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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 회

제 6 장

정 련 기

27


병원에서 퇴원해나온 진호는 첫눈에 직장분위기가 달라졌다는것을 직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불과 보름남짓한 기간이였지만 몇달만에 돌아온것 같은가 하면 마치도 생소한 곳에 처음 온것처럼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새삼스럽게 자기의 존재가 고독하고 서글펐다.

공장에서는 취입시험을 중단시켰을뿐아니라 기술부기사장을 책임자로 하는 심사조가 구성되여 새 연료안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실시하고있었다. 기술안에 대한 기술적인 검정과 함께 창안자의 진의도가 무엇이며 혹시 막다른 처지에서 오는 반발적인 소행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없지 않다는것을 느낀 순간 그는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내가 이젠 그런 의심까지 받게 됐단 말인가!)

너무도 절망적인 사실이여서 불만을 터뜨릴수조차 없었다.

병원에 있을 때부터 어떤 타격이 있으리라는것을 공포속에 예감하고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가혹할줄은 몰랐었다.

전에 의심을 받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진정에 대한 의심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의심이 확증된데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였다. 그때는 불만과 분노를 앞날에 대한 희망에라도 걸수 있었지만 지금은 희망은커녕 사소한 기대조차 가질수 없었다. 오직 절망과 불안, 어둑침침한 고뇌만이 자기앞에 도사리고있을뿐이였다.

어떤 일도 시련이 있어야 재미가 있고 시련을 통해서 얻어낸 보람이라야 진정한 보람이라고 여겨온 자기였으나 이제 와선 그 시련이 지긋지긋하기만 했고 어떻게 그렇게 유치한 생각을 했댔는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였다.

그에겐 다른 또 하나의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파악도 없는 기술안을 제때에 다잡지 못해 사고를 내게 함으로써 생산에 지장을 주었을뿐아니라 대중을 옳게 이끌지 못했다는것으로 하여 제철소당위원회로부터 초급당비서가 추궁을 받고있다는 사실이였다. 책벌이 적용되리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은가?》

태수를 붙들고 호소해보았지만 그 역시 아무 대꾸를 못했다. 웬만한 일쯤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그였으나 요즘은 어째선지 그전처럼 활기에만 차있지 않았다. 줄곧 무슨 생각에 골똘하기도 했고 갑자기 속빈 탄식을 터뜨리며 허구프게 웃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멀리했지만 그래도 태수와 정아만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의 의사이긴 했으나 그들 역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다나니 자연히 자기와 같은 처지에 놓일수밖에 없기도 했다.

태수는 그새 자기한테 배당된 투사기자재로 취입기를 만들어놓았을뿐아니라 파괴된 투사기까지 연료를 취입할수 있게 수리해놓음으로써 이젠 한쪽만이 아니라 로의 동서 량쪽에서 새 연료를 취입할수 있게 해놓았던것이다. 그런 그가 더없이 고마왔지만 진호는 되려 이렇게 말했었다.

《이제야 무슨 필욘가? 관두게!》

그때마다 태수는 왕청같은 말만 했다.

《모르겠다니! 난 아무리 따져봐도 리유를 모르겠단 말일세. 그의 말이 하나도 납득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반박을 할수가 없더란 말야. 글쎄 이게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의 말을 부정하면 마치 어떤 원칙을 반대하는것처럼 돼버리니 말야!》

그는 요즘 노상 명식이에 대한 생각밖에 없는듯싶었다. 언젠가 자기가 체험했던 그 불가사의한 감정을 오늘은 태수가 느끼는것이라고 생각하며 진호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거기에 그의 남다른 힘이 있지. 자기의 견해, 그것이 어떤것이라 해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위력이 그에겐 있단 말이네.》

《그렇다고 그가 옳은거야 아니지 않나.》

《옳지 않다니? 그래 그걸 뭘로 증명하겠나. 그가 잘못한게 뭔가 말일세. 왜 사람의 진정을 리해해주지 않는가고? 어째서 마음속에 품은 간절한 마음은 알려 하지 않는가고? 흠! 그땐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아나? 〈혁명하는 사람은 나타난 사실을 놓고 변명하지 않소. 결과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것보다 더 정확한 기준이 뭐요.〉 이런단 말이야. 뭐라겠어? 한마디로 말해 그는 철갑으로 완전무장했지만 우린 벌거숭이 알몸이거던. 그런 사람과 맞서기 위해서는 감정따위나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걸 알아야 해. 그런것은 그와 맞서기 위해 필요한것가운데 겨우 20분의 1에 지나지 않지.》

태수와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런 결론으로 하여 다시 침묵으로 잦아들었으나 정아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마치 새 연료안이 지금 어떤 사태에 처해있는지, 그것으로 하여 사람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보고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는것 같았다. 더우기 놀라운것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새 연료안을 정면에서 공격해나서던 자기가 이렇게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것이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로 되지 않을가 하는 위구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것이였다.

《이걸 봐요. 방금 유도로에서 시험한건데 탄소성분이 세개나 높아졌어요. 배합이 잘못일가요? 아니면 분석이 잘못됐을가요?》

이런 식이였다.

정아가 자기의 기술안을 지지해나섰다는 말을 첨 들었을 때 진호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졸지에 그가 돌변했단 말인가? 아무리 따져봐도 그의 의사를 가늠할 길이 없었던것이다.

(알다가도 모를게 처녀의 마음이라더니… 과연!)

무엇이 그를 돌변케 했는지 몰라도 필경 내막에 있어서는 변하기 잘하는 처녀들의 속성 즉 그처럼 자기와 지향을 같이할것 같던 현옥이가 하루사이에 돌아앉은것과 같은 그런 변화가 정아에게도 일었다고 여겼댔으나 퇴원하여 그를 만나는 순간 진호는 자기의 짐작이 잘못이라는것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절 욕했지요? 용서해주세요. 대신 이제부턴 조수로 일할게요.》

이 한마디 말에 그는 이 처녀가 무엇 하나 마음속에 숨기지 못하는 아주 솔직하고 대담한 처녀라는것을 직감했고 특히 그가 어떤 일시적인 충동으로 취하는 행동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정말 성실한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해야 할바를 다 알고있다는듯 그의 행동은 자못 자신만만했다. 짬시간마다 시험소에 가서 분석을 하는가 하면 보충연료들이 연료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자료를 안받침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행동에는 인위적인 진실을 나타내기 위한 과장된 표현이 조금도 없었을뿐더러 다만 하던 일을 계속하는듯 한, 그것도 무척 흥미를 가지고 하는듯 한 인상뿐이였다. 당돌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한 그의 행동이 놀랍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더없이 고맙기도 했다.

이제야 무슨 소용이냐고, 괜한 고생은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싶었지만 막상 그 말을 하려니 그것을 표현할 말마디보다 사람들한테서 멸시를 받고있는 자기의 비참한 처지가 되새겨지면서 울분이 솟구쳐올라 차마 입을 열수가 없었다.

이 두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멀찌감치 물러나 싸늘한 눈길로 자기를 지켜보고있었다.

하지만 어느쪽이라고 찍기 어려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책임기사 기철이였다.

진호는 누구보다 그가 자기에게 랭담한 태도로 나오리라고 여겼다.

그런데는 워낙 새 연료안에 대해 품고있는 의견도 의견이지만 중유절약안을 배반하고 자기의 새 연료안에 합세해나선 정아의 괘씸한 처사가 그를 더욱 그런 감정에 북받치게 하리라는것은 당연한 리치였기때문이였다. 한데 그는 침묵으로 아니, 도리여 호의적으로 자길 대하는것이였다.

언제나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그가 마주볼 때면 마치 자기가 온당치 못한 계책을 꾸며 그에게 타격을 가하게 한듯 한 느낌이 들었고 그 역시 이것을 속으로는 느끼고있지만 지나친 격분으로 하여 터놓지 못하고있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으로 당황하게까지 되였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가. 진실로 뭔가 깨달아설가? 아니면 가슴속에 맺힌 원한때문일가?)

도저히 종잡을수 없었다. 보매 그는 어떤 사소한 실수로 하여 더 큰 오해나 받지 않을가 하여 조바심하는듯 한 눈치였는데 이것이 진호에게는 더 난처한 노릇이였다.

확실히 자기와 책임기사사이에는 표면상으로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사업을 토론하면서도 속심으로는 상대방을 경원하고있어 진지한 태도로 바라보지 못하는것은 물론 지어는 싸울래야 싸울수도 없는 그런 관계에 처해있었다.


《오늘은 나하고 같이 가지 않겠나?》

휴계실을 나서던 진호는 방금 목욕을 하고와서 옷을 갈아입던 로장이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뒤돌아보았다.

《어델 말입니까?》

《글쎄 따라만 오게. 혹시 한잔 있을지 알게 뭔가!…》

땀방울이 맺혀있는 그의 얼굴에 얼핏 한줄기 미소가 스쳤다. 입원해있은 자기를 생각해서 어떤 별식을 마련해놓고 집으로 가잔다는것을 짐작 못한 진호가 아니였으나 이 기회에 내심에 이는 고충을 털어놓고싶었던 그는 로장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사실 로장을 마주할 때마다 진호는 은연중 집에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면서 속심을 털어놓고싶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외모와 체취는 전혀 달랐지만 가까이하면 할수록 점점 아버지와 류사한 점을 찾아보게 되였고 그리하여 저도 모르는새에 아버지처럼 대하게 되는것이였다.

일전에 투사기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던 자신을 뉘우치며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실 제가 투사기를 쓰자고 고집한데는 심사에 어떤 지장이 있을가봐…》 하고 우물거리자 《됐네! 알면 됐어.》하며 솥뚜껑같은 손을 불쑥 내미는것이였다.

아버지도 잘못을 뉘우치는 자기앞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엄중한것이라 해도 언제나 이렇게 너그러웠으며 또 이처럼 행동했던것이다.

진호는 로장과 아버지사이에 마치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뉴대가 형성돼있는것 같았는데 그것이 모르긴 해도 계급적바탕에 깊숙이 뿌리박은 인간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그런 동질적인 감정이 아닌가싶었다.

한데 무엇때문인지 로장은 요즘 수명이 지난 로를 그냥 유지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고있었다. 흔히 수명이 차기 전부터 로를 수리해달라는것이 로장들의 일반적인 요구인데 무슨 변덕인지 계획을 이미 수행한데다 보수날자가 지났는데도 한사코 가동을 고집하는것이였다.

《흠! 이젠 도급에 눈이 어두웠구려. 골고루 노나먹어야지 혼자 배부르면 되우?》

이런 시비도 없지 않았으나 그는 끄떡도 안했다.

실상 따져보면 로가 낡으면 그만치 잔손질이 많아질뿐더러 제강시간도 턱없이 길어지기때문에 도급이래야 몇푼 붙지도 않았다. 그래서 용해공들도 속으로는 달갑잖아했으나 그런 내색을 하면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터여서 벙어리 랭가슴앓듯 속으로만 끙끙거렸다.

《아바이도 절 무척 노엽게 생각하시지요?》

큰길에 나선 진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가늠할수 없는 로장의 덤덤한 표정을 지켜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자기 기술안을 위해 투사기를 파괴했지, 로를 마사먹었지, 거기다가 비서동지까지 피해를 입게 했으니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로장의 모습에서 그가 이미부터 자기의 속심을 짐작하고있었을뿐아니라 바로 그래서 이런 기회를 만들었다는것을 깨달을수 있었다.

《나도 자네 심정을 모르는건 아닐세. 고민이야 있겠지.》

달빛에 어려 환영같이 어른거리는 나무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우택은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왜 가슴이 아프지 않겠나.》

그의 다심한 목소리에 진호는 어쩐지 목이 메여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룩하려던것에 비해 너무나도 가혹한 결과만 차례지기때문인지 아니면 그 결과가 이젠 더는 어떤 희망조차 품게 하지 않기때문인지.

오직 하나의 충동, 자기는 결백하며 때문에 언제든 꼭 그것이 증명될 날이 있으리라는 그 하나의 신심으로 일해왔지만 증명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여 점점 더 파렴치한 인간으로만 인정되는것이 아닌가! 내가 과연 그렇게도 비루하고 무뢰한 인간이란 말인가! 솟구쳐오르는 격정을 삼키며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이, 전 요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나 살아가느라면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지켜야 할 도덕적의무가 있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량심이 없는 인간이라 해도 그 의무의 최소의 량은 지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의 도리라구요.》

《도리?》

우택은 마치 진호를 처음보는 사람이기라도 한것처럼 찬찬히 바라보았다.

《도리라… 자넨 지금 자기 기술안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고생시키기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것 같은데 내 생각엔 옳은 처사가 아닌것 같네.》

이때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오던 사람이 속도를 늦추며 로장에게 자기네 로가 지금 무슨 작업을 하더냐고 묻는 바람에 로장은 그쪽을 보지 않을수 없었다. 용해공이라면 누구나 출근할 땐 자기 로의 공정을 묻는것이 상례로 되여있었다.

《한창 쫄이구있네.》

《아니, 벌써요? 그럼 올라가자마자 또 한물 뽑아야겠군! 좋―다! 넨―장!》

대뜸 엉치를 하늘로 추켜세운 그는 갑자기 자전거선수라도 된것처럼 허리를 새우처럼 꼬부리고 신명나게 페달을 밟아댔다.

《어쨌든 자네가 생각하는건 도리가 아니야! 뭐라고 할가? 눈치? 그래, 눈치지!》

《눈치요?》

《암, 눈치구말구, 사람들이 자길 어떻게 볼가 하는 눈치!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행동해야겠다는 눈치란 말일세.》

아버지가 하던 말이 회상됐다. 남들이 자길 보고 뭐라겠는가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눈치는 볼 필요가 없다고,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행동의 결과 오늘은 또 이런 처지에 빠지지 않을수 없게 되였는데 로장은 또다시 눈치를 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저의 립장에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래도 계속 자기 주장을 고집해야 한다는겁니까? 저도 첨엔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의심도 받고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눈을 꾹 감고 일에만 달라붙었지요. 그걸 실현하는것이 자기를 증명해보이는거다 하고 말입니다. 참된 량심은 어느때든 승리하기마련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어데 있습니까. 어디 있나 말입니다.》

또 한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수고했다고 인사를 했으나 우택은 이번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눈치를 봐서야 안되지. 사람이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불구가 되고마는 법이네. 왜냐하면 마음의 주추를 잃어버리니까 결국 허수아비가 되고말지. 남의 말을 듣고 자기를 가늠할수밖에 없게 된단 말일세.》

진호는 로장의 말을 다는 리해하기 어려웠으나 그가 말하는것과 자기가 생각하는것의 차이만은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가 생각하는것은 한갖 평범하고 범속한 범주에 속하는것이라면 로장이 말하는것은 모르긴 해도 그보다 훨씬 숭고한 뜻이 깃들어있는것 같았다.

《그 주추란 뭐겠나? 그건 바로 우리 수령님께서 무얼 바라시는가를 알고 거기에 자신을 내세울줄 아는것, 그이께서 의도하시는대로 행동할줄 아는 그것이 아니겠나. 그래야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나갈수 있지. 어버이수령님께 바치는 이 깨끗한 마음, 이것이 바로 사람의 도리고 량심이 아니겠나 말일세.》

진호는 어떤 새로운 충격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자기가 여태껏 바라왔지만 이룩할수 없었던것, 그래서 포기하려는것을 로장이 부인하고있다는 사실은 어쩐지 반발을 촉발케 했다.

(과연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단 말인가!)

수령님께서 야금의 주체화를 놓고 그처럼 마음쓰신다는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괴로움에 모대기던 자기였던가. 바로 그걸 해결하려고, 기어이 원유를 대신할 우리 나라의 새 연료를 만들어낼 하나의 일념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그 하나를 위해 4년을 고스란히 바친 자기가 아니였던가! 또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고통을 일축하고 현장으로까지 뛰쳐나온 자기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어떻습니까? 누가 그걸 리해해줍니까? 도와주기나 하나 말입니다. 도리여 비웃고 손가락질 하다못해 이젠… 자― 이런데도 여기에 무슨 량심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무슨 성실한 마음이 필요하나말입니다.》

걷잡을수 없는 흥분과 어떤 자학적인 감정으로 하여 눈앞에 안개가 서리였다.

《이 사람아! 진리가 명백한것이긴 하지만 즉시에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4년이 아니라 일생이 걸릴수도 있지. 아니, 일생이 걸려서도 못할수도 있지. 한데 문제는 뭔가? 몇년이 걸리던 그 진리가 확증된 다음에 행동한다는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걸세. 진리가 진리로 되기 전에 느껴야 할뿐아니라 그렇게 행동까지 하는게 보람이 있지. 사람은 바로 그런 재미에 사는게 아니겠나.》

《?!》

《실은 나도 그 재미를 한번 볼가 해서 수명이 찬 로를 그냥 유지하고있는걸세. 자네의 새 연료를 취입해볼가 해서 말이네.》

진호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로장의 말에 대한 움직일수 없는 힘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말을 더욱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아바이가 그렇게 생각하신다 해도 누가 알아줄줄 아십니까? 그런 마음을 지지해줄줄 아나 말입니다. 보십시오! 지금도 아바인 그것으로 해서 시비를 듣고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고있지 않나 말입니다.》

《그건 나도 아네. 그렇지만 난 자네처럼 눈치를 보진 않아! 결심을 달리 하지도 않고!》

어딘가 어둠에 휩싸인 한곳을 응시하며 걷고있는 로장의 모습이 진호에겐 전혀 딴사람처럼 여겨지는것이였다.

《물론 사고심의도 있고 책임추궁도 있겠지. 그렇다고 량심이야 저버릴수 없지 않나. 안 그런가?》

《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옳다는걸 믿을수가 없구요.》

진호는 자기의 목소리가 어느덧 항변이라기보다 이미의 타성에서 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고 그럴수록 어떤 격정으로 하여 가슴이 떨리였다.

한마디로 말해 로장이 말하는 량심이란 사람이 사람다울수 있는 근본조건, 즉 그 사랑을 지탱케 해줄뿐만아니라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으로 갱생케 해주는 힘,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까지도 변함없이 지켜야 할 마음의 기둥이라는것이 아닌가!

사람은 어떤 얘기를 통해 자기가 깨닫지 못했던 힘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을 새롭게 느껴서가 아니라 그 힘이 자기한테 있다는걸 깨우쳐주기때문인것이다. 그가 자기에게 새로운것을 주입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있는 좋은 점을 깨닫게 해주기때문에 그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것이다.

진호는 로장에 대해 바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로장의 인격이 암암리에 주는 영향력이 바로 그런 능동적인 힘을 자기한테 불러일으키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라 어떤 충고나 책망까지도 마음속에서 새로운 의욕을 더욱 강하게 불어넣어주는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누가 옳은가 어디 오늘 밤새껏 론쟁해보세!》

단단히 벼르는것 같기도 하고 빙그레 웃는것 같기도 한 로장을 바라보던 진호는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것처럼 비칠거렸다. 얼른 진호를 부축한 우택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길이 험하네. 그렇지만 저 굽인돌이를 지나면 한결 낫지, 포장도로니까.》

그러면서 로장은 진호의 어깨를 철썩 갈겼다.

로장네 집은 소박하고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친근미가 넘쳐흐르고있었다. 그것은 어느 집에서나 일부러 흉내낸다고 될 성질의것이 아니며 따라서 흔히 볼수 있는것도 아니였다. 어린애들이 많은 집, 모든것이 흩어져있으면서도 루추한감을 주지 않는 집, 손님이라 해도 격식을 차릴줄 모르는 집, 그런 집이 바로 로장네 집이였다.

현관에 들어서던 우택은 무슨 기미를 느꼈는지 갑자기 진호를 돌아보며 조용하라고 손짓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느라니 건너방에서 로장의 두 손자, 열둬살짜리와 일곱살쯤 되여보이는 놈이 된소리를 지르며 맞붙어싸우고있었다.

찰싹찰싹 따귀를 갈기는 소리가 나더니 두놈은 권투선수들처럼 방어태세를 취하고 상대방에게 일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그러다가 큰놈이 동생을 문밖으로 홱 밀쳐버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문이 열리지 않게 걸상으로 막아놓았다.

《늘 이런 판일세.》

미간을 찌프리긴 했으나 웃방을 흘끔 바라보는 품이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나 하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밖에서 작은 놈이 방문을 두드렸지만 큰놈은 태연하게 앉아서 가위로 종이를 오리기 시작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멎더니 이번에는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 열지 않겠어?》

또다시 주먹으로 힘껏 두드리고는 방안의 반응을 기다리는듯 잠잠했다. 그래도 대꾸를 안하자 곧 되알진 소리가 튀여나왔다.

《문 열어라. 요 짱구새끼야.》

진호는 웃음이 터져나오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짱구란 말을 듣고보니 정말 방안에 있는 큰놈의 머리가 앞뒤로 삐져나왔을뿐아니라 하관이 길고 뾰족했기때문이였다.

한참동안 잠잠하더니 이번에는 열쇠구멍으로 간사스런 목소리가 노래소리처럼 새여들어왔다.

《짱구, 짱구, 길짱구―》

그 소리에 큰놈은 가위를 방바닥에 내던지더니 문앞에 세워놓은 걸상을 치우고 힝하니 밖으로 달려나갔다. 복도에서 뺨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작은놈은 도망을 치며 온 집안이 떠나갈듯이 비명을 올렸다. 그러다가 현관에 서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하자 대번에 그 품에 콱 안겨들었다.

《할아버지, 짱구 봐요. 막 때려요.》

《그래? 어디 요 짱구놈 오기만 해라. 혼쌀낼라.》

보매 로장은 언제나 작은놈 편인 모양이였다. 동생이 할아버지한테 안긴것을 보자 큰놈은 더 달려들지 못하고 주밋거리다가 옆에 서있는 진호를 보고는 얼른 허리를 굽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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