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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회

제 6 장

정 련 기

29


그 당시에는 지나친 충격으로 하여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의를 점차 느끼게 될 때가 있는 법이다. 마치 예견치 않은 사고로 하여 병원에 실려간 사람이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퉁퉁 부어오른 상처를 볼 때에야 자기가 어째서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되였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듯이.

어디를 다쳤는지 모를 때와는 달리 상처를 직접 눈으로 본 다음에는 그 아픔이 더해지는것처럼 현옥이도 제철소에 다녀온 직후에야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채 침대에 누워있는 진호를 볼 때까지만 해도 미처 자신을 다잡을수 없던 그였으나 집에 돌아와서는 그때 알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여태껏 자기의 가슴속에 도사리고앉아 항시 자기를 괴롭히던것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어렴풋이나마 감득하지 않을수 없게 된 그것이였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실패를 거듭하고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고있었으며 무리한 시험을 한 결과 사람들에게는 물론 집단에까지 피해를 입히고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오빠가 예견한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쩐지 한갖 무모한 행동의 결과로만 느껴지지 않고 어떤 지나친 현상에 지나지 않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지울길이 없었다. 어떤 근거가 있는것도 아니였으나 왜서인지 그렇게 믿고싶었고 믿을수록 또 그것은 안개속에서 자태를 드러내는 물체처럼 점점 뚜렷한 륜곽을 나타내는것이였다.

《난 무모한 인간일뿐아니라 량심조차 없는 파렴치한 인간이요. 모든 사실이 그걸 증명하고있지 않소.》

그때에는 진호의 이 말도 그대로 받아들였던 자기였으나 돌아와서는 자꾸만 이 말이 새삼스레 상기됐고 혹시 거짓이 아닐가 하는 의혹까지 금할수 없었다. 그러면서 처음 헤여질 때도 어째서 그가 자긴 그런 인간이라고, 사람들을 속이고 동무를 기만했다고 스스럼없이 시인했는지 새삼스레 의문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의문이 무서웠다. 의심이 들수록 그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애썼다.

이제 와서 그 의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다시말해 진호의 처지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한 말이 고통스런 나머지 꾸며낸 거짓이라는것을 인정한다면 자기라는 존재야말로 너무나도 죄많은 처녀가 아닐수 없기때문이였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것은 그처럼 순진한 처녀로 자처하던 자기가 성실하기는 고사하고 가장 비렬하게 행동하였음을 증명하는것이 아닐수 없기때문이였다.

(모든건 그의 탓이야! 그가 나를 기만한데 있고 그가 무모한 기술안을 고집한데 있고 또 그가 내 권고를 듣지 않은데 있어!)

속으로는 이렇게 외우는것이였으나 그것이 실지로는 더없이 무서우면서도 겉으로는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아! 하고 소리치는것과 같다는것을 그자신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투사기심사차로 제철소에 다녀온 오빠가 집에 나타났었다.

《그래 이젠 너도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똑똑히 알겠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걸 말이다! 그는 이젠 어쩔수 없는 막다른 처지에까지 자길 몰아넣고말았어! 그런 사람한테 차례지는 결과란 언제나 명백한 법이니까.》

자기의 주장이 얼마나 정당했는가를 증명하기에만 급급해있는 오빠를 보는 순간, 특히 사소한 동정의 기색은 고사하고 오히려 승리자로서의 우월감이 비껴있는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되자 현옥은 오빠가 내리는 결론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오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였다.

(설사 진호동무가 그런 처지에 있다 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할수 있을가? 어쩜 오빤 이런 사람이 돼버렸을가? 어쩌면 이리도 싸늘하고 랭담한 인간으로 되였을가?)

확실히 어떤 사태도 그것이 비록 절망적인 사고나 뜻하지 않은 불행이라 해도 오빠에겐 한갖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느끼게 되자 현옥이는 소름이 끼쳤다. 모르긴 해도 오빠에겐 뭔가 중요한것이, 사람에게 없어선 안될 귀중한 무엇이 결여돼있다는것을 무서운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을수 없었다. 이런 생각은 곧 그의 머리속에 한가지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언젠가 학급동무들과 함께 3대혁명전시관에서 새로 제작된 로보트를 관람하던 때의 일이였다. 그때 해설원이 로보트가 사람보다 더 정확히 동작을 수행할뿐아니라 인식과 판단, 지어는 감각하고 사고까지 한다는 바람에 옆에 있던 한 동무가 물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하고 다른 점이 뭐예요?》

《거야 명백하지요. 아무리 훌륭하게 제작된 로보트라 해도 사람이 짜준 지령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데 있지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본성인 감정과 창조성이 없는것으로 해서 기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 감정과 창조성이 없는것으로 해서 기계지! 오빠도 바로 그런 기계에 불과해. 기계적인 사색이 빚어내는 테두리안에서 인간적인 감정은 마비되고 고갈되여 오직 타산된 한계내에서만 움직이는 기계!)

이런 확신은 오빠에 대한 불만도 불만이였지만 여태껏 자기가 그처럼 부인하려고 애쓰던 진호에 대한 의심이 한갖 억지에 지나지나 않을가 하는 의혹을 품게 했다.

실로 따져보면 볼수록 진호와 오빠는 너무나도 상극을 이루고있었다. 정확한 타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오빠라면 일단 마음먹기만 하면 무작정 돌진하는 진호였다. 남들이 뭐라든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서슴지 않는 진호라면 단 한번의 실수도 없는것을 행동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있는 오빠였다.

(사실 오빠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를 리해할수 있단 말인가! 오빠가 그런것처럼 나 역시 그를 제대로 리해할수 없는건 당연한 일이지. 난 언제나 오빠의 관점으로만 사물을 대해온 청맹과니였으니까.)

그제야 그는 소스라쳤다. 여태까지 거울에 비쳐진 어떤 물체가 찌그러졌다고만 여겨오던 사람이 실은 그 물체가 찌그러진것이 아니라 거울이 제대로 투영되지 않아서 그렇다는것을 알았을 때와 같은 심정이라고 할가.

(그래! 난 바보였어! 바보! 바보!)

그러나 아무리 가슴을 쳐야 이젠 소용이 없었다. 너무나도 먼거리에 있는 진호이기때문이였다. 그래도 이전에는 맘 한구석으로나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기에 대한 그의 원한이 식어질수도 있고 따라서 그때 가서는 진정으로 되는 용서를 빌수도 있으려니 하는 미련을 품을수 있었으나 이젠 그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이제 와서 그의 사랑은 물론 리해를 바란다는것은 산산쪼각이 난 꽃병을 주어다가 다시 붙이려는거나 마찬가지로 어렵고 어이없는 일로만 생각되였다. 분명 이젠 머나먼 그의 세계를 바라보기만 할뿐 더는 찾을래야 찾을수 없는 아득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난 이젠 맘속으로나마 그를 생각할 자격조차 없어! 없고말고!)

그래도 밤이 되면 그는 눈물을 삼키며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군 했다.

(저한테 이름조차 불리우기 역겨워할 동무라는걸 모르지 않아요. 한푼의 가치도 없는 처녀, 허영에 들뜬 경망한 처녀, 더우기 동무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몹쓸 처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말 못할 울분을 느끼며 지나간 추억의 파편들을 무자비하게 뽑아던질테지요. 그렇지만 이제야 동무를 배반한것이 죄라는것을 안 저는 이렇게 자신을 저주하며 울고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사랑이 어떻다는걸 안 미련한 처녀의 응당한 설음이지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씻을념도 않고 그는 다시금 속삭였다.

(이젠 아무리 바라도 다시는 결합될수 없어! 영영 헤여지고말았어. 잊자! 그를 잊어버리자!)

전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잊으려고 했다면 이번에는 아득히 머나먼 세계에 따로 떨어진 자기의 처지로부터 그를 잊으려고 했다. 아니, 잊어야 했던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의 처지가 비참한 경우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비록 자기탓으로 생긴것이라 해도 은연중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게 되며 그것이 온당치 못한 소행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타당화하려는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기때문인것이다.

(물론 나의 처지가 비참하긴 하지만 나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 옥주도 그렇고 성숙이도 다 처음엔 실패하지 않았어! 그들도 이런 고통을 거쳤을테지만 지금은 새생활에만 몰두하고있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난날을 두고 생각하는것은 우둔한노릇이야!)

그것은 마치 자기에게 더없이 귀중한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처음에는 아쉬움으로 하여 좀처럼 잊을수 없다가도 그것을 다시는 찾을 가망이 없다는것을 알았을 때는 그것이 없으면 무척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뭐 그게 없은들 뭐라나.》 하고 위로하게 되는것과 같은 심정이였다.

하지만 어려웠다.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자기를 저주하며 경멸할 진호의 격분에 찬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무작정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했으나 그것은 한갖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생활에서 너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었기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는 자기의 처지에서 그를 잊으려고 하는것이 또 하나의 무서운 죄를 짓는 일로 되지 않을수 없기때문이였다.

이런 마음은 그로 하여금 뒤늦게나마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수 있는 일을 해야 하리라는 충동을 느끼게 했는데 그것은 새로운 일, 즉 새 연료안도입에서 부득불 제기되지 않을수 없는 축열실격자축조에 대한 개조안을 완성하는것이였다.

결코 그는 이 론문이 진호를 위한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정신적괴로움을 덜기 위한 위안물이라고만 여겼었다. 어떤 사람이 그리울 때면 사진첩을 펼치고 그의 사진을 보는것처럼 진호에 대한 죄스러움에 사무칠 때마다 그는 그 도면을 펼치고 거기에 온갖 심혈을 쏟으며 자기의 마음을 위로하군 했다.

(그래! 나같은 처지에서는 생활이 요구하는대로 하는것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그 방도란 곧 그날그날의 요구에 충실하는거야.)

이때부터 그는 의식적으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려고 애썼다. 이런 의식적인 노력은 날이 감에 따라 차츰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재생시켜나가는상싶었다. 확실히 상처란 첨엔 피가 나고 아프다가도 점차 아물기마련인지.

결국 이렇게 되여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진 한줄기의 물, 현옥이의 생활은 회오리치는 소용돌이와 거친 암반에 부딪쳤다가 마침내 서서히 흐르는 대하로 굽이쳐가는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선 현옥이는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자료실로 향했다.

편집계획에 의하면 아직 얼마간 여유가 있는 원고였으나 오늘중으로 마무리해놓을 심산이였다. 그래야 래일부터 대학에 가서 축열실개조안에 대한 방조를 받을수 있기때문이였다. 대학때부터 자기를 극진히 돌봐주던 강좌장으로부터 도와주겠노라는 다짐까지 이미 받았던것이다.

《자요, 이 책을 부탁해요.》

익숙한 동작으로 도서카드를 골라낸 그는 그것을 접수대에 앉아있는 뚱뚱한 사서에게 내밀었다. 살집이 좋은데 비해서는 신기하리만치 동작이 민첩한 사서는 근 30년을 출판사에서 일해오는데 아무리 까다로운 이름을 가진 외국원서도 제때에 골라냈고 어느 부문에 참고할 책이 어떤것이라는것까지 휑하니 알고있어 직장사람들의 각별한 인기를 끌었다. 이름이 보배래서 그렇게 부르는지 아니면 그를 보배처럼 여겨서 그렇게 부르는지 현옥이도 아직 알지 못했다.

《이 책을 당장 봐야겠니?》

주문받기만 하면 서슴없이 서가안으로 사라지군 하던 그가 무테안경너머로 올려다보는 바람에 현옥은 저으기 락심했다.

《대출됐어요?》

《대출된게 아니라 지금 열람중이여서 그래, 저―기.》

그가 가리킨쪽을 돌아본 현옥이는 그제야 빈줄로만 알았던 자료실의 한쪽구석에 웬 처녀가 앉아있는것을 보았다. 무드기 쌓아놓은 장서들을 펼쳐가며 그는 무엇을 옮겨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직장사람은 아니였다.

《누구예요?》

《제철소에서 왔다는데 무척 바쁜 일인 모양이야. 어제부터 온통 정신이 없어!》

(제철소?)

현옥은 흠칫했다. 저절로 심장이 쿵 하고 방아를 찧었다.

(그래도 그 제철소에서 오진 않았을거야.)

애써 이렇게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잠자코 앉아있던 그가 무슨 기미를 느꼈는지 얼핏 이쪽을 돌아보는것이였다.

처녀의 눈길은 사색에 몰두하던 사람이 일시 외계에 시선을 돌렸을 때와 같은 그런 범상한 눈빛에 불과했다. 그러나 곧 무엇에 놀라기라도 한것처럼 그는 자리에서 움쭉 일어서기까지 하는것이였다. 집요하면서도 뭔가 알아내려는듯 한, 특히 자기의 짐작이 옳은가 어떤가를 따져보는듯 한 처녀의 눈길에 현옥이는 당황해지고말았다.

《책을 빌리러 왔댔는데 동무가 먼저 보는군요. 그렇지만 일없어요. 후에 보지요.》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현옥은 얼굴까지 붉히며 말했다.

《어느 책이예요? 이 책?》

책상우에 펼쳐놓은 책들을 이것저것 짚으며 처녀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아니, 됐어요. 미안해요.》

《미안한건 오히려 제편인걸요.》

여러권의 책을 들고 현옥이앞으로 다가선 처녀는 방긋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의 짐작이 옳다는것을 확신한 사람이 짓는 미소였다.

《현옥동무지요?》

《?》

현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절?…》

《왜 모르겠어요. 정문 벽보판에 커다란 사진이 붙어있는걸요.》

책들을 책상우에 놓은 처녀는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전 ㅎ제철소에 있답니다. 윤정아라고 해요.》

ㅎ제철소라는 말에 온몸의 피가 일시에 심장에 모여들면서 목구멍으로 뜨거운것이 꽉 치밀어오른 현옥은 대뜸 어떤 모멸감으로 하여 어쩔바를 몰랐다. 그래도 제혼자 생각할적에는 태연한 마음을 가질수 있었지만 정작 진호와 함께 일하고있는 이 낯모를 처녀앞에 서있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창피와 수치로 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전 강철직장에서 일하는 공정기사예요.》

그의 태도를 통해 현옥이는 그가 벌써 자기가 누구며 어떤 처지에 있다는것까지도 다 알고있다는것을 짐작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이구, 저것 보지. 네가 종내 방해를 끼치고말았구나.》

책을 한아름 안은 보배아주머니가 현옥이를 나무랐다.

《괜찮아요. 이젠 시간도 됐는걸요.》

책상우에 있는 책들을 주섬주섬 챙긴 정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공원으로 가요. 좋지요?》

《…》

현옥이는 불시에 나타난 이 처녀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이제부터 이 처녀가 틀림없이 자기가 그처럼 고통스럽게 얻어낸 마음의 안정을 깨뜨리리라는것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으나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현관을 나서면서 정아는 한결 더 정다운 태도를 지어보였다.

《우리 제철소에 왔댔다지요?》

《…》

《동무가 왔다갔다는 말을 저도 들었어요.》

사실 현옥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아는 그가 어떤 처녈가? 자기의 출현을 어떻게 생각할가? 오히려 더 큰 후과를 초래하게 되지나 않을가 하는 조바심에 휩싸여있었다. 그 조바심이 어제 벽보판에 붙어있는 그의 사진을 본 순간부터는 그만 불안으로 확대되였던것이다.

(아이, 이뻐!)

부지중 튀여나온 탄성이였다.

처녀들사이에도 저절로 탄복하리만치 매혹적인 용모가 있는 법인데 현옥이야말로 바로 그런 처녀였던것이다. 꼭 다문 입, 가늘면서도 길게 휘여든 눈섭과 특히 그밑에서 한곳을 응시하면서도 그윽한 미소를 띠우고있는듯 한 정찬 눈매, 이 모든 인상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마주설, 특히 심중에 고여있는 감정을 가늠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엔 너무도 눈부신 모습이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처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으로 하여 남달리 도고한 법이고 그래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정아도 모르지 않았다. 더할나위없이 곱게 다듬어진 그의 얼굴은 아무모로 보나 사소한 융통도 있을것 같지 않았다.

하나 그를 대하는 첫순간에 정아는 벌써 자기가 괜한 걱정을 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확실히 현옥이의 눈은 더없이 아름다운 눈이였으나 어딘가 깊은 곳에는 슬픈 빛이 간직돼있었다. 모르긴 해도 정아는 그의 눈빛이 틀림없이 과거의 괴로운 추억이 나타내는 회오의 발로라는 생각이 들자 도리여 그가 측은해지는것이였다. 그의 눈은 마치 모든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는것을 공손히 시인하는듯 《그래요, 전 몹쓸 처녀예요.》하고 말하는상싶었다.

그들은 체육관앞 오색등불이 명멸하는 분수가로 나왔다. 갖가지 색조의 명암을 받은 맑은 은구슬들이 찬란한 진주의 턴넬을 만들고있어 그 무지개빛의 황홀한 굴속을 한번 지나가고싶게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연분홍빛으로 활짝 퍼진 나팔꽃모양의 분수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생생하니 풍기는듯싶었다.

《…》

《…》

두 처녀는 걸음만 옮겼다.

정아는 이제 무슨 말부터 해야 할가 하고 생각했고 현옥이는 현옥이대로 불시에 나타난 이 처녀가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진호에 대한 얘기를 두려워하고있음을 짐작하고 그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는 처녀가 내심 고마왔으나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말을 듣고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그 말을 먼저 물어볼 자신은 없었다.

(이젠 아무런 미련도, 과거에 대한 그 어떤 추억도 없다는걸 보여줘야지. 오직 일에만 전념하고있다는걸 느끼게 해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까짓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며 쉬이 잊게 된다는걸 아니, 이미 잊어버렸다는걸 보여줘야 해. 다만 그가 지금 어떻게 일하며 무엇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낸다는것만 알면 돼.)

자기의 이런 의사가 얼마나 일면적이며 무리한것인가 하는걸 그로서는 미처 가릴수 없었다.

《일 잘돼요?》

현옥이는 될수록 랭담한 기색을 지으며 물었다.

《일요? 정말이지 무척 힘이 들어요.》

정아는 그가 먼저 말을 꺼낸게 여간 반갑지 않았다.

《실험에서는 어느 정도 열량을 담보하는데 실지 취입에선 그렇지 못하거던요. 연재에 의한 작용도 아직은 알수 없고요. 우선 취입을 해봐야겠는데 아직 사고심의때문에… 그렇지만 이젠 됐어요. 아침에 전화를 걸어보니까 공장에서 결론이 있었대요. 겨우 3회의 시험취입이지만 승인됐나 봐요. 그것도 우리한텐 큰 혜택이지요. 아마 그 시험결과를 놓고 다시 결심하려나봐요.》

아침에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정아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어떻게 하든지 빨리 일을 끝내고 시험취입전으로는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던것이다.

(다행이구나!)

단 3회긴 하지만 기술안에 대한 시험이 승인됐다는 말을 들으니 현옥은 진호가 무사하다는 안도감으로 하여 숨이 나갔다.

《참, 이젠 일없어요? 그때…》

현옥이는 입원한 진호의 상처에 대해 물으려 했댔으나 정아를 보고는 곧 묻는 말을 바꾸어버렸다.

《투사긴지 하는것 말이예요.》

그러나 정아는 현옥이가 묻고저 하는 참뜻을 알아차렸다.

《투사기는 새로 제작하기로 했답니다. 이젠 투사기를 창안한 태수동무도 우리와 함께 새 연료안을 같이 하고있어요. 알지요, 태수동물? 실은 그가 동물 꼭 한번 만나보라는게 아니겠어요.

어쨌든 그때 정말 위험할번 했어요. 하지만 이젠 일없어요. 얼마간 입원하고있기는 했지만 요즘은 또 매일같이 현장에서 밝히고있답니다.》

구태여 누구라는것을 밝히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현옥이는 정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였는데 그것은 진호의 무사함을 확신한 안도의 숨이였고 오래간만에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뚜렷이 그려볼수 있게 된 누를길 없는 애수의 탄식이였다.

《어찌도 복잡한 문제들이 많은지 전 조수노릇조차 변변히 못한답니다.》

《조수라니요?》

《아이참! 잊었댔군요. 전 조수랍니다. 그의 조수요.》

《그럼 여기 온것도 그 기술안때문인가요?》

《그래요.》

정아는 그동안의 시험과정에 대해서 대충 얘기한 다음 한결 친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얘긴 후에 하고 동무얘기나 좀 해요. 어떻게 지내고있는지.》

《저요? 저야 뭐 어떻고말고가 있어요?》

현옥이는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그저 매일 원고에 파묻혀 정신이 없는걸요. 뭘 생각하고 조용히 앉아 사색할 여유조차 없답니다. 그래도 퍽 재미는 있어요. 특히 자기가 맡은 원고가 독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킬 땐 보람이 있지요. 바로 그 재미에 일하지요.》

마음속으로는 자기자신에 대해 조금도 용서할수 없는 비렬한 처녀로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뻔뻔스럽고도 대담하게 말했다.

《물론 태수동무의 부탁도 있긴 했지만 전 스스로도 동물 꼭 만나보고싶었어요. 이렇게 마주하고 얘길 나누고싶었어요. 그런데 글쎄 첨엔 막 겁이 나지 않겠어요. 어떻게 만날가 하고, 혹시 동무가 나를 경원하지 않을가 하고 말이예요. 우습지요?》

현옥이는 벌써 정아가 무엇 하나 숨기는 일 없는 아주 소탈한 처녀라는것을 알았다. 그가 지니고있는 발랄한 생기는 그의 눈가에 떠도는 미소와 어울려 아무리 누르려고 해도 저절로 넘쳐나는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 솔직한 처녀가 영영 사라져버린것으로 치부했던 추억을, 이미 죽은것으로만 여겨온 그 감정을 다시금 소생시켜 심장을 사로잡게 한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자기 잘못을 알면서도 털어놓는것이 두려웠노라고? 나에 대한 미련이 저주로 변하지 않았나 걱정이였다고? 저주로운 배반으로 하여 더럽혀진 나의 가슴에 그의 깨끗한 손이 닿을가봐 두려웠노라고? 천만에! 난 그런 용서를 바라기는 고사하고 변명할 자격조차 없어!)

현옥은 다시 랭담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자기가 진호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 하는 호기심이 정아의 얼굴에 나타나있다는것을 알아차린 그는 조용히 그러나 아주 자연스레 말했다.

《저도 이젠 안착이 됐어요. 모든걸 잊고 일에 열중할수 있게 됐지요. 물론 첨엔 가슴이 아팠지만 이젠 아무 일 없어요. 아마 그런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주는가봐요. 그래서 사람들은 새생활에 익숙되는거겠지요.》

《…》

《사실 저와 같은 일이야 처녀라면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무엇때문에 고민하겠어요. 그건 결국 자기를 괴롭히는 외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생활이란 다양하고 그 다양한 생활을 마음대로 택할 권리란 누구에게나 있는거니까요.》

현옥이는 말하는 품이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너무나도 말수가 많았다. 그는 자신이 이것을 감촉하였을뿐아니라 자기를 지켜보는 정아의 눈초리에서도 그가 이것을 느끼고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정아는 의혹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표정으로 봐서도 분명 말 못할 비탄에 젖어있는것 같았으나 막상 현옥이가 표현하는 말은 정반대기때문이였다.

(대체 이 처녀의 가슴속에 어떤 마음이 간직돼있는걸가? 정말 체념과 망각속에 모든걸 묻어버린것일가? 아니면 자기의 감정을 숨기고있는것일가? 자기가 생각하고 느낀바를 죄다 말할수 없기때문일가? 아니면 진정으로 그럴 마음이 없기때문일가?)

《전 동무의 심정이 어떤지 알수 없어요. 설사 짐작한다 해도 동무자신이 느끼는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테지요. 더우기 전 진호동무한테서는 아직 동무얘기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 동문 언제나…》

《거야 그럴수밖에요.》

정아의 말허리를 꺾은 현옥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일단 결심한 일이면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실행하고야마는 사람이니까요, 그것이 비록 잘못된것이라 해도.… 그런데 하물며 저와의 관계를 놓고는 그자신이 천만번 지당하게 행동했는데 무엇때문에 그러겠어요. 저에 대한 회상자체가 벌써 자기에 대한 모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텐데요.》

《아니 아니, 제 말은 그런 말이 아니예요.》

정아는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현옥은 얼른 자기 손을 가무러뜨렸다.

《저도 이젠 다 알아요. 알구말구요. 그러니 저에겐 그런 말은… 그런 말은 그만둬요.》

그제야 정아는 현옥이의 목소리에 감출길 없는 애소가 깃들어있음을 깨달았다. 자기와의 상봉으로 하여 일어난 흥분을 되도록 가라앉히고 일부러 랭정한 태도를 취하려고 했으나 어쩔수 없이 솔직한 감정이 솟구쳐오르고있다는것을, 또 그것은 그가 숨길래야 숨길수 없으리만큼 자기가 죄스러운 립장에 있다는것을 스스로 시인하고있음을 뚜렷이 느끼게 했다. 그 점이 정아를 기쁘게 했다.

《제가 하자는 말은 그게 아니예요. 전 다만 그가 얼마나 새 연료안을 위해 헌신하는가를, 그걸 위해 그 어떤 시련도 희생도 무릅쓰고있다는걸 얘기하려고 했을뿐이예요.》

《그런 얘긴 이젠 저한텐 아무 소용이 없어요.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그러지 말아요. 그건 솔직하지 못한 말이예요. 진호동무가 동무얘길 하지 않은것도 그렇지요. 그가 동무에 대한 얘길 입밖에 내지 않는것이 동무를 잊어서 그럴가요? 회상하기 싫기때문일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잊을수 있겠어요. 잊을수 없지만 나타내지 않을뿐이겠지요. 오히려 그 강압적인 침묵속에 그만큼 더 표현 못할 감정이 물결칠수도 있잖겠어요. 흔히 그처럼 과격한 사람은 자신을 가혹하게 내몰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만치 처절하게 뉘우치기도 하니까요.》

현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동무가 아직 몰라서 하는 말이예요. 제가 그를 어떻게 배반했는가를 안다면… 그걸 안다면…》

현옥이는 이제껏 가슴속에 숨겨온 모든 감정, 모든 설음이 일시에 가슴을 헤치고 분출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의 괴로움을 삐치지 말자고 했던 결심이 물먹은 담벽처럼 허물어지고 가슴속에 고이고고였던 고뇌와 절망,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수 없었던 슬픔이 무섭게 쏟아져나오는것이였다.

《그래요. 전 그에 대한 사소한 미련이나마 자기에 대한 모욕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을만큼 그를 혹독하게 배반했지요. 그렇고말고요.》

자기의 슬픔을 그에게 이야기하고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쓰라린 감정을 가슴에 품은채 도저히 딴 이야기를 할수는 없는노릇이였다. 그는 마음속의 비애를 시원히 털어놓을수 있는것이 기쁘게 생각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바로 진호와 함께 일하는 처녀앞에서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놓아야 한다는것이 참을수 없이 괴롭기도 했다. 하지만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진호와 교제하기 시작해서부터 그의 지향에 공감했던 일, 그러다가 오빠의 말을 듣고는 그를 배반한 일 그리고 입원하고있는 그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도 그는 다 얘기했다.

《모든것이 다 제 잘못이지요.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어요. 오빠를 원망하지도 않아요. 오빠가 나쁘긴 하지만 전 그보다 더 나쁘니까요. 사실 전 진호동무가 바라는 그런 위험과 위훈에 찬 생활을 동경은 했지만 그 동경이 한갖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어요. 오직 한때 남못지 않게 일했다는 겉치레가 필요했던거예요. 아니, 그런 생활에 몸바칠 용기가 없었던거예요. 글쎄 저같은 처녀가 어떻게 그의 지향을 리해할수 있고 힘이 돼줄수 있었겠어요. 어림도 없지요. 설사 같이 제철소에 갔다 해도 전 오히려 그의 짐이 됐을거예요. 짐이 되기 전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을거예요. 이 모든걸 전 요즘에야 깨달았답니다.》

정아는 현옥이의 표정이 자기에 대한 랭소와 환멸 그리고 그 어떤 처절한 비감에 젖어있는것을 보고 말할수 없는 련민의 정을 느끼였다. 그러면서 이처럼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차있는 동시에 무엇인가 더없이 아름답고도 고상한것이 깃들어있음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자 그전에는 현옥이를 비난하던 자기가 이제 와서는 이 처녀의 처지와 심정이 십분 리해되면서 진호가 이 처녀를 충분히 리해 못하지나 않았을가 하는 의심이 드는것이였다.

《제 말을 들어봐요. 동무자신이 말했지만 이런 일이야 처녀들에겐 누구에게나 있을수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문제는 그걸 동무처럼 일면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봐요. 흔히 남자들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겐 정도이상의것을 바라는 법이지요. 그래서 서로의 행동을 지나치게 보고 오해하기도 쉽고요.》

《오해라고요?》

현옥이의 얼굴에는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은 마치 《나도 이젠 사랑이 어떤것이라는것쯤은 알고있어요.》 하고 말하는것 같기도 했고 《제발 그런 값눅은 위로는 하지도 말아요.》하고 호소하는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표정은 순간일뿐 다시금 쌀쌀한 랭소가 입가에 어렸다.

《천만에요. 만약 아직도 그걸 오해라고 여길 여지가 있다면… 그러나 그건 그럴수 없는 일이예요. 어쨌든 저에겐 이제부터라는건 없어요. 그와의 관계에선 이제부터라는건 도저히 있을래야 있을수가 없어요.》

《어째서 그런 약한 소리를 해요.》

천성이 올곧은 정아는 자기에 대한 그의 서글픈 멸시가 격분을 자아내게 했다.

《이봐요, 현옥동무! 우린 젊은 사람들이 아니예요. 청춘이 아닌가 말예요. 이 세상 모든것이 우리의것이고 우리를 위해 있다고도 할수 있지요. 바로 그렇기때문에 누구보다 기쁨도 많고 번민도 많고 자랑도 많고 슬픔 또한 많은게 아니겠어요. 문제는 이런 감정, 특히 이기기 어려운 번민과 절망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데 있잖겠어요. 그런 힘이 없는가요? 그게 없다면 청춘이 아니지요. 글쎄 제 얘길 들어봐요.》

무슨 말을 하려는 현옥이를 제지하며 정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첨엔 진호동무의 기술안을 의심했댔어요. 의심정도가 아니라 반대했지요. 그것도 제일 선두에서 말이예요. 그러나 그의 의도가 어떤것이며 그의 지향이 얼마나 정당한가 하는것을 알고는 곧 그의 기술안을 도와나섰어요. 그런 저를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게요. 그럴수밖에요. 저의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모진 아픔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으니까요.》

기철이에 대한 생각으로 하여 잦아든 자기의 목소리에 불안을 느낀 정아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이 문제겠어요? 남들의 시비가 두렵겠어요? 우리야 옳은것을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교육받은 새 세대들이 안예요. 그래 그 진리를 다른것과 바꿀수 있어요? 거기서 주저하고 물러설 권리가 있나 말이예요.》

《그것하고야 다르지요.》

《무엇이 다르다는거예요. 옳지 않은걸 인정하는데 그치지 말고 대담하게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는데야 매일반이지요. 꼭같지요. 이런말 하는게 어떤지는 몰라도 전 동무가 좀 대담했으면 해요.》

《…》

현옥이는 생면부지의 이 처녀가 자기에게 이렇듯 서슴없는 공격을 들이대는게 놀랍기도 했지만 보다 더 놀라운것은 그런 공격을 순순히 받아들이고있는 자신이였다.

《사랑도 그렇지요. 아무리 굉장한 사랑일지라도 어떤 새로움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생활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충분치 못한게 아니겠어요. 만약 동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가슴속에 뛰여들어야지요. 귀찮아하건 성을 내건 아랑곳하지 말고 말이예요. 체면이나 자존심이 문제겠어요? 그가 괴로와하면 그 괴로움을 같이 나누어가지는것으로써 사랑을 해야지요. 물론 이건 어렵겠지요.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정아의 눈앞에는 또다시 우울한 기색을 짓고있는 기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과연 그를 그렇게 대했던가?)

내심으로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자기 처사가 어디까지나 정당하다는 확신으로 하여 이미부터 모든걸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정작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처럼 리해력이 풍부한 그가 자기의 실책을 인정하는것이 만회할수 없는 일을 저질러놓는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것을 모를가? 자기를 잠시 볼 때조차 그 어떤 저주와 원망이 비낀 빛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그려보느라니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다.

《첨엔 서로가 리해하지 못해도 그걸 깨닫게 됐을 때를 생각해봐요. 그땐 본래보다 몇배 더 뜨거운 정을 느끼게 될게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전 이렇게 생각해요. 남자들에게는 결코 처녀의 외모나 생김새가 중요한게 아니라고, 그건 하등의 의의도 갖지 못하는거라구요.》

그때에야 자기가 누구의 립장에서 말을 하고있는가를 안 정아는 깜짝 놀라 현옥이를 살펴보았다. 혹시 그가 다른 눈치를 채지 않았나 해서, 자기 말이 얼굴이 예쁜 현옥이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나 해서. 하지만 현옥이의 표정에서 여전히 변함없는 수심기만을 읽은 정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하긴 그것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겠지요. 그걸 중시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사랑이란 궁극에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에 뿌리를 두는게 아니겠어요. 끝없이 진실하고 순결한 마음에서 그 뿌리가 더욱 왕성해지는게 아니겠어요.》

《…》

정아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현옥이는 한가지 새로운 점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진호에게 취한 모든 행동이 자기와는 너무도 상반된다는것이였다.

누구보다 믿어야 할 진호를 의심하고 배척했던 자기였다면 남들이 하나같이 의심하고 비난할 때 진호를 진정으로 도와나선 정아였고 자기로 하여 지울길 없는 상처를 가슴에 새긴 진호라면 그의 힘찬 격려에 새로운 희망을 안고 투신하는 진호가 아닌가. 한마디로 말해 자기가 결심했던것을 이 처녀는 행동으로 옮기고있는것이였다.

이 뚜렷한 대조는 필경 진호로 하여금 정아에게 고마움이상의 감정을 품게 했으리라는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조수라고 했지? 그래! 틀림없어!)

벌써 현옥의 생각은 외곬으로만 뻗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더욱 정아한테서 부드러우면서도 열정에 넘친 눈빛과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흉내낼수 없는 약동하는 생기를 뚜렷이 엿볼수 있었고 그것이 분명 사랑을 받는 처녀에게서만 볼수 있는, 이미 자기한테서는 영영 사라져버린 그런 모습이라는것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모든 정황을 자기에게 더 불우하게 해석하기 십상인것이다. 행복한 사람앞에서 불행을 느낄 때보다 더 서글픈 때는 없지만 현옥은 자기의 처지를 지금처럼 비참하게 느껴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솟구쳐나오는 눈물을 어쩔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모든 비애의 원인이라고 느낄 때만 나타내는 그런 깊은 절망의 눈물이였다. 그러나 맘속으로는 정아가 밉거나 어떤 악의에 찬 감정을 품게 되지 않았다. 도리여 그가 더없이 고상하고 아름답게만 여겨지는것이였다.

그 점은 정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현옥이에 대한 부족점은 부족점대로 느끼면서도 이 처녀가 더없이 훌륭하게 느껴지는것이였다.

두 처녀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존경은 금할수 없었다. 현옥이로서는 정아가 훨씬 더 자기보다 훌륭하고 령리한것 같았고 정아로서는 또 현옥이가 곱절 더 자기보다 순결하고 고상한것 같이 생각되는것이였다.

이들은 오래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도 다음날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야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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