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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회

제 2 편

제 2 장

4


서울 인의동에 일본놈들이 쓰던 전매국청사가 있었다. 단층이지만 꽤 쓸만 해서 거기에 공과대학교사를 정했다. 김동일이외에 몇명의 교원지망자들이 나타났다. 대학이나 전문학교를 중퇴했던 학생들,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온 청년들이 공부하겠다고 모여왔다. 그런데 책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자체로 강의안을 짜고 설명으로 실험을 대신 할수밖에 없었다. 담양에서 서울로 올라온 리승기의 안해와 아이들은 동숭동에 있는 왜놈교원이 쓰던 집에 림시로 들었다.

그무렵 미군정청에서 《국대안》문제를 내놓았다. 말하자면 국립서울종합대학안에 모든 대학들을 통합해넣겠다는것이다. 법정전문도 법대와 합치고 리과대학과 리학전문을 합치는 식인데 기본목적은 진보적교수와 학생들을 내쫓고 대학을 군정청이 하나로 통제하자는것이였다. 국대 총장으로 미국인 안스테드를 앉혀놓았는데 그자는 한낱 건달배에 지나지 않았다.

《국대안》은 나오자바람으로 민주세력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쳤다.

공과대학에서도 그것을 받아무는 교원과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리과대학을 꾸리고있던 지태규가 리승기를 찾아왔다. 그는 신공덕에 있는 리공과건물의 지하실에서 쓸만 한 책들을 꺼내올수 있을것 같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구 군정청에서도 파손된 책과 실험기구를 변상해주겠다구 하네. 그래서 목록을 작성하라는구만.》

리승기는 어지간히 반가왔다. 어떻게 누구를 통해 지태규가 이런 주선을 하게 되였는지 하는것에는 미처 주의가 돌아가지 않았다.

《국대안》반대투쟁으로 어수선한 속에서도 무엇보다 학교에 책과 실험기구가 필요했던것이다.

목록을 작성해서 군정청에 제출하려는데 미군정청 문화계통담당의 한 대표가 어느 식당에서 목록을 놓고 마주앉자는 전달을 보내왔다.

조용한 장소를 택하는것 같았다. 변상목록을 하나하나 따져볼 심산인 모양인데 차라리 그렇게 과학적으로, 실무적으로 변상요구를 받아들이려는것이 아무튼 좀 믿음이 있어보였다.

본래 경성제대 리공학부에 관계했던 사람들로부터 보증까지 받아 목록은 법적인 체모까지 갖추어졌다. 한데 그것이 수량으로만 작성되였지 금액상으로는 얼마나 되겠는지 알수가 없었다. 점령군의 딸라와 일본돈의 교환가치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곳은 음악도 춤도 없는 조용한 다방이였다. 지태규의 안내로 리승기는 거기로 갔다. 도중에 전차고장으로 지체되여 약속보다 몇분 늦어 도착하였다. 찦차를 타고온 군정청대표와 통역은 제 시간에 온것 같았다.

대표는 사복차림이여서 그 군사직급은 알수 없었다. 차라리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있어서 그와 마주앉기가 다소 수월한듯싶었다. 통역은 조선사람이였다. 대표는 자기를 스미스라고 불러달라면서 줄곧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우면서 그들을 식탁으로 안내하였다.

처음에 리승기는 스미스가 짓는 미소의 뜻을 종잡을수 없었다. 허나 이내 그것이 실무적이고도 외교적인 의미이외 아무것도 아니며 상대방앞에서 무엇인가를 가리기 위한 투명치 못한 너울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미스는 유리고뿌에 맥주병을 기울이였으나 리승기가 마시지 않는다고 하자 차를 가져오게 하였다.

스미스가 맥주잔에 입을 갖다댈 때마다 그 유난히 까부라진 매부리코의 끝머리가 맥주잔을 걸고있는듯 한 느낌이 들군 하였다. 이 스미스라는 미국인은 맥주를 별로 마시지 않고 그저 대였다 떼면서 주로는 생각에 더 머리를 쓰는상싶다.

스미스는 미소를 띠우며 입을 열었다.

《우린 선생의 이름을 전부터 알고있습니다. 카로사스가 나이론을 발명한 그 이듬해 선생은 새로운 합성섬유를 발명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는 통역의 말이 끝나자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결국 전쟁바람에 여기 조선반도에까지 오게 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전공이 무엇이라는것을 밝히려고는 하지 않고 목록을 보자고 청했다.

그때까지 리승기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았고 지태규가 가끔 영어로 한마디씩 끼여들군 하였다.

스미스가 목록의 종이장을 번지며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하자 통역이 곁에서 설명해주었다.

리승기와 지태규는 차잔이나 맥주잔을 들어 입에 갖다대였다간 떼군 하면서 기다렸다. 리승기는 이따금 생각이 나서 지태규에게 무엇이 빠진것 같다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하면 지태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까짓것이 중요치 않다는듯 한 기색이다.

마침내 스미스는 목록의 마지막장을 넘기고나서 불만도 찬성도 아닌 그 뜻모를 미소를 띠운채 만년필로 목록의 뒤등에 얼마의 수자를 뻑뻑 써서 식탁우에 내놓으며 보이였다.

《금액상으로는 대략 이만한 달러어치가 되겠습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의 자신심에 찬 말처럼 스미스의 어조는 확고하게 울리였다.

리승기는 놀래였다. 상대방이 공업경영학전문가 아니면 공과계통에 밝은 사람으로 보였다.

《우린 인차 변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걱정마십시오.… 그런데 한가지 만났던 기회에… 말하자면 〈국대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러면서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 안스테드를 즉 미국사람을 총장으로 임명한것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군정기간에만 실시하는 할수 없는 조치이니 량해하는것이 좋겠습니다.》

리승기는 림기응변이 전혀 없는지라 정면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긍정해줄수도 없어 난감한 처지에서 어쩌지 못하는데 그래도 이때 지태규가 고맙게도 그를 구원해주었다. 지태규는 직접 영어로 말했다.

《스미스선생, 오늘은 정치적성격을 띤 담화는 하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두사람사이에 미리 어디선가 담화가 진행되였었다는것을 피뜩 눈치챘으나 어쨌든 리승기는 이 순간에 다행한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지, 그렇지. 호상 자기의 의무를 성실히 리행하는 방향에서 노력해봅시다.》

바로 이때 리승기는 정식으로 미국인대표에게 신공덕청사문제를 상기시켜 빠른 시일안에 그것을 내주기 바라는 요청을 내놓으려고 했다.

변상목록을 작성해오면서도 사실상 제일 중요한 그 문제를 가슴속에 품지 않을수 없었던 리승기는 마침내 이렇게 말을 꺼냈다.

《한가지 요구할게 있습니다. 군정청에서도 이미 알고있는 문제입니다만 신공덕에 있는 리공과청사에서 미군히스테리병원을 빨리 철수시켜달라는것입니다.》

통역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스미스의 얼굴에서 한순간 미소가 사라지였다. 그러자 그 매부리코가 더 날카롭게 구부러져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 반대도 긍정도 아닌 그 뜻모를 얇은 미소가 다시 떠오르면서 미간에 잡히던 가느다란 주름살까지 말끔히 펴지였다.

《그 문제는 저의 전문이 아닙니다만 충분히 그 의사가 하지중장각하에게 보고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 개별적 생각에는 당분간 곤난할것 같습니다. 그 정신병원에 있는 미국인들은 다 아시아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동정해주셔야죠.》

리승기는 문제를 자유니 동정이니 하는데로 끌고가는 그의 처사가 괘씸하여 참아오던 분격이 터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극력 자제하면서 말했다.

《지방이나 서울교외에 건물이 좀 많습니까?… 그 건물의 방들이 크지 않고 깨끗해서 좋으니까 한번 정해놓고는… 그것을 점령군의 군사적조치로써 다시 철회할 생각은 조금치도 않는 그것이… 바로 그것이 우리 조선사람을 우습게 알고… 전패국나라의 땅과 건물을 전쟁배상으로 여길 때처럼… 그렇게 하니 말이요.》

리승기는 울분과 모욕감으로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수 없었고 통역이란자는 그 복잡한 의미를 미처 전달하지 못해 쩔쩔매였다.

그러나 스미스는 그 노르끼레한 눈을 대굴대굴 굴리며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챈것 같았다. 그의 입술과 볼의 근육이 움씰거리였다. 그런 순간에는 미소가 간데없이 사라지군 하였다.

리승기는 말을 이었다.

《난 얼마전에 일본에서 건너왔는데 파괴된 동경대학도 맥아더사령부가 점거하려다가 못하고말았습니다. 일본은 전패국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 전패국입니까? 왜 대학청사를 함부로 점거하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항의로서 군정장관에게 정식으로 전달해주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도 지성인의 한사람으로서 리해합니다. 꼭 전달하겠습니다.》

리승기는 그만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지태규가 슬그머니 옆구리를 당기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스미스가 말했다.

《기왕 만났던김에 얘기나 좀더 나눕시다.》

리승기는 일어나고싶었으나 상대방의 손에 들린 목록을 다시 보는 순간 얼른 일어설수가 없었다.

스미스는 여전히 미소를 띠운채 말했다.

《여기 앉으신 지태규선생은 우리 미국에도 태평양전쟁전에 벌써 두번씩이나 왔다가시고 우리에 대한 호의도 깊은분이니 우린 믿습니다. 두분 다 우리 사업을 리해하시고 적극 협력해주기 바랍니다. 지태규선생은 리과대학 학장으로 된다지만 그보다 장차 미국에 가서 과학연구를 본격적으로 해볼 용의를 표명했는데 하지중장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리승기는 별로 놀라지는 않았으나 얼핏 곁에 앉은 지태규를 돌아보았다. 워낙 체소한 몸집의 지태규는 더 쪼그라든듯이 움츠리며 리승기의 눈을 피해 당황한 기색으로 시선을 떨구는것이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며 변명이나 하듯 리승기한테 말했다.

《고향에 가있는 송복섭군한테도 사람이 내려갔네. 스미스씨가 보내서…》

《어째서?》

리승기는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송복섭이를 리과대학 교원이라면 몰라도 미국으로 데려간다는건가?

리승기는 못마땅한 시선을 지태규의 옆얼굴에서 뗄수가 없었다.

한데 스미스는 제딴의 열에 떠서 말을 계속한다.

《지금 세계적으로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쏠리는 향심이 그 어느때보다도 높아가고있습니다. 선생도 아시겠지만 대전기간에 이미 아인슈타인씨가 미국에 와서 큰일을 했고 얼마전에는 도이췰란드의 브라운도 백명의 동료들을 거느리고 백개의 로케트를 가지고 미국에 왔습니다.》

《V₂》라는 최초의 미싸일을 도바해협 건너 영국본토에 날려보낸 브라운은 사실상 전쟁포로의 명목밑에 억지로 미국에 데려갔지만 스미스는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있었다.

(※ 나이 30전에 세계최초의 군사용로케트를 제작한 브라운은 그후 미국국적을 가지고 마지막에는 미우주항공국장까지 되여 미국의 우주로케트분야에서 기초를 마련해놓았었다. 처음에는 히틀러에게 복무했으며 후에는 미제국주의군수재벌의 하수인으로 된 브라운… 그의 이름을 세계과학사는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가?)

《우린 여기 조선에도 재능있는 과학자들이 있다는걸 알고있습니다.… 우리 자유세계는 과학자들부터 우선 환영합니다.》

스미스가 말하는 뜻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리승기는 스미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의 담화는 이것으로 끝내는것이 어떻겠습니까?》

스미스의 얼굴에 차거운 미소가 스쳐지났다. 그 순간 리승기는 그의 속심을 너무나도 빤히 들여다보는듯싶었다. 힘없는 어조로 그러나 마지막힘을 다하여 리승기는 이렇게 말했다.

《변상목록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이 가급적으로 속히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리승기는 웬일인지 저 목록이 스미스의 손을 거쳐 어느 서류함속에 꾸겨박히거나 휴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가 생기면서 자기가 여기로 온것부터가 허무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위안해보았다.

(아무렴 그렇게야.)

허나 미군정청에서는 겨울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약속은 거짓인것 같았다.

하루는 지태규가 리승기를 찾아와 말했다.

《책과 실험기구를 일본에서 실어올거라구 하네. 배편이 해결되지 않아서 지금…》

《그만두시오. 난 이젠 기대하지 않소.》

《그런데 좀 보게. 군정청에서두 호의를 베풀게 됐나. 모두 〈국대안〉을 반대해서 들구일어나니께 원.》

《그거야 량심적인 교원들을 제직시키구 학생들을 붙잡아가니 〈국대안〉을 반대안하게 됐어요?》

《아니, 〈국대안〉을 반대하니 잡아가는거지.》

《허 참.》

리승기는 지태규의 꺼꾸로 된 론리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태규가 돌아갔으나 리승기는 어느때인가 전패국의 왜놈취체원이 썼을수도 있는 찌그러진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상념에 잠겨있었다.

서울은 혼란에 휩싸였다. 좌익과 우익의 정치세력들이 저저마다 자기편에 사람을 끌어당기려고 한다. 리승기한테도 이쪽저쪽에서 사람이 왔다. 좌익에서는 민전위원이 되여달라고 하고 우익에서는 《국대안》을 지지하고 무엇이 되여달라고 한다.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섬유강좌부터 꾸려놓고 연구사업을 해보려던 결심따위는 누구도 알아주려 하지 않는다.

마침내 심신의 과로가 리승기를 꺼꾸러뜨렸다. 그는 갑자기 고열로 앓기 시작했다. 농흉이라는 병명이였다. 친구의 주선으로 경성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유능한 의사인 최응석이 돈을 받지 않고 순전히 인간적인 선의로 그를 담당하여 치료해주었다.

적어도 한달이상은 침대에서 꼼짝하지 말고 안정해야 한다는것이다. 담당의사는 리승기의 안해를 내놓고는 학생들과 교원들의 면회를 극력 제한하였다.

리승기는 하루종일 누워 천정만 쳐다보면서 번거로운 사색의 시달림을 받았다. 모든것이 이것으로 끝장나는것 같은 절망감에 휩싸여 곁에서 시중을 드는 안해가 무엇을 물어도 잘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병때문인지 만사가 귀찮았다.

어느날 지태규가 찾아왔다. 하루종일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로서 여느때없이 그가 반가운 생각도 들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일본에 있을 때부터 맺어진 친교가 있고 같은 화학자로서 서로 나누어볼 화제도 있는것이다. 이즈음에 와서는 서로 만났다가 헤여질 때는 점점 자기들의 사이가 소격해진다는것을 피차에 느끼고있는터이지만 그래도 지금 병원에 면회하러온 그를 만나는것은 지어 기쁘고 즐겁기까지 하였다. 또 최응석의사는 지태규한테만은 시간을 제한하지 않는 눈치였고 두사람만 남겨두고 그는 인차 병실에서 나가버렸다.

지태규는 죄지은 사람처럼 그 체소한 몸집을 더욱 옹송그리고앉아 리승기의 신색을 살피며 침대옆에 붙어있었다. 안정상태를 유지하느라고 곧바로 누운 리승기는 지태규의 얼굴을 마주볼수가 없었다.리승기는 허공에 대고 말하듯 지태규에게 물었다.

《그쪽 리과대학은 꾸려지고있나?》

《그저 그렇지… 아무래도 국대에 속하는수밖에 없을것 같애.》

《여전히 안스테드란자가 국대 총장이겠지.》

《글쎄… 그저 그렇게…》

여기서 지태규는 환자를 절대로 흥분시키지 말라는 최응석의 당부를 잊고 시무룩한 어조로 말했다.

《하필이면 그런자를 총장으로 앉힐건 뭐겠나. 알고보니 미국에서라면 어느 중학교 교장자리도 아까운자더군. 나두 만나자구 해서 만났는데 그 지성세계란 미국인들의 일반수준에두 못 닿을것 같애. 미국에 그렇게두 학자들, 총장감들이 없을라구.》

리승기는 여전히 천정에 대고 말했다.

《그게 다 조선사람을 깔보고 하는 미군의 처사야.》

《그래두 안스테드 그 한사람이 곧 미군은 아니지 않나.》

그바람에 리승기가 몸을 한쪽으로 돌아누우려고 할번 해서 지태규는 급히 두손으로 그의 몸을 제지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리승기는 다시 본래대로 누워버렸다.

《태규선생, 선생은 늘 그 한사람이 미국이 아니야, 그가 곧 미국이 아니야 하는데 그럼 누가 미국이란 말인가. 군정청대표라는 스미스를 놓고도 그랬고 안스테드도 그렇고… 그래 누가 미국이란 말인가.》

《승기선생, 너무 흥분하지 말게.》

두사람은 공식적으로 흥분하면 서로 깍듯이 존대를 한다. 교또대학 때처럼 선생이란 말을 앞에 내세울 때는 서로의 립장과 견해가 어긋나는것임을 말해준다.

리승기는 지태규를 마주보지 않고 곧바로 누워서 말할수 있는것이 다행스러웠다.

《군정청대표의 말도 그랬구, 듣자니 공식적으로 미국에 갈 용의를 표명했다면서?》

《미국시민권을 그렇게 쉽게 쥘수도 없거니와 지금 당장은… 미쏘공동위원회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보구서… 한데 림시로 미국에 학술연구를 가는거야 응당한 일이 아니겠나. 일본에 있을 때도 내가 두번씩이나 갔다온걸 알지 않나… 과학에야 무슨 국경이 있겠어… 과학에는 민족이 소용없어.》

《…과학에는 민족이 소용없다?… 그러나 민족에는 과학이 있어야 하네.》

리승기는 또박또박 찍어서 천천히 말을 하였다.

갑자기 지태규가 리승기한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참 북에 갔던 자네의 전처사위가 나한테 찾아왔더군.》

전처사위라고 밝히는 지태규의 얄궂은 언사에 리승기는 개의치 않았다.

한데 지태규자신이 말을 고쳐서 했다.

《그 리재업군이 송복섭군을 데리고가는것 같은데 송군은 끝내 나한테 나타나지 않았네. 할수 없지. 우리 리과대학에서 교편을 잡든가, 미국에 가든가 하는 권고들을 다 두고서 생각해보자구만 하던 송군이 글쎄.》

리승기는 제가 천거해준 사람들중에 송복섭이가 있다는것을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송복섭이 여기에 들렸다는 말은 구태여 하고싶지 않아 이렇게 조용히 응수했다.

《식민지공업이긴 하지만 유일하게 화학의 토대가 있는 흥남에 가는거야 학자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러자 지태규가 앉은 자세에서 웃몸을 꼿꼿이 펴고는 발끈해하는 어조로 말했다.

《솔직한 말로 난 승기선생한테 섭섭한 생각이네. 송군이 여기에 왔다갔겠지?… 그를 나한테서 떼치운것 같은 노여운 심정이네. 하지만 어찌겠나. 승기선생말대루 학자로서 자연스런 탐구열의때문에 흥남에 갔겠지.… 리재업군의 말이 북의 형편이 여기보다 낫다구는 하지만 장차 어떻게 될는지…》

리승기는 눈을 감은채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순전히 육체적인 안정을 위해 말을 삼가하려고 애쓰는것만 같았다. 아니 그는 지태규한테 여러모로 자신을 터놓고싶지 않았을뿐이다. 조만간 서울에 학계가 형성될것으로 믿었던 리승기로서는 여기서 제가 설 위치가 어느 정도 명백하다고 생각했던것만큼 남이나 북이나 제 나라, 제 땅인데 어디서 연구사업을 하든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어차피 38도선이 인차 없어지고말겠는데 시간이나 랑비하며 왔다갔다 할건 뭐겠는가.… 그는 이렇게 생각했던것이다.

지태규가 은근한 어조로 조용히 물었다.

《그래 재업군이 승기선생한테는 뭐라던가?》

《이런 형편에서 그가 뭐라겠나?》

지태규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하긴 그래.》

리승기는 차라리 지태규가 그렇게 아는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지태규가 좀 열띤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난 북과 쏘련을 일치시켜 생각하네. 공산주의자들의 과학을 난 아직 모르고있네. 로씨야에 대해선 멘델레예브나 아는 정도이지.》

왜 지태규가 그런 정도로밖에 모르겠는가. 분명히 그의 어조에는 비양조가 어려있었다.

그런데 이때 리승기는 저의 복잡한 심중에서 헤여나오려는듯 괜히 상대방을 시까스르고싶어졌다.

《설사 선생이 북으로 갈 생각이 있어두 집사람때문에 안될거요.》

참말이지 이제껏 어느때도 리승기는 지태규한테 이런 류의 모욕을 준적이 없었다. 따라서 지태규는 의아하게 두눈을 치뜨면서도 그 말에 대답을 못하였다. 지독한 숭미공미에 물젖은 그리스도교신자인 안해의 치마폭에서 헤여나오기엔 의지가 모자라는 지태규였다. 일찌기 지태규가 갖게 된 미국에 대한 환상은 그 녀자에 의해 형성되였는지 모른다.

지태규가 모욕을 감수했는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승기도 어색한 분위기속에서 그것을 바랐다. 오늘도 만날 때는 반가왔으나 헤여지면서는 본래보다 더욱 멀어짐을 피차에 느끼는 그들이다.

리승기는 한달후에 퇴원하여 동숭동에 있는 집에서 안정하다가 보름이 지나자 가족들과 함께 짐을 싸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고말았다.

병으로 쇠약해진 몸을 추세운다는것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소란한 서울을 피하고싶었고 모든것이 조용해지기를 바랐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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