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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 회

제 2 편

제 3 장

3


그 이튿날이였다. 리승기는 굴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실험실에 있었다. 그는 실험복 량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실험대앞을 왔다갔다하였다. 내심의 초조와 불안을 애써 감추려는것이 분명하다.

그는 엊저녁에 하던대로 다시 첨가제를 넣은 시험관을 들고 거기에 몇방울의 시약을 떨궈놓고는 그것이 지금 당장 중요치 않다는것을 알면서도 부질없이 그것을 관찰하려고 애쓰는것이였다.

옆방에서 벌어지는 초산비닐합성실험에 온통 그의 주의가 쏠려있었다. 그는 자주 거기에 가보고오군 하였다. 그 방에는 림창직, 김용석 그리고 현석실장이 실험공들과 함께 있었다. 오늘의 실험이야말로 기초실험단계에서는 결정적인것으로 될지 모른다. 합성실험을 그동안 세일수없이 많이 반복해왔다. 어쨌든 어제까지 기본적인 실험테타를 확정하고 오늘에 검증실험을 또 한차례 진행하는것이였다.

옆방에서 말소리와 함께 이따금 가벼운 탄성이 들리였다. 굴의 측벽을 따라 뻗은 복도에서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울리고 어디선가 조심스럽게 유리기구를 다루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굴안의 여러 실험실들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이 합성에 집중되고있었다.

옆방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더 자주 울리기 시작했을 그때, 뜻밖에도 리승기는 등뒤의 문쪽에서 들리는 부름소리에 놀라 뒤돌아보았다. 옆방에서 자기를 데리러 온 처녀실험공이 아니라 거기 문간에는 수심에 잠긴 얼굴빛으로 리금진이 서있었던것이다.

금진은 눈길을 허둥대다가 발아래에 떨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는것이였다.

《선생님, 전… 집에…》

《집이라니?》

리승기는 처녀한테 위안의 말도 못한채 부랴부랴 실험탁에서 안경을 주어 눈에 끼였다. 그래야 앞을 똑바로 가려보고 침착하게 생각할수 있다는 거의나 본능적인 동작이였다.

그제야 리승기는 흰 동정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재빛두루마기를 입은 금진의 차림새에 주의가 미쳤다.

《집에 말인가?》

리승기는 재차 중얼거리듯 물었다.

한데 이때 웬일인지 리승기의 머리에는 처녀가 왜 다름아닌 자기앞에 나타나 비탄에 젖은 눈빛으로 동정과 리해를 구하려는지 하는 그런 의문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옆방에서 성공의 환성이 오르고 사람들이 달려와 금진이한테 축하해달라고 소리치기만 하면 대번에 처녀의 행동과 얼굴빛에서도 변화가 생길듯싶은 환상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하지만 리승기는 처녀의 기분에 덩달아 한숨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 좀 앉소.》

《선생님, 기차시간이…》

처녀는 얼핏 장의자를 보면서도 앉지는 않는다.

《그럼 언제쯤 돌아서나?》

《어머님형편을 보겠습니다.… 아주 가야지만… 짐두 있구 하니… 다시 오겠습니다.》

순간 리승기는 처녀가 작별인사로 림창직이도 만나러 왔을수 있다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그러자 그는 마음 한구석이 그지없이 허전해나면서 얼른 할말을 찾을수가 없었다.

(가다니? 영영?… 가만, 어떻게 한다?)

그런데 상대편에서 오히려 리승기를 구원해주었다.

《김용석선생두 만나구 갔으면 해서요. 저때문에 엊저녁에도 사모님과 함께 오셔서 너무 마음쓰시던데…》

리승기는 옆방에 대고 김용석을 소리쳐불렀다. 조용한 실험실에서 간벽에 대고 큰소리를 친 사실자체가 그한테는 일상시에 있어본적 없는 일이다. 그로서는 이때처럼 마음의 경황을 잃은적은 없었던것이다.

김용석이 들어오기까지 그 짧은 시간에 리승기의 머리속에는 처녀를 하루만 더 지체시킨다면 하는 한가닥의 조급한 희망이 떠올랐다. 이 하루가 처녀나 림창직이한테서 운명적인 하루로 되였으면 하는 (리승기자신이 의식했건 안했건) 간절한 소망이 아니였을가…

한데 김용석이 들어와 리금진이 갖춘 옷차림새를 보고도 웬일인지 별로 놀라지 않는다.

《이렇게 빨리요? 하긴 하루라도 늦출순 없지요.》

리승기는 저 사람이 왜 저런 소리를?… 하는듯 의아쩍게 바라본다.

김용석이 작별인사로 손을 내밀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듯이 《참, 창직동무가 저기 있소. 여기 곧 보내겠소.》하고 급히 말하면서도 여전히 범상하기만 하였다.

그러자 금진은 그 까무스름한 눈을 깜빡거리며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됐습니다, 됐어요, 제발…》

그는 애원에 찬 눈길로 김용석을 쳐다보는것이였다.

《자 그럼, 인차 또 만납시다.》

김용석은 급히 이런 말을 남기며 바야흐로 실험의 결과가 판정될 옆방으로 가버리였다.

그는 분명 리금진이 기껏해서 보름쯤 집에 갔다가 되돌아설 걸음으로 여기는것 같았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던 금진이 분연히 머리를 쳐들었다. 그는 문간을 향해 섰다가 다시 뒤돌아섰는데 그찰나 그의 눈에 함뿍 고인 눈물이 고촉의 불광에 번뜩이였다.

《선생님… 인제 다시 기회가 없을것 같구… 선생님한테 전 모든걸… 전 창직선생의 불행을 안 그때부터… 그 선생의 불행을 매일 매 시각 느끼면서도 전 위로할 말을 찾을수가 없었어요. 저와 함께 나눌 그런 고통이 못된다구만 생각하구… 한데 또 우리 오빠가… 그 소식이 나한테도… 그러니 더 창직선생의 불행이 뼈에 사무쳐오구…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그를 먼장에서만 봐두 더욱 괴롭군요. 차라리 조국통일 그날까지 남쪽에… 안해되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희망을 안고 그의 손발이 되여 창직선생의 연구를 도울수만 있다면… 또 그렇다면 내가 당하는 우리 집 불행도 그렇게는 고통스럽지 않을것 같아요.… 아, 선생님, 이 전쟁은… 그 악귀같은 미국놈들은 왜 우리에게 모진 불행만을 들씌우는가요?》

《금진이! 침착하라구.》

《선생님, 제가 정신없이 아무 말이나 막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그럼 전… 차시간이… 합숙에 들려 트렁크를 갖구가야 합니다.》

처녀는 허리굽혀 인사를 하고는 졸지에 사라져버렸다.

리승기는 걸상에 주저앉았다. 과학상의 론쟁에서라면 물러설 그가 아니지만 이런데서는 도무지 꼼짝할수가 없었다. 처녀를 끝내 멈춰세울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였다. 설복은커녕 오히려 금진이한테 끌려드는것만 같았다. 범박한 련정이나 실무적인 남녀결합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그우에 높이 솟아있는 한 고결한 녀성을 발견한것이다. 하지만 그 처녀는 영영 새처럼 날아가버리려고 하지 않는가.

옆방에 있던 세사람이 동시에 뛰여들어와 다짜고짜로 그를 데리고 갔을 때에도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면서 환성을 올리는 얼굴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리승기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마침내 리승기는 김용석의 팔소매를 잡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걸 어쩌면 좋나?) 하는 눈길로 김용석을 보다가 《그는 갔네, 금진이 말이네. 이번에 가서 자리를 잡구 영영 거기에… 가버릴수 있어.》라고 했다.

김용석이 놀라며 그 시커먼 두눈섭을 치켜올리고 리승기를 뻔히 쳐다보았다.

《선생님, 그건 뭘 념두에 두시고?》

김용석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어머니때메 고향에 다녀올수 있겠는데…》 하다가 그만 불시에 다급해지는 마음을 누르지 못하는듯 방안을 서성거리였다.

《그러구보니 이게 어떻게 된셈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란 알수가 있어야지.… 한데 참, 불행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는 말두 있잖습니까.…》

느닷없이 그러면서도 자신없이 중얼대는 김용석의 목소리는 독백과도 같았다. 그때 림창직이 들어왔다. 방안을 살펴보는 그의 얼굴에선 저쪽방에서 가져온 성공의 기쁜 빛이 사라지고 문득 심중한 기색이 떠오르는것이였다. 슬그머니 뒤돌아서 나가려는 그의 팔소매를 김용석이 잡았다.

《내가 말했는데두 왜 이제야 들어왔나? 우리한테 인사하러 왔던 금진선생은 이미 정거장으로 나갔네.》

림창직은 고개를 숙이며 풀기없이 응수했다.

《미안하네, 용서하게.… 그 얘긴 따로 하세.》

《우리한테 미안하다? 그런 말은 어제 밤에 실컷 듣구두 남았네.》

그들을 바라보는 리승기는 년장자답게 마음을 늦추려고 애쓴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허나 그는 다시 일어나며 림창직을 향해 거의나 준절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자네가 그리두 끝까지 금진이를 피하는건 도대체 뭔가? 그의 오빠가 전사했다는데두 그한테 찾아가 위안의 말 한마디 못해준단 말인가?》

그래놓고보니 너무도 야박한 힐책같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자네의 아픈 심정을 모르는바 아닐세. 하지만 마음의 상처란 저절루 아물기를 기다려선 안되는줄로 아네.… 자네답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

도로 의자에 앉으며 마음속으로 무엇을 더듬는듯 눈을 감았던 리승기가 눈시울을 치켜올리며 천천히 말을 했다.

《나두 자네와 비슷한 처지에 있을 때가 있었네.》

림창직이와 김용석이 나란히 선채 의자에 앉은 리승기를 놀라운듯 바라본다.

리승기는 지난날을 돌이키며 말했다.

《고독하구 불행했던 나한테 한 처녀가 현해탄을 넘어 찾아왔을 때… 난 1년을 두고도 얼른 용단을 내리지 못했네.… 만일 그때 끝내 결심을 못 내리였다면 내 생활은 아마 다르게 되였을수도 있어.》

그러다가 그런 말을 이제 와 해서 뭘하겠느냐는듯 손을 들어 홱 내저었다.

《창직이, 마음을 다잡구 생활을 창조해야 하네. 지금 북남삼천리에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한둘인가.… 이 어려운 시기에 과학에 몸바친 우리로선 여기서 용약 뛰쳐나와야 될줄로 아네.》

리승기는 그러한 훈시조가 스스로도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잠간 말을 멈췄다가 뒤를 이었다.

《이 전쟁중에 우리가 하는 과학연구란 무엇을 의미하겠나? 그건 무엇보다… 우리의 생활을 파괴하려는 힘과 맞서 생활을 창조하는거네.

오늘 비록 합성실험에서 성공했지만 자네가 생활을 재창조하는 용단을 못 내린다면 난 기쁠것 같지 못해.…》

《선생님…》

림창직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약간 떨리였다.

김용석이 제잡담 림창직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리승기를 향해 말하였다.

《선생님, 용서하십시오. 시간이 급해서 그럽니다. 갔다와서 얘기를…》

림창직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우지 않은채 김용석은 급히 말하였다.

《빨리 나와 함께 가세.》

《어디로?》

얼떠름해진 림창직이 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정거장이지.》

《아니, 거긴 뭣하러?》

《아, 그래 오빠의 전사통지서를 받구 가는 사람, 어머니한테 가보는 사람을 바래워주면 못쓰나? 젠장, 그래 자넨 언제부터 저만 생각하게 됐어? 엉? 자, 늦겠네. 빨리 가세.》

김용석은 실험복을 활활 벗어붙이고 림창직의 팔에서도 실험복소매를 잡아 빼내였다. 그리고는 복도로 지나가는 실험공처녀를 불러세워 그한테 자기들이 벗은 실험복을 던져주었다.

김용석은 림창직을 이끌어가듯 그의 팔소매를 잡은채 뒤돌아보았다.

《선생님, 이제 갔다와서 우리 창직동무랑 자세히 얘기를 나눕시다.》

급행렬차운행까지 곧 있게 된다는 그즈음에 화물차 달린 보통객차가 다니기 시작한지는 얼마간 되였다.(물론 적들의 폭격속에서 자주 시간이 지체되기는 하였지만) 금진이 지금 그 차를 타려고 정거장에 있을것이였다. 두사람이 문을 열고나가는 그때 돌연히 뒤에서 리승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 거기 좀 섰게.》

두사람이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리승기가 실험복을 벗고있었다.

《나두 가겠네.… 내가 가야지.》

마치나 무엇을 뒤늦게 채심한 사람처럼 입속으로 마감말을 하였다. 림창직과 김용석이 마주쳐다보는 사이 어느새 리승기는 그들의 옆을 지나 굴속복도를 걷더니 굴밖에 나서자 뒤도 안 돌아보며 앞장서 걸어갔다. 그뒤로 김용석과 림창직이 따라섰다.

림창직이 처음 얼마동안은 뒤로 몸을 제치듯 하면서 김용석이한테 끌려가다가 마침내 화가 나는지 팔을 뿌리치였다.

《제발 놓으라구, 내 발루 갈테니.》

《그럼 그럴게지.》

《에익, 결국 이 친구하구 같이 밥을 먹기 시작한 내가 잘못이야.》

그것은 롱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워낙 천성이 쾌활하고 락천적인 림창직이 오늘 이 시각처럼 어찌할바를 몰라할 때는 일찌기 없었던것 같다. 언제나 새로운 생활에로 남먼저 달음치는 그였건만 정거장으로 가는 그의 얼굴에는 지금 실로 초긴장의 심각한 빛이 력연하다. 슬픔과 고뇌를 물리치고 거기서 나와 새로운 생활에로 뛰여나가자면 그것이 결코 조련치는 않는법인즉 김용석은 마치 그 용단을 그한테 주려는듯 줄곧 림창직이와 나란히 걷고있었다.

리승기의 뒤를 따라 두사람은 정거장의 나들문을 빠져나갔다. 금진은 다행히도 아직 트렁크를 든채 역홈에 서있었다.

화물렬차뒤에 단 두개의 려객차칸, 그 중간 승강대에 오르다말고 자기한테로 다가오는 리승기와 그뒤에 따라선 두 사나이를 띄여본 금진은 놀라서 움직이지 못하다가 둬걸음 물러서기까지 했다. 리승기가 금진이한테 다가서며 말했다.

《금진선생, 잘 다녀오시오. 폭격이 심한데 몸조심하시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였다가 쳐드는 처녀의 얼굴에는 의아쩍은 표정이 떠올랐다.

《모두 바쁘시겠는데 이렇게…》

금진의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림창직이 조용히 응대를 한다.

《리선생과 함께 나왔습니다. 아무튼 어머님을 잘 위로해주시오.》

김용석도 그렇게 말했다.

《그렇소, 어머님을 잘…》

《알겠어요.》

처녀의 표정은 그의 말과는 달리 종잡을수없이 착잡해지고있었다. 의문과 놀라움이 사라지자 그 어떤 원망의 빛이 어리는것 같았다. 리승기는 뒤짐을 지고 마치 전시의 환경에서 다니기 시작한 그 객차가 희한한듯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며 차창마다 기웃거려보는것이였다. 허나 그의 귀는 젊은이들의 말을 다 가려듣고있었고 그들의 표정마저 차창에 뚜렷이 그려보고있었다. 웬일인지 처녀는 자존심이 상한듯 또는 어리광에 찬 노여움인듯 이렇게 말했다.

《왜들 나오셨나요? 영영 떠나서 오지 않을 사람이라구 해서요?》

금진의 그 말에 리승기는 얼핏 곁눈으로 처녀를 보았다. 처녀는 홱 돌아서더니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흐느낌에 못이겨 어깨를 떠는듯싶었다. 이 순간 리승기는 처녀가 이 역두에 다시 와닿게 되고 이 고장에서 영영 떠나지 않게 되리라는 운명의 예감을 어렴풋이, 그러면서도 점점 더 확실히 느끼는것이였다. 젊은이들이란 처녀들앞에서 둔감할 때도 있으니 금진의 눈물이 그저 오빠를 잃은 슬픔을 위안받은데서 오는것인줄로 알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승기는 내심 자신을 나무람했다.

(저는 어떻구?)

가장 단순한 녀성의 심리변화조차 안해나 김용석의 도움으로 깨달은 자기가 아니던가.

역시 이런 때에 김용석이 할말을 찾을줄 알았다.

《진정하오. 금진동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겠소, 창직동무랑 같이 말이요.》

리승기는 그들한테 다가서며 말했다.

《제일 기다릴 사람은 난데…》

리금진이 황급히 두루마기고름끝으로 눈굽을 훔치고는 《선생님, 미안합니다.》하면서 세사람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들이 오늘실험에서 얻은 성과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맙소.》

림창직이 세사람을 대표하듯 대답했다.

리승기는 《잘 갔다오시오.》하면서 처녀의 손을 다시한번 쥐였다놓고는 돌아섰다. 그뒤에 떨어져 뚜벅뚜벅 홈에서 걸어나오던 림창직이와 김용석은 약속이나 한듯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처녀는 한손을 어깨우에 들가말가 쳐들어보이였다. 그의 목에 휘감긴 흰 명주목도리의 긴 자락이 이른봄의 쌀쌀한 바람에 펄럭이듯 날리고있었다.

땅속의 실험실에 돌아온 김용석이 리승기의 방에 들어왔다.

김용석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지켜보던 리승기는 천천히 일어나 그의 손을 꽉 부여잡고 말했다.

《잘했소, 고맙소.》

흡사 자기는 역에 나가지 않았던 사람과도 같았다.


×


1953년 4월, 굴간앞에 《합성1》호의 일산 20키로그람능력중간공장을 차릴 건물공사를 시작하였다. 《일산 20키로중간공장》이라고 명명한 설계초안이 작성되였다. 초산비닐합성실험의 성공은 비록 기초단계이지만 폴리비닐알콜의 첫 돌파구를 열어놓은셈이다. 폴리비닐알콜을 방사하고 열처리, 후처리하는 문제는 이제 폴리비닐알콜중간공정을 완성해야만 《합성1》호의 공업화전망이 열리는것이다. 세계는 강적과 힘겹게 싸우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았을뿐 그 싸우는 조선안에서 과학을 탐구하는 조선이 그만 못지 않은 팽배한 힘과 기상으로 자라고있음을 모를수 있었다.

세계화학계의 적지 않은 학자들이 조선의 화학을 령으로 보고있었기때문에 그들의 경우에는 우리 나라 실정에 맞는 새로운 활성탄으로 초산비닐합성실험에서 성공한것을 그 무슨 원자탄시험만치나 놀라와했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여, 믿으라! 생사존망의 판가리전쟁에서도 여기 압록강변의 땅속에 자리잡은 지하연구실에서 한두 나라외에는 엄두도 못내는 폴리비닐알콜공업의 탄생이 마련되고있음을…

굴간 밖에 세워지는 일산 20키로그람중간공장건물공사가 거의 완성될무렵에 정전이 되였다. 이때에야 세상사람들은 지하연구실에서 어떤 과학적성과들이 이룩되였는지를 확실히 믿게 되였을것이다.

전승의 광장에서 울리는 축포소리… 그것을 들으며 과학자들은 거기에서 또 다른 감격을 눈물겹게 감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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