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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 회

제 2 편

제 4 장

1


전쟁이 끝난지 1년후 여름날의 찌는듯 한 무더위는 오후에도 숙어들지 않았다. 바람 한점 없이 땡볕만 내리쬐는데 어디선가 매미가 극성스레 울어댄다.

요행 길가에서 나무그늘을 만난 소년은 거기에 퍼더버리고앉아 웃동을 벗었다. 속에 입은 적삼이 땀에 푹 젖었다. 그는 중학생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하면서도 한손으로 풀섶에 놓은 닭알꾸레미를 조심스레 만져보며 혹 깨여지지 않았나 살펴보았다. 벼짚으로 싸고 한알씩 그 마디마디를 벼짚오래기로 꽁꽁 동여맨 꾸레미는 한묶음이 열알씩 되였다. 한묶음에 200원씩 주고 의주장마당에서 사가지고 오는 길이다. 의주읍에서 10리 떨어진 신경과전문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위해 닭알사러 다니는 리승기의 맏아들애는 아무리 타고장이라도 제또래 아이들 보기 창피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나 방학기간에 와서 몇번 다니는 길이라 참아야만 했다.

아버지는 벌써 몇달째 입원해있다. 의사들의 말이 지속적인 사색과 과로한 정신부담에서 오는 신경병이라고 한다. 극도의 의기저상상태, 심한 건망증… 이런 말들이 오갔다. 남조선에서 살 때 일본사람제자인 가와가미한테서 편지를 받고 불면증시달림을 받은것이 빌미가 되여 생긴 병이라고 한다.

소년의 어린 가슴이 공포에 휩싸일 때도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는 영영 페인이 되고마는게 아닐가? 세상에는 과학을 하다가 머리가 돈 사람들이 많다지, 나이론을 발명한 카로사스도 미쳐버렸다지. 허나 그는 도리머리를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될순 없어.…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과학이란 이런건가, 아무튼 힘든 일이다, 난 뭐가 될가… 한데 아버진 내가 바이올린에 취미를 붙여도 그만, 소설책을 밤을 패며 들여다봐도 그만, 그러다간 류산제조반응식을 내 혼자 푸는걸 보고 꿈쩍 놀라셨지, 그러면서도 날 과학자가 되라는 말은 없었어, 아버지의 말은 제 취미와 천성은 어려서는 모를수도 있고 곁에서 암만 이래라저래라해도 할 놈이 해야 한다는 식이지… 다른 집 아버지들은 제 자식한테 리상과 희망을 돋구어준다, 인생의 옳바른 길을 훈시해준다, 하다못해 매로써 버릇을 가르친다 하며 야단인데 우리 아버진 그저 연구, 연구밖엔 몰라… 하긴 아버지주위에 있는 연구사아저씨들은 다 마찬가지이긴 해.…

아버지처럼 안경을 낀 소년은 안경을 벗어들고 얼굴의 땀을 적삼자락으로 훔치고는 벼짚으로 싼 그 닭알꾸레미를 매만져본다.

무더운 여름이라 닭알이 곯았는지 안 곯았는지 귀밑에 대고 흔들어보며 사야 한다. 한꾸레미씩 사러 벌써 몇번이나 무더위속을 걸어다니고있다. 아버지는 고기나 생선따위는 입에 대지 않는데 아들애가 장마당에서 사오는 토종닭알로 어머니가 손수 끓인 닭알탕만은 마다하지 않는다.

나무그늘아래 앉았던 소년은 웃도리를 입은 다음 닭알꾸레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이때 그의 앞으로 같은 또래의 웬 아이들 셋이 슬금슬금 다가와 떡 버티고섰다.

모두들 웃몸뚱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채 적삼을 어깨에 걸메였거나 따가운 볕을 가리워 너울처럼 머리에 썼다. 가슴이며 어깨팍이 해볕에 타 까맣게 그슬고 방금 개울에서 미역을 감았는지 젖은 머리칼이 이마우에 뒤엉켜있었다.

그중 제일 큰 애가 여긴 우리 마을인데 넌 어데서 굴러온 얼뜨기냐는듯 우쭐렁대며 소리쳤다.

《너 어데루 가?》

닭알꾸레미를 가슴앞에 부여안으며 소년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 닭알때문에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러한 동작은 상대방들한테 오해를 줄수 있었으니 이 낯선 아이가 못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해도 무슨 떳떳치 못한 걸음이라도 하는듯 한 인상을 그들한테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세 아이가 저마끔 제나름의 판단과 억측을 내놓으며 떠들어대였다.

《장마당에 닭알 팔자구 가는게 아니야? 고무공을 사자구 말이다.》

《너네 개인농이지?》

《아니야. 장사군네 자식같애.》

《닭알장사라면 왜 요것밖에 안되갔어?》

《훔친게 아냐?》

《아니, 이치가 운수좋게 어데서 얻어본거지 뭐.》

맨 처음에 소리를 치던 큰 애가 제법 이렇게 결론을 내렸으나 다른 아이들은 전혀 그게 미덥지 않은듯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순진한 촌아이들은 상대가 안경을 쓴 섬약한 체질로 보여서인지 도회지의 왈패들처럼 함부로 덤벼들고 손을 대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세명의 감때사나운 사내애들이 한 아이를 점점 에워싸면서 싸움을 벌릴 위기일발의 순간처럼 보일수도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저쯤에서 더위에 지쳐서 오던 어떤 로인이 헐썩이며 급히 다가왔다.

《왜들 벋지르고 서서 야단이냐? 썩 사라지지 못할가?》

그러자 세 아이는 별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화닥닥 놀라 냅다 뛰여달아났다.

그 로인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이게 박사선생네 맏이가 아니냐?》

그러면서 로인은 머리를 끄덕인다.

《음, 또 장마당에 갔다오는 길이구나. 가자, 나두 아버지한텔 가는 길이다.》

소년은 오원배로인이 든 보퉁이를 제가 들려고 했다.

《넌 그 닭알꾸레미나 조심히 들고가자. 날씨가 무덥지 않으면 닭알을 갖다 쌓아두는건데 며칠만 지나면 변질되는것 같애 미타하단 말이다.》

세번째로 병문안 오는 로인의 보퉁이속에는 로친네가 꿍져주는것이 있는가 보았다.

오원배는 베적삼 앞깃을 헤치고 걸으면서 소년에게 말했다.

《그래, 요새 아버지병세는 어떻다더냐? 거 무슨 병인지 도제 가늠할수가 있어야지. 아는 사람이 와두 별로 반가와하는 기색두 없으니, 원참.》

그러면서도 오원배의 심중에서는 리승기한테 느끼는 미안한 생각이 더 커갔다.

아들이 종합대학졸업을 앞두고 집에 왔다갔는데 그가 하는 말이 과학원으로 간 방하민이 자기를 그리로 끌어가려고 해서 자기도 생각중이라는것이였다. 처음에는 방하민이 의리요, 인연이요 하면서 아들을 과학원에 데려가려는것을 좋게만 여겼었다. 한데 아들 오정해를 리승기박사가 전쟁중에 우정 공부시키러 보냈다는것을 (그것도 2년씩이나 집에서 밥을 먹이면서 보살펴주지 않았던가.) 뒤늦게 채심한 오원배는 방하민도 방하민이거니와 아들자식이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아들녀석은 리승기박사네 연구집단이 하고있는 돌에서 실을 뽑는 연구가 큰 난관에 다닥치고있으니 거기에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꾀하는게 아닌가. 로인은 밤잠을 잊고 시름에 싸였다가 로친네도 모르게 옛 글투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눈앞에 앉았다면 당장 따귀라도 칠것같은 노여움을 가졌으나 편지란 괴이한것인즉 모든 사람들이 다 이 편지글을 보는것만 같아 마음을 늦추며 아들한테 점잖게 타이르는 말을 고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돌아오라는 간절한 뜻만은 재삼재사 박아서 썼다. 아들이 아직 졸업하기 전이라 편지는 제때에 가닿았겠지만 녀석한테서는 소식이 없었다.

요즘 로인한테는 간혹 이런 의문이 들었다. 병중에 있는 리승기박사가 혹시 이 사실을 알고있는게 아닌가.… 그렇다면 야단이다. 아무리 만사에 무관심한 괴상한 병이라 해도 이 일은 결코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버릴것이 아니여서 병치료에 해로울것은 뻔하다. 어쨌든 리승기박사의 귀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병문안을 갔다와서는 인츰 평양에 올라가 아들녀석은 물론 과학원의 방하민도 만날 작정이였다.

간혹 로인한테는 한가닥의 위안이 생겼다. 그것은 아들의 앞날이 그래도 웬만치는 촉망되겠기에 방하민도 그를 탐내서 과학원에 데려가려는것이 아닌가 하는 그것이였다. 아주 쓸모없는 재목이라면 누가 데려간다만다 할것인가.

허나 그러한 위안보다도 아들과 방하민에 대한 섭섭한 생각만이 더 커가는 오원배였다. 그는 이런 한없이 미안한 심정을 안고 병문안길에 오른것이였다. 오원배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밤에 불면증에 시달리던 리승기가 잠간 풋잠이 든 시간이여서 오원배는 딴 방에서 기다리였다. 얼마후에 오원배는 간호원의 안내로 방에 들어갔다. 본격적인 신경병환자들과 접촉시킬수 없어 병원측에서 특별히 따로 꾸린 방이였다. 방에는 리승기 혼자 누워있었다. 리승기가 두팔굽을 짚고 상반신을 일으키려 했으나 오원배는 급히 만류하며 도로 편안히 눕도록 하였다.

그 순간 오원배는 리승기의 눈빛과 표정에서 전에 없는 생기를 발견하는듯싶어 무중 반갑고 다행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침대가까이로 의자를 끄당겨 바투 다가앉으며 모포우에 놓인 리승기의 손을 감싸쥐는것이였다.

《박사선생, 신색이 훨씬 좋아졌습니다레.》

확실히 눈빛이 달라보였다. 섬찍할 정도로 주위에 무관심하던 그런 눈은 이미 아니였다. 반가움이 어리고 뒤이어 어떤 기대와 호기심의 불꽃이 타오르는것이였다.

(됐구나, 됐어.)

오원배는 내심 무릎을 쳤다. 그의 오랜 생활경험은 때로 의사들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군 한다. 그자신도 그렇게 자부하고있었다. 허나 아직은 환자를 흥분시키지도, 많은 말을 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그는 좀 앉아서 《이제 곧 다 낫지우다, 낫구말구요.》하는 그러루한 말을 하다가 이내 물러나려고 작정했다.

한데 리승기가 그의 한손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좀더 있다가 가시우, 적적해서 그러니… 재미있는 얘기나 좀 하시다가…》

리승기는 고독감을 느끼는것이다. 오원배는 그가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오원배는 드디여 말주머니를 풀며 입을 열었다. 상대방의 눈치를 보아가며 조심조심 그리 높지 않은 순탄한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금년에 마을에서 처음으로 협동조합을 무었는데 지금까지 작황을 보더라도 개인농들보다 훨씬 낫다는둥 아들 정해녀석이 대학을 졸업하면 일찍 장가들이려 하는데 리선생의 의견은 어떤가는둥 (여기서 대담하게 아들이름을 꺼내면서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으나 별다른 기색이 없자 오원배는 좀 안심을 하였다.) 어쨌든 리승기가 흥미를 가질만 한 말거리를 찾아내였다.

한데 오정해를 장가보내련다는 말에 리승기는 한손을 쳐들어 그 뜻을 제지시키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정해가 지금 몇살이던가요?》

《스물세살이지요. 그전때같으면 벌써…》

《아닙니다. 학문에 나선 사람치구 좀 일찍 합니다.… 조혼이라구 할수 있지요. 조혼은 난 반대입니다. 나두 조혼때문에 좀 곡절이 있었지요.… 열여섯살이였으니 철이나 있을 때입니까.…》

리승기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그만 오원배는 눈물이 쿡 솟구치도록 가슴이 뜨거워났다. 그렇듯 무표정하던 리승기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면서 오원배는 그까짓 아들녀석이 3대외독자이겠으면 어떻고 장가따윈 당장에는 그만두자고 로친네를 강박할 용기까지 생겼다.

《리선생의 뜻이 그렇다면 그만두겠수다. 아무튼 정해녀석이야 선생네 댁에서 두해씩이나 밥을 먹구 자랐으니 리선생한테 요새 말대루 하면 발언권두 있구 결정권두 있지유, 허허허.》

오원배는 리승기를 웃기려고 회의에서 쓰는 말까지 생각해내였다.

《그리구 말입니다, 요새 연구사업두 잘돼간다구 합니다.》

여기서 로인은 생각지도 않게 생뚱같이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리승기가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잘된다구 하던데요.》

로인은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실수를 했으니 며칠전에 현석실장과 림창직이 병문안왔을 때의 일을 몰랐던것이다.

그때 두사람은 리승기를 위안하고 기쁘게 해주려고 일산 20키로중간공장에서 방사하여 후처리까지 했다는 실을 한줌이나 되게 가지고왔다.

리승기는 성냥을 달라고 해서 거기다 약간 불을 붙여보고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두사람은 옳다고 우겼다. 사실 그것은 실험실적방법으로 얻은것치고도 변변치 못한것이였다. 리승기의 관심은 일산 20키로중간공장에 가있었고 그보다 작은 규모에서의 실험결과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원배는 그런 내용은 모르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당황하면서도 이내 그는 《어쨌든지간에 그런 걱정말구 몸을 다 추세워가지구 나가야 합넨다.》 하고는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그는 그제야 생각이 난듯 상대방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띠염띠염 이렇게 물었다.

《참, 방하민이란분이… 여기 병문안 오지 않았습디까?》

그 말에 리승기는 대답을 못하고 도리여 의아쩍게 오원배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한데 정해동무 아버님은 방하민선생을 어떻게 아신다구 하셨지요?》

이 로인이 방하민을 어떻게 안다고 했더라?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지, 그건 아직 말하지 않았어, 친척인가? 그렇다면 여태 내가 몰랐을수 없는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오원배는 말꼬리를 이으려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방선생이 날 처음 찾아온건 전쟁직전이였지요. 부친이 나를 꼭 찾아보라구 했다구 해서 말입니다, 친아버지가 아니라 이붓아버지이긴 하지만… 그 방선생의 계부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였지요. 나보다 나이는 몇살 우이지만 청수동에서 같이 광제청년단에도 들었고 왜놈때문에 내가 여기루 이사온 후로는 그가 우리 아재비벌 되는 오동진어른을 따라 독립군에도 들어갔다는것도 알았지요.… 우린 청수동에서 김형직선생을 세번이나 같이 모시기까지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방선생의 얘기를 듣구보니 방선생의 양아버지는 간도〈토벌〉에서 가족들을 다 잃구 또 저 흑하사변 때두 큰 봉변을 당하구 멀리멀리 가서 살았는데… 방선생을 친아들삼아 키우면서 장차 조국에 나가 문명을 일떠세우려구… 그 아라사땅에서 대학공부까지 시키자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던 그가 글쎄 아라사땅에서 세상을 떠나다니.》

리승기는 오원배의 말이 무심히 들리지 않았으며 방하민을 새로이 알게 되는것만 같았다. 그 양아버지란 사람이 걸어간 순탄치 않은 길이 별로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것 역시 민족수난의 발자취인것이다. 제가 일본땅에서 당하던 고통보다 방하민의 양아버지가 만주와 먼 이역땅에서 겪은 수난이 더하면 더했지 못할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리승기는 방하민까지도 동정으로 대하고싶어졌다. 자기가 이러저러한 소소한 일때문에 괜히 그를 외면하고 경원시한것만 같이 느껴졌다. 어째선지 방하민과 그의 양아버지를 나란히 놓고 생각하느라니 자연 까닭모를 자책감에 휩싸이게 되는것이였다.

오원배의 말소리가 들린다.

《아직두 빠다냄새가 나지만 그 방선생두 이제 양아버지의 뜻대로 큰 학자로서… 물론 그의 학문이 어떤지 그런거야 박사선생이 더 잘 알겠지만… 난 그 방선생을 동생처럼, 아들처럼 대하게 되구… 그래서 아직 아라사땅에 있다는 늙으신 어머니를 처와 아들애와 함께 빨리 모셔내오구 양아버지의 유골두 생전의 뜻이라니 여기 조선땅에 가져오라구 했지요.》

그리고나서 오원배는 탄식하듯 조용히 부르짖었다.

《허참, 그 사람은 결국 이국땅에서 가구말았구만.… 아 서경조, 서경조… 그 불같던 사람이…》

그 순간 리승기는 귀가 멍멍해지는것 같았고 혀가 얼어붙은듯 입을 열수 없었다. 간신히 떠듬떠듬 말했다.

《이자… 뭐라구… 하셨습니까?》

리승기는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우에 앉았다.

《뭐라는지요?》

오원배가 도리여 리승기의 급작스런 행동에 의아해서 되물었다.

《이자 방금 무슨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불렀지요, 서경조라구… 왜 그러십니까?》

오원배는 리승기가 어떤 병적발작에 들뜨는것 같아 그것만이 근심되여 괜히 제가 그런 이름을 꺼냈다싶었다.

《자자, 누우십시오. 조선땅에 이름자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 그럽니까, 원참.》

리승기는 다시 침대에 누우면서 물었다.

《로인님이 아는 그 서경조라는 사람의 고향은 어딥니까?》

《저… 강원도 어디메더라. 청수동에 왔을 때는 아주머니와 딸만 있었는데… 아들 하나는 간도에 들어갔다던지 그랬지요.》

리승기는 제가 아는 서경조한테 딸이 있다는 말은 아버지한테서도 듣지 못했었다. 더구나 고향이 강원도라니 그 목포큰아버지는 아닌것 같았다. 그러나 (혹시?) 하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뒤설레기도 하였다. 어째선지 이 순간에 리승기는 제가 알고있는 서경조가 방하민의 양아버지이기를 바라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상고머리에 코수염을 기른 강직한 인상의 서경조와 두리두리한 얼굴의 방하민의 모색이 전연 다른것은 피줄이 달라서 그렇다치고 체취에서라도 공통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것이였다.

어쨌든 이것은 하나의 충격으로 되여 리승기는 오원배가 돌아간 다음에도 뒤짐을 지고 방안을 돌고돌았다. 이상한것은 그 순간부터 번거로운 상념대신에 머리속이 맑아지기 시작한 그것이다. 어떤 문제이든 뇌리에 떠오르면 그것의 론리가 정연해지고 사색이 거침없이 흐르는것만 같았다. 웬일인지 스스로도 정상상태로 돌아온다는 자신이 갑자기 생기는것이였다. 아마도 이때까지의 치료효과가 어떤 계기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는지 모른다.

일주일후에 병원에서 퇴원한 리승기는 그날 저녁으로 일산 20키로중간공장이 있는 작은 골짜기의 량쪽에 마주앉은 단층건물들에 가서 합성, 중합, 검화, 방사 등 공정을 다 돌아보았다.

그는 몇달동안의 멍한 망각상태에서 불시에 깨여난듯, 그사이에 잠재의식으로 사색이 계속되기라도 한듯 이것저것 즉석에서 방도를 일깨워준다. 번뜩이는 예지와 령감의 힘으로 판단하듯 그는 방사공정앞에 서있는 림창직에게 말했다.

《방사원액의 온도를 높여보시오, 온도를.》

그리고 그는 중합을 책임진 옥지문에게 말한다.

《옥동무, 아무래두 립상중합은 안되겠소. 용액중합으로 바꿔야겠소.》

옥지문이도 리승기의 여느때없이 결단성있는 말투앞에 어리벙벙해 서있었다. 몇달동안 병원에 가있으면서 이것만 궁리하다가 나온 사람같았다. 옥지문은 문가를 향해 걸어가는 리승기의 뒤모습을 의아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리승기는 즉시로 실장인 신현석이와 마주앉아 중합도와 용액중합에 대하여, 방사원액의 온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줄 몰랐다. 신현석이 먼저 일어났다.

《선생님, 병원에서 나오자바람으루 너무 무리합니다. 집으로 가십시다, 저와 같이… 우리 집사람도 선생님네 집에 갔을겝니다.》

그와 함께 밖을 나서던 리승기는 어째선지 문득 방하민이 청수에 와있을것처럼 생각되였다. 과학원안에 새로 조직된 화학연구소의 부소장인 방하민이 박사론문을 준비한다던 기억이 났다. 그 론문의 쩨마를 현석실장이 알수 있을것이다.

리승기는 자기의 한쪽팔을 곁들어주려는듯 바투 붙어서 걷는 신현석에게 그것을 묻고싶었으나 웬일인지 그 대답이 두려워지면서 물어볼수 없었다.

(천천히 물어보지,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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