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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25 회

제 2 편

제 1 장

5


굴앞에 서있는 한그루의 수양버들, 신록에 부푸는 그 나무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 길다란 널판자의자들이 몇개 놓여있었다. 굴안에서 줄창 실험을 하다가 잠시라도 나와 해빛을 쪼이면서 휴식겸 사색도 할수 있었다.

리승기는 조용한 날이면 이 버드나무밑 의자들에 앉아 연구사들과 함께 학술토론회를 갖군 하였다. 대개 읽은 잡지, 문헌들에 대한 견해와 소감을 피력하는 토론회였다.

리승기는 사색에 잠겨 혼자 나무의자에 앉아있었다.

제가 모색끝에 도달한 견해, 즉 목질을 녹이는 흥미있는 성질을 가진 그 《염화아연》이라는 물질에 대하여 다시금 곰곰히 따져보다가 즉시 현석실장과 토론할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리승기는 얼핏 앞을 바라보았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듯 경사진 길우에 불쑥 누군가 나타나 몹시 급하게 뛰여올라왔다. 리승기는 대번에 김용석이를 알아보았다. 평양에 간지 한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던 그였다.

한데 김용석은 인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숨이 턱에 닿아 다짜고짜 팔부터 들어올려 손으로 아래켠을 가리키는것이였다.

《저기… 자동차에… 실험기구들이…》

순간 리승기의 머리에는 여러가지 의혹이 한꺼번에 뒤엉키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몇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느새 굴안에서 나온 연구사들도 와락 달려나가다가 모두 굳어진듯 그 자리에 서버렸다. 정말로 경사지아래에는 자동차가 보였다. 자주 여기를 지나다니는 저런 군대자동차에는 삭주쪽에서 실어내가는 수류탄이나 포탄상자가 보였고 때로는 병원에 실어오는 약품상자들이 있었다. 김용석의 얼굴에 어린 흥분과 그 목소리는 저기에 몇개의 실험기구정도나 실려있다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생님!》

김용석이 리승기의 팔소매를 잡고 뜨거운 숨결을 퍼붓는듯 했으나 리승기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바투 김용석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김용석은 숨찬 목소리로 《여러분!》하고 웨치며 주위를 둘러보고나서 말했다.

《저기에 실험기구 한자동차입니다 . … 글쎄 들어보시오.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저를 이웃나라에 띄워 귀중한 돈을 내시여… 사오게 하시였단 말입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김용석이 어떻게 그새 외국에 갔단 말이며 그가 어떻게 장군님의 특명까지 받게 되였다는 말인가.

현석실장이 나서며 김용석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된거요? 자세히 설명을 좀 하오.》

숨을 돌리면서 김용석이 얘기했다.

김용석은 평양에서 중앙창고는 물론 여기저기를 헤매면서도 실험기자재를 더는 구할길이 없어 하는수없이 내려오려고 성에 들렸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성의 책임일군이 그러지 않아도 청수에서 사람을 부르려던 참이였었다고 하면서 자기를 홍명희부수상한테 데리고 갔다는것, 홍명희부수상이 장군님의 특명을 전달하고 자금이 가득한 가죽가방을 주면서 호송군관과 같이 자동차에 타라고 하더라는것이였다. 그는 지금 압록강철교를 건너 의주를 거쳐 여기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김용석은 자동차를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저기에 없는게 없습니다! 다 있습니다!》

사람들이 와― 달려갔다. 리승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누며 흥분을 눅잦히느라고 애썼다. 안경을 낀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그는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그는 내리막길로 허둥지둥 달려내려갔다.

자동차우에서 누군가 웨치는 소리.

《항온건조기가 있소!》

련이어 웨치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은 품명마다 소리쳤다. 관상로, 가감저항기, 특수온도계, 과산화벤조일시약 등등…

리승기는 곁에 서있는 김용석의 팔소매를 슬그머니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보 용석동무, 혹시 장군님께 걱정을 끼쳐드린건 아니겠지? 우에다 성화를 먹여 그것이 보고되여…》

《선생님, 그건 아닙니다.… 장군님께서는… 벌써 보내준다는게 늦었다구 하셨답니다. 과학자들에게 과업을 주고나서도 이제야 실험기구를 보내지만 그것이 원만치는 못할거라구,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느때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김용석을 쳐다보느라고 리승기는 옆에 방하민이 다가선줄도 몰랐다.

방하민은 공장앞에서 자동차를 만나 이 사실을 알고 급히 뒤따라온것이였다.

방하민이 리승기한테 다가서며 말했다.

《정말 장군님께서 이렇게 배려해주시니… 전선형편이 어려운 지금에… 저희들 일군들이 면목이 없게 됐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진정 감동에 겨워 떨리는상싶었다.

《전 량심상 가책두 느낍니다. 재업동무가 그 연구자금을 좀 쓰자구 제기했을 때 전 그걸 대번에 반대했거던요.

실무적으로 대책을 강구해볼 대신에 말입니다.》

방하민은 굳이 그것을 제 잘못으로 인정하려는 허심한 립장에 서려는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방하민의 감동과 일종의 솔직성때문에 리승기는 여느때없이 그가 무척 가까운 사람으로 느껴졌다.

지금에 와서 진심으로 자기를 뉘우치는듯 한 방하민이 그때는 결코 자기와 같은 립장에서 그 돈을 거절한것이 아님을 피뜩 느꼈으나 지금 언제 그런 내심의 파동에 옴해있을새가 없었다.

값진 실험기자재들과 시약들을 담은 상자들을 조심히 들어 적재함에서 내려왔다. 뚜껑을 연 상자옆에서 저저마다 떠나지 못한다.

리승기도 꼭 어린애같은 마음이 되여 쓸어보고 만져보고, 깨질가보아 가벼운것도 두손에 받들어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었다.

호송일군이 그에게 종이장을 내밀며 말했다.

《인수증에는 부소장동지의 수표도 있어야겠지만 꼭 리승기박사선생이 수표해야겠습니다. 홍명희부수상동지의 지시입니다.

상급에선 인수정형을 장군님께 보고드려야 하니까요.》

리승기는 만년필을 쥐고 곁에서 누군가 받쳐주는 책우에 놓인 명세표의 아래에 이름을 쓰려고 하였다.

그는 이름자 하나로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리승기 받았습니다.》하고 또박또박 정성스레 써넣었다.

명세표를 도로 호송일군에게 내주는 리승기의 눈앞에는 문뜩 해방직후 서울에서 미군히스테리병원이 틀고앉은 공과대학에 있던 비품과 실험기자재들을 보상받겠다고 작성해서 들고다니던 그 명세서종이장들이 얼른거리였다. 아, 어데서나 랭대받던 명세서였다. 국립서울종합대학 총장이랍시던 미국놈 안스테드의 책상은 물론 미군정청대표 스미스와 군정장관 하지한테서 한갖 휴지장처럼 밀려나던 그 명세서종이장들…

리승만은 나중에 공과대학청사마저 괴뢰군 사관학교에 넘기려 했지.…

리승기는 호송일군의 손을 꽉 부여잡고 오래도록 놓지를 못했다. 호송군관이 리승기한테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차는 떠났다. 연구사들과 실험공들은 상자와 지함들을 맞들어서, 혹은 혼자 안아서 굴속에 들여가기 시작했다.

그때 리승기는 가장 중요한 일을 여태 놓치기라도 한듯 문득 오정해를 불러 《태호동무한테두 이 소식을 빨리 전해줘야겠네.》 하더니 즉석에서 말을 고쳤다.

《아니, 아니… 내 갔다오지.… 가만, 정해. 그 가감저항기지함이 어데 있더라?》

오정해는 의아쩍게 리승기를 보다가 주위를 살피였다.

그 말을 듣고 저쪽에서 한 연구사가 지함을 들고왔다.

리승기는 그리 무겁지 않은 길죽한 지함을 받아 제 옆구리에 꼈다.

그제야 펀뜻 정신이 든 오정해가 말했다.

《제가 들겠습니다. 같이 갑시다.》

중상을 당하면서도 가감저항기를 구해내지 못해 의식을 잃은중에 그것을 찾던 한태호였으니 이걸 보면 얼마나 반가와할것인가.

리승기는 지금 그한테 보여주려고 이 가감저항기를 들고 가려는것이였다.

오정해가 보기에도 순진하고 진심이 어린 학자의 결심은 눈물이 겹도록 절절한것이였다.

리승기가 그 가감저항기지함을 부둥켜안았으나 김용석이 말없이 그것을 앗아내여 제가 들고나섰다.

리승기와 김용석의 뒤에 오정해며 현석실장, 림창직이 줄레줄레 따라섰다.

이런 특이하고 엄숙한, 그러면서도 마음 즐거운 병문안이 또 어디에 있으랴.…

그들의 눈앞에는 똑같이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릴 한태호의 얼굴이 보이고있는것이였다.

…그날 밤부터 굴안의 실험실들에서는 말없는 약속밑에 철야실험이 진행되였다.

맞교대로 실험공정들을 이어나갔다. 화학실험이란 련속으로 이어대면 댈수록 실험수치들이 정확해진다.

그들은 수류탄을 만들고 포탄을 깎는 심정들이였다.

리승기도 자기 방에 침대를 들여놓고는 이 지하실험실의 사령관처럼 밤에도 여러 공정들을 돌아보았다. 불빛이 환한 복도에서 가끔 리승기는 걸음을 멈추고 이 비상한 현실을 심장으로 감득하는것이였다.

지금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캄캄한 전선길에서 밤을 지새우고계실것이다. 머리우로 포탄이 날고 적비행기들의 야간폭격이 지척에서 벌어지고…

한데 여기는 이렇게 불빛이 환하다.

흡사 김일성장군님께서 보내시는 사랑의 해빛이 저 고촉의 불광으로 되여 이 지하실험실들을 환히 비치는것만 같았다.…

어느덧 여름철이 왔다. 리승기는 뒤로 미루기만 하던 교육성의 청탁을 실행하지 않을수 없었다.

후창에 소개되여 간 원산농업대학에 초청강의를 가달라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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