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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회

제 6 장

정 련 기

28


드디여 새 연료안에 대한 심사성원들의 결론이 있었다. 결론은 예견했던것보다 더 무자비했다.

《현실성이 없을》뿐아니라 《무모》하기때문에 기술안을 당장 취소할것과 창안자에 대한 문제를 별도로 엄격하게 취급해야 한다는것이였다. 이 결론은 그대로 제철소당위원회에도 제기되였다.

(그러니 이젠 결국…)

혹시나 하고 바랐던 한줄기의 기대마저 잃고나니 진호는 눈앞이 캄캄했다. 전신을 휩쓰는 허탈감으로 하여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릴수가 없었다.

가슴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 이젠 자기의 희망이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애달픔과 그처럼 고심참담한 과정들을 거쳐 이룩해놓은 모든것이 일시에 거품처럼 되고말았다는 절망감뿐이였다.

(이런 조건에서 뭘 더할수 있단 말인가! 몇년이 아니라 일생이 걸릴수도 있다구? 그것을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 참된 사람이라구?)

로장이 하던 말이 이제 와선 한갖 현실과는 거리가 먼 뜬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피해 터벅터벅 구내산으로 들어섰다. 용광로의 열풍소리와 매미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긁어댔으나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초연히 서서 멀리 바다처럼 펼쳐진 대동강과 그우에 일매진 무늬를 이루고있는 조개구름만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털썩 그 자리에 퍼더버리고앉은 그는 두손을 뒤로 뻗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젠 하소연조차 할데 없는 자기라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목이 메여올랐다.

(현실은 어째서 나에게는 매번 이리도 가혹한것일가? 어째서 나는 매 걸음이 암초에만 부딪치는것일가? 내자신이 스스로 그런 처지에 내몬다구?)

현옥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물끄러미 옆에 있는 꽃밭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허구픈 웃음이 스쳤다. 그것은 이름도 모를 하얀 꽃송이우에 앉을듯앉을듯 팔랑거리면서도 종시 앉지 못하는 노랑나비가 마치 그 어디에도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는 자기의 처지같았기때문이였다.

(그래도 저 나비야 더 좋은 꽃가루를 찾아다니지만 나야 어디…)

갑자기 그는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벌떡 허리를 일으켰다. 불시에 어떤 흥분이 온몸을 사로잡는것이였다.

(그래! 가자! 저 나비처럼 아무데라도 가자! 거기서 쫓겨나면 또 다른데 가서라도 새 연료만은 기어이 만들어놓을테다!)

자리를 차고 일어난 그는 황황히 초급당비서 사무실로 향했다.

마침 비서는 방에 혼자 있었다.

다른데로 가겠다는 하나의 충동에 못이겨 비서를 찾아온 진호였으나 정작 그를 마주보느라니 그런 충동보다 그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앞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퇴원후 단둘이 마주앉기는 처음이였다.

간혹 직장모임때나 현장에 있는 그를 먼발치에서 볼 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진호는 지금 비서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랴, 더우기 그 괴로움을 털어놓을수 없는 처지로 하여 얼마나 고통스러우랴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미여지군 했던것이다.

《어떻게 왔소?》

줄곧 무뚝뚝한 눈길로 자기를 주시하고있는 비서를 보느라니 새삼스레 그에 대한 죄책감이 갈마들었다.

《비서동지! 이런 말 한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전 제가 저지른 일이 비서동지한테까지 피해를 입게 할줄은 몰랐댔습니다. 무슨 말로 잘못을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상범은 한쪽입귀를 실룩해보였는데 그것은 흔히 맞갖잖을 때마다 나타내군 하는 그의 버릇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전 어떤 결론이라 해도 저의 기술안에 대한 기대만은 버릴수가 없습니다. 제딴엔 자신도 있구요. 앞으로 있게 될 추궁이 어떤것이라 해도 전 다 접수하겠습니다. 또 달게 받겠습니다. 그런데는 이미 습관됐으니까요. 다만 기술안을 계속할수 있는데만 보내준다면…》

진호는 말을 더 이을수 없었다. 그전에 사고를 냈을 때도 부당비서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었다는 생각이 가슴을 허비였기때문이였다.

《그러니 다른데로 가겠다 그 말이요?》

《아무데라도 좋습니다. 야금로가 있는데라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보내주십시오.》

비서의 눈치를 살핀 진호는 한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주필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상범은 한동안 아무말없이 진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가겠다…》

또다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가겠다는 사람을 붙들어놓을수야 없지.》

너무도 선선한 대꾸에 진호는 얼떠름했다. 원주필을 만지작거리고있는 변함없는 거동이며 침착하고 태연한 표정으로 봐서는 비서가 진정으로 자기의 제기를 받아들이는것 같았으나 방금 한 대답을 통해서는 뭔가 못마땅해하는 뜻이 포함돼있지 않을가 하는 의심이 드는것이였다.

사실 상범은 방금전까지 바로 진호의 기술안에 대한 심사조의 결론에 대해 그리고 그 결론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당위원회에 제기했던 사실에 대해 되새기고있던터였다. 만약 당위원회에서 자기의 제기를 무시하고 그대로 집행할것을 승인하면 어떻게 할가 하는 불안도 없지 않았지만 보다는 설사 그렇다 해도 그 기술안을 버릴수 없을뿐더러 어떤 책벌이 차례진다 해도 그걸 포기할 권리가 자기에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던것이다.

그는 진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었다. 그가 심사결과를 놓고 고민하고있으리라는것과 자기의 앞날에 대한 불안에 잠겨있으리라는것은 짐작했지만 차마 여기를 뜰 생각까지 하고있는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 진호를 보느라니 깨우쳐줘야겠다는 의무감보다 어쩐지 배반당한듯 한 노여움이 솟구쳐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나 물어보기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침착했다.

《동문 혹시 자길 어떤 수난자로 여기는게 아니요? 억울한 희생만 강요당하는 수난자 말이요.》

(수난자?)

너무도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진호였으나 곧 어떤 도전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고말았다.

(그래! 사실 내가 수난자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진정을 유린당했지, 사랑을 잃었지, 그것도 부족해서 이젠 고의적인 방해자로까지 락인되고있는 내가 수난자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세상에 나보다 더 애꿎은 수난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 보오!》

자리에서 일어난 상범은 창가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어떤 일도 목적과 방도만 가지고는 어려운 법이요. 특히 첨 해보는 일일수록 말이요. 그건 왜냐하면 목적과 방도를 찾기보다 몇배 더 힘든 열정이 있어야 하기때문이 아니겠소. 열정이! 그런데 그런 열정이 동무한테 있소?》

상범은 진호가 미처 대답할새도 없이 손을 홱 내리그었다.

《없소! 동무한텐 그런 열정이 없단 말이요. 왜? 그건 언제나 동문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 개인의 리해관계에만 얽매놓기때문에, 다시말하면 동문 새 연료안을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자기가 얼마나 결백한가 하는 그것만을 증명하려고 할뿐이요. 자― 봐라! 난 이런 사람이다! 바로 이걸 시위하지 못해 안달아할뿐이란 말이요!》

진호는 고개를 들었으나 무섭게 번뜩이는 비서의 두눈을 보고는 다시 시선을 떨구지 않을수 없었다.

《동무같은 사람은 남들이 상상할수 없는 정열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리해관계와 결부될 때뿐이요. 모든 일을 자기에 대한 리해에 얽매기때문에 그 정열에 편파가 있을수밖에 없단 말이요. 더우기 참된 목적은 승리하기마련이라는 이 하나의 생각에만 몰두할뿐 승리를 위해선 복잡한 생활속에서 그 목적을 신념으로 고수하고 그것을 자기의 의지와 노력으로 관철해나가는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걸 모르고있단 말이요. 말하자면 참된 지향은 시련을 이겨내는 투쟁을 통해서만 증명된다는것을 모른단 말이요. 알아두오만 동무같은 그런 행동은 한갖 개인영웅주의자의 유치한 공명에 지나지 않소. 자길 수난자로 여기는 패배자의 너절한 추태에 불과하단 말이요!》

생전 처음 듣는 말이였다.

도저히 접수할수도 없는 말이였다.

(내가 공명주의자라니? 자기 리해관계밖에 생각하지 않다니?)

조금도 납득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말에 가슴을 찌르는 무엇이 있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속으로는 이상하게도 여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드센 격랑을 받아안은것 같았다. 그는 그것이 무엇때문인지는 알지 못하면서도 그 새로운것에 커다란 충격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어제 제철소당위원회확대회의가 있었소. 그 회의에서 또 새 연료안에 대한 문제가 론의됐소. 수령님께서 중유를 해결해주셨으면 더 많은 증산으로 은덕에 보답하도록 대중들을 동원하는것이 당일군으로서 본분이지 파악도 없는 기술안을 붙들고 생산에 지장을 주는것이 옳은가고 들이대더군. 난 그 비판을 다 받아들였소. 모든 잘못이 내한테 있고 책임도 응당 내가 져야 한다고 말이요.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리해해달라고 했는데 그것은 수령님께서 해결해주신 중유로 더 많은 깡을 생산하는것도 필요하지만 내 생각에는 중유가 아니라 우리의 연료로 깡을 생산하는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며 바로 이것을 수령님께서 더 바라시고계시리라는걸 믿는다고 했소. 때문에 새 연료안을 취소시킬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시험하게 해달라는것을 제기했단 말이요. 바로 동무를 믿고! 다른 사람은 못해도 동무만은 해내리라는것을 믿고 말이요. 그런데 가겠다?…

사실 난 우리의 연료를 기다리고계실, 우리의 연료로 쇠물을 끓인다는 보고를 애타게 기다리고계실 수령님의 영상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저려 잠을 이룰수가 없었소. 그런데 동문 자기 체면, 자기 자존심, 자기 명예밖에 안중에 없거던. 정말 동무야말로 한푼의 량심도 없는 사람이요.》

진호는 호되게 얻어맞은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한푼의 량심도 없다는 말이 며칠전에 하던 로장의 말과 합쳐지면서 예리한 비수가 되여 페부를 찌르는것이였다.

《가겠으면 가오. 그러나 이번엔 사람들의 조소나 힐난이 아니라 수령님의 기대를 저버린 배신자라는걸 똑똑히 알고나 가오. 그것도 두렵지 않거든 가란 말이요.》

더는 마주하기도 싫다는듯 창문쪽으로 돌아서는 비서의 모습을 진호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퇴근시간이 지난지도 오랬지만 진호는 공정기사실에 앉아 낮에 하던 비서의 말을 곰곰히 곱씹어보고있었다.

비서의 말은 그의 마음속에 줄곧 전기의 불꽃과도 같은 작용을 일으키며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제까지 무기력했던 모든 생각들을 일제히 변경시키는가 하면 하나의 옹근 덩어리로 뭉쳐놓는것이였다.

모르긴 해도 그는 지금까지 자기의 온 생명을 틀어쥐고있던 머리속의 중요한 나사못이 풀어져있었다는것을, 바로 그것을 비서가 예리하게 지적했다는것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수난자―그래 내가 과연 자신을 희생만 강요당하는 수난자로 여기지 않았단 말인가! 자기보다 불우한 사람이 없다고 여기면서 울분에 잠겨 사소한 일에도 저돌적인 흥분을 나타내지 않았단 말인가! 마치 남다른 목적을 위해 시련에 찬 길만 걸어야 하는 억울한 희생자처럼 여기지 않았단 말인가!

개인영웅주의자―정녕 내 마음속에 자기에 대한, 자기 체면과 명예에 대한 생각밖에 뭐가 더 있었단 말인가! 수령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는 생각, 그 숭고한 목적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있었는가! 오직 자기의 서푼어치 량심을 증명해보이려는 그 일념, 그것을 통해 자기를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복수해보일 그 일념밖에 뭐가 또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그런 비렬한 감정을 기술안을 위한 정열로, 남다른 헌신으로 자부해오지 않았단 말인가!

따져보면 볼수록 비서의 말은 깊숙이 박힌 화살처럼 좀처럼 가슴에서 뽑을수가 없었다. 저절로 무거운 한숨이 쏟아져나왔다.

《아니,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어요?》

이런 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호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오는지 여태 작업복을 입고있는 정아가 방안으로 들어서기때문이였다. 손에는 계산자와 도면말이가 쥐여져있었다.

《예비처리로의 자동권양기때문에 늦었어요. 자꾸 말썽을 부리는군요.》

피곤에 지친듯 하면서도 어딘가 행복스러워하는 기색이였다.

자기 기술안을 도우면서도 공정기사로서의 임무는 꼭꼭 책임적으로 수행하는 그였다. 머리수건을 벗으며 자기 책상으로 다가서던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이쪽으로 돌아서서 방긋 웃는것이였다.

《저, 한가지 제기하랍니까?》

어딘가 롱이 섞인 어조였다.

《제기라니?》

《조수니까 아무 일이나 연구사의 허가를 받아야지요?》

《허가라는건 또 뭐요?》

언제나 그를 마주할 때면 그런것처럼 진호는 이번에도 그의 기분에 말려들고말았다.

《아무래도 제가 평양에 있는 연구소나 과학기술위원회에 다녀와야겠다는거예요. 시험로의 분석수치를 보면 계속 규소분이 높아지거던요. 축열실과 연도에 미치는 작용에 대해서도 미흡한 점이 많고. 마침 장입기도면을 끝냈기때문에 당장은 급한 일이 없어요.》

《…》

진호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자기는 지금 기술안의 운명을 놓고 불안에 휩싸여있는데 이 처녀는 생각하느니 그것밖에 없지 않는가. 마치 이젠 자기가 새 연료안의 주인인듯 했다.

진호도 그가 속으로는 지금 못내 심사결론에 신경을 쓰고있을뿐아니라 누구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있다는것을 모르진 않았다. 놀라운것은 그런 불안을 그가 조금도 내색하지 않는것이였고 그것도 결코 무슨 기교나 잔꾀로써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성과 의지로 극복하는데 있었다. 정아의 그런 의지가 진호에게는 놀라운 한편 부럽기까지 했다.

《이젠 자료들을 빨리 확보해놔야겠어요. 참! 오늘 로장아바이가 책임비서동지를 직접 찾아가 취입시험을 하겠다고 제기한걸 알아요? 이젠 사고가 나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시면서…》

진호도 그 사실을 알고있었다.

낮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너무도 놀라와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로장의 결심을 몰랐던것은 아니였지만 기술안의 운명이 판가리되는 이때에 그런 제기를 들이대리라고는 짐작도 못한터였다.

《가도 되지요?》

《내야 뭐… 책임기사가 승인하겠소?》

《책임기사요?》

갑자기 말끝을 흐린 정아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여느때 같으면 틀림없이 《일없어요.》 하고 자신있게 대꾸할 그였지만 책상우에 있는 계산자만 만지작거렸다.

요즘 그는 확실히 책임기사를 피하는 눈치였다. 해야 할 말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는가 하면 총화때에도 그를 마주보기조차 꺼려했다.

(하긴 아무리 정당한 행동이라 해도 옹색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동문 어째서 전기를 전공했소?》

그의 울적한 기분을 가셔주기 위해 진호는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네?》

《왜 전기를 택했냐 말이요.》

《왜요?》

《전기란 뭘 생산하는것도 아니니까 제품을 놓고 희열을 느낄수도 없고 또 워낙 처녀들한테는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 아니요.》

정아의 두눈은 대번에 동그래졌다.

《생산물이 없다니요? 불과 열은 전기의 생산물이 아닌가요 뭐! 생산물중에서도 가장 값진거지요. 사실 제딴엔 첨엔 남달리 좋은걸 택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전기일이란 잘하면 잘할수록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자꾸만 남의 눈에 거슬리기만 해요.》

못내 유감스러운듯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까지 내쉰 그는 어느새 다시 밝은 기색으로 돌아섰다.

《그래도 좋아요. 어쨌든 어두운 곳을 밝게 해주고 모든것을 뜨겁게 해주니까요. 그렇지요?》

《…》

정아를 대하게 될수록 진호는 그에 대한 어떤 호감과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호감은 자신의 정당성을 행동으로 과시할줄 아는 그 담대한 기질과 올곧은 성격이였고 호기심이란 그처럼 가슴속에는 남다른 정신적아름다움을 지니고있으면서도 그자신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점이였다. 보매 이 처녀는 오직 자기 일에만 급급할뿐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랑 그리고 자기가 남보다 고상하다는데 대해서는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상싶었다. 이 점이 그의 정신적미를 더 보태주고있었다. 확실히 그의 체내에는 남들에게는 없고 또 보이지도 않는 미묘한것이 생기있게 약동하고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정아는 요즘 여느때보다 몇곱절이나 더 행동하고싶고 투쟁하고싶은 열망에 타오르고있었다. 자기앞에 일감이 산더미처럼 쌓아져있기만 바랐고 그속에서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싶었다. 그런데는 단지 자기 내심에서 이는 정신적불안을 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날이 더해지는 새 연료안에 대한 충동때문이였다.

중유절약안을 맡았을 때에는 그 일의 리해관계가 많이는 기철이에게 국한되여있었다면 지금은 자기가 하는 일이 진호의 기술안이라고는 하지만 집단과 전체를 위해서 아니, 보다 숭고한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기쁨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그 역시 지금 기술안의 운명이 위험에 처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더 태연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것을, 자기만이라도 그래야만 진호에게 다소나마 힘을 줄수 있으리라는것을 알고있기때문에 더욱 명랑한 태도를 취하는것이였다.

《평양에 가면 어디부터 찾아가야 방조를 받을수 있을가요?》

정아는 조심스레 그러나 의미있는 눈길로 진호를 바라보았다.

실상 그에겐 평양에 가서 방조를 받는것도 받는것이였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었던것이다. 그것 역시 기본임무 못지 않게 어려운 과제였다.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것인지도 몰랐다.

낮에 그는 설계실에서 태수를 만났었다. 아무래도 평양에 가서 방조를 받았으면 한다는 의향을 말하자 그는 대뜸 제도판을 밀어놓고 자기쪽으로 돌아앉는것이였다.

《마침이요! 그렇지 않아도 골치거리가 하나 있는데…》

사업과 관련된 어떤 부탁이려니 했는데 그는 왕청같은 말을 꺼냈다.

《거기 가면 ××출판사에 들려 현옥이라는 처녀를 만나주오.》

《현옥이요?》

언젠가 진호의 사업일지를 볼 때 거기에 적혀있던 이름이였다는것이 상기됐다.

《누군데요?》

《진호 애인이요. 대학때 말이요. 일전엔 여기까지 오기도 했는데, 글쎄 그 친구가… 어쨌든 그 친구에 비하면 얼싸한 처녀요. 대학적으로 소문난 미인이겠다, 마음은 또 얼마나 곱다구. 그런데…》

그들에 대한 전후사를 듣고난 정아는 어쩐지 한숨이 나갔다. 현옥이라는 처녀에 대한 불만이 솟구치는가 하면 진호가 지내 가혹한것 같기도 했고 처녀의 처지가 리해되는가 하면 또 진호가 너무도 불쌍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느끼지 않을수 없는것은 진호에 대한 새로운 련민의 정이였다.

(너무해! 어째서 그에겐 그토록 가슴아픈 일만 생기는걸가? 도대체 어떤 처녀기에 그와 같은 사람도 리해하지 못할가?)

《거기에 들려 그 처녀의 기색이 어떤지나 알아봐주오. 속시원히 알아야겠단 말이요. 그래야 결심할 문제도 있고 해서. 처녀들은 말이 없이도 그런걸 알아내는 재간이 있지 않소.》

그 처녀를 어떻게 만나며 만나서는 무슨 말을 할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정아는 응했다. 응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한데 사무실에 홀로 앉아있는 진호를 보니 그가 처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알고싶은 충동이 불쑥 일었던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는 진호의 생각이 처녀에게 미치게 하려고 촉수를 조심스레 뻗쳐보는것이였다.

《아무래도 부에 먼저 가야겠지요?》

《아니, 과학기술위원회에 가는게 더 효과적일거요. 거기 가야 연료전문가들도 있고 해당한 자료를 볼수 있을테니까.》

《혹시 우리한테 필요한 론문이 투고된건 없을가요? 출판사 같은데 말이예요.》

《출판사?》

얼른 자기를 마주보는 진호의 표정에서 정아는 그의 생각이 은연중 출판사에 있는 현옥이에게 미쳤다는것을 직감했다. 너무 직선적으로 들이댄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호는 창문으로 다가가 달빛에 우중충한 구내산을 바라보기만 했다.

《출판사에 그런 원고가 투고될게 뭐요? 없을거요. 가지 마오.》

이렇게 혼자소리처럼 되뇌인 그는 문득 전화번호를 대줄테니 전화나 한번 걸어달라고 했다.

《네, 그러지요. 누군데요?》

가로수의 잎새로 새여드는 달빛에 비치였다가는 그늘에 덮이군 하는 진호의 얼굴을 살피며 정아는 다음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녀동생인데 내가 보고싶어하더라고만 말해주오. 시간이 있으면 한번 오라고…》

《…》

무겁고 축축한 밤공기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으려는듯 한 날씨였다. 검은 비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올라 순식간에 연기처럼 변하며 달빛을 가리는것이였다.

어떤 부질없는 상념을 쫓아버리려는듯 갑자기 고개를 쳐든 진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억양으로 말하는것이였다.

《아― 래일은 비가 올가분데?》

그 목소리가 어찌도 처량하고 구슬프게 들리는지 정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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