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17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17


책임기사실의 방문을 열자마자 정아의 눈에 비친것은 목에 수건을 두른채 책상을 내려다보고있는 책임기사의 모습이였다.

그의 이마에는 아직도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러나 그가 왜 고개를 숙이고있는가를, 즉 무엇을 보고있는가를 안 순간 대뜸 바늘끝같은 비애가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것이였다.

(역시 도면이구나!)

그의 책상우에는 커다란 도면이 펼쳐져있었다.

어떤 반감과 서글픔이 일시에 솟구쳐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긴 뭐 나같은건, 나같이 단순하고 뛰여난 점이라고는 없는 처녀야 한갖 사업대상으로밖에는 달리될수 없지! 없고말고!)

저절로 목이 메여올랐다.

《자, 이쪽으로 오오. 이리 와서 도면을 좀 보오.》

정아의 내심이 어떻다는건 알지도 못하고 기철은 자못 반가운 기색을 지으며 자기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그러나 정아는 그가 가리키는 의자가 아니라 자기의 손목시계만 얼핏 내려다보았다.

《왜 무슨 일이 있소?》

《녜, 누구와 좀 만나려구요. 만나자고 해서요.》

《?…》

자기를 마주 쏘아보는 정아의 눈길과 더우기 여느때없이 싸늘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듯 기철은 정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더없이 명랑하다가도 이렇듯 리유도 없이 새침해지군 해서 도저히 갈피를 잡을수 없다는 기색이였다.

사실 왜서인지 기철은 정아를 마주할 때면 이렇다 할 리유도 없이 당황해질 때가 있었다. 어떤 일감을 놓고 그 수행정형에 대해 따지고 새로운 과업을 주는것은 자기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자기의 내심을 읽히우는것 같은 그런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그 리유가 무엇때문인지는 저로서도 딱히 알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할수 없지. 후에 만나는수밖에. 래일 얘기하기요.》

바로 이런 점, 언제나 자기를 남들과 똑같이 대해주는 이 점이 정아에게는 더 부아를 돋구는것이였다. 차라리 갈수 없다고 하든가 누구를 만나느냐고 물어보기라도 해도 좋으련만!

《그래야 뭐 이 도면에 대한 계산이겠지요?》

당장 나갈듯이 출입문쪽으로 돌아선 정아였으나 나가지는 않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아니, 그런게 아니요. 무슨 과제나 지시가 아니라 내 개별적인 부탁때문이요.》

(개별적인 부탁?)

정아는 한걸음 책상앞으로 나서며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첨 보는 도면이였다. 대체의 륜곽으로부터 선을 따라가며 구조들을 더듬어나가던 그는 갑자기 온몸이 긴장되면서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니, 이건?)

자기의 짐작을 확인할양으로 그는 도면의 맨밑에 있는 명기란에 시선을 옮겼다.

《로내에서 열관리개선의 새로운 대책(중유절약안)!》

틀림없었다. 바로 그 도면, 자기를 그토록 흥분시키던 그 기술안이였다.

(이걸 어떻게 하자는걸가?)

가슴속에 도사렸던 착잡한 감정은 삽시에 사라져버리고 까닭모를 의혹이 서려들기 시작했다.

《이 기술안을 동무가 좀 맡아줄수 없겠는가 해서 그러오.》

(이 기술안을?)

정아는 더욱 어리둥절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찬탄해마지 않는 기술안, 고심참담한 노력을 다 바쳐 마침내 황홀한 결실을 눈앞에 둔 기술안이 아닌가! 그걸 무엇때문에 이제와서 나한테 인계한단 말인가? 단번에 소화하기에는 너무도 아름찬 충격으로 하여 그는 숨이 다 막혔다.

《실은 다른 과제가 제기돼서 그러오. 얼마전에 새로운 산소취입안을 제기했더니 공장에서는 생산성을 담보하는 안이라고 당장 그것부터 추진하라는거요. 하긴 이젠 중유도 풀렸기때문에 모든 력량을 생산에 집중하는것이 응당한 일이 아니겠소. 그렇다고 그것때문에 이 기술안을 그냥 묵여둘수는 없고. 그래서 따져보던 끝에 난 바로 동무가 이 기술안의 적임자라고 생각했소. 누구보다 공감해온것도 그렇고 리해하는것도 그렇고, 특히 이 기술안의 고충이 바로 전기장치의 도입에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도 동무이상 적임자가 없더란 말이요.》

《…》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도 놀라운 사실이여서 정아는 기철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불만과 절망의 나락으로부터 대번에 행복과 환희의 절정에 솟구쳐오른듯 한 느낌이였다. 기술안자체가 가지는 의의도 의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한테 맡겨주는 그의 의도에는 다만 전기를 전문했다는것만이 아닌, 자신이 여태껏 그토록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내색조차 할수 없었던 그 살뜰한 온정이 스며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하여 더욱 가슴이 터질것 같았던것이다.

(누구보다 공감해온것도 그렇고 리해하는것도 그렇고…)

정아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틀림없이 이 도면에 자기의 섬약한 마음의 매듭을 풀어주는 그의 따뜻한 정이 간직되여있으리라는것을 믿었다. 아니, 믿고싶었다.

심술사나운 론리의 목소리는 이 사실을 믿을만 한 근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우겨대는것이였으나 그의 감정은 이 모든 반박을 물리치고 한사코 《그렇다! 그렇다!》하고 자신있게 속삭이는것이였다.

흔히 누구나 소망이 간절하면 할수록 사소한 일상사도 줄곧 거기에 결부시켜 생각하기 마련이고 그것을 서로 련관시키면 시킬수록 또 틀림없이 그럴것이라는 확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법이다.

《어떻소? 맡아주겠소?》

《…》

한마디로 대답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물음이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과제가 아니기때문에 내키지 않는걸 억지로 맡을수야 없지 않겠소. 때문에 나도 결코 강요하는건 아니요.》

기철은 방금 자기를 쏘아보던 정아의 눈길을 되새기며 못내 조심스런 어투로 말했으나 반대로 정아는 자기의 태도가 그처럼 야무진것이 바로 그자신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그만치 열렬하기때문이라는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책임기사가 여간만 안타깝지 않았다.

《하겠어요, 해보겠어요.》

정아는 어쩐지 당장 눈물이 쏟아져내릴것 같아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고맙소.》

《그런데 제힘으로 감당해낼수 있겠는지…》

《하긴 쉬운 일이 아닌것만은 사실이요. 그렇지만 난 동무가 꼭 해결해내리라고 믿소.》

《그래도 옆에서 도와주셔야 해요.》

《물론 그래야지. 그러나 내가 출장을 떠나게 되면 그땐 진호동무가 방조하게 하려고 하오. 이 기술안의 방조가 그의 새 연료안 수행에서도 도움이 될테니까.》

(진호?)

진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정아는 내심 언짢았다.

그의 눈으로 볼 때 진호는 아무 일에나 지나친 열정을 시위하려는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때에 따라서는 리해할수 없으리만치 괴벽한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아무때나 자기의 주장을 고집해나서는것을 볼 때면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도 제 생각밖엔 없을가 하는 불만을 품지 않을수 없었다.

(어쨌든 그의 도움은 받지 않을테야. 아니, 다치지 못하게 할테야. 이것만은 기어이 내 힘으로 해내고야말테야! 보란듯이!)

속으로는 이런 강심을 먹으면서도 그는 전혀 다른 말을 뱉었다.

《그럼 차라리 그 동무한테 맡기는게 어때요? 아무래도 그 동무가 저보다야…》

《그렇지만 그 동무야 직장에 갓 온 사람인데다가 자기 과제가 있지 않소.》

이렇게 대답한 기철은 이 처녀가 이제 와서 또 발딱 뒤집지나 않을가 하는 위구에 사로잡혀 조심스레 쳐다보다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이 친구가 이젠 오겠는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기철은 그제야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내가 정신이 없구만! 내 얘기만 하느라고 동무가 누구와 만난다는것도 깜빡 잊고… 이제라도 어서 가보오.》

《됐어요. 후에 만나지요 뭐.》

《?!》

너무나도 흔연한 대꾸에 기철은 또다시 얼떠름해졌다. 과연 알다가도 모를 처녀다.

이때 이마에 붕대를 감은 진호가 모자를 벗으며 방안에 들어섰다.

정아가 있는것을 본 그는 일시 멈칫 했으나 책임기사의 표정을 살피고는 들어가도 무방하다고 느꼈는지 성큼성큼 책상앞으로 다가서는것이였다. 붕대는 붕대대로 동였지만 아직 눈섭우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두군데나 있었다.

그날 우연히 6호연도옆으로 지나가던 축로공들이 아니였다면 자기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처지에 있었다는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는것 같았다.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는지 작업복은 온통 검댕이칠이였다.

책상을 가운데 놓고 두사람을 마주앉힌 기철은 례의 그 단정한 목소리로 새로운 과제, 산소취입법을 선행할데 대한 공장의 요구로부터 중유절약안을 인계하기로 한 결심을 말하고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부턴 이 기술안을 정아동무가 맡아하는 조건에서 진호동무가 옆에서 도와주었으면 해서 그러오. 물론 연료안추진에는 지장이 없도록 하면서 말이요. 내가 이걸 권고하는건 중유절약안을 빨리 수행하자는데도 있지만 진호동무의 기술안 완성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믿기때문이요. 어떻소?》

《…》

진호는 줄곧 책상만 내려다보았는데 보매 거기에 펼쳐진 도면을 보고있는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집중시키고있는게 분명했다. 다시 시선을 옮겨 창밖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그제야 대꾸할 말이 생각나기라도 한것처럼 천천히 기철이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오래동안 생각한데 비해서는 너무도 단순한 대답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난 반댑니다.》

《?!》

기철은 물론 정아까지도 아연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책임기사동문 이 중유절약안을 방조하는 과정이 나한테 도움이 될거라고 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난 벌써 몇번이나 이 기술안을 검토해보았지요. 두 기술안이 다 연료를 해결하기 위한것이긴 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다릅니다. 하나는 중유를 인정하면서 절약하자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유를 무시하고 새 연료를 쓰자는겁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반대하는 리유가 내한테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반대하는건 이 중유절약안이 우리의 현실에 피동적이기때문입니다.》

《피동적이라니?》

《나도 이 기술안의 착상이 기발할뿐아니라 실현될 가능성도 풍부하다는건 압니다. 그렇지만 우린 어디까지나 우리의 연료로 제강할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렵다 해도 말입니다.》

실로 천만뜻밖이였다. 이 기술안에 대한 뭇사람들의 평가를 무시하는것은 둘째치고라도 그만치 현실을 식별할줄 아는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것이 기철에게는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놀라움쯤은 누를줄 아는 사람이였다.

《물론 나도 동무의 의도를 모르는건 아니요. 나 역시 어디까지나 우리의 연료에 의한 제강조업, 이게 현실이 바라는 절박한 문제라는건 아오. 그렇지만 그건 아직 이렇다할 성과가 없고 또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 일인지 모르지 않소. 그래 빠른 시일에 해결할 전망이라도 있소? 바로 그래서 당에서도 중유를 우리한테 우선적으로 풀어준게 아니겠소.》

진호는 책임기사에게 자기 견해를 더 명백히 이야기하고싶었다. 자기 견해를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그가 자기 주장을 계속 피력할 필요는 없어질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 문제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너무도 판이하다는것을, 그래서 자기가 아무리 설명한대야 도저히 서로가 리해에 도달할수 없는 일이라는것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물고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런 조건에서 그중 합리적인 생산방법이 뭐겠소? 한방울의 중유라도 절약하면서 생산하는 이것이 우리한텐 당면한 과제가 아니겠소.》

《옳습니다.》

진호는 아무래도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지 않을수 없다는것을 깨닫고는 기철이를 마주보았다.

《론리적으로 따지면 그럴수도 있지요. 그러나 난 이런 경울수록 오히려 우리가 중유를 하루빨리 쓰지 않는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력량을 집중해서라도 말입니다. 우린 언제나 자신이 자기를 어쩔수 없는 사태에 빠뜨려놓고도 거기서 헤여나오려고도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되려 거기에 만성이 돼버리군 하지요.》

《?!》

기철의 눈길이 금시 꼿꼿해졌다. 이렇게까지 엇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한 그였다.

《그러니까 동문 자기 기술안만이 가장 현실적이라는건가요?》

이렇게 쏘아붙이고 진호를 노려보는 정아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모독적이고 혐오스러운것이 있었다.

《그렇소. 난 그렇게 생각하오.》

《전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다가 포기한 그 안이야말로 가능하지 못할뿐더러 무모한 안이라고 보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거야 사람나름이지요. 동무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볼수밖에!》

진호의 이 말은 대번에 정아의 비위를 거슬렸다. 자기에 대한 로골적인 멸시를 느낀 그는 자기가 받은 아픔에 대하여 앙갚음할만 한 신랄한 문구를 궁리해내여 툭 내쏘았다.

《좋아요! 저 역시 동무같은 사람이 제 말을 리해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아요. 여기엔 분별과 리성이 필요하니까요. 물론 중유절약안에 대한 방조도 바라지 않구요.》

흔히 처녀들이 모욕적인 언사를 썼다고 생각할 때 쓰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정아는 진호를 쏘아보았는데 그의 눈길은 마치 《나를 더는 무시하지 말아요. 그랬다간 가만두지 않겠어요.》하고 단단히 벼르는상싶었다.

사실 그는 지금 진호에 대한 분노로 하여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의의있는 기술안을 무시하는것도 그렇지만 그토록 자기에 대한 따뜻한 정이 스며있는것을 무자비하게 묵살하려는데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던것이다.

(흥, 제가 뭐라구…)

진호의 방조를 달가와하지 않던 그로서 이런 거절을 응당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것이나 그의 의도가 어떻다는것을 안 이 마당에 와서는 오히려 더없이 분하기만 했다.

한편 진호는 진호대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 처녀가 이처럼 되바라지게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저 웃음많은 명랑한 처녀겠거니 했는데 보통 암팡진 처녀가 아니지 않는가! 마치 영문모를 뺨을 한대 얻어맞은것 같기도 했다.

(어째서 중유절약안에 그토록 큰 의의를 부여하는걸가? 하긴 내 기술안이 어떤건지 모르니까 이런 절충안에도 매혹될수밖에. 다른게 없어! 하루빨리 내 기술안을 완성하는것밖에! 그래서 실물로 보여주는수밖에!)

이전페지   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