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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회

제 2 편

제 1 장

4


한낮에 이르러 리승기는 지하도서관에서 돌아오느라고 등성이진 길을 따라 오르고있었다.

봄날의 볕은 따스하고 대기는 조는듯 고요하다. 가렬처절한 전선에서 총포탄이 울부짖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다가도 불시에 한태호의 부상이 머리에 떠오르면 이 모든 평화로운 정적이 겉보기일뿐이라고 여겨졌다. 실상 무시로 적비행기들이 달려들면 푸른 하늘이 포연과 폭연에 그슬리고 살륙의 쇠붙이들이 죽음의 휘파람소리를 내며 대기를 찢어놓는것이였다.

청수공장도 여러번의 폭격으로 구내에 구부러진 배관과 철골들이 널리고 로케트포탄에 벽체마다 구멍이 펑하니 뚫렸지만 그속에서도 여전히 리재업이 책임진 합성고무중간공정이 진척되고있었다.

이틀전에 4연구실의 실험실들이 산기슭단층집에서 이사하여 깊은 땅속의 굴간으로 들어갔다. 4연구실, 즉 《합성1》호 연구실은 여러 실험실들로 굴안에 규모있게 꾸려졌다.

리승기는 지하도서관에서 구한 목질화학과 관련한 몇권의 책과 잡지들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다가 굴간입구에 와 멈춰서며 주위의 산기슭을 둘러보았다. 꽃잎이 떨어진 진달래덤불에 새파란 잎새들이 덮였다. 굴간앞 펑퍼짐한 곳에 서있는 한그루의 커다란 수양버들, 줄줄이 아래로 드리운 가지들에는 파랗게 내돋은 애어린 잎새들이 한낮의 볕에 노그라진듯 까딱 움직이지 않는다.

옆구리에 낀 여러권의 책들을 추슬러올리던 리승기는 문득 자박거리는 걸음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금진교원이였다.

《아이, 인주십시오. 제가 들겠습니다.》

인생은 어쩔수 없는것이여서 처녀의 눈매는 봄볕에 더 까매지였다. 전시의 곤난한 환경과 탐구의 지속적인 사색, 피할수 없는 생활의 질박한 단조로움속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처럼 실험실에 자주 나타나기를 바라게 되는 그런 처녀였다. 더구나 연구사업에서 최초의 흥분은 사라지고 여러가지 애로가 겹치자 연구사들은 저마다 제가 맡은 실험공정에서 고민하고 모대기며 일체 사생활의 여유를 잃고있었다. 과학연구란 가장 량호한 조건에서도 그자체의 요인으로 좌절과 진퇴량난과 지지부진을 겪기마련인데 하물며 이같은 전시조건에서야 어찌하랴 하는 위안 겸 변명도 해보았으나 그럴수록 도정신을 하며 그 어떤 믿음과 기대를 저바리는듯 한 자격지심을 어찌할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처녀는 확실히 굴속에 활력과 생기를 안고오는 새와도 같았다.

한데 리승기는 금진이를 볼 때마다 모순된 심리를 체험하군 한다.

불안과 다행스런 심정이 엇바뀌는 그것이였다.

처녀가 림창직한테 가까와졌으면 하는데서 생기는 감정이다. 림창직의 안해가 희생되였다는 부정할수 없는 사실을 김용석이나 자기의 안해를 통해 본인한테 전달할수 없으며 오직 자기만이 그렇게 해야 할 도덕적의무를 지니였다고, 바로 그렇게 할것을 다름아닌 용석의 형인 그 잊지 못할 김용진이 자기한테 맡겨놓고간것이라고 자신을 납득시키면서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던 리승기였다.

그는 곁에서 금진이 걷는다는 감촉에 황급히 그런 생각에서 멀어지려 하였다.

처녀는 리승기의 팔에서 한사코 빼낸 책을 제가 들고간다.

《땅속에 차린 실험실을 또 구경하고싶어 왔습니다. 얼마나 희한한지 보면 볼수록… 그리구 창직선생이 오늘 화학수업에 오기로 되였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았나보군.》

《래일로 잘못 알구있는지두 몰라요. 제가 얼빤히 말한것 같기두 하구…》

《글쎄, 창직선생은 약속을 정확히 지키는 사람인데.》

《아니예요. 창직선생이 오늘에 시간이 있다구 한건 사실이예요.》

《그럼 누구 잘못인가? 허허.》

리승기는 어지간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문득 그의 심중에서는 처녀에게 회령의 집에 누가 있으며 어떻게 자라고 어떤 희망과 리상을 가졌던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허나 그는 말을 꺼낼수가 없다.

한옆구리에 책을 낀 리금진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수양버들 실가지끝을 잡아 그 연록색잎새를 코끝에 가져가 냄새를 맡는듯 하더니 말을 하였다.

《아까 댁의 사모님이랑, 실장선생 부인, 옥선생 부인과 같이 태호동무한테 면회를 갔댔습니다. 사모님들이 닭곰을 해가지구 가는데 난 어쩌나 하다가 그냥 따라갔어요.》

《수술자리 실밥을 뽑았을테지?》

《네, 새살이 나오구 창상이 다 아물었어요.》

《아직 젊었으니까…》

《그럼요. 저보다두 몇살이나 아랜데.》

《금진선생은 뭐 그리 나이가 들었다구, 허허허.》

24살의 처녀는 대번에 얼굴이 발깃해졌다. 본의아니게 제 나이를 강조한셈이다. 그러나 명민한 처녀는 이내 화제를 돌릴줄 알았다.

《글쎄 태호동무의 말이… 전선에서 적의 총탄에 부상당하구 들어온 병사들이 옆호실에 있는데 그들이 짝다리를 짚구 와서 병문안을 할 때면 막 창피하다는거예요. 후방에서 돌아다니다가 폭격두 하나 제대루 피하지 못해 다쳤다구 말입니다. 옆호실 부상병이 어떻게 알았는지 〈여, 동문 과학전선에서 싸우는 병사야. 창피하기는 우리가 더해. 다시 전선에 나가지 못하게 됐으니 말이야.〉 하구 말하니까 좀 마음이 누그러진다나요.》

리승기와 금진은 굴간에 들어갔다. 리승기는 아직도 익숙치 않은듯 잠간 멈춰섰다. 고촉불광이 환한 굴간안은 조용하고 평화로왔다. 오른편으로 주런이 달린, 뼁끼도 칠하지 못한 생널로 만든 문들중에서 세번째 문만이 하나 열려져있었다.

굴간안의 정적, 이 정적으로 하여 반응물질의 분자들이 더 맹렬히 운동할수 있고 아무런 소음의 장애도 받지 않으면 물질의 화합과 합성이 빨리 진행될것만 같은 얼토당토않은 생각조차 들었다. 어쨌든 굴속의 실험실에만 들어서면 사색과 마음의 안정이 저절로 깃드는것만 같다.

갑자기 굴안이 부르르 떨며 진동하였다.

바깥에서 또 적들의 폭격이 시작된것이다.

여기가 안전한것만큼 다른데가 걱정되여 문들이 열리고 출구쪽에 나가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오정해가 출구로 뛰여들어오며 소리쳤다.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병원이… 병원이 대폭격을… 맞았습니다.》

《뭐라구?》

리승기는 안경알을 번뜩이며 웨치였다. 부상병들과 함께 폭격에 상한 일반사민들도 많은 병원이다. 그 병원에 있는 한태호부터 먼저 걱정이 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손이 후들후들 떨리였다. 물론 병원뒤산에 깊은 방공호들이 있으나 매번 그런것처럼 갑작스레 닥치는 폭격에서 무슨 일인들 없으랴. 확실히 양키들은, 그놈들은 야만들이다. 병원지붕에서 나붓기는 적십자기발이 얼마든지 보이겠건만, 그 기발이 제네바협정의 인도주의사항을 호소하듯 항시적으로 펄럭이고있건만 오히려 거기에 더 달려드는 미국놈들이다.…

그런데 이때 출구쪽에서 또다시 웨치는 소리들이 들렸다.

《저기도 폭격을 맞았소.》

《어디, 어디?…》

《본래 실험실건물…》

《창직선생이랑 있는 방쪽은 일없는것 같소.》

《맨 웃쪽 실험실방이 직탄을 맞았소.》

어데 갔다오던 길에 밖에서 폭격을 겪은 사람인지 누가 굴벽이 찌렁하니 소리쳤다.

《엘모뽐프가 다 마사졌소!》

《아니, 그게 어째 상기두 거기 있었어?》

미처 운반해오지 못한것이 아니였다. 본래 공장실험실의것인데 방하민이 합성고무에 먼저 주어야겠다고 하던 뽐프였다. 빨리 가져가지도 않고 결국 폭격을 맞아 여기서도 거기서도 쓰지 못하게 되였다. 허나 그런 아쉬움과 통탄을 할새가 없었다. 병원부터 생각해야 한다.

비상용담가를 들고 사람들이 달려나갔다.

먼저번 폭격때 병원약국이 불탔으니 약품이 미처 오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구급처치약도 제대로 없을것이다.

어떻게 되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리승기는 급히 실험실로 뛰여들어 알콜이 든 유리단지를 끌어안았다. 신현석실장이 리승기앞에 서있다.

《선생님, 그게 마지막알콜입니다.》

유리단지안에서 3분의 1도 못되게 알콜이 찰랑거리고있었다. 신현석은 질책이 담긴 리승기의 시선을 피했다.

리승기는 오정해한테 알콜단지를 넘겨주었다.

《깨지 말게. 단단히 잡구 가자구.》

리승기의 목소리는 갈려있었다.

신현석이 리승기한테 말했다.

《그럼 선생님이 여기 계십시오.》

어차피 한두사람은 남아있어야 했다.

《아니, 창직동무가 남아야 하오. 하던 실험도 있구 하니.》

그러면서 리승기는 불안과 공포로 하여 눈이 휘둥그래진 금진에게 말했다.

《학교는 무사하다니 금진이두 여기 좀 남아있지, 부탁이요. 함께 동무해서 말이요.》

리승기는 굴밖으로 나왔다. 병원쪽하늘에는 시커먼 매지구름처럼 연기가 덮였다. 사람들이 서로 부르고 찾으며 거기로 뛰여가고있었다.

다급히 걸어가는 리승기의 머리속에는 때아닌 상념이 번뜩이였다. 전쟁은 파괴이고 과학은 창조이다. 창조는 파괴를 이길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그것은… 허나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리승기는 그냥 뛰기만 하였다.

이렇게 뛰여보기는 그의 일생에서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는 다름아닌 제가 빨리 가야만 되는듯이, 날파람있는 구조대원이거나 유능한 외과의나 되는듯이 정신없이 그리로 달려갔다.

…병원건물은 적지 않게 파괴되였다. 여러명의 사상자가 났다. 부상자가 다시 부상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히도 한태호는 무사하였다.

이미부터 굴설해오던 지하갱도에 먼저 중상자침대부터 옮기기 시작했다. 며칠간 연구소성원들도 병원복구와 정리작업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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