년대말에 도이췰란드에서 그 설비들을 들여왔었다는것에 생각이 미치였다.

리재업은 단장과 리승기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합성고무직장쪽으로 향하였다.

리재업의 마음은 착잡하였다. 호기심과 기대 그리고 불안이 서로 엇갈리였다. 그는 자기의 기본연구과제인 합성고무를 보는것도 필요했지만 방하민의 말대로 여기 초산비닐합성에서 비등식을 보는것이 또한 중요했다.

여기 부나에서 류동촉매에 의한 비등식으로 할것이라고 생각하면 어째선지 일종의 안도감이 들며 제가 괜히 불안해한다고 스스로 위안해마지않았다. 어느덧 그의 머리속에는 비등식합성이 확고히 자리를 잡아 이제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파고들겠는가 하는 궁리만 있었다.

합성고무직장도 청수의 중간공장들을 확대해놓은감을 많이 주었다. 일제는 청수의것도 도이췰란드설비들을 들여왔던 모양이다.

세사람은 통역을 통하여 기사장이나 직장장이 하는 설명을 주의깊이 들으면서도 호상간에는 서로 보는 견해들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눈길을 마주쳐본다든가, 고개를 약간 끄떡해보인다든가, 눈에 의문의 빛을 띠고 기웃거린다든가 고작해서 그런 정도로 의사를 표시하고 교환하였다.

합성고무의 합성공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설명을 듣던 리재업은 리승기와 의혹의 눈길을 마주쳤다. 뜻밖에도 여기서는 여전히 고정식이라고 할수 있는 그런 방법, 자기들이 애를 먹고있는 그것과 별반 다름없는 방법에 의거하고있지 않는가!

공장의 력사를 자랑하듯 지난날의 방법을 고집하는 인상을 받았으나 고정식에서 열을 어떻게 제거하는가 하는것은 아무튼 흥미가 있는 일이였다. 역시 복잡한 장치를 해결할수 있는 이 나라의 구체적인 조건에서는 이것이 합당하겠다는 뜻으로 리승기가 고개를 끄덕이였을 때 리재업은 그것을 리해하면서도 어쩐지 불안해났다.

(이제 폴리비닐알콜공정에 가면?… 거기서는 합성을 어떤 식으로 할가?)

그것은 기대보다 위구가 앞서는 의문이였다.

합성고무공정의 참관이 끝났을 때 통역과 안내원만 남기고 량해를 구한 공장기사장은 바쁜 일때문에 가야겠다면서 마감에 자기와 다시 만나자는것이였다.

리재업은 기사장의 얼굴에서 두가지의 뜻을 읽었다. 이제 가야 할 폴리비닐알콜공정을 홀시하거나 아니면 있을수 있는 질문들을 피하거나… 어쨌든 투명하지 못한 당황한 기색이였다.

초산비닐합성공정에 서있는 도이췰란드사람으로서 중키의 사나이인 직장장은 무슨 측정계기인지 보다가 손님들이 다가가자 약간의 답례를 표하고는 한참이나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그것만 들여다보고있었다. 일행을 향해 돌아선 그의 표정은 몹시 거만해보였다. 안내원한테서 무슨 말을 들으면서도 그의 낯색은 한빛으로 굳어져있었다.

문득 리승기가 리재업한테 몸을 약간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저 사람의 코수염이 히틀러모상에서 본 그 코수염같지 않소? 좀 성글기는 하지만.》

리재업은 웃음이 나왔으나 웃을수가 없었다. 리승기한테서 일생 처음으로 듣는 롱담이였다. 그리고 아주 신통히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승기가 직장장에게 물었다.

《지금 휘껜샤 K가 얼마입니까?》

중합도의 높고낮음의 질을 평가하는 수치를 물은것이였다.

그런데 직장장은 통역의 말에 반복해 귀기울이고나서도 당황해하며 얼른 답변을 못했다. 수치를 잘 대지도 못했거니와 그 물리적의미도 잘 모르는것 같았다. 리승기가 상대방의 자존심에 손상이 가지 않게 몇마디 설명을 해주자 직장장은 그제야 퍽 곰상스러워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직장장이 초산비닐합성에 이르러서는 어물어물하면서 말을 잘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무슨 특허의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공정에서 그들도 애를 먹는것 같았다. 여기서도 역시 합성고무에서처럼 고정식이였다. 촉매를 류동촉매가 아니라 고정촉매를 쓰는것이다.

그래도 어딘가 무슨 비결이 숨어있을것이다.

적지 않은 질문을 하고나서 리승기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듯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는 고정식이구만.… 고정식이야.》

리승기의 얼굴을 주의깊이 살피던 리재업은 그 말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울리는듯만싶어 어쩐지 모든 기대가 일시에 허물어지는것 같았다.

《여기서는 고정식이구만, 고정식이야.》

리재업의 귀가에선 여전히 이 말이 징징 울리며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서도 여전히 고정식을 붙안고 고생하게 되리란 말인가. 방하민의 예측이 뒤집어진것은 둘째치고 합성을 직접 맡은 림창직이네는 얼마나 더 고충을 겪어야 할것인가. 자기의 론문인 《비등체의 수력학적원리》가 비록 한 측면에서나마 이 도이췰란드땅에서는 인정을 못 받는것만 같은 때에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허전감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고정식을 견지하고있는 여기에 어떤 별다른 비결이 있을터인데 리승기는 별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여전히 생각깊은 표정으로 뒤짐을 진채 다음공정으로 떠나가는것이였다, 고정식에 완전히 공감하고 그 구체적인 조건과 특성들을 다 리해하기라도 한듯…

리재업은 생각하기를 라이프찌히에 자리잡은 라이프니쯔연구소에 가서는 리승기한테서 이러한 의문들의 대답을 얻게 되리라고 믿었다.

라이프니쯔연구소는 고분자화학연구소인데 소장은 프레므니쯔교수였다.

교수는 자기의 방을 행정일군들의 방처럼 꾸리지 않았다. 서재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다는 그렇지도 않았다. 복판에 커다란 책상이 응접탁을 대신하고 그 주위에는 의자들이 놓여 언제나 몇사람이 모여앉을수 있게 되였다. 지금도 방금 사람들이 앉았다가 나갔는지 응접탁 여기저기에 책들과 잡지들이 놓였다. 교수의 책상은 어딘가 구석진 곳에 있었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등갓을 씌운 탁상등이 두드러져보였다.

교수의 얼굴에는 권력이 주는 오만한 빛이 아니라 학술적인 권위에서 오는 도도한 위엄기가 어려있었다. 동양에서 온 세명의 학자들을 마중하는 그의 태도는 정중하였으나 방문객들을 바라보는 그의 갈색눈은 상대방을 굽어보는듯 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리재업은 왜 이렇게 모두 거만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선입견일수 있다고 여기면서도 한편 19세기와 20세기 40년대 중엽까지만 해도 화학의 중심이라고 할수 있는 나라의 학자이니 응당 그럴만도 하지 않는가, 그런 량해와 긍정도 생기였다. 리재업은 제일 마감으로 의자에 가앉았다.

리승기는 몇가지 질문을 했다.

통역의 말을 주의깊이 듣던 교수는 일어나서 책꽂이에서 한권의 책을 꺼내왔다.

《이것이 최근에 내가 쓴 책인데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도 여기에 있을것입니다.… 기념으로 드립니다.》

도이췰란드어로 《고분자화학》이라고 책표제를 썼다. 프레므니쯔는 좀더 친절해지려고 애쓰는듯 책을 펼쳐들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폴리비닐알콜편입니다. 참고해보시면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교수는 같은 말을 반복할번 한 제 실책을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고 급기야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런데 가만, 그 책을 좀…》

그 책을 받아들려고 하는 리재업한테서 교수는 도로 책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책상우의 안경을 쓰더니 어느 한 페지를 들여다보며 거기를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여기에 적힌〈고분자가 용액속에서 구부러진다〉는 이 리론을 전개하는데서 (50년대까지만 해도 고분자가 용액속에서 구부러진다, 안진다 하면서 도이췰란드학계는 물론 다른 나라들에서도 론쟁이 있었다.) 바로 이〈S,ℓℓℓ〉라는 학자의 론문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나는 그가 우리의 저명한 슈타우딩거박사의 리론을 새롭게 자기식 리론으로 전개했다고 생각합니다. 1930년대초에 벌써 말입니다.》

책을 펼쳐진채로 리재업에게 다시 주고난 교수는 앉지도 않고 왔다갔다하면서 아무런 반응도 없이 덤덤히 앉아있는 리승기를 못마땅하게 흘겨보는것이였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의 저작에 남먼저 얼른 손을 내밀지 않았기때문인것 같다.

리재업은 책장을 들여다보았다.《S,ℓℓℓ》(에스, 리)―이것은 일본이름으로 창씨를 하지 않았던 리승기가 영어로 처음 글자만 따서 연구보문들에 내던 그 조선이름의 략자였다.

도이췰란드교수가 리승기한테 다가가 모욕적인 손짓으로 리재업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키고 그러면서도 점잖은 투로 저기에 나의 답변이 다 적혀있다고 다시금 말했을 때 그만 참을수 없어 리재업은 통역에게 말했다.

《저 교수한테 좀 말해주오, 이〈S,ℓℓℓ〉는 바로 이 리승기선생이라고.》

통역의 말을 듣고 교수는 아연실색하듯 잠시 아무 말을 못하다가 급기야 정신을 차린듯 두손을 맞비비며 어색한 미소를 띠웠다.

《아, 그렇습니까?!… 난 프랑스학자인줄 알았는데.》

프레므니쯔는 불시에 맥이 빠진 사람처럼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는 번개처럼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던지 그는 한손을 훨썩 쳐들며 말했다.

《가만… 36년인가 37년에 일본에서 견학실습을 왔던 기다 겡이쯔교수를 내가 만난적 있었는데 그때 그는 어떤 연구생을 몹시 칭찬하더랬습니다. 섬유의 고분자론을 발전시키는 그의 론문을 돌아가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헤쓰의 저분자론이 아니라 슈타우딩거의 고분자론을 따르면서도 그걸 반박하면서 발전시킨다고 하여 난 잘 믿지 않았고 또 속으로 코웃음까지 쳤습니다.》

프레므니쯔는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탁자우에 한손을 짚은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후에 기다 겡이쯔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로만 할수 있는 말이라고 하면서… 그 연구생한테 박사학위를 주었는데 그 론문 하나만으로도 일본 고분자화학의 체계를 바로잡은 주추돌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연구생이 식민지청년이여서 자기도 딱할 때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프레므니쯔교수는 리승기교수를 유심히 눈여겨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그 식민지청년이 조선사람이고… 그 연구생이 혹시… 당신이 아니십니까?》

프레므니쯔가 직접 리승기한테 물었거니와 아까 리승기라는 이름을 까밝힌것으로 하여 장인한테서 힐책어린 눈길을 받은지라 리재업은 감히 제가 다시 나서서 말할수가 없었다.

리승기는 의자에 앉은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일본인들조차 인정한 조선인화학자들이 결코 한두사람이 아니였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난 조선을… 새롭게 알게 되누만요.》

리승기를 존중히 대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실책을 사죄하는 의미와 함께) 프레므니쯔교수는 저녁에 호텔식당에서 제 성의껏 만찬을 마련하였다. 마감에 교수는 고기뼈다귀들을 낡은 신문지에 싸면서 말했다.

《집에서 사랑하는 개가 나를 기다립니다. 갖다주렵니다.》

리재업이 한마디 하였다.

《선생은 화학보다 개를 더 사랑하지는 않겠지요?》

그 말을 들은 교수는 《아니, 내가 더 사랑하는것이 어느것인지 모르겠소. 화학인지 개인지…》하고 대답하며 껄껄거리는것이였다.

리재업은 이런 때에도 리승기의 표정을 살피고있었다. 연구소의 실험실들을 돌아볼 때, 소장의 방에나 만찬의 식탁앞에 앉았을 때 리승기의 얼굴은 덤덤해보이기만 하였다. 그는 오히려 교수와의 면담을 불쾌하게 여기는것 같았다.

리재업은 리승기에게 대담하게 물어보았다, 왜 기다 겡이쯔교수가 자랑한 그 제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는가를.…

리승기는 의미심장하게 조용히 대답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전연 같지 않기때문이겠지.》

아무튼 도이췰란드교수에 대한 인상은 썩 좋지 않은것 같았다.

리승기의 얼굴빛은 웬일인지 도이췰란드를 떠나기 전까지 줄곧 상심한 기색인듯싶었다. 한데 떠나기 전날 저녁이였다.

리승기가 뜻밖에도 가던 길에 레닌그라드에 꼭 들리자고 단장에게 제기하는것이였다.

리재업은 리재업대로 합성고무에 대한 제나름의 욕심때문에 이제 그것을 제기하려던 참이였다. 그런데 리승기가 먼저 거기에 들리자는 제의를 하는것이였다. 단장은 리재업이한테 장인이 합성고무의 주인인 사위를 위하여 거기 들리자고 하는것이 분명하다고 눈을 끔쩍거려보였다. 이번 방문의 기본로정이 도이췰란드이였던만큼 모스크바라면 몰라도 레닌그라드로 가는것은 로정의 보충이 아니라 변경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단장이 베를린에서 대사관 걸음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리재업은 리승기와 단장한테 미안한 생각도 뒤로 미루고 이 기회에 모교의 교수들과 레닌그라드의 권위있는 화학자들과 더 접촉하기 위해 바삐 지내였다. 사흘이 지나갔다. 그새 리재업은 합성고무에 대한 연구관계자들을 만나고 중간공장들을 찾아다녔다.

며칠동안 해빛을 좀해서 볼수 없던 레닌그라드의 하늘은 여전히 구름장들로 뒤덮이고 날씨는 추웠다.

리승기는 리재업의 소개로 그의 지도교수였던 사람을 만나고 대학연구소의 실험실들을 돌아보았으며 여러 학자들과 면담을 하였다. 그새 그가 어떤 탐구의 사색을 계속하였는지 그때까지는 누구도 알수가 없었다.

물론 리재업은 장인이 통역을 앞세우고 화학자들을 만났으며 자기의 어제날 지도교수도 만나 그와 장시간 담화를 나눈것도 알고있었지만 그 내용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리재업은 돌아올 때 기차로 씨비리대지를 횡단하고싶었으나 리승기는 초기의 예견과는 달리 매우 서두르면서 비행기편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리재업은 조급함을 싫어하는 리승기의 성미를 알고있는지라 외국방문의 과정과 결과를 두고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섭취해야 하겠는가를 캐여묻지 못했다. 렬차의 긴 로정이라면 몰라도 비행기로 오는 도중에는 그럴 기회를 별반 얻을수가 없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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