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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 회

제 3 편

제 1 장

1


가을이 닥쳐왔다.

공장둘레의 울타리를 따라 길쪽에 주런이 선 키높은 백양나무와 뽀뿌라나무의 잎새들이 누렇게 황이 들기 시작했고 청수동골안의 산자락에는 군데군데 빨간 단풍이 피였다.

압록강을 건너 불어오는 바람이 퍼그나 쌀쌀해지고 공장정문으로 들어오는 아스팔트길우에서 락엽들이 굴러다녔다. 어느덧 헐벗고 앙상해진 뽀뿌라나무의 우듬지에 남은 마지막잎새들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맨 웃초리에만 붙은 그 잎새들은 여전히 푸른빛을 띠고있어 지나간 여름날의 신록을 아쉬워하며 마가을 찬바람과 한사코 맞서는것만 같았다.

청수에 내려올 때마다 들군 하는 연구소의 한 방안에서 밖을 내다보던 방하민은 락엽부스레기가 바람에 굴러드는 창문을 닫고 책상주위를 서성거리였다. 증기난방이 아직 제대로 되지 않은 방안은 썰렁하였다. 마음은 안정을 잃고 불안하기만 하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지 모른다. 한해의 결속을 서두르는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을이라 저마다 제 생활의 보금자리를 꾸리려고 서두른다.

가을은 사나이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요즈음은 원기와 의욕보다도 고독감이 더 자주 가슴속에 엄습해오는 방하민이였다. 책상우에는 책들이 놓여있었다. 마저 번역하려고 내려올 때 갖고온 화학잡지 몇권 그리고 그옆에는 한달전에 쏘련에 갔다가 가져온, 역시 로문판인 고분자화학에 관한 새로운 책이 펼쳐져있었다.

허나 그는 거의 하루종일 거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기분상태는 저녁때까지 계속되였다.

저녁에 오정해의 결혼을 축하하여 연구사들이 리승기의 집에서 간소한 만찬을 마련하였다. 방하민도 거기에 참가하게 되였다.

오정해의 잔치는 물론 의주의 오원배네 집에서 있었다. 오원배 늙은 내외는 아들과 함께 있는 연구사들을 위해 놋양푼에 기장찰떡과 송편을 담아 음식보자기에 싸서 들고 뻐스를 타고왔다.

술은 역시 마음의 고독과 울적함을 가시는데서 더없이 좋은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방하민은 생강술을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독한 워드카에 습관된 방하민도 꽤 입에 댈만 한 술이다. 워낙 술에 절제가 있는 그인지라 취기가 오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군 한다. 예상외로 생강술이 도수가 높은지 취기가 빨리 올라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으나 좌석의 분위기를 보지 않고 훌쩍 일어설수는 없었다. 그의 곁에는 웬만 한 술에는 끄떡도 없는 이 집 사위인 리재업이 앉아있었다.

노래소리와 손풍금소리가 울렸다. 아래방에서는 연구사의 안해들이 웃음과 이야기로 신부를 둘러싸고 앉았다.

방하민은 노래와 손풍금소리에는 아랑곳없이 리재업과만 무슨 얘기를 나누고싶었다. 하지만 진짜로 하고싶은 말을 지금 당장 여기서 꺼낼수 없다는것을 의식한 그는 취기가 오른 흥분을 어쨌든 무엇으로든지 쏟아놓고싶어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우선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쏘련에서 첫 인공지구위성을 쏘아올린것은 쏘베트과학의 거대한 승리요.》

첫 인공지구위성발사의 성공이 세계적인 흥분을 가져온 때였다.

방하민은 리재업의 무릎을 쳤다.

《인간은 바야흐로 무한대한 우주로 날아가게 되였소. 여기서 두말할것도 없이 쏘련이 앞장섰단 말이요.》

그러다가 그는 불시에 제가 스스로도 서글퍼졌다.

(한데 난 뭐야? 난 아직두 박사학위론문두 결속짓지 못했으니… 이건 다… 저 안경쟁이 리승기의 우유부단성때문이야. 과학원의 자연과학부문 위원장이라는 권위를 세우느라구 질질 끄는가. 좋아, 이젠 실험실에선 문제가 없다니 그까짓 중간공장에도 내밀어보자꾸나.)

허나 이것이 취중의 객기에서 오는 생각임을 스스로도 부인할수 없었다. 그는 신랑신부의 노래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약간 비틀거렸다. 그는 리재업의 팔소매를 놓지 않고 슬그머니 끌면서 나왔다. 문밖에 나서자 안에서 림창직부부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리재업이 그걸 듣지 못하는게 아쉬운지 그쪽으로 손짓을 했으나 방하민은 여전히 그의 팔소매를 잡은채 말했다.

《자, 이젠 다 끝나가는데… 저 부부간의 노래두 괜찮구만. 잘 어울려. 자, 가자는데…》

《어디로요?》

《재업동무네 집에 가기요.》 그러더니 방하민은 리재업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한다. 《나한테 워드카 두병하구 연어통졸임 가져온게 있소.》

그제야 리재업은 술에 취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무슨 일에나 용단을 내린다는것을 보여주고싶어 《갑시다.》하고 선선히 동의해나섰다.

방하민은 하숙집에 들려 가방안에서 술과 통졸임을 꺼내가지고 리재업이네 웃방에 들어갈 때까지도 이 리재업과 제가 무슨 말을 꼭 하려고 했던지 아리숭한것 같기만 하였다. 그는 흔히 리재업을 만나면 곧잘 《우리끼리니 말이지만》하군 하는데 지금도 그런 감정이 작용했다. 방하민이 소반우에 놓은 통졸임통뚜껑을 따개로 썩썩 따서 한쪽에 번져놓고서 저가락으로 그안의 연어살토막을 집어 접시우에 꺼내놓으며 말했다.

《재업동무가 비날론중간공장 공장장으로 된 이후에 참 수고가 많소. 더군다나 합성고무연구도 계속 내밀면서 말이요. 공학에 밝은 동무니까 공장장직분을 맡긴것이지.… 한데 200키로중간공장에 와서 더 시련을 겪는것만은 사실이요.》

방하민은 리재업이 부어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만문한 연어살토막을 입안에 넣고 몇번 씹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소? 화학이란 원래 실험실단계가 다르구 중간공정이 다르구 공업화단계에서 달라진다는거야 상식이 아니요? 그러니 공학에 밝은 재업동무가 한몫 해야 할건 뻔하거던.》

술기운이 별로 보이지 않는 리재업의 얼굴은 일상시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그의 눈빛은 무엇인가 다른 말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보였다.

다시금 취기가 오른 방하민이 말을 계속했다.

《리선생이 지금 중합에서 새 방법으로 제2진을 치는데… 리선생이 항상 제2진을 치는 용의주도한 수법은 참 경탄할만 하오. 한데 답답한 일두 있소. 지금 역시 제일 말썽이 합성이 아니요?… 리선생이 재작년에 고도기술협의때문에 모스크바에 갔다가 마쟈르요, 우크라이나 과학원이요 하는데서 요청을 한다구 거기나 가지 말구 초산비닐합성의 조상이랄수 있는 도이췰란드에 먼저 갔어야 했을게 아니요,… 물론 며칠내로 인차 리선생과 동무와 그리구 평양에서 누구 한사람 셋이서 도이췰란드로 떠나게 되였지만.… 그때 벌써 갔다왔어야지, 안그렇소?》

방하민의 말이 그럴만하게 들렸다. 리재업은 도이췰란드로 떠나기 전에 자기의 과제인 합성고무연구정형과 함께 비날론중간공정들을 공학적으로 자세히 검토해보고있는중이였다.

방하민은 술상너머로 리재업한테 몸을 기울이며 괜히 목소리를 낮추느라고 하였다.

《사실 도이췰란드에 가도록 적극적으로 제기한건 내가 그런거요. 도대체 우리 기술만 가지구 앉아서 어찌자는거요? 선진과학부터 허심히 배울줄 알아야지. 이번 기회에 초산비닐과 함께 동무두 그 합성고무를 보구 오구려. 부나화학공장이 세계적인 화학공장이니 거기서 합성을 어떻게 하는가 우선 그것부터 보란 말이요. 이제 도이췰란드화학과 쏘련화학에 몸을 푹 잠그고나면…》

방하민의 말은 사뭇 훈시조로 울리였다.

리재업은 숫제 반감도 공감도 없는 사람같이 듣고만 앉아서 이따금 갸름한 고개를 끄덕여 상대방의 말에 응수하군 하였다. 이러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방하민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오금을 박았다.

《이번에 리선생은 폴리비닐알콜공정들을 많이 보겠는데 동무가 곁에서 잘해줘야겠소. 특히 합성에서 말이요.》

여기서 구태여 설명한다면 합성공정은 폴리비닐알콜에서 심장부라고 할수 있다. 합성에서는 초산과 아세찔렌이 반응해서 초산비닐이 나온다. 탕크밑으로 각기 초산가스와 아세찔렌가스가 올라와서 초산아연을 흡착시킨 활성탄층으로 통과되면 초산비닐이 얻어지는데 그 활성탄을 일정한 층으로 고정시켜놓으면 고정식이고 촉매를 춤추듯이 자꾸 류동시키면 비등식으로 된다. 고정식은 실수률이 비교적 높은 대신에 장치가 복잡하고 반대로 비등식은 실수률은 좀 낮아도 복잡한 장치를 피할수 있었다. 여태 20키로에서 고정식방법을 하다가 반응물이 엉키고 굳어지면 보름이고 한달이고 정으로 까내군 한것이다.

방하민이 리재업더러 합성공정을 잘 보고 오라는것은 옳은 말이였다.

마침내 방하민은 취기가 사라진듯 한 또릿또릿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도이췰란드에서는 이미 합성에서 비등식방법을 하구있으리라구 보오. 외국문헌을 봐서두 그렇구… 그렇게 되면 동무가 쏘련에서 인정받은 학사론문인〈비등체의 수력학적원리〉도 도이췰란드사람들에 의해 비등식합성에서 하나의 기초원리로 적용되는게 아니겠소?》

그 말을 듣던 리재업이 슬그머니 딴데로 눈길을 피했다. 방하민은 병안에 남은 술을 리재업의 잔에 마저 따라주면서 말했다.

《너무 겸손할 필요는 없소.…》 그러다가 불쑥 목소리를 높이였다. 《하여튼 이번에 도이췰란드에 갔다오면 리선생두 정신을 차릴게요.》

방하민은 높였던 목소리를 다시 낮추었다.

《그리구 한가지 부탁은 검화공정두 잘 보구 오우. 내 론문을 위해서 말이요.

리선생이 내 론문을 아직 확신성있게 대하지 않는것 같은데…》

흡사 자기의 박사론문을 중간공장에 확대시키지 않는것은 제가 아니라 리승기인듯이 보였다. 아니다. 방하민은 결코 이런 부탁때문에 리재업을 끌고 그의 집에까지 오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는 리재업을 통하여 자기의 론문을 중간공장단계를 거치지 않고 무난히 진척시키려고 한듯싶었지만 막상 리재업과 마주앉고보니 학술상으로나 어느모로 보나 리재업보다 우이라는 체면과 자존심때문에 그런 말을 꺼낼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내심으로 얼굴을 붉히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랴부랴 자기와 마주앉은 리재업의 연구과제에로 말을 돌리였다.

《가만,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한번 강조하기요. 이번에 도이췰란드에 갔다오면서 쏘련에서 합성고무를 어떤 방향에서 하는지 좀 단단히 보구 오우. 잡지〈히미야〉최근호에서 보니까 카바이드가 아니라 감자에서 알콜을 뽑아 합성고무의 재료로 쓴다는것을 적었더랬는데.》

《나두 보았습니다. 이번에 쏘련에 들려 잘 보구 오자구 합니다.》

《스웨르들롭스크종합대학에 갈 기회가 있으면 좋겠는데… 내 지도교수인 알렉쎄예브교수도 좀 만나고… 하지만 그럴 시간이 있겠소?… 가지 마오, 가지 마오. (그는 부랴부랴 말했다. 리재업이 거기에 가는것이 갑자기 겁나기라도 하듯) 재업동무가 연구원에 몇년 가있은 레닌그라드공업대학에 꼭 들리자구 제기하우. 합성고무중간공장도 꼭 견학하구 말이요.》

《알겠습니다.… 가지요.》

리재업은 흔연히 대답했다.

그때 리재업의 안해가 친정에서 돌아오는것이여서 방하민은 차라리 잘되였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밤도 깊었으니 가야겠다고, 좀더 얘기를 나누다가 가라는 안주인의 만류를 점잖게 사양하고서 몸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구두술을 꺼내 손에 쥐더니 허리를 굽혀 그걸로 발뒤꿈치를 구두속에 밀어넣고는 일어서서 발을 탕탕 굴러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취한 사람같지 않게 몸가짐을 바로하며 천연스레 주인내외한테 밤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걸어나갔다.


×


이튿날에 리승기의 방에서 그와 마주앉은 방하민은 어제밤 리재업과 만났을 때의 그 허심하고 소탈한듯 한 태도와는 달리 아주 공식적인 자세에 굳어진 사람같이 말을 꺼냈다.

《도이췰란드로 떠나시기 전에 얘기하려구 해서… 물론 이제 평양에 들리면 려경구소장선생두 말이 있겠지만…》

려경구는 여전히 과학원 화학연구소장으로 평양에 살면서도 여기 청수에 있는 화학건재공업성 중앙연구소의 소장을 겸임했다. 지금 방하민은 화학연구소 과학부소장으로서 말하는것이였다.

《아무래두 리선생이 우리 연구소의 나일론연구실장을 겸임하신것만큼 도이췰란드와 쏘련에 가면 나일론의 연구방향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료해해야 할것 같습니다.… 지금 나일론연구실이 제 궤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리승기는 방하민의 말이 옳다고 여기였다.

《난 그저 부실장동무한테만 맡겨놓구 여기 일이 바쁘다나니 평양에 가서두 연구방향이나 이따금 토론해줄뿐이지요.》

리승기는 요즘 방하민을 대할 때마다 어쩐지 자신을 두고 화가 났다. 그를 랭정히 대하지 말자 해도 마음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가 바로 서경조가 사랑을 기울여 키워낸 양아들이라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기때문이다.

방하민이 말했다.

《외국출장을 떠나겠는데 오늘이랑 좀 일찌감치 들어가시지요, 준비도 할겸.…》

방하민의 친절성에 리승기는 그저 《고맙습니다. 특별한 준비야 뭐 있겠어요.》하면서 그 자리에 오래 앉아있기 힘든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리승기가 합성공정에 간다고 하자 방하민은 《그럼 저도 좀 같이…》 하고 따라섰다.

두사람은 합성탑앞에 섰다. 어째선지 뽐프도 멎고 주위는 조용하다.

방하민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리선생의 생각엔 어떻습니까? 도이췰란드의 학계에서는… 아니, 공장들에서 이 합성공정을 어떤 형식으로 하는지?…》

리승기는 전혀 뜻밖의 질문이라는듯 방하민을 돌아보았다. 무엇보다 방하민자신의 론문을 두고 꼭 무슨 말이 있으리라고 기다린 사람과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것이 민망스럽고 미안한듯 리승기는 조용히 말했다.

《글쎄요. 문헌에서 특별히 주목을 끈건 없었구.》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들이 분명 이 합성공정에서 비등식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겁니다.》

방하민의 목소리는 확고한 믿음으로 울리였으니 제 론문의 운명따위는 숫제 여기에 끼여들수 없다고 여기는것이 분명하였다. 오로지 중요한것은 이 합성공정을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하는것이며 바로 여기에서 방하민은 과학원측의 공식태도를 표명하는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 리승기도 줄곧 그 생각을 하여왔던지 뜻밖이리만큼 단호히 말하였다.

《하여튼 이번 걸음을 다녀와서 봅시다.》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가을날의 오후볕은 따스하기까지 했다. 건물안이 을씨년스럽고 바깥이 오히려 좋은 때이다.

방하민은 리승기의 옆에서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리재업동무가 쏘련에서 학위를 얻은 그 론문은 쏘련학자들은 물론 외국학자들까지 인정한겁니다. 그 원리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도이췰란드에서도 보나마나 초산비닐에서 고정식은 안할겝니다.》

리승기는 곁에서 같이 걸음을 옮기는 방하민을 보지 않고 웬일인지 약간 고개를 쳐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명백히 찍어서 말하였다.

《그 론문의 의의를 지내 과대평가하는게 아닙니까? 그 원리는 비등식에서 하나의 측면을 반영할뿐입니다. 그리구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쏘련학자들의 인정보다 그게 우리 일에 참고나 도움이 된다면 그게 더 기쁜 일이라구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 실정에 얼마나 맞는가 하는겁니다.》

이 순간 방하민은 《그것쯤 몰라서 내가 하는 말이겠습니까?》하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방하민이 멀어져갈 때 그 뒤모습을 바라보며 리승기는 내심으로 생각하고있었다.

(한데 저 부소장은 어찌된셈인지 큰 나라만 바라보고 그 나라 학자들이 인정하는가 안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구 또 그들의 견해만을 곧잘 내세우거던… 하긴 우리 나라에 과학적인 토대가 약하긴 약하지. 하지만 우리한테도 제 힘이 자라났는데 제 힘을 믿지 않으니 자기의 론문에 대한 확신이 적은것도 바로 거기에 있어.)

리승기는 방하민이 점점 자기한테서 멀어지는것 같아 안타깝도록 서운하였다.

요즈음 가끔 서경조의 인상깊은 얼굴이 세월의 류수를 헤치고 눈앞에 떠오르면 그 서경조가 누구도 아닌 방하민한테 제가 지녔던 민족의 얼을 넘겨주려고 했었다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를 않았다. 방하민과 서경조는 전혀 비슷한데가 없다고만 여겨지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리승기는 그한테 따뜻한 정을 주지 못하는것은 저의 랭정한 성미의 탓이라고 자책하기도 하였다.

문득 지난 봄날에 있은 회의때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하신 말씀이 뇌리에 떠오른다.

《자기자신을 믿고… 자기 인민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리승기는 어느때든 방하민과 마주앉게 되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그 어떤 말로써 충고만 할수도 없는 일이다. 생활로써 탐구와 창조의 활동에서 그럴 기회를 얻고싶었다.

…이틀후에 리승기와 리재업은 몇몇 연구사들과 가족들의 바래움을 받았다.

기차가 떠나기 전에 림창직이 안해와 함께 나타났다. 금진은 포대기안에 갓난애를 싸안고 남편한테서 몇걸음 떨어져 홈에 나왔다.

리승기는 금진이한테 다가서서 포대기안을 기웃해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속에는 그들부부의 지난날을 되새기는 의미와 작별의 정이 함께 어려있는듯싶었다.

금진은 첫 애기를 안아보는 녀인들이 그러하듯 처녀처럼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선생님, 먼길에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구 재업선생두 무사히 다녀오세요.》

금진은 여전히 처녀때처럼 억실억실한 눈매였다.

금진한테서 이 역두는 잊을수 없는 곳일것이다. 그 언젠가 리승기와 김용석이 림창직을 위하여 금진이를 멈춰세운 이 역두가 그들한테서 운명의 전환점과도 같은 장소인데 오늘은 금진이 귀한 딸을 안고 행복에 겨워 림창직과 함께 서있어 리승기의 마음도 즐거워지는것이였다.

…두사람은 평양에 올라갔다가 과학기술위원회의 한 일군과 함께 셋이서 비행기편으로 도이췰란드를 향해 떠났다. 비날론중간공장이 진통을 겪고있을 때의 도이췰란드방문은 그들 매 개인한테 제나름대로의 큰 기대를 주었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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