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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 회

제 2 편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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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승기는 오후에 방에 앉았으나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각 실험실에서 가져온 실험일지들을 여느때보다 더 꼼꼼히 훑어보며 자그마한 허점이나 오점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주위를 집중하려고 애썼다.

집에 들어갔을 때 안해가 묻는듯이 쳐다보았으나 리승기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안해도 모를수가 없었다. 200키로중간공장은 어림도 없고 연구사업자체까지 중지될지 모른다는, 상부에서 검열그루빠가 내려왔다는 소문이 하루새에 청수바닥에 짜하니 퍼졌다. 당과 국가에서 주는 기대와 보살핌에 비하면 전도가 너무나도 묘연하니 그럴수밖에 없다고 려염집 아낙네들까지 입을 모아 시까슬러대는 판이니 그런 말이 당사자의 귀에 들어오지 않을수가 없다.

리승기는 어둑컴컴한 천정을 쳐다보며 잠들지 못했다. 그는 200키로중간공장을 당장 계획에 물리지 못하는것이 응당하다고 자신을 납득시키려고도 했다. 왜냐하면 이 연구사업의 관문이라 할수 있는 20키로의 소규모에서조차 아직 허다한 난관이 풀리지 않고있기때문이였다. 그는 이 사실자체가 자기자신보다 연구집단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고있었다. 연구사들과 실험공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말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순진한 기대에 불과하였다.

다음날 아침 리승기는 정한 시간에 어김없이 제 방에 들어갔으며 종일 중간공장현장이나 실험실들에 나가지 않고 줄곧 책상을 마주하고 실험보고서와 공정일지들을 검토하였다.

서필규가 청수공장지배인실에 앉아 여러 연구사들과 실험공들, 중간공장운전공들, 청수공장 일군들까지 부지런히 불러다가 담화를 한다는것을 알았기때문에 그가 더욱 제 방에 붙박혀있는듯싶다.

어느 연구사가 찾아왔을 때 그는 어제 불이 붙었던 뽐프기름온도의 변화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중합공정을 맡은 옥지문이 찾아왔을 때는 그한테 립상중합으로부터 용액중합으로 넘어갈 자기의 확고한 결심을 말해주었다. 그들은 실상 실무적인 문제보다 리승기의 기분상태를 더 알고싶었던지라 문간으로 나가며 뒤돌아보고는 끄떡도 없이 제 책상에 앉아 안경을 벗은 얼굴로 실험보고서를 들여다보는 리승기를 놀라운 눈으로, 어찌보면 고마운 눈길로 바라보는것이였다. 허나 방하민이 찾아왔을 때 리승기는 어지간히 놀라고 당황하였다. 너무나 뜻밖이라고 여겼기때문이다.

문득 서필규가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할 때 《내가요?》하면서 황급히 눈길을 떨구던 방하민이 돌이켜져보였다. 리승기는 20키로에 머물자는 방하민의 그 견해를 나무람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가 만일 제 신념으로 말했다면 그는 학자로서 옳은것이다. 다만 불쾌했던것은 자기앞에서 직접 말하지 않고 어딘가 뒤에서 서필규와 이미전에 미리 얘기가 되였다는것을 세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알게 된 그것이였다.

방하민이 의자에 앉으면서 말을 꺼냈다.

《리선생, 려경구소장한테서… 과학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중간공장때문이지요. 저두 할 말은 했습니다.… 투자를 아껴서 될일은 아니거던요. 지금 3개년계획수행때문에 나라사정이 허락치 않는 점은 리해하십시오. 내가 이제 올라가 려경구소장과 함께 여기 실태를 원장선생한테 좋게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상심마십시오.》

성실한 탐구자한테는 값싼 동정이 모욕으로 된다. 흔히 학계에서 론적들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위안하는것으로부터 자기의 지론을 전개하기도 한다.

방하민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리승기는 오원배와 만났을 때 (혹시나?) 하고 방하민이 서경조의 양아들이기를 바란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였던가를 돌이켜보았다. 그것은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될 일처럼 생각되는것이였다.

리승기는 방하민과 만나는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그가 무엇때문에 왔을가 하는 의문이 들었을 때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듯 방하민이 말했다.

《아무래도 리선생의 지도와 방조를 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방하민의 입가에는 어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뭔데요?》

리승기는 상대방의 얼굴을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방하민은 어째선지 무릎우에 놓은 두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른게 아니구… 제 박사학위론문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요?》

학술적인 담화에는 언제든 편견없이 흥미가 동하는 리승기이건만 호기심보다 의혹이 앞섰다.

방하민이 눈을 들며 말했다.

《폴리비닐알콜연구분야에서 쩨마를 잡았는데 지금 고충이 있습니다.》

리승기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련을 거듭하는 폴리비닐알콜에서 박사론문주제를 택하다니… 고맙기도 했지만 리해가 안되였다.

그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물어보았다.

《그래 어느 공정에서… 무슨 제목으로?》

《저… 검화공정입니다. 산에 의한 폴리초산비닐의 검화반응에 대해서입니다.》

《가성소다가 아니라 산에 의해서?…》

리승기는 호기심과 의문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실험실에서는 가성소다에 의한 방법을 하고있었던것이다. 리승기의 그런 물음이 흥미있다는듯 방하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아주 자신만만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리승기는 방하민을 침착한 눈길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문헌이나 실험자료를 보았습니까?》

그는 당장에 중간공장의 계획이나 연구사업의 전망에서 난관이 있다는것을 모르는 사람과도 같았다. 그만큼 자기를 잊고 학술적인 열렬한 심정에 사로잡힌것이였다. 무엇을 긍정하는 경우에 리승기의 질문은 더욱 깐깐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러자 방하민이 그 어떤 자신심을 담아 주저없이 말하는것이였다.

《쏘련에 갔을 때 아르메니아의 예레반화학공장에서 구체적인 자료들을 보았습니다. 전 그때 검화공정들을 특별히 주목해서 봤습니다.》

《쏘련에서… 쏘련에서라…》하고 리승기는 되뇌이며 잠간 생각에 잠기더니 중요한것은 어데서 착상되였는지 그게 아니라는듯 방하민에게 말했다.

《어쨌든 여기 청수에서 기초실험자료들을 얻어야 할게 아닙니까?》

방하민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야 그렇습니다.… 연구조수와 실험공을 붙여준다면… 제가 자주 여기 와서…》

《그렇다면 신현석실장동무와 한번 토의해봐야겠습니다.》

그 말에 방하민은 작은 두눈을 더욱 쪼프리며 머리를 끄덕여 기대와 감사의 뜻을 표하고있었다. 비교적 손쉽게 담화가 이루어지고 앞으로 얻어질 명예가 눈앞에 보이는것 같아 어지간히 마음이 들떠난 방하민은 여기서 본의아니게도 상대방한테 그 어떤 도움을 주고 후에 자기를 위한 응당한 보상을 받아내려는 얄궂은 심사를 어쩌지 못하였다. 썩 시일이 지난 뒤에 그는 그것이 절대로 본심은 아니였다고 스스로 변명했지만 이 순간에는 일이 뜻밖에 이상하게 번져갔다. 그는 말했다.

《제 이번에 올라가서 꼭 노력해보겠습니다. 아마두 우리 과학원이 성과 국가계획위원회를 상대로 한바탕 해봐야 할것 같습니다.》

목소리는 높았으나 어쩐지 확신은 덜해보였다. 방하민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럼…》 하고 바삐 방에서 나갔으나 리승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방하민이 제가 구상하는 론문을 위하여 20키로공정만은 살리자고 하는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그것이 사실일수 있었다. 그러니 방하민은 폴리비닐알콜공업의 조속한 전망을 믿지 않는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리승기는 방하민이 찾아오기 전보다 훨씬 더 기분이 무거워지는것이였다.

며칠이 지났다. 그새 한 연구사는 가정사정을 내대고 멀리 흥남비료공장시험소로 끝내 적을 떼고 가버리였다. 검열그루빠가 왔다간 후 련이어 몇사람이 떠나갔다.

그들한테는 그들대로의 합당한 구실이 있었다.

평양의 과학원 화학연구소로 가게 된 사람들도 우에서 어떤 무서운 결론이 내려오기 전에 여기를 뜨려고 서두르는것만 같았다. 어쨌든 사람들이 찾아와 작별인사를 할 때가 리승기한테는 가장 참기 어려운 순간이였다.

이러한 나날에 청수로 한사람이 찾아오고있었다. 그는 오정해였다.

저녁무렵이다. 곱슬머리에 모자도 얹지 않은 오정해가 양복깃우로 번져진 흰 노타이깃을 저녁어스름속에 유난히 빛내이며 주인을 찾아 밖에 서있었을 때 거기를 내다보던 분이가 너무나도 놀라와 《아이구머니, 이게 누구요?》하고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얘들아, 정해아저씨가 오셨다.》

그러자 두 계집애가 먼저 뽀르르 달려나와 《아저씨, 아저씨.》하며 각기 오정해의 량손에 매달리였다. 정해는 오랜만에 만나는 아이들앞에서 어째선지 혀가 굳어진듯 말을 못하고있었다.

그때 리승기는 제 방에서 책을 펴놓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여보, 누가 왔나 좀 보세요.》하는 안해의 말에 승기는 안경부터 바삐 쥐여 눈에 끼며 일어나 뒤돌아섰다.

《아, 이게 누군가?》

오정해가 리승기의 손을 부여잡으며 《선생님, 그새… 안녕하십니까?》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리승기는 한손을 오정해의 두손아귀에 맡긴채 서서 다른 손으로는 회매한 몸집에 키가 자기와 비슷한 이 곱슬머리청년의 어깨를 어루만지였다.

《앉게, 앉으라구.》

오정해는 의자에 앉을념을 못하고 그냥 서있다. 솔직하고도 급한 성미는 여전하였다.

《선생님, 여기로 오는 도중 돌이켜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첨에는 저라는 일개 초학도가 어데 가나 마찬가지라구 생각했습니다. 과학원화학연구소력량도 꾸린다지 또 한쪽에서 말하기를 (그는 방하민의 이름을 꺼들이진 않았다.) 앞으로는 여기 성산하 중앙연구소도 과학원에 통합될거라 하구… 전 이렇게 실무적으로만 끌리다나니 의리두 없이 나 개인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참에 여기서 하는 연구사업을 중지시킨다 어쩐다 하는 바람에 와짝 등이 달아 견딜수 없었습니다.

전시에 선생님밑에서 함께 시작한 여러 선배들의 얼굴도 떠오르고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가 순탄하면 나같은건 필요없어도 될것 같았는데 여기서 곤난을 겪는다니 내 마음은 더는 자신을 속일수 없게 되였습니다.》

《됐네, 됐어. 차츰 천천히 얘길 나누세. 여전하군그래.》

이 순간 리승기는 이제껏 자기가 그의 의리를 믿지 못했던것 같이 느껴지면서 그한테 오히려 사죄하고싶은 심정이였다. 겨우 의자에 눌러앉힌 오정해가 흥분에 못이겨 다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검열결과가 어떻게 되였습니까? 제가 당중앙위원회까지라두 찾아가겠습니다!》

여기서 리승기는 전쟁때 배낭을 멘채 회의장에 나타나 열변을 토하며 송복섭이를 옹호하던 그때의 오정해를 다시 보는것만 같았다. 그는 오정해를 향해 한손을 내들며 짐짓 이렇게 말했다.

《그만하게. 좀 천천히. 난 오히려 정해의 졸업론문내용이나 들었으면 좋겠는데…》

오정해를 만난 반가움에 때없이 마음에 여유가 찾아드는것이였다.

오정해의 도착은 울적해지는 가슴에 흘러드는 한가닥의 빛처럼 감촉되였다. 비록 그것이 심각한 정황을 달리 해줄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생신하고 열렬하고 힘있는 그 무엇으로 느껴진다. 재능있는 제자를 얻는것은 좋은 일이지만 떠나갔던 제자가 돌아온것은 그보다 더욱 기쁜 일일수 있었다. 실험조작에서 특별한 재간을 가졌던 오정해가 지금은 실력에서 말할수없이 성장했을것이기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여기 청수로 돌아온 그것때문인것이다. 안해가 방안을 들여다보더니 《먼길을 온 손님 붙잡구 무슨 얘기 그리 길어요? 우선 저녁부터 자시구 회포를 푸실 일이지.》 하고는 정해를 향하여 말했다.

《아저씬 언제 봐두 먹을 복이 있어, 발이 길지두 짧지두 않구. 오늘따라 아저씨 좋아하던 차조밥을 했다니까… 어서들 내려오세요.》

안해의 목소리는 이 저녁따라 퍼그나 밝게 울린다. 아래방에 내려온 리승기와 오정해는 겸상을 하고 마주앉았다. 다른 식구들은 두리반에 앉았다. 오정해가 와서 오랜만에 즐거워지고 단란해진 저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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