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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회

제 2 편

제 6 장

2


1957년 초봄, 해토무렵의 개울과 도랑마다 눈석임물이 콸콸거리며 소리쳐흘렀으나 먼산에는 아직 흰눈이 점점이 남아있었다.

당중앙위원회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가는 리승기의 옆자리에는 신현석실장이 함께 탔다. 두사람 다 떠날 때부터 별반 말이 없이 각기 다른쪽 차창밖을 덤덤히 내다볼뿐이다. 그들의 심중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리승기는 무거운 생각에 잠겨있었다. 부름을 받을 때의 그런 의문과 긴장감때문만은 아니다.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갔던 김용석과 옥지문이 몇달이 지난 오늘에 와서 모스크바에서 국제전화로 과학원 원장한테 사업보고를 하고나서 거기에 남아 더 일을 보고 온다는 말을 청수에서 듣고 떠난 리승기는 그들이 아닐론문제에 대하여 어떤 결과를 알려왔겠는가 하는것이 자못 궁금해났다.

그것을 알아보도록 제의한것은 리승기자신이였다. 이제 그것에 전망이 보인다면 《합성1》호 연구는 뒤로 물러날수도 있다. 그 어느 학자를 막론하고 자기의 창조물이 부정당하거나 밀려난다는것은 참을수없이 고통스러운노릇일것이다.

한편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이 제것을 두고 남의것을 넘겨다보는짓이 아닌가고, 보다 쉬운 길로 가려는 꾀바른 시도가 아닌가고…

어쨌든 리승기는 나라의 섬유문제를 푸는데서 빠른 길이 나선다면 흔연히 《합성1》호를 미뤄놓을 용의가 있었다. 작년에 있은 당중앙위원회 8월전원회의와 12월전원회의에 뒤이어 더욱 그러한 생각이 깊어졌다. 종파분자들이 인민생활을 걸고 당을 공격하고 수령님을 괴롭히는 이때 한시바삐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무엇인가를 해놔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무를 이토록 가슴깊이 간직하기는 아마 처음일것이다. 준엄한 겨울은 지나갔다. 하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나라의 몸을 뜨뜻이 덥힐 섬유가 있어야 한다, 섬유가…

승용차가 평양으로 점점 가까이 달릴수록 리승기는 차창밖을 내다보며 지난 수개월동안 수도에서 벌어진 정치적사변들에 저절로 사색이 줄달음쳐갔다. 자기는 시골에 앉아 실험과 실험에만 묻혀 세월을 보내면서 수도에서 벌어진 그 모든 일들에 무관심하고 외면했던것 같이 느껴졌다.

시련을 겪는 준엄한 겨울과도 같은 8월, 무더위속에서도 서리발같은 투쟁이 벌어졌다. 허나 엄동설한에도 12월은 당을 받들어 8월의 폭양처럼 뜨거운 열기를 안아왔다.

력사적인 8월전원회의가 있은 뒤 반당종파분자들과의 투쟁이 고조에 이르던 시기에 한번은 청수에 내려온 방하민이 리승기한테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서필규란 그런자란 말입니다. 내가 그런자의 말에 귀기울이지 말구 연구사업을 내미시라고 하였지요? 글쎄 인민생활을 코에 걸고드는자들이 섬유문제해결을 위한 이 연구를 제일 반대하고 나섰으니 도대체 그자들은 인간으로서도 용납될수 없는것이지요.》

실상 서필규를 규탄하는 방하민의 흥분은 자기의 론문을 빨리 추진시키려는 하나의 극적인 음악반주이거나 효과음악과도 같은것이였다.

리승기는 방하민의 학위론문을 본인의 요구대로 일산20키로중간공장에까지는 확대를 안한다고 해도 실험실단계에서는 다시 검증해보지 않을수가 없다고 여겼다. 론문제출이후에 진행된 반복실험은 몇가지 허점과 의문점들을 가져왔고 그것들은 별치 않은 종처가 오래도록 아물지 않을 때처럼 된다, 안된다 하면서 무던히도 오래 시간을 끌어서 방하민을 제쳐놓고라도 리승기자신이 거기에 자연히 끌려들어가 시간을 빼앗겼다.…

승용차는 평양시내에 들어서서 과학원청사앞에 멎어섰다. 신현석이 접수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과학원 원장이 지금 자리에 없고 당중앙위원회에 갔다는 말에 그들은 차를 려관으로 몰게 하였다.

당중앙위원회의 부름, 과학원 원장의 움직임, 모스크바에서의 전화 그리고 분명 당중앙위원회에서 주관하여 열리는듯 하는 회의… 려관의 아늑한 방에 자리를 잡고나서도 리승기는 뒤숭숭한 상념에 싸여 자신에 대한 불만과 위안 그리고 무언지 모를 일종의 수치감까지 자신을 괴롭히는것을 느꼈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였다. 신현석이 리승기에게 말했다.

《제 아침시간에 공업농업전람관에 갔다오겠습니다.》

《거긴 왜?》

신현석이 한유하게 전람관이나 돌아다니려 하는것은 아닐것이다.

《전람관 관장선생의 부탁으로 진렬용섬유를…〈합성1〉호 솜뭉치를 새로 좀 가져왔습니다. 거기 진렬된것이 너무 덞었다고 전화도 오구 사람도 왔다가지 않았습니까?》

《합성1》호 섬유를 감히 《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것은 벌써 1년전이다.

3차당대회를 앞두고 공업 및 농업전람관에 전시할 《합성1》호시제품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때도 서필규는 전화로 그것은 시기상조다, 공업화는 고사하고 중간공장실현도 묘연한데 그것은 과학에서 하나의 허풍이라고 했었다.

허나 당중앙위원회 해당 부서에서까지 전화가 와서 20키로에서 뽑은 섬유로 연구사의 안해들이 떨쳐나서 실을 뽑아 녀인용쟈케트를 뜬다, 양말을 뜬다 하면서 법석을 놓았었다. 그네들은 밤이면 옛날에 길쌈하는 녀인들처럼 모여앉아 기쁨과 즐거움에 휩싸여 말장단을 멈추지 않았다.

금진이 어린이용양말이라고 하면서 어찌나 작게 뜨개코를 잡았던지 신현석의 안해가 곁에 앉은 분이한테 눈껍적이를 해보이며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왜 이리 작게 뜰가. 오라, 맘속으로 이제 태여날 첫아기의 발에 맞추는 모양이지.》

그바람에 금진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였고 녀인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리하여 섬유뭉치와 함께 쟈케트, 양말들이 평양의 전람관에 전시되게 되였다. 그것들을 올려보내면서 리승기는 연구사들에게 말했다.

《상부에서 그걸 요구해서도 그렇지만 난 우리자신의 책임과 사명감을 더 감각하기 위해서두 이걸 내놓아야 한다구 봅니다.… 우리가 인민들에게 보여주고 인민들의 기대를 느끼면 느낄수록 힘이 생기고 과학자로서의 의무감이 더 높아질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람관개관을 앞두고 리승기는 신현석이 림창직이와 함께 《합성1》호 솜과 그것으로 만든 제품들을 갖고 평양에 왔었다.

그들은 직접 진렬대에까지 가서 자기네 연구집단이 내놓는 창조물들이 진렬되는것을 가슴울렁이는 심정으로 지켜보았으며 그 진렬위치와 형식을 잡을 때 전람관일군들을 도와도 주었다.

그때 그들은 떠나기 아쉬운 곳을 갔다오듯 세번이나 거기에 갔었다.

《합성1》호 섬유의 견본이 새하얀 솜뭉치로 소복이 담겨져있음을 보는것은 얼마나 가슴흐뭇한 일이였으랴. 옆에는 그 섬유로 실을 뽑아 만든 양말과 장갑, 두팔소매를 앞에 포개여놓은 녀인용쟈케트… 다른쪽에는 한갖 막돌에 지나지 않는 한덩어리의 석회석돌덩이가 파르스름한 천우에 그 무슨 귀금속광석처럼 놓여있었다. 설명없이도 그 돌덩이에서 섬유가 나왔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느라고 그렇게 한것이였다.

개관식날에 전람관을 돌아보시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진렬대앞에 제일 오래 머물러계시였다. 그이께서는 만족한 미소를 띠우시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듯 수원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였다.

《보시오! 우리의 과학자들이 얼마나 큰일을 하는가를.》

그것이 벌써 1년전 일이다. 한데 거기에 진렬된 섬유가 너무 만져봐서 덞어지게 되였으니… 그렇게 되도록… 그러니 너무 때이르게 당앞에, 수령님앞에, 인민앞에 내놓은것인가. 우리 하는 일이 너무 늦어져 이렇게 되다니…

종파놈들이 인민생활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당정책을 시비질하는 동안에 나는 뭘하고있었는가. 그자들의 도전을 막아 나는 섬유문제로 당을 옹호해야 할 섬유학자가 아닌가. 내가 만약 우리 일을 질질 끌지만 않았더라도 종파놈들이 수령님을 감히 괴롭히지 못했을수 있었을것만 같았다.

전쟁의 가렬한 불길속에서도 수령님께서는 《합성1》호를 연구하도록 하시였다.

국가계획위원회 책임일군이던 서필규가 청수에 왔다가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수령님께서는 내각전원회의에서 그 견해를 일축하시고 직접 또는 일군들을 통하여 여러모로 변함없이 기대와 믿음을 보내주시였다.

리승기는 신현석이 전람관에 갔다오겠다고 했을 때 바로 이렇게 당앞에, 수령님앞에, 인민앞에 면목이 없다는것을 깊이 자책하게 된것이였다.

리승기는 신현석에게 말했다.

《승용차를 타구 빨리 갔다오우. 일요일이라두 갑자기 찾을수 있으니.》

한시간후에 신현석이 돌아왔다. 좀처럼 그의 내심은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데 어째선지 다소 유쾌한 표정같기도 했다. 다시보면 면구스러운 미소같기도 했다. 리승기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신현석이 무슨 얘기인지 하려고 하였다. 그는 조심스레 입을 떼면서 리승기의 기색을 살피였다. 자기가 거기서 느낀 감정이 리승기도 가질수 있는것이여서 혹시 괜한 소리로 되지 않겠나 우려하는상싶었다.

《어서 말하오.》

어째선지 리승기가 재촉을 하였다.

신현석은 관장한테 섬유표본을 주고나서 전람관의 바로 그 진렬대에 찾아갔다는것이다. 진렬대앞에는 1년전과 달라서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았다. 유리그릇안에 넣은 섬유뭉치는 보기에도 그리 하얗지는 못했다.

신현석은 안내원처녀한테 우정 이렇게 물어보았다.

《왜 저 섬유뭉치를 유리그릇안에 넣어놓구 만져보지두 못하게 합니까?》

《미안하지만 손님은 그걸 만져보시자구 그러는것 같으신데 그건 안됩니다. 원래 전람관의 진렬품을 만져보는것은 비문화적이 아닙니까.》

《하긴 그렇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 사람이 많이 모여서던 초기에 너무 만져봐서 그게 어떻게 되였겠습니까.… 그래서 할수 없어 다른것을 교체하려고 청수에 가서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래두 꺼매져서 유리그릇안에 넣어놓구 봉인을 했습니다. 한번은 유리단지를 통채로 깨여먹을번 했구… 하긴 이젠 1년이 지나니 지방에서 온 손님들이나 한번 만져봤으면 합니다.》

안내원처녀의 마지막말이 힘없이 울리였다. 신현석이 어떤 죄의식에 몰리듯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움에 못이겨 서있기만 하였다. 사람들이 이젠 믿지 않는게 아닌가. 우리가 너무 허풍에 떴던게 아닌가. 거기서 느낀 심정을 신현석이 리승기한테 그대로 털어놓지 못했으나 리승기자신은 그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신현석의 말이 제가 진렬대를 막 물러나려는데 곁에서 웬 할머니가 《이봅세, 아지미.》하고 북관땅말씨로 안내원처녀를 부르며 다가서더라는것이다.

현석실장도 뒤에 서서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이봅세, 내 함경도에서 평양 딸집에 왔다가 외손자녀석을 앞세우구 여기 왔당이. 소문이 나서 왔는데 이거야 그림의 떡이지 한번 만져보기나 할새. 저렇게 꼭 닫아 열지두 못하게 했당이. 내 이 두손을 밖에서 수도물에 싹 씻구 들어왔으니 한번 좀…》

할머니는 간절한 눈으로 안내원처녀를 쳐다보며 팔을 벌려 두손을 쳐들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별로 응대가 없자 할머니는 노여운듯, 서글픈듯 처녀에게 말한다.

《처녀는 모르지비. 내 저네만 한 나이때 삼삼이를 너무 해서 이 무릎에 썩살이 생겨 지금두 풀리지 않았슴메. 살아생전에 돌에서 뽑은 실을 가지구 짠 천을 한번 보구 옷을 입어보았으면 정말 좋겠당이… 내 기다리구있겠는데 이제 사람들이 즘즘해질 때 딱 한번만 만져보자꾸나.》

할머니는 처녀한테 바싹 붙어서며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남이 듣지 않게 하느라고 애썼으나 늙어서 가는 귀가 먹은 경우에 그러하듯 그 말소리는 작지 않아서 몇걸음 뒤에서 다 들리였다.

《야, 정말 할머닌 딱하게 구시네… 관장동지랑 승인해주시면 몰라두…》

신현석의 품속에는 필요할지 몰라 미심결에 가지고온 섬유뭉치가 있었다. 물론 관장한테 주고 남은 자그마한것이였다.

신현석은 보다못해 할머니의 팔소매를 잡고 조용히 말했다.

《할머니, 저쪽으로 좀 갑시다.》

《아니?… 관장어른인가?》

《아닙니다. 그저 좀…》

신현석은 해빛이 밝은 창문가로 할머니를 데리고갔다. 그는 품속에서 엷은 명주천에 싼것을 꺼내 헤쳐보이였다. 그안에 납죽하게 된 섬유뭉치가 있었던것이다.

《할머니, 이게 저기에 있는것과 꼭 같은겁니다.》

《무시기라구? 페러운 손님이시우다. 어떻게 저런게 손님한테 있겠슴메?》

눈이 떼꾼해서 놀라던 할머니는 신현석의 얼굴과 섬유뭉치를 번갈아보더니 그래도 혹시 하는 기색으로 손을 천천히 거기에 가져가는것이였다.

《에구, 이게사 솜뭉치지비. 손님은 의원인 모양이지. 약솜을 가지구 다니는걸 보니… 가만, 한번 다시… 어쩐지 목화솜하구는 다르긴 다른것 같기두 하구…》

안내원처녀는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얼굴에서 이내 미소를 지워버렸다. 그 손님이 할머니를 제곁에서 떨구어준것을 고맙게 여기면서 손님이 솜씨있는 롱담으로 할머니의 지꿎은 소원을 무마시켜준다고 생각했으나 이 40대에 들어서나마나한 사나이가 순진한 할머니의 소원을 지내 하찮게 대하는것만 같았던지 오히려 그때는 신현석을 나무람하는 깔끔한 눈길로 바라보더라는것이다.

현석실장은 할머니한테 말했다고 한다.

《할머니, 할머니생전에 꼭 마련을 볼겝니다.》

《에구,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슴메.》

신현석의 얘기는 여기서 끝났으나 리승기의 눈앞에는 당장 그 할머니의 얼굴이 가까이 보이는것만 같았다.

문득 그한테는 전쟁때 오정해와 함께 계응상한테로 가던 일이 생각나며 날저무는 길에서 자기네를 부르듯 울리던 산촌의 다듬이소리, 이튿날 아침엔 자기네를 먼길로 바래우듯 울리던 그 다듬이소리가 이제금 귀전에 다시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기대와 념원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더욱 강렬해진다는 그 절박한 느낌이 가슴을 옥죄여들었다. 그는 전람관에 찾아왔던 할머니며 전쟁때에 만났던 그 할머니, 이 나라 모든 어머니, 할머니들에게 마음속으로 깊이 머리를 숙여 절하며 용서를 빌고싶었다. (여러분, 나라에서 당신들한테 전람관에 내놓으면서 약속을 한것은 다 이 못난 학자를 믿은때문이올시다. 그러니 난 여러분들께 면목이 없습니다.) 하고 그는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였다.

바로 그 이튿날에 리승기와 신현석은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아주 중요한 회의라는것은 추측했으나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 친히 나오시여 지도하시는 그런 회의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그들이라 맨 처음에는 몹시도 당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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